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27
악녀는 마리오네트 24장. 진실 공방(27/33)
24장. 진실 공방
사냥 대회에서 있었던 일은 순식간에 퍼졌다. 특히 괴수와 이상한 힘을 가진 자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수도를 발칵 뒤집었다. 그것이 예이스터가 벌인 짓이라는 것도 귀족 사회를 술렁이게 했다.
“이것은 신성 모독이오!”
죽음을 거스른 괴수에 대사원에서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여론은 하나로 모였다. 당장 예이스터를 화형에 처해야 한다고 모두 목소리를 높였다.
예이스터가 반박했다.
“그날 있었던 모든 일은 황녀가 저지른 짓이다! 황녀가 마법사이며 모두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조금도 설득력이 없었다. 그가 투창 안에 화약을 채워 넣은 증거도 발견되었다. 키드레이 공작가는 의식을 잃은 채 돌아온 자신들의 주인을 보고는 분노했다.
-야.
라파엘로는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찡그렸다.
툭. 툭.
-야, 인제 그만 눈떠.
‘……뭐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상한 목소리였다. 뭔가 말랑한 것이 제 얼굴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에 치즈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다. 고양이가 역정을 부렸다.
-일어나. 지금 세상이 뒤집혔는데 잘 때가 아니라고.
“…….”
아직 꿈인가 보군. 라파엘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일어나라니까!
퍽! 퍽!
라파엘로는 도무지 꿈이라고 여길 수 없는 선명한 냥냥 펀치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주변을 돌아보니 자신의 침실이었다. 침대 위에 있는 것은 진짜 고양이가 맞았다.
그럼 지금 이 고양이가 말을 한 건가? 라파엘로는 고양이를 휙 들어 올렸다.
-캭! 내려놓지 못해!
“뭐야, 이건?”
어딘가 익숙한 건방짐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말투인데…….
“……바옐?”
-그래! 내려놓으라고, 멍청한 공작 놈아!
그가 표정을 찡그렸다.
“원래 고양이였어?”
-고양이겠냐!
똑똑. 그때 침실 문이 열리고 제레미가 들어왔다. 라파엘로와 바옐의 고개가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아, 깨어나셨습……!”
제레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인님이 드디어 일어나서 기쁘기는 한데…… 웬 고양이지?
-냐, 냐앙.
라파엘로는 바옐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바옐의 머리와 등을 긁어 주었다.
‘음, 얘도 손맛이 괜찮네.’
바옐이 눈을 게슴츠레 감았다.
“무슨 일이지?”
“아.”
제레미가 그제야 정신 차리더니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는 라파엘로에게 다가갔다.
“몸은 어떠십니까?”
“괜찮은데.”
그러다 라파엘로의 뇌리로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카예나!’
이상한 마법사가 그녀를 향해 죽일 듯이 공격했었다.
“황녀 전하는?”
라파엘로가 답지 않게 몹시 다급하게 물었다. 제레미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황녀 전하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몸이 회복하는 대로 황궁으로 방문해 달라십니다.”
카예나는 무사한 모양이었다. 그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원에게 진찰받으시고 채비하신 후에 가시지요.”
“그러지.”
제레미가 의원을 부르러 나가자 다시 침실에는 라파엘로와 바옐만이 남게 되었다. 라파엘로는 잠깐 생각을 정리한 후에 입을 열었다.
“네가 검은 정원의 주인인가?”
-그래.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
“그런데 왜 내게 정체를 드러낸 거지?”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바옐이 말했다.
-너, 황녀를 황제로 만들 생각이지?
“그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어.”
-하지만 네 힘이 대세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확실하지.
그건 사실이었다. 라파엘로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냐는 표정으로 바옐을 바라보았다.
-황녀가 황제가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바옐은 그가 쓰러진 사이 생겨난 일들을 말해 주었다.
라파엘로는 황위 계승 후보에서 예이스터의 이름을 지웠다.
“대공자의 약점이라면 내 쪽에서도 몇 가지 갖고 있어. 지금까지는 그것이 치명적이진 않았지만…….”
지금 화약 창고와 조디악 백작에 관련한 증거를 대사원에 넘긴다면 예이스터는 완전히 회생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제 그에게서 특별한 이득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대공가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럼 카예나가 바로 황위를 계승하는 거야?
“그건 아니야. 레제프 황자가 남아 있는 데다가…….”
라파엘로는 말을 멈췄다. 문제가 있었다. 바로, 레제프의 출생에 관련한 문제였다. 게다가 이 사실이 밝혀지면 타격을 입는 것은 레제프만이 아니다.
“선황후를 폐위하려는 자들이 반드시 나올 텐데…….”
부정을 저지른 선황후를 폐위하게 되면 레제프만이 아니라 카예나도 정통성을 잃게 된다.
라파엘로는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최근 카예나가 레이디 카트린의 영향력을 키워 준 참이다. 아마 그녀를 황후로 책봉할 계획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시기를 좀 더 이르게 하여 카트린이 황후가 된다면 어떨까? 그리고 카예나를 그녀의 아래로 입적한다면? 정통성을 잃게 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건 모두 황제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지.’
라파엘로는 에스테반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 어서 일을 진행해야 함을 깨달았다.
-카예나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바옐이 오늘 찾아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황녀는 너무 빠르게 생명력을 태우며 마법을 쓰고 있어. 가뜩이나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수명 계약을 해 버렸는데…….
“…….”
-내가 마법 계약을 무르면 수명이 제법 많이 돌아오게 될 거야. 하지만 그 전에 죽어 버리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어.
바옐은 자신이 입을 타격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카인을 마법 재판에 넘겼다. 당장 그를 위협할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으니 마법의 정원이 약해지더라도 천천히 회복해 나가면 된다.
라파엘로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 모든 과정을 아무리 빠르게 해도 몇 달의 시간이 필요하다.
“레제프 황자를 얼른 처리해야겠어.”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리며 제레미가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 아까와 달리 사색이 되어 있었다.
“주인님, 황제 폐하께서 독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범인으로 황녀 전하께서 지목되셨습니다!”
“당장 황궁으로 간다.”
* * *
황제가 죽었다!
카예나 황녀가 선물한 은스푼이 변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차를 마시다가 피를 토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의원들이 달려와 황제를 진단했다. 아주 희미한 숨이 붙어 있었으나 그들은 황제가 죽었다고 진단했다. 그것은 레제프의 지시이기도 했다. 예이스터가 몰락했으니 그가 황위를 계승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카예나 황녀가 그럴 리 없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그녀의 손을 들어 주는 이들이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 키드레이 공작가, 도티 후작가, 엘리반 남작가……. 후계 구도를 뒤집어 버릴 수도 있을 법한 조합이었다.
사람들은 직감했다. 이번 일이 뒤집히면 후계 구도도 뒤집힌다는 것을. 가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우선 황녀가 진상한 은스푼이 가짜 은으로 밝혀지자 카예나는 유력한 용의 선상에 올라 황녀궁에 유폐되었다. 외부인과의 접촉은 일절 금지되었다.
고요한 황녀궁으로 루든 시종장이 찾아왔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는 엘릭서를 챙겨 황제를 찾아가려다가 멈칫했다. 루든 시종장이 그녀를 향해 작은 함을 내밀었다. 열어 보니 안에 낡은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선황후 폐하의 일기입니다.”
“……이것을 왜 내게 주느냐?”
“판을 뒤집을 증거입니다. 어떻게 사용하실지는 전하의 손에 달렸습니다.”
판을 뒤집는다?
카예나는 루든 시종장이 그녀의 손을 들어 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일기장이 무슨 효력을 가졌기에 판을 뒤집는다는 것인가? 심지어 이 일기장의 존재는 지난 생에서도, 원작 소설 속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카예나는 의아한 얼굴로 일기장을 펼쳤다.
⌜제국력 ……년 ……월 ……일.
레오가 설마 나를 버리고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는 그게 나를 지켜 줄 방법이라고 했다. 가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며 날 설득했다. ……그게 정말일까?⌟
“……레오?”
카예나는 일기를 훌훌 넘겼다. 계속 레오라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충격에 휩싸인 내용이었다.
⌜레오와 그 여자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정말로 버림받았다.⌟
레오, 레오. 카예나는 입안에서 그 이름을 계속해서 굴려 보았다. 누구인지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다.
⌜아버지는 내가 에스테반 황태자와 결혼하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장차 엘다임 제국의 황후가 되는 거라고,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되는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황궁도 황태자도 무섭다…….⌟
⌜날 향한 애정이 식고 새로운 여자를 찾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줄 알았던 그가 다시 나를 찾았다.
노아 키드레이와 결혼한 것이 너무나 후회된다고,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황제는 나를 사람이 아니라 후계자를 낳을 도구로 취급할 뿐이다. 애정을 바라는 나를 차갑게 바라본다. 너무 지쳤다. 나는 사랑받고 싶은데…….⌟
“레오 키드레이 공작……!”
모친의 연인이 바로 레오 키드레이인 모양이었다.
‘그럼, 공작이 바람을 피운 상대가 설마 어머니라는 건가?’
머리가 쿡쿡 쑤셨다. 미간에 절로 깊은 골이 생겨났다.
⌜딸이 태어났다. 그분을 닮은 것 같다…….⌟
⌜황궁의 공기가 너무 무겁다. 내 죽음을 바라는 이가 있는 것 같다. 클로렌스는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 나를 다독여 주었다. 내게는 그녀밖에 없다.⌟
선황후는 상당히 유약한 사람이었다. 도저히 황궁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로 계속해서 클로렌스 엘리반이 언급되었다.
카예나는 제 유모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이 사람은 이렇게나 부족한 내 어머니를 이토록 챙겨 주었구나. 게다가 또 그 딸을 위해 희생했다.
⌜요양을 핑계로 남부로 내려왔다.⌟
⌜레오가 남부로 왔다. 아내와 아이는 어쩌고? 그는 곧 이혼할 거라고 내게 말했다. 정말일까? 레오는 클로렌스에게 우리의 밀회를 들키면 황제에게 고발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클로렌스에게 거짓말을 하기가 힘들다. 그녀는 내 유일한 이해자인데.⌟
⌜이상하다. 월경이 시작되지 않는다.⌟
“…….”
나는 순간 이 일기장을 덮어 버리고 싶었다. 다음 장을 넘기기가 불안했다.
⌜아이가 생겼다. 클로렌스가 먼저 알아차렸다. 그녀는 레오가 남부에 숨어들어 나와 밀회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하염없이 울었다.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그녀는 레오를 남부에서 내쫓았다. 임신 사실을 들키지 않도록 주변을 철저히 단속했다.⌟
⌜황제 폐하가 남부로 내려왔다. 배가 조금 나왔지만, 붕대로 감으니 크게 티 나지 않았다. 품이 넓은 드레스를 입었다.⌟
카예나는 다음 장을 넘기고는 숨을 멈췄다.
⌜들킨 것 같다.⌟
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가슴이 콱 막힌 듯 답답해져 숨이 가빴다.
레제프는 황제의 아들이 아니다.
“그래서 그랬던 건가?”
부황이 그토록 레제프에게 냉혹했던 이유를 알았다. 카예나는 소파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레제프는 모르겠지.’
카예나는 엘릭서가 담긴 병을 보았다. 두 방울이면 끝인 양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미리 준비했던 도안을 챙겼다. 카예나가 침실에서 나오자 애니와 도나가 벌떡 일어났다. 카예나가 말했다.
“중앙군을 불러와 길을 터라. 황제 폐하께 갈 것이니.”
그러자 도나가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카예나는 서늘하게 경고했다.
“도나, 지금 나를 방해한다면 네게는 용서받을 여지 따위는 없다. 나를 배반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나는 사색이 되어 바닥에 엎드렸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전하! 양친을 죽이겠다는 겁박이 두려워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습니다!”
카예나는 도나를 내려다보았다. 굳이 용서할 필요는 없겠지만,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도 피로했다.
“그간의 정을 보아 너를 처벌하지는 않겠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도나는 당장 화를 모면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애니와는 다르다. 카예나는 이 아이는 측근으로 쓰기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녀의 손짓에 도나가 물러났다. 당연히 감시도 붙였다.
애니가 도나를 대신하여 중앙군을 호출하기 위해 비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지금 황녀궁을 점거한 이들은 황실 직속 기사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레제프를 지지하고 있으니 카예나의 명령에 바로 비켜서지 않을 것이다. 무력을 쓸 마음은 없었으나 그녀가 가진 힘을 보여 줄 필요는 있었다.
애니의 연락을 받은 중앙군이 본성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카예나의 은혜를 입은 중앙군에게는 그녀의 말이 곧 황제의 말이었으며 황법이었다. 제드 총기사단장을 비롯한 중앙군은 황실 직속 기사들과 대치했다.
카예나는 황녀궁 입구로 걸어가 황실 직속 기사들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물러나라. 진범을 가리러 가는 길이니.”
그때 기사들 사이에서 드뷔시 재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반역입니다!”
카예나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내가 무엇에 반기를 든 것인가, 재상?”
드뷔시 재상은 카예나가 자연스럽게 쓴 하대를 눈치채지 못하고 노성을 터뜨렸다.
“황녀 전하께서 진상한 은스푼이 가짜 은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어찌 무력으로 일을 해결하려 드십니까! 이것을 위해 폐하께서 전하께 중앙군 통솔권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로구나.”
카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폐하께서 위기에 빠지셨다. 그분 다음의 통솔자가 누구지?”
재상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거야 당연히 국정 대리인인 카예나였다.
“은스푼은 사원에 공증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가짜 은이라? 그 말은, 사원이 폐하를 시해하도록 사주했다는 것으로 간주해도 되겠는가?”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드뷔시 재상.”
카예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죽기 싫으면 비켜라.”
“…….”
드뷔시 재상은 주먹을 파르르 떨며 한 걸음 물러났다. 황녀를 저지할 힘이 부족했다.
카예나는 군대를 이끌고 황제의 처소로 향했다. 그 걸음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 폐하를 진단한 의원과 시종들을 모두 포위하라.”
“명을 받듭니다!”
처소의 문이 무력으로 열리며 그곳을 채운 채 가짜 눈물을 흘리던 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카예나는 아수라장을 뚫고 대기실을 지나 침실 앞에 섰다.
달칵. 문이 열리자 침대에 가만히 누운 부황이 보였다. 카예나는 침실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고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다. 부황의 몸에 손을 대자 아주 미약한 고동이 느껴졌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 엘릭서를 먹이면 회복할 것이다.
그녀는 엘릭서를 품에서 꺼내 협탁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것을 부황에게 바로 먹이지 않고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저 가만히 잠든 사람의 곁을 지키는 것처럼. 카예나가 엘릭서가 담긴 병을 손가락으로 쓸다가 입술을 떼었다.
“아버지.”
그녀는 죽어 가는 부친을 바라보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왜 그러셨습니까?”
격정적이지도, 암담하지도 않은 담담한 물음이었다.
“당신께서 무슨 짓을 저지르셨는지 아십니까?”
카예나는 친모의 일기와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며 모든 정보를 조합했다.
모친과 레오 키드레이 사이에서 레제프가 태어났으며 그 사실을 에스테반 황제에게 들켰다. 그리고 황제는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모친에게 그것을 먹여 죽였다. 그러고는 부정의 산물인 레제프를 제 아들로 둔갑시켜 거두었다. 그러나 황후의 핏줄이니 꼴도 보기 싫었던 게 분명했다. 카예나도 같은 이유로 외면당한 것일 테고.
“어쩐지 키드레이 공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더라니.”
뭔가 이상했던 것들이 딱딱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황제를 흡족하게 할 행동을 했더니 금방 마음을 풀었던 것은 그녀가 친자식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에 비하면 레제프는 끊임없이 시험당했다. 진실을 알기 전에는 그저 아들을 견제하는 못난 지배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왜 제가 레제프를 마음 편하게 미워하지도 못하도록 그러셨습니까?”
카예나는 타고나기를 온정이 있고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온화함은 지난 생의 학습을 통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카예나는 태어나서 이토록 강렬한 분노, 허탈감,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 아이는 이미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노리셨던 겁니까?
황제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카예나는 죽어 가는 부친을 바라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면 차라리 거두지 말고 죽이시지 그랬습니까?”
레제프는 부황의 아들은 아니지만, 여전히 자신의 동생이다. 우습게도 그 아이는 이제 라파엘로의 동생이기도 했다.
“제가 레제프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제 모든 것을 마무리할 일만 남았다. 카예나는 잠시간만 황위를 계승하여 정세를 회복하고 이델의 대관식을 치러 준 다음 여생을 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도망칠걸.”
도망치다가 실패해서 죽어 버리든, 헨버튼 길리안에게 납치되어 또 똑같이 살다가 죽어 버리든, 예이스터에게 이용당하다가 죽어 버리든 그냥 죽어 버릴걸. 허탈하고 우스웠다.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에스테반 황제는 죽어서도 마음이 흡족할 터였다. 레제프의 몰락을 지켜볼 테니. 카예나는 빛이 꺼진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저는 정말로 악녀가 되어야겠군요.”
그녀는 황제를 살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황제가 죽기를 기다렸다. 엘릭서는 살아 있는 자에게 투약하면 모든 병과 상처를 낫게 한다. 방금 숨을 거둔 자에게 투약하면 죽기 직전의 상태로 얼마간 더 살 수 있도록 숨을 붙여 준다. 카예나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막 숨을 거둔 황제의 입술에 엘릭서를 흘려 넣었다.
“이제 황위를 물려주셔야겠습니다.”
카예나는 에스테반 황제에게서 벗겨진 왕관이 어디로 향할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일을 지금 결정하기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혹시라도, 제 마음에 조금이라도 그를 용서하고자 하는 연민이 든다면 어떡하지?
카예나는 자신이 여전히 어리석은 황녀라고 생각했다. 대국은 승리로 이끌었으나 개인의 문제에서는 완전히 패배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황제가 거친 숨을 토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컥! 침실 문이 열리고 카예나가 말했다.
“폐하께서 살아 계시다!”
그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황제가 죽은 게 아니었다니! 다들 충격 받은 얼굴을 하고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카예나가 냉엄하게 명령했다.
“감히 죽음으로 위조해 부황을 시해하려 한 자들을 모조리 처단할 것이다!”
카예나를 보좌하며 따라왔던 제드 총기사단장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하옥해라!”
황제가 타계했다는 소식에 대사원에서 대사제를 비롯한 고위 사제들이 황궁을 찾아왔다.
“황제 폐하께서 살아 계시다니요!”
황제가 죽은 줄로만 알고 황궁을 찾았더니 경악할 사건이 벌어지자 그들은 혼란스러워했다.
“고위 귀족을 비롯하여 모두 대회의장으로 모이시오.”
카예나는 긴급 회의를 열었다. 그녀는 대회의장에서 사원의 공증을 받은 은스푼 도면과 황제를 죽게 한 가짜 은스푼을 비교했다.
“여기 도면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원에서 축성받은 은스푼에 문제가 있으면 곤란하니 사제들은 눈에 불을 켜고 도면과 가짜 은스푼을 비교했다.
“보석 뒤에 글씨가 음각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 은스푼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카예나가 의뢰했던 은스푼에 달린 보석 뒤에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레제프의 수하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누군가가 황녀를 음해하려 했다는 정황이 드러나자 사태는 훨씬 심각해졌다.
각자 처소에 연금되어 있던 직속 시녀들이 풀려나며 카예나를 찾아왔다. 카예나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 은스푼을 조작했다는 것을 황자파에서도 다 알았을 것이다. 줄리아, 로드릭 후작을 끌어내릴 때가 바로 지금이다.”
“예, 전하!”
“베라, 수잔 너희가 줄리아를 도와주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카예나가 마련한 장치들의 톱니바퀴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착착 맞물려 움직였다. 그러나 카예나는 스스로도 대체 무슨 이유로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계획을 실행했다. 마치 누군가가 조종하는 마리오네트처럼.
그때 올리비아가 다가왔다.
“키드레이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정처 없이 파도에 출렁이는 부표처럼 있던 카예나가 제게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따로 연락하지 않았음에도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황궁을 방문했다. 든든한 아군의 등장에 카예나가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라파엘로…….”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표정을 보는 순간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에게서 이렇게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카예나에게 다가가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카예나에게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라파엘로는 이제야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곳에서 도망치세요.”
“…….”
“제가 당신을 숨겨 드리겠습니다. 제가 다 감당하겠습니다. 이 모든 일은 제가 수습할 테니까…… 여기서 도망치십시오.”
자신을 안은 너른 품과 다 버리고 도망치라는 말이 스스로도 부숴 버렸던 마음의 어떤 부분이 다독이는 것만 같았다. 모두 복수가 덧없다고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복수하고 나면 카예나는 황위와 안위를 거머쥐겠지만 가장 중요한, 감정적인 만족감이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당신은 어떡하려고요?”
“저는 괜찮습니다.”
카예나의 손이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나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러나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조금도 괜찮은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초조했다. 카예나에 비하면 황위 다툼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라파엘로가 몸을 떨어뜨리며 이곳으로 온 용건을 꺼내려 했을 때였다.
“전하.”
제드 총기사단장이 엄중한 표정을 하고는 그들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레제프 황자를 침실에 유폐하였습니다.”
카예나의 독살을 주장한 것이 레제프 황자파였다. 결과가 뒤집혔으니 그를 심문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심문해야 할 내용은 그게 아니지만.’
독살은 중요하지 않다. 레제프와 풀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단장의 보고에 카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직접 심문하지요.”
“동행하겠습니다.”
라파엘로는 상당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꼭 카에나가 물거품으로 흩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카예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괜찮아요. 이건…… 우리 남매가 반드시 이야기해 봐야 할 일이기도 하고.”
엉망진창인 가족사에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가 반쯤은 이 이야기에 걸친 사람이기는 하지만……. 굳이 마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카예나는 루든 시종장의 생각과 달리 레제프의 출생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이미 모든 정황이 카예나의 편이다. 그러니 그런 지저분한 일까지 터뜨릴 필요는 없다. 참 미련한 말이지만, 레제프에게 마지막 연민이 들기도 했다.
“다녀올게요.”
둘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근처에 포진해 있던 기사들이 소곤거렸다.
카예나가 황자궁으로 향했다. 올리비아가 곁을 따르며 그녀를 보필했다. 올리비아가 물었다.
“황자 전하를 폐위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리해도 모자람 없는 일이지.”
카예나가 하고자 한다면 레제프를 당장 사형에도 처할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카예나의 옆얼굴을 힐끗 보았다. 카예나답지 않은 깊은 고뇌, 혹은 번민 같은 것이 느껴졌다.
“끊어 내야 할 관계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카예나가 올리비아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비화를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레제프를 용서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쨌든 동생이니까, 그 애도 피해자이니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카예나는 이미 실패했던 이유를 다시 붙잡았다. 미련한 짓일 수 있다. 헛수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예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기에는 레제프가 가여운 것이 사실이었다.
달칵. 기사들이 지키고 선 침실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레제프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은 채 카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카예나보다는 조금 더 짙고 화려한 색의 파란 눈동자가 곧 눈물이라도 맺힐 것처럼 일렁거렸다.
“에반스 후작을 조사해 보시면 됩니다. 그자가 저지른 짓입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뒷공작도 해 놓은 모양이었다. 카예나는 가만히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레제프는 천천히 한 걸음씩 카예나를 향해 다가갔다.
“에반스 후작이 저를 버리고 하인리히 대공자와 결탁하려 한 증거도 있습니다. 전에 도티 부인을 이용해 성년식을 망치려고 한 남자 궁정인을 기억하십니까?”
“……에밀 하브론이었지.”
“그렇습니다. 그자가 하인리히 대공자의 세작이었습니다. 사냥 대회부터 우리는 예이스터의 수작에 놀아난 것입니다.”
그는 붕대를 감은 제 팔을 내밀었다. 사냥 대회에서 다친 것이었다.
“제가 어리석었어요. 제게 속삭이는 간악한 이들의 말을 따르면 안 됐어요. 그렇게 엘리반 부인을…… 그래서는 안 됐는데.”
타고난 착하고 온순한 얼굴에 슬픔을 걸치니 마음이 아릿해질 정도로 가엽고 애처로웠다. 여기서 그를 탓하는 말 한마디라도 나오게 되면 되레 탓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가해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올리비아, 잠깐만 자리를 비켜 줄래?”
카예나는 제 뒤에 바짝 붙어 선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올리비아는 카예나와 레제프를 번갈아 보더니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침실 문이 닫히고 레제프와 카예나만이 남았다.
“우리 솔직해지자.”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님?”
“레제프, 너는 내게 졌어.”
그러자 레제프가 시선을 툭 떨구었다.
“누님은 저를 용서할 생각이 없으시군요…….”
“레제프.”
“저는 정말 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황위에도 관심 없어요. 그냥, 그냥 누님만 제 곁에 남아 주시면 됩니다.”
그게 지금까지 레제프가 한 말 중 가장 진실에 가까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레제프가 카예나의 앞으로 다가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끝을 두 손으로 쥐고 조심스럽게, 또 공손히 입을 맞추었다.
“그렇습니다, 나의 폐하.”
그는 완전히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카예나의 눈에는 이게 진심이 아니라는 허점들이 속속들이 보였다.
카예나도 마찬가지로 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시선을 맞췄다. 그러자 레제프가 동요했다. 그녀는 참고 참았던 뜨거운 무언가를 토해 내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레제프, 내 동생.”
“…….”
뭔가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레제프가 간교하게 속살거리던 입술을 다물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카예나는 독을 마시고 깨어난 그날부터 한 번도 자신의 일에 눈물 흘린 적이 없었다. 눈물은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경우나 연기가 필요한 순간에만 흘렸다. 그 외의 일에는 카예나의 삶이 너무 메마르고 건조하여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삶에 돌아온 이후로 처음, 자신과 레제프가 가여워서 눈물을 떨어트렸다.
레제프의 두 눈이 흔들렸다. 레제프가 카예나의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십시오, 누님. 괜찮습니다. 다 괜찮아요.”
다독거리는 목소리가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레제프는 누이의 어깨를 안으며 품에 기대게 했다. 그러더니 돌연 카예나의 허리를 안아 들어 일어서더니 침실의 문 쪽으로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흣! 전하……!”
자밀이 올리비아를 붙들어 목에 칼날을 바짝 붙였다. 그녀의 목에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른 비밀 수행원들도 카예나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 레제프는 카예나가 스스로 덫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나의 누님. 당신이 여기서 선택만 잘하면 됩니다.”
레제프가 그녀를 품에 옭아매며 귓가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 모든 사건을 다른 곳에 씌울 시나리오는 제가 마련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그렇게 가엽게 여기는 마음으로 장단을 맞추면 됩니다.”
“…….”
“나는 당신을 용서하기로 했으니까.”
이미 그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그것이 카예나의 머리에 닿았다.
“아니면 이상한 자들이 침입해 황족을 시해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말겠지요.”
카예나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라도 접어 크게 웃고 싶었으나 레제프에게 결박당한 상태였기에 불가능했다. 그녀가 웃음을 간신히 멈췄다.
“너는 그냥 너로구나, 레제프.”
안타까운 비화와 폭군 황제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도 참 다른 문제이기도 했다. 구제 불능의 개망나니. 그게 바로 레제프였다.
“어서 말해!”
그가 윽박질렀다.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내게 용서를 구하고 빌어. 그러고 내 누이로서 살아가면 되는 거야.”
“너는 이번 사냥 대회에서 일어난 그 모든 일이 예이스터만의 짓인 것 같니?”
“……뭐?”
카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제프와 수행원들의 손에 들린 무기가 사라졌다.
쿵! 쿵!
“크윽-!”
자밀을 포함한 이들이 강한 충격에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카예나는 공간 이동으로 레제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레제프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나는 정말 무서웠단다.”
카예나는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지은 올리비아에게 다가가 손수건으로 목을 지혈해 주었다.
“혹시라도 너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라도 생길까 봐. 그래서 너무 무서웠어, 레제프.”
품에서 한 방울 남은 엘릭서를 꺼내 건넸다.
“상처가 사라질 거야.”
올리비아는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는 그것을 마셨다. 정말로 목의 상처가 사라졌다. 레제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내 유모를 죽인 것을 알고서도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았니? 나는 네가 가장 원하는 걸 꼭 뺏고 싶더구나.”
그녀는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마법의 힘을 손에 넣었지. 황위를 계승하는 건 내게 일도 아니었어. 실제로 곧 내 머리 위에 왕관이 씌워지겠지.”
아까 레제프의 손에 들려 있었던 총이 카예나의 손바닥 위로 소환되었다.
그녀는 묵직한 감각에 그것을 꽉 틀어쥐었다. 철컥. 안전장치가 풀렸다. 카예나는 총을 들어 총구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네가 원하는 게 바로 나였네.”
“누님.”
“움직이지 마.”
레제프가 한 발짝 움직이려고 하자 카예나가 총을 겨누었다. 그가 우뚝 멈춰 서자 카예나가 곧잘 지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착한 아이구나.”
카예나는 일기장을 이곳에 소환했다. 모친의 일기장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다음에는 올리비아의 손을 잡았다. 올리비아가 뭔가 직감한 것처럼 입술을 열었다.
“전……!”
말이 이어지기 전에 카예나가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
침실 문이 스스로 활짝 열렸다. 갑자기 열린 문에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레제프의 귓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직 찢어질 듯이 뜬 눈으로 카예나만을 바라보았다. 카예나가 하는 행동들이 이상했다. 꼭 이대로 사라질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누님, 어리석은 짓 하지 마십시오.”
“모든 톱니바퀴가 나 없이 굴러가도록 해 두었던 것이 참 다행이었지.”
카예나는 작동만 시키면 되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계획한 결과가 도출되도록 모든 것을 설계해 두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레제프가 매섭게 물었다. 카예나는 대답하지 않고 손에 쥔 총을 바닥에 버렸다. 그것을 본 레제프가 곧장 카예나를 향해 달렸다.
“누님!”
그의 손이 카예나를 붙잡아 당겼다. 어디론가 도망치지 못하게. 카예나가 레제프에게 붙잡힌 채로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안녕, 레제프.”
그녀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