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25
악녀는 마리오네트 23장. 사냥의 계절(1)(25/33)
23장. 사냥의 계절(1)
수도 엘퀴엠에서도 가장 번성한 유흥가는 ‘귀족의 밤거리’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곳에서도 유달리 크고 화려한 저택은 조디악 백작의 저택이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이나 일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썼다. 그곳에 카예나와 제다이어가 숨어들었다. 그들은 가면을 쓴 손님처럼 행세하다가 외쳤다.
“쳐라!”
와아아-!
제다이어가 내린 신호에 함성이 터져 나오며 내부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예이스터의 수하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막아라! 다 죽여!”
“아악!”
마치 기사처럼 갑옷을 입고 무기를 지급받은 사람들은 예이스터가 이룩한 것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총을 사용한다면 일은 훨씬 수월해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황궁의 군대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뒷골목에서는 총을 쓰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마치 전쟁터처럼 변한 이곳에서 카예나는 남들보다 훨씬 느려진 세상을 걸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등불을 터뜨렸다. 빛이 줄어들수록 자신이 활동하기 더 편해진다. 그녀는 아군이 위험한 순간에는 공간을 편집하거나 응축한 시간의 흐름을 화약처럼 터뜨렸다. 저택 1층의 도박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카예나는 안을 채운 귀족들을 더 빠르게 도망치게 만들고자 손에 든 쇠막대로 램프들을 쓸었다.
와장창-!
일렬로 늘어놓은 램프가 그대로 박살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불꽃이 여기저기 떨어지며 저택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불이야!”
가면을 쓴 채 향락을 즐기던 귀족들은 이미 혼비백산해서 비명을 내지르며 밖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집에 미친 여자를 초대한 적은 없는데.”
여우 가면을 쓴 남자, 예이스터였다.
“네가 그 마담 메데이아라는 여자인가?”
그가 씹어 먹을 듯이 물었다. 그러나 카예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예이스터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부웅!
그는 설마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 몰랐는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
카예나가 시간을 조종하고는 있었으나 특별한 전투 능력을 지닌 건 아니었다. 그녀가 느리게 한 것만큼이나 예이스터의 반응 속도는 빨랐다.
예이스터는 온통 검은 차림으로 모습을 꽁꽁 감춘 카예나에게 이를 갈며 말을 뱉었다.
“집주인이 나왔으면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요즘 내 거리를 들쑤시고 다니는 것도 봐주었더니.”
그는 품에 손을 넣더니 총을 꺼냈다.
‘역시. 저 개망나니가 룰을 지킬 리 없지.’
상관없었다. 그가 쏜 탄환보다 빠르게 움직이면 되니까.
탕-!
카예나는 시간이 훨씬 느리게 흐르도록 붙잡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탄환은 쇠막대기로 쳐 내 버리고 그대로 예이스터의 허리를 후려쳤다.
콰득!
“……아아악-!”
장기가 온통 다 으스러지는 끔찍한 통증에 예이스터가 짐승처럼 괴성을 내질렀다.
“주인님!”
수하들도 품에서 총을 꺼내 카예나를 노렸다. 그러나 제다이어가 조금 더 빨랐다.
탕!
카예나는 일찍이 제다이어에게도 총기를 구해 주었다. 애초에 룰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은 예이스터만이 아니었다.
예이스터는 그 와중에도 시뻘겋게 충혈한 눈으로 카예나를 노려보며 총을 들었다.
‘근성도 좋지.’
카예나는 총알을 피해 뒤로 살짝 물러나다가 이번엔 총을 쥔 팔을 부러뜨렸다.
“끄으윽……!”
예이스터가 신음을 삼키다가 소리쳤다.
“터뜨려!”
콰앙!
어딘가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폭발음이었다. 저택에 폭약을 설치해 놓은 모양이었다. 화약 창고도 가지고 있던 자이니 이런 장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다.
카예나는 베일 안에서 피식 웃었다.
“철수한다!”
공간 마법으로 확장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카예나가 비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를 향해 말했다.
“수고를 덜어 줘서 고마워, 예이스터.”
진짜 이 암흑가를 가져서 무엇 하겠나? 이 저택을 덮친 건 진짜 이 거리의 주인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었다. 귀족 사회에 예이스터가 전력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개돼지쯤으로 여겼던 귀족들이 제게 기어오르는 것을 참지 못한 예이스터가 서둘러 황위를 계승하려고 무리하도록 만들 셈이었다.
“……너!”
예이스터는 이미 여우 가면도 벗겨져 얼굴이 훤히 드러난 채로 카예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는 것인가!”
“시끄러워.”
카예나는 더는 어울려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이번에는 다리를 부수고자 쇠막대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
콱!
그때 뭔가가 그녀가 든 쇠막대를 붙잡았다. 의아해져 뒤를 돌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저 검은 연기 같은 것이 그녀의 쇠막대를 타고 내려오며 부식시키고 있었다. 그 연기가 손에 닿기 전, 카예나는 얼른 손을 놓아 버렸다.
투두둑.
부식되어 녹 가루가 된 그것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이건 마법이다.
‘다른 마법사가 있어!’
그것도 아주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자였다. 아니, 한 사람일까? 여럿일 수도 있다. 카예나는 시간을 멈추려고 했으나 이미 무리한 탓에 날카로운 이명이 들리며 어지러웠다.
“멍청한 년!”
예이스터는 품에서 엘릭서를 꺼내 마시고 다시 멀쩡해졌다. 그는 벌겋게 충혈한 눈으로 카예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카예나는 그것에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탁!
고양이 가면을 쓴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예이스터의 팔을 붙들었다.
예이스터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방해꾼을 발로 찼다. 그러나 상대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는 그제야 고양이 가면을 쓴 놈도 마법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사들이여, 나를 도와주시오! 여기 당신이 찾는 자가 있소!”
고양이 가면의 남자, 바옐은 휘청거리는 카예나의 허리를 붙들고 방어막을 둘러 앞에서 화살처럼 쏘아진 검은 연기를 막았다.
콰콰쾅!
저택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폐허 속에서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 셋이 나타났다.
가운데에 있는 가장 키가 작은 남자가 키들거렸다.
“검은 정원의 주인이 여기까지 나오시다니.”
바옐은 식은땀을 흘리며 혼절하다시피 한 카예나를 데리고 사라지려고 했다.
“그 여자는 내 거야.”
“개소리 좀 그만해.”
그러자 남자가 모습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광기로 뒤덮여 섬뜩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남자의 얼굴은 바옐과 닮아 있었다.
“인간사에 끼어들지 않기로 하지 않았어, 형?”
“누가 네 형이야!”
“슬프네. 우리는 하나뿐인 가족인데.”
바옐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아니면…… 검은 정원을 넘기든가.”
바옐을 닮은 마법사의 눈빛이 돌변하며 검은 연기를 그에게 폭사했다.
그때였다.
“짜증 나게 하지 마.”
콰앙-!
검은 연기가 바옐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폭발해 사라졌다. 비척거리던 카예나가 가느다란 한숨을 흘려보내며 똑바로 섰다. 목덜미로 식은땀이 배어났으나 정신은 더욱 예리하게 다듬어진 채로 의식이 돌아왔다. 그녀는 바옐을 닮은 남자를 향해 비소했다.
“하여간 남동생이라는 것들은.”
카예나가 그를 향해 손을 뻗어 시공간을 편집해 비틀었다. 그대로 상대를 공간에서 지워 내 버릴 참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는 검은 연기를 흩뿌리며 사라지더니 다른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정말로 멋진 능력이잖아!”
그는 환희에 찬 얼굴로 카예나를 향해 박수 쳤다.
“정말…… 당장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그만둬라, 카인!”
바옐이 노성을 터뜨렸으나 마법사, 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 연기를 거대한 손 모양으로 만들어 크게 휘둘렀다.
파스스.
그 연기에 닿는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부식해 녹아 버렸다. 그 순간 카예나는 바옐을 붙들고 공간을 편집했다.
파앗!
그러나 아직 몸 상태가 온전치 않아 저택 밖으로 나온 게 고작이었다. 무릎에 힘이 풀렸다.
“조심해.”
카예나가 휘청거리자 바옐이 부축했다.
“……동생을 어떻게 키운 거야?”
그녀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타박하자 바옐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동생이 더 심각하거든!”
바옐은 억울했다.
“그리고 이제 쟤는 내 동생이 아니야! 마법사는 개별적인 존재라고!”
그러자 검은 연기로 저택을 뒤집으며 밖으로 나온 카인이 짐짓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섭섭한 말을 하네, 형. 죽여 버리고 싶게.”
바옐은 한숨을 삼키며 카예나에게 말했다.
“내가 상대할 동안 도망쳐.”
바옐의 주변으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카예나는 마법을 더 썼다가는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팟!
그녀는 서둘러 공간을 이동했다.
마법사가 자신을 노리는 이유가 뭘까? 카예나는 정신없이 여력이 닿는 대로 공간을 이동하면서도 의문을 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법사들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는 것이라고는 마법사는 상당히 개별적인 존재라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바옐을 제외한 다른 마법사와 얽힐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읽었던 소설에서도 바옐이 아닌 다른 마법사는 없었으니까.
‘바옐은 카인이라는 남자가 나를 노리는 이유를 아는 것 같았어.’
검은 정원을 넘기라고 했던가? 그것도 마치 황위처럼 찬탈 가능한 것인 모양이었다. 그 일에 카예나가 필요한 모양인데, 카인의 행동을 보면 카예나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혹시 내 힘을 빼앗을 수 있나?’
어쨌든 지금은 몸을 숨겨 힘을 비축한 후에 침실로 돌아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조디악 백작의 저택이 폭파된 탓에 거리가 어지러웠다. 거리에는 도망치는 사람과 이때다 싶어 날뛰는 폭력배, 거리를 빠져나가려 미친 듯이 달리는 말과 마차들로 가득했다.
카예나는 누가 보아도 수상하리만큼 모습을 꽁꽁 감추었기에 발각당하기 쉬웠다. 몸이 멀쩡했다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겠지만, 지금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벌써 다리가 후들거리며 눈앞까지 가물거렸다. 이 상태에서 연속으로 마법을 쓰는 건 불가능하다. 공간 편집 마법도 멈추고 최대한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아지트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비켜라! 비켜!”
귀족들을 태운 마차는 앞에 사람이 있건 말건 무자비하게 내달렸다. 카예나가 숨어든 골목으로도 마차가 튀어나왔다.
“죽기 싫으면 비켜!”
좁은 거리에 마차 여러 대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마부들이 매서운 얼굴로 소리치며 말을 몰았다.
탁!
누군가가 카예나를 붙들었다.
“이쪽으로.”
나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
상대는 카예나를 부드럽게 감싸며 마차를 피해 이동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검은 늑대 가면을 쓴 남자가 보였다.
‘오늘 조디악 저택에 있던 남자인가?’
그런데 목소리가 익숙했다. 키나 체격, 그녀를 감싸 안은 손길까지도.
‘라파엘로다.’
마침내 아지트 앞에서 멈춰 섰을 때 카예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마담 메데이아라면 등장했을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뒷골목에 등장한 폭력배를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상했다. 라파엘로는 어이없게도 퍽 익숙하다는 듯이 건물의 숨겨진 위치까지 파악해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그녀는 라파엘로가 내민 손을 잡고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외부의 시야가 차단된 곳으로 들어오자 라파엘로가 가면을 벗고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머리칼을 털었다.
“나를 어떻게 알았냐고요?”
카예나가 재차 묻자 라파엘로가 검은 베일 너머를 응시하듯 시선을 맞췄다.
“마법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그의 말에 카예나가 입술을 다물었다.
‘어떻게 마법인 걸 알았지?’
라파엘로는 마법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르는 일반인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마법을 알았으며, 또한 자신이 마법사임을 알았다는 말인가?
설마…….
“그때 잠든 척하고 있었어요?”
카예나가 그를 찾아갔던 그날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라파엘로는 대답하지 않고 베일로 가린 카예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작은 창을 타고 들어온 창백한 달빛이 라파엘로의 얼굴에 스며들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었다. 이 남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마법의 힘을 얻기 위해 수명으로 거래했다는 것을…….
카예나는 입술을 짓이기다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라파엘로.”
라파엘로는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뜨며 표정을 건조하게 굳혔다.
“당신께 남은 시간을 알 수 있습니까?”
‘역시나.’
탄식이 쏟아질 것 같았으나 간신히 참아 냈다.
‘바옐이 알려 줬을 리도 없고.’
마법에 관련한 자료라도 찾아본 모양이었다. 카예나는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수명의 절반을 거래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로의 손을 겹쳐 쥐었다.
라파엘로의 눈이 일렁거렸다. 카예나는 차라리 이 남자가 참지 않고 자신에게 화내기를 바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홀로 남아서 살아갈 나는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화내도 돼요.”
카예나의 말에 라파엘로가 속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원망하려거든 자신을 탓해야 했다. 클로렌스 엘리반 부인을 지켜 내지 못하고, 그녀의 편지를 카예나에게 전달한 자신을 원망해야 했다.
카예나는 그가 무엇을 두고 자책하듯 그렇게 말하는지 깨닫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모는 레제프가 죽였어요. 그 일에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그건…… 오직 나와 레제프의 문제예요. 또한, 황제 폐하의 잘못이죠.”
라파엘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 궁지에 몰리지 않도록 일찍이 도왔더라면. 자신이 더 과감하게 행동했더라면.
“이제 다 끝나 가요.”
카예나는 곧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은 라파엘로에게 말했다.
“모든 게 다 끝나면, 내 남은 시간은 모두 당신 거예요.”
그러니 조금만 견디면 된다. 하루만 더. 그리고 또 하루만 더 주어지면 된다. 승리만 하면 죽음까지 남는 시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바랐던 진정한 자유가 되리라.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라파엘로의 뺨을 쓸었다. 그러자 라파엘로가 검은 베일 위로 키스했다. 얇은 베일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입술을 겹쳤다. 그가 고개를 살짝 떨어뜨리며 말했다.
“당신께 승리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이제 실패는 그들의 계획에 존재하지 않았다.
* * *
레제프는 소파에 누운 채 천장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무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즐겁지 않았다. 전처럼 시도 때도 없는 분노에 휩쓸리거나 하지도 않았다. 영혼이라도 잃어버린 듯, 그렇게 빛을 잃은 눈동자로 시간을 죽여 나갔다.
사냥 대회 준비도 귀찮았다. 거기에 가서 뭘 하겠는가? 어차피 예이스터가 준비한 어떤 깽판에 휩쓸리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는 일밖에 더 하겠는가? 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웃는 누이의 얼굴이나 보겠지.
‘야위었구나, 레제프.’
다정하게 제 뺨이라도 쓸어 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봐 줄지도 모르지.
레제프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후회스러웠다. 지난날에 자신이 했던 충동적이고 어리석은 행동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섣불리 카예나의 유모를 죽이지 말았어야 했다.
“산 채로 데려와 눈앞에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래야 이지를 상실한 카예나를 보듬어 안으며 인제 그만 제 보호 아래에서 얌전히 있으라고 잘 타이를 수 있었을 텐데.
레제프는 가장 가지고 싶었던 가족을 잃어버렸다. 오직 나만을 사랑하는 가족. 피로 이어져 있어 절대 끊어 내지 못하는, 그 완전한 결속 아래에 이루어지는 단단한 혈맹.
그것의 달콤함을 누이가 알려 주었다. 자신을 위해 뭐든 하고 안온한 관심을 보여 주고 애정을 쏟아 주었다.
“나는 누님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었는데.”
물기라도 어려야 할 것 같은 그 말은 너무나 차갑고 냉혹하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배신했다. 당장 가족의 연을 끊고 처단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미련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너그럽게 누이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누님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해.”
그렇게 결정하자 안달이 났다. 어서 자신을 괴롭히는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가급적 이번 사냥 대회 기간 안에.
“자밀.”
그의 비밀 수행원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내 사냥감은 늘 하나였지.”
레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냥 대회 중에 황제를 죽여라.”
자밀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듭니다.”
* * *
조디악 백작이 의문의 마담 메데이아에게 패배했다. 카예나는 되는대로 돈을 쏟아부으며 암시장을 순조롭게 장악했다.
제다이어는 다음 목표를 위해 세력을 새롭게 꾸렸다. 도시 국가, 하임벨을 키드레이 공작령으로 복속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그 부유한 도시를 공작가에서 삼키면 한 나라의 수장만큼이나 권한이 강력해지게 된다.
카예나는 원작 내용에서 봤던 하임벨 영주가 야만족으로부터 위협을 당했던 것을 자세히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 내용을 토대로 대략적인 도면까지 그려 냈다.
“이 도면을 따라 들어가면 하임벨 영주를 잡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제다이어는 카예나가 그린 하임벨 영주 성의 도면, 침입 경로를 암기하며 물었다.
“그래. 그가 키드레이 공작가로 도망칠 수 있게 마부도 포섭하고.”
“그런 일이야 돈만 있으면 가능합니다만…….”
제다이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러다가 공작가가 갑자기 독립 선언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임벨 영주를 키드레이 공작가가 잡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공작가의 힘을 압도적으로 키워 주는 일이었다.
카예나로서는 강력한 교역로까지 손에 넣은 라파엘로가 차기 후계자로 이델을 밀어 주는 것에 조금의 잡음도 나지 않게 할 장치였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큰 권한을 쥐여 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들이 공국으로 독립 선언이라도 한다면 제국은 골치가 아플 수 있었다. 하지만 카예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그렇게 될 운명이었구나 생각해야지.”
“이것 참…….”
제다이어는 카예나와 라파엘로의 사이를 모르니 뺨만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장 하임벨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때 카예나가 물었다.
“동생은?”
엘릭서를 마시고 괜찮아졌느냐는 뜻이었다. 제다이어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피웠다.
“덕분에 씻은 듯이 멀쩡해졌습니다.”
“다행이네. 황녀궁이 넓으니 몸이 튼튼해야 잘 돌아다닐 수 있을 거야.”
제다이어가 아무리 일을 빨리 마무리한다고 해도 거의 한 달은 제국을 떠나 있어야 한다. 카예나는 그동안 그녀를 황녀궁 안으로 데려와 보호할 생각이었다.
제다이어가 침실에서 나가자 몰래 숨어 있던 치즈 고양이가 나타났다. 암흑가에서 벌어졌던 난투극 이후로 며칠 만이었다. 그간 황녀궁으로 오지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동생이랑 정리는 끝낸 거야?”
그러자 고양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미친 자식. 검은 정원을 가지려고 네 힘을 노리고 있어.
바옐은 타고난 마법사들은 계약 마법사의 몸에 심은 검은 장미를 훔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죽는 거고?”
-그래.
카예나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네 동생은 예이스터와 손을 잡은 모양이던데.”
-내가 전에 시간을 멈추면 다른 마법사들이 느낄 수 있다고 했지? 녀석이 그래서 마법 발현지를 찾아온 거야.
“그렇다면 내가 황녀라는 사실은 아직 모른다는 뜻인데…….”
-카인은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 걱정하지 마.
“든든하네.”
카예나는 곁으로 다가온 바옐의 턱을 긁어 주었다.
바옐은 시건방지게 어른의 턱을 긁는 카예나에게 바락 화를 낼까 하다가 손길이 시원하여 골골거리며 눈을 게슴츠레 감았다.
카예나가 약한 한숨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라파엘로에게 마법사라는 사실을 들켰어.”
-뭐야?
바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캭, 하고 털을 세웠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는 걸 간과했지 뭐야. 낌새를 느끼자마자 마법사에 대해 알아본 모양이야.”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라파엘로가 수명 거래까지 알아차렸다고 설명했다.
바옐이 꼬리로 탁자를 탁탁 두들기더니 입을 열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래.
나름대로 신경 쓴 위로의 말이었다. 그 말에 카예나가 피식 웃었다.
“우리는 결혼은커녕 약혼도 안 했어.”
-뭐, 어쨌든.
이로써 아주 확실한 한 가지 가설이 생겼다.
“이번 사냥 대회에 카인이라는 마법사가 나타나겠네.”
확정된 위기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당연히 사냥 대회에 참가해야지.”
위기를 뒤집으면 그보다 더 큰 기회는 없으니까. 카예나는 이번 사냥 대회에서 후계자 서열을 정리할 작정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카예나는 중얼거리며 파르르 떨리는 손을 콱 움켜쥐었다. 잦은 마법 사용으로 인해 몸이 나날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더.’
황위에 다가설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에 바옐이 다시금 투명하게 사라졌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애니가 들어왔다.
“전하,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가자.”
오늘은 사냥 대회 장소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오늘 사냥터 수색부터 시작할 테니 남자 귀족들은 이미 도착해 있을 테지.’
그렇다면 지금 라파엘로도 그곳에 있다는 뜻이다.
‘사냥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미리 일러두어야겠다.’
* * *
“도착했습니다.”
사냥터는 상당히 넓었다. 카예나는 가장 안쪽에 위치한 좋은 막사로 안내받았다. 막사가 황녀궁의 침실만큼 좋을 수는 없지만, 과연 황족이 쓸 공간답게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사냥 대회를 위한 막사이거늘, 묘하게도 전장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명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생사가 오가는 위험한 일이 터질 것은 자명했다.
“바옐.”
카예나가 혹시나 하고 그를 불러 보았으나 지금은 없는 모양인지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멀지 않은 곳에 키드레이 공작가의 막사가 보였다. 그녀는 마력으로 막사 내부를 훑었다.
‘라파엘로 혼자 있네.’
곧 사냥을 나갈 그에게 해 줄 말도 있고 얼굴을 볼 겸 그의 막사로 공간 이동했다.
“라파엘…… 어머.”
카예나는 입을 다물었다. 라파엘로가 상반신을 완전히 다 벗은 상태였다. 완벽하게 근육으로 다듬어진 몸매가 언제 보아도 감탄만 나오게 했다.
라파엘로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자신이 셔츠를 벗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건지 옷부터 입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카예나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갑자기 공간 이동을 해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우선 옷부터 입어야겠다. 라파엘로가 셔츠를 미처 껴입기도 전에 막사 입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바스턴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머뭇거릴 시간도 없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를 데리고 침대로 갔다. 검은 융단을 걷어 그 안에 카예나를 숨겼다.
두 사람이 눕자 깃털로 된 시트가 푹 꺼졌다. 라파엘로는 입구 쪽에 등을 보인 채 카예나를 끌어안아 몸을 완전히 밀착했다. 가까이 오지 않으면 그의 몸집에 가려 들키지 않을 터였다.
카예나는 그의 벗은 몸에 뺨을 댄 채로 숨을 죽였다.
“들어와라.”
라파엘로가 그렇게 말하며 새카만 시트 위로 흩어진 금빛 머리카락을 이불 안으로 정리해 주었다. 몸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바스턴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곧 사냥터로 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라파엘로가 긴 흉터가 난 조각 같은 등을 내보이고 있자 바스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옷은 왜 벗고 계십니까?”
“사냥용 튜닉 셔츠로 갈아입으려다가…….”
“……그런데 옷은 왜 안 입고 침대에 누워 계십니까?”
라파엘로는 잠깐 고민했다.
“……잠시 쉬고 있었다.”
요즘 주인이 좀 많이 이상했다.
“시중을 도와드릴까요?”
라파엘로는 바스턴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는 대담하게 자신의 품에 꽉 안긴 카예나의 머리칼을 쓸었다.
‘들키면 어쩌려고.’
물론 상태가 바스턴이면 들키더라도 조금 민망한 수준으로 그치겠지만. 그래도 황녀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은가? 둘은 약혼한 사이도 아니어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별로 좋지 못했다.
‘공간 이동을 했어야 했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느라 미처 공간 이동으로 제 막사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준비하고 나갈 것이니 먼저 채비해 두어라.”
“예, 주인님.”
바스턴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주인이 조금 이상했으나 우선 밖으로 나갔다. 기척이 사라지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갔습니다.”
그의 말에 카예나가 경직한 몸을 풀었다. 머리끝까지 덮었던 검은 담요가 스르르 내려왔다. 라파엘로는 품에 완전히 밀착해 안긴 카예나가 드러나자 저도 모르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갑자기 나타나셔서 놀랐습니다.”
카예나는 그의 팔을 베며 자세를 편안하게 고쳤다.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가만히 눈을 맞추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곧 사냥터로 나가잖아요.”
“응원해 주시는 겁니까?”
“이런 사냥 대회에 썩 적극적이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전하를 위해서라면 가장 훌륭한 사냥감을 구해 올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카예나는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에 쪽 하고 입 맞췄다. 라파엘로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부드럽게 휘었다. 카예나는 그의 뺨, 단단한 턱, 조각상 같은 목선을 살살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 미리 이야기하러 왔어요.”
“하인리히 대공자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무기 같은 것은 국가에 신고하지 않은 것들도 넉넉하게 챙겨 왔습니다.”
그가 당당히 범법을 저질렀다고 말하자 카예나가 웃었다.
“황녀 앞에서 당당히 말씀하시네요.”
그러자 라파엘로가 몸을 일으켜 카예나를 팔 안에 가두며 엎드렸다.
“체포하실 겁니까?”
“내 방에 가둬 두고 싶기는 하네요.”
라파엘로는 으음, 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 표정이 상당히 야했다. 그녀가 물었다.
“유혹하는 거예요?”
그러자 라파엘로는 자신의 몸을 더듬는 카예나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전하께서야말로.”
그 행동에 저릿한 긴장감이 몸 안에서 피어올랐다. 그를 받아들였을 때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라파엘로가 고개 숙이며 입술을 붙이자 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토해졌다.
“……이러시면 참기 힘듭니다.”
그의 경고에도 카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세워 어깨를 콱 깨물었다.
라파엘로는 잠깐 한숨을 내쉬고는 막사 입구를 힐끗 보았다.
‘두 시간 정도면 괜찮겠지.’
아쉽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