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28
악녀는 마리오네트 25장. 악녀가 사라진 세계(28/33)
25장. 악녀가 사라진 세계
카예나가 사라졌다. 눈앞에서, 분명히 내가 두 손으로 그녀를 붙들었는데. 그런데 버려졌다. 레제프는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황녀 전하는 어디에 계십니까?”
멱살이 잡혀 거칠게 끌어당겨졌다. 레제프가 텅 빈 눈동자로 시선을 들어 올리자 라파엘로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주체하지 못해 넘쳐흐르는 분노가 피부로 느껴졌다. 주위의 공기마저 뜨거워지는 것 같은 강렬한 분노였다.
그제야 주변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끌려 나가는 수행원들, 비명을 내지르는 궁정인들, 울부짖는 목소리들……. 그 가득한 소란 속에 오직 카예나만 없었다.
“어디로 숨겼어?”
레제프의 입술이 떨어졌다.
“누님을 어디에다가 숨겼냐고!”
그녀가 홀로 사라졌을 리가 없다. 필시 눈앞의 이 빌어먹을 새끼가 꼬드겨 같이 일을 벌였을 게 뻔했다. 카예나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작동하게 해 준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네가 누이를 황궁에서 도망치게 했잖아. 네가 아니었다면 나를 떠났을 리가 없어!”
부릅뜬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과 표독스럽게 내뱉는 말들에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내놔-!”
레제프가 악에 받쳐 라파엘로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내놔, 내놔, 내놓으라고!”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채로 휘두르는 주먹질 따위가 라파엘로에게 조금도 유효할 리가 없었다.
“당장 내 앞에 누이를 데려다 놔!”
라파엘로는 억지로 노기를 삼키며 주먹질을 피하다가 결국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빠악-! 잔뜩 힘을 실은 주먹에 얻어맞은 레제프가 카펫 위로 뒹굴었다. 라파엘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레제프에게 올라타 그를 가격했다. 라파엘로가 분노에 차 경어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에게 소리쳤다.
“너잖아. 네가 황녀를 도망치게 했잖아!”
라파엘로는 이제 상대가 황자든 말든 상관없었다. 레제프의 반응을 보니 카예나가 사라진 게 확실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를 선택한 것이다. 카예나의 선택은 탁월했다. 레제프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견디기 힘들어했다.
“왜 나 때문이야!”
레제프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악쓰며 소리 질렀다.
“왜 다 나 때문이야? 왜!”
라파엘로는 질려 버린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카예나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러나 돌이킬 수 있는 게 없었다. 레제프는 잡히는 대로 뭐든 내던지며 노성을 터뜨렸다.
“내가 뭘 했는데? 왜 다 내 탓이라고 하는데!”
흉포한 분위기에 기사들을 비롯한 궁정인들이 침실 밖으로 물러났다. 침실에는 동시에 카예나를 잃어버린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그때, 라파엘로는 바닥을 나뒹구는 일기장 하나를 발견했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는 묘한 예감으로 그것을 주워 들었다. 안을 펼치자마자 탄식이 흘러나왔다. 선황후의 일기였다. 이것으로 카예나가 모든 전말을 알게 된 것이다.
“내 옆에만 있으라고 했잖아. 그러면 내가 다 들어준다고 했잖아. 대체 왜 내 말을 안 들어!”
라파엘로는 발악하는 레제프의 앞에 일기장을 던졌다.
“읽어.”
분노에 젖어 있던 레제프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카예나가 소환했던 일기장이었다. 이게 카예나가 사라진 이유인가?
그는 그것을 얼른 펼쳐 들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빠르게 내용을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동자가 점차 떨리더니 일기장을 쥔 손에 점차 힘이 꽉 들어갔다. 그는 그것을 찢어 버릴 듯이 다음 장, 또 다음 장으로 넘겼다.
“……들킨 것 같다.”
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잠시 가만히 멈춰 서 있던 레제프는 일기장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날아간 일기장은 벽난로 위의 장식품들을 쳐 내다 벽에 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아악!”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부수고, 눈앞에 있는 것들을 찢어발겼다. 상처로 뒤덮인 손에서 피가 나든 뺨이 유리에 긁히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제는 자신을 말리러 올 누이가 없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그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카예나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갑자기 눈물을 보였는지, 왜 자신을 가엽게 여겼는지 이해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그토록 바꾸려고 했던 모든 순간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다 깨트려 버린 것이다.
묵직한 것이 목을 꽉 틀어쥐었다. 머리는 깨질 듯했고 눈은 불에 지진 것처럼 뜨거웠다.
“잘못했어요…….”
용서를 빌어야 할 상대는 이미 이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레제프는 눈물을 카펫 위로 툭툭 떨어뜨리며 간절하게 빌었다.
“잘못했어요, 누님…….”
레제프는 아이처럼 빌었다. 또 애원했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이대로 사라지지 마세요. 제발…….
그러나 아무리 빌어도 눈앞에 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진짜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곳에서 완전히.
라파엘로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돌아 버릴 것 같은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입안의 살을 씹으며 간신히 이성을 유지했다. 카예나가 마련한 무대의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역할에 맞추어 움직이도록 해야 했다. 라파엘로의 역할은 명확했다.
“황제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는 기사들이 레제프를 감시하도록 보초를 세우고 황제를 알현하러 떠났다. 황제의 침실을 지키는 문지기가 라파엘로의 걸음을 막았다.
“황제 폐하께서 막 의식을 차리셨습니다. 다음에 방문하심이……”
라파엘로는 문지기의 말을 무시하고 침실로 향했다.
“고, 공작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들 경악하여 얼른 그를 저지하려 검을 뽑아 들었다. 라파엘로의 수행원들이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며 그들에게 맞섰다.
라파엘로는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막 죽음에서 깨어난 황제를 진찰 중인 의원과 루든 시종장이 있었다. 그는 황제의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누구도 미처 말릴 틈 없이 검을 뽑아 들어 황제가 베고 누운 베개에 푹 꽂아 넣었다. 은빛의 검신에 황제의 옆얼굴이 비쳤다.
“공작!”
다들 비명을 내질렀다. 황제가 메마른 손을 들어 올리며 저지했다.
“다들 나가 보아라.”
“하, 하오나 폐하!”
“황명이다.”
다들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황명을 따랐다. 라파엘로가 싸늘하게 말했다.
“황녀 전하를 음해하려고 한 것도 모자라 그분을 실종시킨 악독한 레제프 황자를 폐위하십시오.”
“하, 하하하……!”
생명력이 거의 꺼져 가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에는 활기가 없었다. 힘없이 몸을 들썩이다가 기침을 토하더니 비열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황자를 폐위하라고? 글쎄. 공작, 짐이 왜 그리하겠는가?”
거칠게 갈라진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안에는 선명한 생기가 어려 있었다. 아니, 생기가 아니라 광기였다. 라파엘로가 이를 드러내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건 권유가 아닙니다, 폐하.”
황제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짐은 황자를 의심하고 싶지 않다, 공작.”
개소리였다. 의심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미쳐 날뛰도록 풀어 두고 싶은 것이겠지!
“지금 당신의 딸에게 생긴 변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까? 황녀 전하는 당신을 살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따위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라파엘로 공작. 자식은 부모를 봉양해야지. 그 아이는 효를 다한 걸세.”
저 밑에서부터 살의가 치밀었다. 방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엄하고 날 선 비난들이 혀끝까지 기어올라 왔다.
라파엘로는 손에 쥔 검의 손잡이를 이대로 내려 버리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럼 개소리를 지껄이는 입이 뚝 멈추겠지. 그러나 아직은 황제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다. 그렇기에 카예나가 황제를 살린 것이리라.
황제가 교만하게 웃었다.
“레제프가 다음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짐작이 되는가? 그의 생부가 레오 프란시스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 레제프는 어찌할 것 같은가?”
아마 레제프는 생부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이다. 황제는 희열을 느꼈다. 아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최후라니. 완벽한 복수의 마무리이지 않은가!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죠.”
라파엘로가 베개에서 검을 뽑아내며 냉담하게 말했다.
“카트린 하멜을 황후로 맞이하여 이델 영식을 정식 후계자로 책봉하십시오.”
“하하하!”
황제는 승리에 도취한 역겨운 웃음을 터뜨리다가 라파엘로에게 말했다.
“고맙네. 진심으로 고맙네, 공작.”
라파엘로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서서 침실을 나왔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고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착실히 모든 일을 수행해 냈다. 그는 카트린의 저택에 그들을 보호할 기사단을 배치했다.
카예나가 마련한 안배의 흐름대로 움직이고 나서 라파엘로는 금방 막 마지막 심지를 태운 초가 된 것처럼 툭 꺼져 버렸다. 전부를 잃은 기분이었다. 라파엘로의 정신은 진창을 굴러 엉망이 되었다. 과연 이 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까? 미지수였다.
그가 공작저로 돌아와 제 침실 문을 열었다.
“……?”
지금 자신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카예나가 제 침대에서 금빛 머리카락을 퍼뜨린 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라파엘로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아주 조심히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한 걸음,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침대로 내디뎠다. 마침내 침대 머리맡에 다다랐을 때, 그는 숨을 멈췄다. 진짜 카예나였다. 다 버리고 훌쩍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여자가 제 침실에 잠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실감한 순간, 내내 속을 찢어발길 듯하던 어두운 감정이 고요해졌다.
라파엘로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침대 차양도 내리고 침실 문도 잠가 버렸다. 라파엘로는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침대에 살짝 기대어, 잠든 카예나를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빛에 반짝거리던 금빛 머리카락과 흰 피부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얕은 어둠에 잠긴 모습이 꼭 안식을 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불을 덮은 그녀의 몸이 숨을 마시고 내뱉으며 작게 들썩였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경이로워 보였다.
아직 늦지 않았구나. 다행이다. 돌이킬 시간이 남아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야.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이곳에 존재하며 살아 있음에 미치도록 감사했다.
그는 두 손을 그러모아 꽉 쥐었다. 맞잡은 주먹에 이마를 기댄 채 기도했다. 전장에서도 신을 찾은 적 없었건만 이 순간만큼은 더없이 간절하게 빌었다.
신이시여, 이 사람을 가엽게 여기신다면 부디 숨을 앗아 가지 마십시오. 이 사람의 존재 가치가 그저 이용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혹독하게 시련을 내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때 카예나가 뒤척이더니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둠에 잠겨 여느 때와 달리 무거운 색을 띠는 눈동자가 라파엘로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손이 이불 안에서 스르륵 움직여 두 손을 맞잡은 채 기도하는 라파엘로의 손을 붙잡았다.
“…….”
두 사람의 시선이 고요하게 마주쳤다. 풀어야 할 이야기가 많다. 상의하여 도모할 일도 많았다. 아픔을 감싸 안고 위로하고 서로를 다독이는 일도 필요했다.
그러나 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기도하던 손을 풀어 카예나의 이마를 짚어 주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벌써 장미가 다 지고 날이 무더워진 것을 아십니까?”
그가 낮고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좀 더 주무십시오.”
아직 잠이 묻어나 가물거리는 눈꺼풀 위를 커다란 손으로 덮어 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쉬어도 괜찮습니다.”
손 아래로 가려지지 않은 도톰한 입술이 작게 달싹거리려 했다. 라파엘로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제가 계속 이곳에 있겠습니다.”
그러자 손바닥에 속눈썹이 스르르 감기는 간지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쉬어도 된다. 지금 카예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내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파엘로는 천천히 손을 떨어뜨리고는 이불을 고쳐 덮어 주었다. 원래도 침실 근처로 사람을 두지 않지만, 라파엘로는 제레미와 바스턴에게 근처를 완전히 통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빛이 닿지 않게 주의하여 램프를 밝혔다. 그러고는 잠깐 드레스 룸으로 자리를 옮겨 실내용 옷으로 갈아입었다. 실내용 바지 위에 매듭이나 단추를 엮을 필요도 없는 검은 가운을 대충 걸쳤을 때였다.
똑똑.
“제레미입니다.”
제레미가 쟁반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챙겨 왔다.
“오늘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잖습니까?”
“괜찮아.”
“안 괜찮으니까 그렇지요.”
라파엘로가 제레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고맙지만 나중에 챙겨 먹겠다. 중요하게 할 일이 있으니 바스턴도 너도 이 통로로는 오지 않아도 괜찮아.”
“어…….”
제레미는 멍한 표정으로 그대로 굳었다.
‘어라, 먼저 누군가에게 접촉하신 적이 없었는데……?’
그 라파엘로가 남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부하를 격려하며 어깨를 두드린 것이다. 제레미는 얼른 주인의 안색을 살폈으나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라파엘로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자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뭐지?’
제레미는 혼란에 잠겨 쟁반을 든 채 그대로 멍하게 밖으로 나갔다.
라파엘로는 얼른 침실로 돌아갔다. 그는 카예나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 침대 옆자리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끌어왔다. 그의 시선은 잠깐 눈을 떼면 날아갈 나비를 보는 아이 같았다.
노을이 사라지고 달빛이 카펫 위로 흰 자국을 만들어 내도록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곳에 있기로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바옐은 어디에 있지? 어서 계약을 회수해야 할 텐데.’
초조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조급해졌다.
라파엘로는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카예나가 몸을 뒤척이자 숨을 멈췄다. 그녀가 다시금 몸을 고쳐 누우며 새근거렸다. 괜히 부스럭거려 그녀를 깨운 줄 알았다.
“……후.”
라파엘로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쯤 바깥은 끓는 용광로처럼 난리였다. 키드레이 공작저도 비상사태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들의 주인이 이 중요한 시기에 침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간을, 또한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누구보다도 목이 바싹 마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런 힘이 없는 파수꾼이 된 기분이군.’
입가로 메마른 미소가 힘없이 떠올랐다가 바스러졌다. 지켜야 할 것은 명백한데 그것을 지켜 낼 검 한 자루도 없다. 그게 지금 그의 상태였다. 그의 시선이 깊은 잠에 빠진 카예나에게 다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붉은 눈동자 위로 노란 불빛이 수심처럼 어른거렸다. 라파엘로는 적막에 잠겨 시간을 죽여 나갔다. 적막만큼 그가 사랑했던 것도 없었는데 이 순간만은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부디 이 숨소리가 끝없이 이어지기를.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다.
* * *
이건 꿈이다. 카예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그렇게 생각했다.
내리쬐는 햇살이 새하얗고 피부 결을 어른거리는 바람은 보드라웠다. 그러나 이불의 감촉이 황녀의 처소에서 쓰는 종류가 아니었다. 코끝에 걸리는 향도 제 침실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라파엘로의 침실도 아니다. 그럼 여기는 어디지?
잠깐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깼으면 후딱후딱 일어나야지 뭘 꾸물거려?
건방진 말투의 고양이가 세상에 둘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저것은 바옐이었다.
“너, 날 납치했니?”
-깨자마자 헛소리야!
바옐은 바락 역정을 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래 봤자 고양이의 모습이라 우습고 귀여울 뿐이었다.
카예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신성하리만큼 새하얀 공간 속에서 그녀는 침대 아래에 놓인 폭신한 슬리퍼를 신고 바옐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카예나가 물었다.
“여기는 꿈속이야?”
-잘 아네.
바옐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더니 하얀 테이블 위로 예쁘장한 모양의 티 포트 세트를 소환했다.
“고양이가 준비해 주는 차는 처음 마셔 봐.”
-고양이 모습인 거지, 진짜 고양이가 아니라고!
카예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바옐의 맞은편에 앉았다. 예쁜 꽃이 그려진 하얀 주전자가 그녀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향기로운 차향이 느껴졌다. 꿈속인데 별게 다 선명하다고 생각했다. 차는 오직 카예나 앞에만 놓였다.
“너는 고양이라서 차를 안 마시니?”
바옐은 고양이가 아니라고 버럭 하려다가 말았다.
카예나는 찻잔을 손으로 쓸었다. 우윳빛의 새하얀 찻잔은 살짝 오므린 꽃송이처럼 생겨서 귀여웠다.
“나만 마시는 걸 보니 특별한 차인가 보네.”
‘하여간 저 황녀는…….’
도통 저 귀신같은 눈치는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바옐은 혀를 내두르다가 말했다.
-그래. 계약을 해지하는 마법의 차니까.
카예나는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여상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원하는 건 다 이룬 거 아니야?
“원하는 걸 다 이루었나……?”
언젠가는 자유였고 언젠가는 복수가 된 그것은 과연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사라진 세상은 과연 어떨까? 이 이야기에서 카예나는 악녀였다. 동생은 폭군이고 둘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카예나가 돌아온 이후부터 이야기는 바뀌었다. 엉망으로 어그러진 것들을 억지로 펴고 이어 붙였다.
그녀가 그려 낸 무대는 분명히 꽤 괜찮았다. 괜찮은 무대, 괜찮은 역할을 골고루 부여받은 등장인물들. 자신이 봐도 그럴듯한 이야기가 완성되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건 애초에 악역이 행복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누구나 불행하다. 완전한 행복은 환상이다. 염세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왜 그 현실적인 생각이 오히려 현실 도피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계약을 회수하면 장미의 정원에 큰 타격이 간다고 카인이 그랬던가?”
바옐은 작게 카인을 욕했다. 계약 마법사에게 누설해서는 안 될 금기였기 때문이었다. 카예나는 찻잔에서 손을 떼며 바옐에게 물었다.
“계약을 해지하면 바옐, 당신은 어떻게 되지?”
-…….
설마 그런 걸 물을 줄 몰랐기에 그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되기는 뭐가 어떻게 되느냐고 면박을 줬어야 했는데 이미 저 황녀는 이 잠시간의 침묵에서 많은 정보를 읽어 냈을 것이 분명했다.
-원래대로라면 정원의 힘은 크게 약해지게 되겠지. 그러면 또 카인 같은 놈이 날뛰어 대서 정원을 찬탈당할지도 모르고.
카예나는 바옐이 말한 ‘원래대로라면’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뜻일까?
-마법사들끼리 회의를 진행했어. 카인은 마법사 협회에서 척결 대상 1순위였지만 가진 힘이 강력해 섣부르게 제압할 수 없었지. 그런 카인을 네가 처리한 거야.
바옐의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래서 마법사 협회에서 뭔가 해 줬다는 말이겠네?”
-맞아. 우리는 현상금 명목으로 네가 원한다면 마법 계약을 해지해 주기로 했어. 그에 따른 리스크는 다 같이 나눠서 짊어지기로 했고.
마법 세계의 생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카예나를 상당히 배려한 것임은 느껴졌다. 아마도 바옐의 입김이 크지 않았을까? 카예나는 입술을 가만히 다문 채 그의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
-그 차를 마시면 계약은 해지되고 넌 더는 계약 마법사가 아니게 될 거야. 수명도 돌아올 거고, 이전처럼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카예나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장밋빛 차가 매혹적인 향을 내뿜고 있었다.
-이왕이면 살아. 살아남아서 좀 더 생각해 봐.
“……코끝이 찡해지는 말이네.”
-하여간 너는 좀 진지해질 수 없어?
“진심이야.”
그러나 바옐은 카예나의 항변을 믿지 않았다. 고양이는 샐쭉하게 뜬 눈으로 카예나를 흘기다가 짤막하게 한숨지었다.
-이제 내 설득은 끝났어. 선택은 네 몫이야.
바옐은 거기까지 말하고 모습을 감췄다. 카예나의 손이 찻잔의 표면을 천천히 쓸었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찻잔 손잡이를 쥘지 말지 알 수 없는 손길이었다. 그녀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선택은 내 몫이지.”
그녀의 손가락이 찻잔 손잡이를 쥐었다.
* * *
에스테반 황제는 루든 시종장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독은 모두 해독했습니다만, 많이 쇠약해지셨습니다.”
루든 시종장이 걱정스럽게 하는 말에 황제가 웃었다.
“목숨을 보전한 것만으로도 어디인가? 게다가 요즘 마음이 좋으니 전보다 덜 아픈 것 같구나.”
실제로 에스테반 황제는 되살아난 이후로 기력은 많이 약해졌으나 안색은 더 좋았다.
“레제프는 아직 레오 프란시스를 찾아가지는 않았느냐?”
“예. 황녀 전하를 찾는 일 때문에 정신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황제는 긴 시간 동안 레제프를 다뤄 오며 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레제프는 분명히 자신의 정통성을 위협하며 거슬리게 하는 레오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제 친아들의 손에 죽는 레오라니. 마음이 더없이 흡족했다.
“슬슬 카트린과 이델도 궁으로 들어와야지. 후계자 자리가 공석이라 마음이 편치 않아.”
황제가 넌지시 말하자 루든이 곧장 알아듣고 고개를 조아렸다.
“서둘러 황후 책봉을 진행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에스테반 황제가 미소 지었다.
“카예나가 사라졌다지?”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말했다.
“황자 전하의 처소에 들어간 직후로 갑자기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고 있으나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참 이상한 일이로구나.”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간단하게 차린 식사를 했다. 딸이 사라진 것에 별다른 유감스러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친딸이기는 해도 그 몸에 흐르는 절반의 피는 선황후의 것이니까. 다만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공주처럼 갑자기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춘 것은 참 이상했다.
더 이상한 것은 자신의 상태였다. 사망 진단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독을 마신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니 중독되었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뭘까?’
어제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자신을 살렸다고 했다. 그게 단순히 누명을 뒤집고 사망 진단을 내린 자들을 물리쳤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조처가 있었다는 것일까?
루든 시종장이 말했다.
“하인리히 대공자가 계속해서 황녀 전하가 마법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사라진 것도 마법의 힘이라고 하더군요. 근거가 없으니 모함에 불과합니다만…….”
“마법?”
황제도 사냥 대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보고받았다. 악마의 힘이 발현했다고 대사원에서 오랜만에 신성 재판을 준비하며 난리를 피워 대기도 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예이스터는 괴수를 불러내는 사특한 피리를 갖고 있었다. 정황상 사냥 대회에서 벌어진 그 일은 예이스터의 짓으로 좁혀졌다. 자연스럽게 그의 말은 성의 없는 모함으로 치부되었다.
“카예나가 마법사라고……?”
마법사라니, 뭔가 묘한 예감이 스쳤다. 예이스터가 당장 부닥친 상황을 모면하고자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는 자던가? 그렇지 않다. 씻은 듯이 사라진 중독의 흔적과 예이스터의 주장이라…….
‘고대 제국에서는 마법사의 피로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영약을 만들었다고 했지.’
자신이 괜찮아진 것은 그 영약, 엘릭서를 마셨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억측일 수 있지만 알아볼 가치는 충분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지배자가 꿈꾸던 영생에 가까운 삶을 실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 딸이 영약이라니. 에스테반 황제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카예나만큼 쓸 만한 것이 없구나.”
황제가 시종장에게 말했다.
“중앙군을 모두 동원하여 반드시 카예나를 찾아내라.”
그러자 루든이 아뢰었다.
“중앙군 통솔권이 황자 전하께로 넘어가 이미 황녀 전하를 찾는 일에 총동원했습니다.”
“통솔권이 넘어가?”
황제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카예나가 하루 동안 말없이 사라지면 군사 통솔권이 레제프에게 이임되도록 해 놓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상당히 영리한 방법으로 레제프가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제어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영 거슬리게 되었다.
“쯧, 중앙군이 하는 일은 그대로 두되 황자의 권한은 박탈해라. 짐이 직접 진두지휘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폐하.”
에스테반 황제는 긴 숨을 내뱉으며 나른한 만족감에 젖어 들었다.
‘이로써 나의 정의를 실현했다. 당장 목을 쳐 죽여도 시원찮을 것들에게 관대하게 징벌을 내린 수준이지만.’
남은 것은 레제프의 손으로 레오 프란시스를 처리하는 것을 보는 일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몸 상태도 여느 때보다 나은 것만 같았다. 황제는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오직 황제에게만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 무렵 황녀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기름에 붙인 불처럼 수도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 카예나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황녀 전하께서 사라지신 장소가 황자 전하의 처소인데, 어찌 그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일각에서는 레제프가 카예나를 죽여 놓고 사라진 것으로 둘러댄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황녀 전하께서 말없이 사라진 채 하루가 흐르면 군사 통솔권이 황자 전하께 넘어가지 않습니까?”
이것은 황자파 사람들에게도 딜레마 같은 일이었다. 눈엣가시 같은 황녀가 사라진 것은 좋지만 그 때문에 황자가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았다. 카예나만 치워 버리면 레제프가 사실상 단일 황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레제프가 황제의 소생이 아니라 실은 선황후와 레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꼭 누군가가 상황을 지켜보며 일부러 순서대로 소문을 흘린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어쨌든 이 모든 난리는 황제와 하등 상관없는 일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문제가 터졌다.
“황제 폐하!”
늘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루든 시종장이 당혹스러워하며 황제의 침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루든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교계에 선황후를 견과류 알레르기로 죽인 진짜 범인이 폐하라는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뭐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제가 그간 레제프를 지속적으로 학대한 증거까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사교계는 이 끔찍한 사실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뜩이나 신성 재판으로 바빴던 대사원에서도 아연해지고 말았다.
아내를 죽이고 자식을 학대한 아비라니……. 수도의 여론이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레제프 황자는 악마 같은 황제에게 학대당한 가엾은 피해자가 되었다. 황제가 거센 노성을 토했다.
“대체 이게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더냐!”
그는 노호를 내지르다가 온몸이 찢기는 듯한 기침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깟 고통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실이 대체 왜,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가 중요했다.
‘라파엘로 공작인가?’
하지만 라파엘로가 레제프에게 유리한 여론이 조성되도록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가 가장 증오해야 할 사람이 바로 레제프인데!
그런데 루든 시종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새로운 문제가 또 터진 것인가?
“일각에서는 대공자가 주장하는 악마가 실은 황녀 전하가 아니라 황제 폐하가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뭣!”
시종장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황자 전하께서 황녀 전하께 위해를 끼쳤다는 듯이 소문난 것도 폐하께서 그리 둔갑시킨 것이라고-”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그딴 망발을 지껄인다는 말이냐!”
황제는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졌다. 일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혀 앞이 깜깜해졌다. 루든은 황제가 비틀거리자 얼른 그를 부축해 침대로 눕히며 소리쳤다.
“의원을 들라 하라!”
에스테반 황제는 격통에 시달리면서도 아득바득 말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감히 짐을 기만하는 자가 누구인지 당장 밝혀라!”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하를 손에 쥔 것 같았다.
그런데 하늘이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동정할 게 없어서 레제프를 동정한다는 것인가? 화가 나다 못해 기가 막혔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여론이 너무나 레제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절로 이가 빠드득 갈렸다. 황제는 냉혹하게 명했다.
“레제프를 끌고 와라.”
이 사건의 주범은 레제프가 확실했다.
곧 침실로 레제프가 들어왔다. 레제프는 평소와 달리 머리카락을 말끔히 넘기거나 모양도 내지 않고 축 늘어뜨린 채였다. 옷차림도 마찬가지로 전혀 신경 쓰지 않은 티가 역력했다. 그의 드리워진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텅 빈 눈동자가 대충 어딘가를 향하다가 이내 황제에게 닿았다. 황제는 레제프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 짐승만도 못한 것-!”
에스테반 황제는 손에 잡히는 것을 되는대로 레제프에게 집어 던졌다. 다만 기력이 받쳐 주지를 않으니 그 패악질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가 숨을 헐떡이다가 포효했다.
“지금껏 거둬 주고 먹여 주었더니 감히 은혜를 원수로 갚아? 감히 내게 천륜이라니!”
“…….”
레제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당장 두 무릎을 꿇으며 부황을 향해 거짓된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영혼이 빠져나가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황제에게는 그딴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눈앞의 것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천박한 짐승. 그게 바로 레제프였다. 황제는 단 한순간도 그를 아들로 여긴 적 없었다. 제 아래로 레제프를 입적한 것을 몇 번이고 후회했다.
그래도 레제프가 음험하기 짝이 없는 예이스터를 잘 견제해 주어 그것으로 꽤 쓸모 있는 도구라고 여겼다. 저것이 이렇게 살아 숨 쉬며 황족의 성을 받아 호사를 누리는 것은 모두 천하의 주인인 자신이 보살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감히 도구 따위가 주인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귀가 있으니 사교계에 떠도는 네 천한 태생에 대해 들었겠지? 그것이 헛소문인 줄 아느냐? 이래서 천한 핏줄을 거두는 게 아니었거늘!”
황제는 주름진 얼굴 위로 악귀 같은 표정을 띄웠다.
“너는 짐의 친자가 아니다! 진짜 황족도, 반쪽짜리도 되지 못한 너 따위는 짐이 선황후와 함께 한순간에 폐위할 수 있음을 모르느냐?”
레제프는 무감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이 역겨울 정도로 불손하게 느껴졌다.
“세상을 뒤집는 건 결국 힘이다. 짐의 손에 중앙군이 있거늘, 감히 네놈 따위가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중앙군을 일으키면 눈앞의 레제프는 물론이고 프란시스 가문도 한순간에 멸문할 수 있다.
“네놈과 네놈의 생부는 결코 편히 죽지 못할 것이야!”
그때 레제프가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시끄러워.”
“……뭐?”
황제는 자신이 잘못들은 줄 알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레제프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또박또박 말했다.
“입 좀 닥치라고.”
아무리 찾아도 카예나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을 위해 제국의 전역에 황녀의 초상화를 뿌렸는데 그녀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얼굴이 감춘다고 해서 감춰질 것이 아닌데도.
시간이 너무 무심하게 흘렀다. 고통스럽고 저주스러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수도를 뒤흔들고 있는 소란스러운 소문들은 관심도 없었다. 카예나만 찾으면 된다. 그는 누이를 찾아냈을 때 뭘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에 지배당했다.
레제프는 비로소 두려움이 무엇인지 절절히 깨달았다. 카예나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숨 막히는 가정이 뇌리를 스칠 때면 미칠 것 같은 분노와 폭력성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또 그녀가 흘린 눈물을 떠올리면 분노가 차갑게 식어 지독한 상실감이 그를 파도처럼 덮쳤다. 다 죽여 버리고 싶어. 없애 버리고 싶어. 황궁도, 제국도 다 불태워 재로 만들어 버리고 싶어. 그러면 카예나가 나타나지 않을까?
그러다가 다시금 분노의 불씨가 탁 튀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체 누구를 탓해야 하지? 레제프는 끝없는 나락으로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이 주제도 모르는-!”
한때 친부라고 믿었던 자가 불같이 화를 냈다. 아까부터 뭐라고 자꾸만 시끄럽게 지껄이는 통에 카예나를 생각하는 일을 방해받았다. 레제프가 맛이 간 눈으로 황제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이 내 탓이 아니었어.”
레제프는 항상 문제를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 왔다. 이번에도 그는 손쉽게 외부에서 문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선황후, 레오 프란시스, 그리고 에스테반 황제가 바로 카예나를 사라지게 한 원인이다.
“너 같은 새끼가 문제야.”
그가 황제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진득한 살기가 어린 목소리에 황제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레제프가 얼마나 포악한지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 앞에서는 감히 발톱을 드러내지 못할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그만큼 황자가 제아무리 개망나니라고 할지라도 감히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레제프가 광기로 얼룩진 얼굴로 활짝 웃었다.
“누님을 찾아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잖아?”
그가 황제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황제가 비명처럼 호위를 부르려 했다.
“호위…… 으읍-!”
에스테반은 침대에 몸이 처박혔다.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얼굴이 베개에 뒤덮였다. 숨이 막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악의와 살의에 찬 힘만 느껴졌다. 그가 살고자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카예나만 찾으면, 제 딸만 찾아내면 엘릭서의 힘으로 다시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되찾을 텐데! 그럼 이런 주제도 모르는 벌레 새끼는……!
“읍! 으읍!”
힘껏 버둥거리던 몸이 점차 힘을 잃어 가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
잠잠해졌다. 침실 안을 채우던 나직한 소란이 사라지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레제프는 베개를 치웠다. 볼썽사납게 죽은 황제를 보니 웃음이 났다.
똑똑.
“황제 폐하, 루든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심상치 않음을 느낀 루든 시종장이 침실 문을 두드렸다. 레제프가 문 앞으로 걸어가 활짝 열어 버렸다.
“-!”
그는 루든 시종장을 끌어당겨 문을 다시 닫은 후 옆에 놓인 황동 촛대로 머리를 후려쳤다. 두꺼운 장식용 촛대에 머리를 거세게 후려 맞은 시종장이 그대로 즉사했다. 순식간에 시체 두 구가 생겨났다.
레제프는 피에 젖은 황동 촛대를 바닥에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끌고 온 친위대가 충성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하고 폐하께서 타계하셨다고 알려라.”
“명을 받듭니다!”
일이 순조로웠다. 누이가 황궁에 있었던 때와 달리 그를 막으며 귀찮게 구는 게 없었다.
“레오 프란시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 와.”
이제 레오를 제거할 차례였다. 레오 프란시스의 행적은 찾고자 하니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행적을 알아낸 수행원이 레제프의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수도 외곽의 저택에 연금해 놓은 상태입니다. 어찌할까요?”
레제프는 손을 까딱하며 하인에게 로브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곳으로 간다.”
허리춤에는 총이 있었다. 그는 생부를 발견하자마자 머리에 총을 바로 쏴 버릴 생각이었다.
수행원은 레제프를 말려야 할지 고민했다.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직접 감시 중인 곳을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레오 프란시스를 처리하면 정체를 발각당할 수밖에 없다. 귀족 간의 살인은 무조건 사형에 처하는 중범죄다. 거기다 레오 프란시스는 부정을 저질렀다고는 해도 그의 친부이기도 하다. 보이는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 사회에서 이런 패륜을 용서할 리 없었다.
앞서 레제프가 죽인 에스테반 황제의 죽음은 괜찮다. 쉽게 조작할 수 있다. 그는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였으니까. 시종장은 실종 처리하여 황제의 짓이라고 현장을 조작하면 된다. 그러나 레오 프란시스의 경우는 다르다. 은밀해도 모자랄 일이거늘 키드레이 공작가가 지키고 선 곳이 아니던가?
그러나 수행원은 끝내 레제프를 말리지 못했다. 충언이랍시고 섣불리 입을 놀렸다가는 황제나 시종장 꼴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꼴인데.’
수행원들은 부디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레제프는 말에 올라타 수도 외곽으로 달렸다. 한적한 곳에 지어진 조그마한 저택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그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말에서 내렸다.
탁!
“수색해.”
뒤따라온 수행원들이 우르르 내려 저택 근처로 접근했다. 이상하게 공작가의 기사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설마 레오 프란시스가 그새 다른 곳으로 이동 중인 걸까? 수행원들은 의아해하며 능숙하게 저택 안으로 침입했다.
그들은 곧 어느 방 근처에 보초가 선 것을 발견했다. 가만히 숨죽이며 기다리자 보초들이 저들끼리 뭐라고 말하다가 자리를 비웠다. 수행원들은 얼른 레제프를 데리러 갔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레제프는 손쉽게 저택에 들어와 생부가 있을 방 앞에 섰다. 그가 마침내 문고리를 잡았다.
달칵.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썰렁한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 한 남자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금빛의 머리카락과 자신을 돌아보는 선명하게 푸른 눈동자. 약간 처진 눈꼬리가 인상적인 정석적인 미남이었다. 필시 젊은 시절은 더 대단했을 미모였다.
레제프는 굳이 소개받지 않아도 저 남자가 레오 프란시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무척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레제프 황자 전하?”
그것은 레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부의 공작령을 거의 벗어난 적 없었기에 황자나 황녀의 생김새도 몰랐다. 그런데 자신을 찾아와 진짜 아들이 있음을 알려 준 자들의 말대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닮아 있었다.
그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레제프를 바라보았다. 사교계에 황자의 출생이 사실 어떻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고 있음은 그도 얼핏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아, 이렇게 자신을 찾은 것은 역시 생부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저와 그녀를 빼닮으셨군요.”
그는 황자를 향해 감격에 젖은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저 아이가 바로 자신의 진짜 피붙이다. 저주스러운 검은 머리도 붉은 눈동자도 아니다. 자신처럼 금발에 아름다운 푸른색 눈동자를 지니지 않았는가! 감히 지아비를 떠받들며 납작하게 굴지 않는 도도한 노아 키드레이와는 달리 유순한 선황후도 많이 닮아 있었다. 너무나 감격스러운 재회였다. 레오는 제 아들을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이런 머저리가 내 생부라니.”
멈칫. 레오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지금 뭐라고 하셨-”
“나를 그딴 역겨운 눈으로 보지 마, 벌레 새끼야.”
철컥. 레제프는 허리춤에 찬 총을 빼내 안전장치를 풀었다. 레오는 그 모든 과정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경악했다. 친아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다니?
레제프는 현실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 총구를 레오에게 들이밀었다. 레오가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전하!”
이것은 조금도 고려해 보지 않은 그림이었다. 자신이 레제프를 곧바로 친아들로 여기며 마음을 연 것처럼 그도 똑같이 그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혈연은 그런 것이지 않은가?
그러나 레제프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은 어디에도 온기가 스며 있지 않았다. 꼭 물건을 바라보듯 무감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레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제프는 마땅히 해야 하는 임무처럼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꺄악-!”
난데없는 비명이 뒤에서 들렸다.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니 우아한 차림새의 귀부인과 남자 귀족 여럿이 서 있었다. 몇 사람은 얼굴이 눈에 익었다. 아아, 프란시스 가문의 후계자였던가? 그들이 경악으로 물든 표정을 지은 채 레제프와 그가 든 총, 맞은편의 레오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황자 전하!”
메일런 프란시스 경이 외쳤다. 그들은 키드레이 공작가의 연락을 받고 레오 프란시스를 데려가려 이곳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니…….
“귀족 살해는 중죄입니다. 모르시지 않을 텐데요!”
레제프는 그 말에도 여전히 총을 내리지 않았다.
“황자 전하!”
그때였다. 척! 척! 척! 훈련받은 자들의 딱 맞아떨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이곳으로 가까워졌다. 이내 프란시스 가문의 사람들 뒤로 완전무장한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 사이로 익숙한 사람도 보였다. 라파엘로 키드레이였다. 라파엘로가 건조하게 통보했다.
“총을 내리십시오.”
레제프는 최근 공작저에서 두문불출했던 라파엘로가 뜬금없이 이곳에, 그것도 이 시간에, 기사단을 끌고 나타난 것을 보고 깨달았다.
아, 이거 함정이었구나. 저 새끼가 파 놓은 덫이었어.
상황이 하나하나 피부로 스며들 듯 순식간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실의에 잠겨 제 집에 처박혀 있는 줄 알았더니 이런 중상모략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후로 자신에게 닥칠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그간 수도를 휩쓸었던 레제프에 대한 동정의 여론이 쏙 들어갈 것이다. 이쯤에서 한발 물러나 주면 협의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내가 왜?”
레제프는 레오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귀가 찢어질 듯한 총성이 섬뜩하게 이 공간을 울렸다. 총에 맞은 레오가 피를 흩뿌리며 그대로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꺄아악! 레오-!”
라파엘로는 레제프가 총을 쏘자마자 튀어 나갔다. 탕! 레제프가 뒤를 돌아 곧장 두 번째 발포를 시도했으나 라파엘로의 저지에 엉뚱한 곳을 쏘았다. 비명과 혼란이 뒤섞인 와중에 기사들이 밀려들어 와 레제프를 제압했다.
라파엘로는 제압당한 채로 바닥에 엎어진 레제프를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명령했다.
“끌고 가라.”
* * *
카예나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라파엘로는 그녀가 이틀, 사흘, 나흘이 넘어서도록 계속해서 깨어나지 않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황궁에서 돌아와 제 침실에서 잠든 카예나를 발견한 첫날은 안도감이 컸다. 이튿날은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불안을 홀로 삭였다. 사흘째. 카예나는 미동도 없었다.
그는 카예나가 그저 단순히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 현상이 마법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추측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깨어나기를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는 카예나의 안위를 보호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가신으로 조직을 결성했다. 이후, 긴 시간 동안 사라져도 주변의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실력 있는 의원을 알아보았다. 제레미가 보고했다.
“이스트 타운의 발데마르라는 자가 오래전에 선황후 폐하의 주치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신분을 숨긴 채 빈민으로 위장하여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카예나와 접촉했던 적이 있으며 그녀의 암흑가 세력과 교섭이 있었다고 했다. 라파엘로는 당장 그를 키드레이 공작가 아래로 포섭했다. 발데마르는 비밀리에 키드레이 별저에 도착했다.
“사흘이나 주무시고 계시다고요?”
그는 카예나를 진찰해 보았으나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나흘째. 라파엘로는 저택 내 담벼락에 둘러싸여 은밀히 감춰진 별채를 개방했다. 카예나를 계속해서 제 침실에 숨겨 두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별채에 소수의 사용인을 채우고 비밀 통로의 경계를 강화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예나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점차 절망감이 우울하게 몸을 짓이기듯 뒤덮었다.
“주인님.”
그때 제레미가 그를 찾아왔다.
“베라 렉턴 영애와 올리비아 그레이스 영애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방문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었다. 라파엘로는 잠든 카예나를 힐끗 보았다. 그녀가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그녀를 숨겨 주기로 했고 상황을 다 수습해 주겠다고 했었다. 황제의 복수를 망가뜨리고 레제프를 폐위하리라. 그는 메마른 표정을 한 채 별채를 나와 응접실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을 뵙습니다.”
세 사람은 간단한 인사만 나누었다. 베라는 곁에서 모시던 황녀가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것은 올리비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라파엘로가 결성한 조직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전하께서는 무탈하십니까?”
베라는 그것부터 물었다. 라파엘로는 짤막한 한숨을 머금었다. 대체 그 상태를 무탈하다고 해야 할지 심각하다고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건강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베라는 뭔가 미심쩍음을 느꼈으나 추궁하지는 못했다. 라파엘로가 피로감에 젖은 표정을 감추며 용건을 꺼냈다.
“에반스 후작가 쪽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에반스 가문의 혈족들이 모여 로드릭 후작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의견을 합치했습니다. 하인리히 대공자의 세작이 후작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직격타였어요.”
베라의 말에 라파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신성 재판으로 난리이니 예이스터와 얽힐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은 당연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깨어나기를 손 놓고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를 대신해 상황을 전부 수습하겠다고 한 말은 허튼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할 일은 명확했다. 황제의 비정한 행동들을 속속들이 밝혀내는 것.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간 에스테반 황제가 레제프 황자를 학대해 왔던 증거들이 많아서 밝히기 쉬웠다. 아내를 살해하고 자식을 학대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대사원의 교리에 완벽히 어긋나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는 카예나가 사라진 것도 황제가 선황후 폐하를 용서하지 못해 저지른 일로 둔갑했다. 예이스터가 그토록 주장하던 황녀가 마법사라는 소문을 이용해 실은 그 악마가 황제였다고 중상모략을 한 것도 그였다. 사람들은 진실보다도 자극적인 거짓을 더욱 믿었다. 황제가 그토록 간악한 사람이니 악마인 것도 이해가 간다며 다들 입 모아 말했다.
이렇게 황제의 부덕함을 만천하에 드러내 레제프를 동정하는 여론을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베라가 말을 이었다.
“사교계에서도 계획한 소문이 빨리 퍼지도록 조치했어요.”
“공작가에서도 불을 붙이고 있으니 곧 황제의 귀에도 들어갈 겁니다.”
황제가 길길이 날뛸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아마 군대라도 이끌어 자신을 기만하는 것들을 처단하려 들지 않을까? 황제는 자신을 기만하는 일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의 복수는 자신을 기만한 것들을 모두 엉망으로 망가뜨리는 것으로 완성되어야 했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판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카예나를 위해 라파엘로가 한 복수였다. 모든 정황이 황자에게 더없이 유리하니 황제는 레제프를 가장 먼저 의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자 성격에 황제를 죽여 버릴 가능성이 크지.’
만약 예상과 달리 죽이지 않는다면 라파엘로가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될 시 발생하는 맹점이 있었다.
‘자칫 레제프 황자가 여론을 등에 업고 황위를 계승하게 될 수도 있지.’
그렇게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만큼 레제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를 꽤 잘 알고 있었다. 레제프는 거슬리게 하는 레오 프란시스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때를 위해 라파엘로는 부친을 작은 저택에 연금해 두었다. 레제프를 유인하기 위한 덫이었다.
레제프가 부친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을 귀족들에게 직접 목격시키면 그간 형성되었던 동정의 여론이 엎어질 것이다. 라파엘로는 새롭게 후작이 될 줄리아 에반스를 포함하여 세력을 통합하고 레제프 황자의 비정함을 탄핵할 생각이었다.
올리비아가 말했다.
“레이디 카트린과 이델 영식을 황가의 일원으로 입적하는 절차는 최대한 빨리 할 수 있도록 손써 두었습니다.”
계획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이제 카예나만 깨어나면 된다. 카예나가 만든 무대는 완벽하게 기능했다. 그녀가 쥐여 준 권한을 쥔 등장인물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냈다.
그녀를 향한 은밀한 별명이 문득 떠올랐다. 황자의 마리오네트. 지금은 누가 그녀를 마리오네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모두가 그녀의 마리오네트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카예나가 깨어나지 않는 지옥 같은 시간이 계속해서 흘렀다.
라파엘로는 익숙하게 자신의 침실이 아닌 카예나가 누워 있는 별채로 향했다. 그가 카예나의 손을 쥐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간절한 바람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내일은 일어나 주십시오.’
내일이 아니어도 좋으니 일어나 주십시오.
또 하루의 지독한 밤이 흘러갔다.
* * *
카예나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며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침실의 차양을 걷자 너머로 보이는 햇살이 눈부셨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지? 잠깐 잠이 깼을 때 라파엘로가 무척 자상하게 다독여 준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여기는 라파엘로의 침실은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을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옮긴 모양이었다. 카예나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다. 침대에 상체를 불편하게 기댄 채 잠든 라파엘로가 보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녀는 잠든 라파엘로에게 손을 뻗어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이 사람을 두고 갈 생각을 잠깐이지만 했다는 것이 미안했다.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카예나의 손길을 느낀 라파엘로가 몸을 움찔하더니 선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휘둥그렇게 커진 눈동자가 상황을 파악하듯 카예나를 향했다.
“일어났……”
카예나가 아침 인사라도 하려던 찰나에 라파엘로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을 마주한 것 같은 포옹이었다. 마치 결박이라도 하듯 깊은 포옹에 카예나가 잠깐 당황하다가 이내 그의 등을 안으며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해요.”
라파엘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카예나를 안은 채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이러다 진짜 울겠네.’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라파엘로가 눈물을 툭툭 떨어뜨렸다. 카예나는 몹시 당황하여 몸을 일으켰다.
“라파엘로.”
그의 붉은 눈동자가 눈물에 잠겨 있었다. 인제 보니 뺨도 수척했다. 카예나가 그의 두 뺨을 쥐고 눈물을 닦아 주자 라파엘로가 그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이대로 깨어나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낮게 잠긴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망치로 때리는 듯한 호소력이 깃들어 있었다. 차마 미간도 찡그리지 못한 채로 눈물만 뚝뚝 떨구는데 그 모습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제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어요?”
그 물음에 라파엘로가 말했다.
“일주일 동안 잠들어 계셨습니다.”
카예나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일주일이나 잠들었다니.’
아주 잠깐 꾼 꿈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카예나는 완벽한 죄인이 된 기분으로 라파엘로를 끌어안았다.
“제가 너무 늦게 일어났네요.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마침내 긴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카예나는 그를 꼭 안은 채 입술을 떼었다.
“꿈에서 바옐을 만났어요.”
그러자 라파엘로가 흠칫했다.
“마법 계약을 해지하자고 하더라고요.”
“…….”
라파엘로가 천천히 몸을 떨어뜨리며 떨리는 눈으로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해약했어요.”
카예나는 장밋빛의 차를 마셨다. 그리고 차를 마시자마자 꿈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슬피 우는 아이에게 말하듯 다감하게 그를 달랬다.
“이제 시한부에서 벗어났네요. 다행이죠?”
라파엘로는 말없이 카예나를 품에 안았다. 카예나는 작게 웃으며 폭 안겼다. 말하지 않아도 이 사람이 지금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지 온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도망치면 당신이 저를 숨겨 준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왔어요.”
그랬다. 라파엘로가 황궁에서 카예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었다.
“나 좀 숨겨 줘요, 라파엘로.”
라파엘로가 안도 섞인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얼마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