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29
악녀는 마리오네트 26장. 함께(29/33)
26장. 함께
제다이어는 습관적으로 흉터가 있는 왼뺨을 긁다가 멈칫했다. 볼에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꾸물거리지 마, 둔탱아.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고양이가 그를 쏘아붙였다.
제다이어는 무심결에 어깨를 흠칫했다. 사람 말을 하는 고양이라니,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
-곧 하임벨 영주성을 털어야 하는데 정신을 빼놓고 있으면 어떡해?
“……그렇죠. 죄송합니다.”
제다이어는 엘다임 제국 서부 공작령에서 국경선을 넘어 하임벨에 도착한 상태였다. 쉬지 않고 이동해도 2주는 걸릴 거리였으나 그는 출발한 지 고작 하루 만에 하임벨로 진입할 수 있었다. 고양이…… 아니, 바옐 덕분이었다.
제다이어가 막 떠나려고 했을 때, 바옐이 그의 앞에 나타났었다. 그는 “하임벨로 가면 되냐?”라고 묻더니 질풍처럼 가속 이동을 시작해 단 하루 만에 국경선 앞에 도착했다. 너무 빠른 이동에 제다이어가 몸살을 앓고 누우니 꾸물거리지 말라며 뺨을 찰싹찰싹 때리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엘릭서를 먹여 주었는데 그 덕에 왼뺨의 오래된 흉터마저 사라졌다.
-후딱후딱 해치우자, 후딱후딱.
제다이어는 바옐의 말투가 뒷골목 깡패 같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자신이 담금질당할 수도 있으니까. 대신 다른 걸 물어보았다.
“저기, 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그 귀한 엘릭서까지 주시고…….”
바옐은 제다이어의 물음에 퉁명스레 대답했다.
-이게 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래. 너는 꼭 사람 가려서 사귀어. 아, 이미 늦었나?
그 대답에 제다이어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바옐도 카예나에게 매료되어 그녀를 도우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제다이어는 하임벨 영주 성 근처의 은밀한 장소에 매복한 채 다시금 계획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자 바옐이 말했다.
-흥, 그런 조잡한 계획 따위 필요 없어.
고양이의 두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그러자 영주 성 근처로 안개가 스멀스멀 끼기 시작하더니 불길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영주쯤 되는 녀석들은 꼭 인간이 아닌,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을 해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더란 말이지. 구린 짓을 많이 해서 그런가?
그러니 그 두려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잔뜩 겁을 줄 생각이었다. 바옐은 낮은 목소리로 영주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린아이들을 야만족에게 매매해 왔다고 했지? 그 원혼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해 주지.
제다이어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들은 하임벨 영주 성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 * *
카예나가 긴 잠에서 깨어난 다음 날 아침. 황제가 서거하고 황자는 생부를 살해했다. 대사원은 이때다 싶어 목소리를 높이고 귀족들은 급격히 변화하는 정세에 혼란스러워할 때, 공작저의 주방도 혼란에 잠겼다. 바스턴이 주방으로 가서 말했다.
“주인님께서 보양식과 달콤한 간식을 준비하라십니다.”
건강하기 짝이 없는 라파엘로가 보양식을 찾는 것은 둘째 치고, 생전 단것은 입에도 대지 않더니 갑자기 달콤한 간식이라니?
“달콤한 간식이라니?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니신지요?”
그들이 믿을 수 없다는 의구심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자 바스턴이 단호하게 말했다.
“달콤한 간식을, 종류별로! 준비하라십니다.”
더 믿을 수 없는 말에 그들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종류별로……?”
“그렇다니까요.”
혼란은 주방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바스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좌관실로 들어가 불쑥 물었다.
“주인님께서 갑자기 꽃을 두고 깊은 고심에 잠기셨는데, 여기 꽃 좀 잘 아시는 분 계십니까?”
“……우리가 정원사도 아닌데 어떻게 압니까?”
꽃이라는 것은 공작저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일 뿐, 라파엘로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취미와는 관련 없었다. 그러니 손님을 맞이할 때가 아니면 굳이 실내에 꽃을 넉넉하게 장식해 놓지 않았다. 그런데 라파엘로가 갑자기 관상용 꽃을 두고 고민하다니?
라파엘로는 제 집무실 화병의 꽃이 매일 바뀌고 있는 것도 모를 사람이었다. 바스턴은 신입 보좌관으로서 누구보다도 주인을 잘 모시고 싶었다.
‘아니, 황녀 전하께서 여기에 머물고 계시다는 사실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신신당부해 놓으시고는…….’
지금 라파엘로가 누구보다도 티 내고 있었으니,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지경이었다.
“봄이로구나, 봄이야.”
바스턴의 중얼거림에 동료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여름이야, 이 사람아.”
“거참, 시를 모르는 기사는 무식한 근육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 모르나?”
“뭔 소리를 하는 건지…….”
하여튼 봄이다. 엉망으로 할퀴며 지나간 줄 알았던 그 봄은 가짜였고 이곳의 봄은 이제 시작하고 있었다.
똑똑. 바스턴은 라파엘로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바스턴입니다. 말씀하신 것들을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달칵.
문이 열리고 라파엘로가 나왔다. 그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은 황제의 서거일이라 곧 밖으로 나가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라파엘로의 눈이 바스턴이 끌고 온 카트를 한차례 훑었다. 덮개를 씌운 보양식과 간식, 테이블 장식용으로 화사하게 꾸민 생화 장식은 그의 안목에도 썩 나쁘지 않았다.
“수고했다.”
그의 담담한 칭찬에 바스턴은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았다.
‘아니, 왜 갑자기 안 하던 칭찬이시래?’
고작 식사와 간식, 꽃만 준비했다. 그간 바스턴이 해 온 고강도의 업무에서는 이런 칭찬이 드물었다. 사랑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고는 하지만, 헛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들은 은밀히 숨겨진 작은 별채로 향했다. 이 별채는 원래부터가 불순한 용도로 지은 곳이라 외부 시야에서 차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근처로 누군가가 침입할 수도 없었다. 뒤편으로 물길이 꽤 넓게 흐르는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깊숙한 곳에 라파엘로가 들어섰다.
별채 바깥의 테라스에 카예나가 나와 주변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라파엘로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내 인기척을 느낀 카예나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카예나도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림 같은 날의 그림 같은 두 사람이었다. 청명한 녹음이 우거진 공간을 다시금 힐끗 본 카예나가 깊고 고요한 음색으로 말했다.
“정부를 숨겨 놓기 좋은 은밀하고 로맨틱한 장소네요.”
“……쿨럭!”
바스턴은 설마 이 흐뭇한 상황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 몰랐기에 헛바람을 집어삼키다가 기침을 토했다. 라파엘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긍정했다.
“그런 용도로 자주 써 왔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그런 것 같았어요.”
봄은 착각이었나……? 바스턴은 이 연인의 대화에서 어떤 사랑의 달콤함을 느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카예나는 아침이라 서늘한 기온에 얇은 가운을 여미며 테라스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곧 둘이 먹기에는 과한 양의 조찬과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운 색색의 간식들이 테이블에 올랐다. 바스턴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예를 갖췄다.
“그럼 저는 물러나 보겠습니다.”
별채에는 곧 모든 사용인이 주인과 특별한 손님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라파엘로가 스튜를 그릇에 덜어 카예나의 앞에 놓아 주었다. 카예나는 푹 끓여 낸 스튜를 한술 떴다.
“맛은 괜찮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카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를 차리려고 한 게 아니라 정말로 맛있었다. 따뜻한 음식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상당히 오랜만에 평온한 아침을 맞아서인지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차분했다. 평범한 아침이란 이런 거구나. 그녀는 이미 새벽같이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서 일찍부터 테라스에 나와 계속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꽤 불편하고 불안한 일이었다. 그녀가 그동안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빠르게 움직이고 느지막하게 잠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여명을 바라보는 일 따위는 평생 하지 못할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그녀는 그런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해는 언제나 떠오르고 지지만 일은 때를 놓치면 실패한다. 카예나는 실패를 용납받을 수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서 실패할 수 없었다. 실패한 순간들의 말로는 전부 죽음뿐이기도 했고.
쪼르륵. 라파엘로가 은으로 된 잔에 차갑게 식힌 음료를 따랐다. 카예나는 스튜를 한술 더 뜨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까부터 라파엘로가 음식은 먹지 않고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저보다는 당신이 먹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자 라파엘로가 바람 빠진 것 같은 웃음을 지었다.
“저는 이미 다 먹은 것 같은 기분입니다.”
카예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사람, 지금 행복하구나. 상대의 행복감을 이렇게나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꽤 놀랍기까지 했다. 그녀의 마음에도 곧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달콤 쌉싸래한 무언가를 실은, 묘한 바람이었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옷이 상복임을 알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긴 잠에서 깨어난 후에 발데마르는 건강에 문제는 없지만, 하루는 안정을 취하라고 권고했다. 안정을 위해 라파엘로와 길게 같이 있지는 못했으나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물을 시간은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카예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미 상복 하나만으로도 부황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벌어졌을 숱한 인과 관계를 대략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라파엘로가 그녀를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카예나는 스튜를 뒤적이다가 말했다.
“이 남자는 언제쯤 내게 키스하려나…… 그런 생각?”
“……예?”
그녀의 놀림에 라파엘로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당황했다. 드러난 귀 끝이 붉었다.
“벗은 몸도 다 본 사이에 고작 그거에 이렇게 당황하는 거예요?”
라파엘로는 민망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간 근처를 꾹꾹 누르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게 아니라…… 혹시 무리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살짝 작아진 목소리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카예나가 피식 웃으며 놀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제가 안 될까 봐 그러는 거예요? 의원이 나더러 기력이 부족하다고 말한 것 때문에?”
라파엘로의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억지로 그녀와 나누던 시간과 감각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는데도 부드러운 체향을 인식하는 순간 자제가 어려웠다.
가뜩이나 이제 막 시작한 연인이기도 했고, 그들은 달콤한 시간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으며, 욕구를 자제하기에 라파엘로는 너무나 젊었다. 일단 시작하면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녀의 체력이 딱히 좋지 않은 것을 고려해서 최대한 무리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기는 했다. 그것이 전혀 지치지 않는 라파엘로의 기준이라 애석하게도 객관적이라고 보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욕구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머리로는 알지만…….’
아침부터 낯 뜨거운 짓이 하고 싶은 걸 보면 자신은 한참 모자란 사람인 모양이었다. 라파엘로는 미약한 한숨을 머금으며 자신을 놀리는 카예나에게 변명처럼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니…… 맞기는 하지만…….”
그는 어쩐지 바보가 된 기분으로 말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다가 결국 순순히 인정했다.
“네. 전하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가진 색깔만큼이나 뜨거운 열망을 품은 붉은 눈동자가 카예나의 서늘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곧 그 열기가 옮겨붙기라도 할 것처럼 집요하고 진득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이내 열기는 착각이었던 것처럼 금방 사라졌다. 라파엘로는 이제 이성이 돌아온 듯 지저분하게 널려 있던 기분과 갈망을 정리했다. 카예나는 내심 그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그녀는 스푼을 내려놓고 라파엘로의 곁에 의자를 끌고 가 바짝 붙어 앉았다. 카예나가 몸을 붙이자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카예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연인들이 흔히 시간을 같이 보낼 때 그러듯이.
라파엘로도 카예나와 이런 평범한 시간을 보냈던 때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이 조금 착잡했다. 그 모진 풍파를 정면으로 맞으며 한가로운 시간 한 번 보낸 적 없었을 카예나가 안쓰러웠다. 자신이 뭐라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바깥은 여전히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거칠고 위협적인 칼바람은 멈출 생각을 않고 덩치를 더욱 거세게 불려 갔다. 미처 폭풍우를 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반드시 그 비바람에 휩쓸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결 좋은 금빛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들어 와 차르르 흘러내렸다.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예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는 굳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았다. 마법 계약을 해지하고 꿈에서 깨어난 일을 두고 한 말임을 모를 수 없었다.
“당신께 마법의 힘을 포기하는 일이 쉽지 않은 선택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라파엘로가 느끼기에, 카예나는 삶에 특별한 애착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런 사람이 계획했던 일을 이룰 대로 다 이루었다. 아마 어떤 회의감이나 무기력함이 그녀를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카예나가 삶을 선택한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만약 그대로 해약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깨지 않을 잠에 빠졌을 테지.
“예전에 제가 말씀드렸었지요. 저는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득을 위해 누군가를 모함하는 일에 특별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딱히 그런 일에 주저하지도 않는다. 가진 무력도 충분하다. 폭력을 보일 필요가 있다면 그것도 서슴없이 휘두를 수 있었다. 납치 사건 때처럼, 혹은 레제프에게 주먹을 날렸던 것이나 황제를 위협했던 것처럼.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욕심이 많습니다. 당신을 독점하고 싶다는 그 저열한 욕망도 여전히 떨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당신이 슬퍼할 만한 일만큼은 죽어도 하지 않을 겁니다.”
카예나는 가만히 그가 어깨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제 손을 살며시 맞잡는 것을 느끼며 숨죽였다.
“저는 어떤 형태로든 당신 곁에 남고 싶습니다.”
그 말에 카예나의 고개가 천천히 어깨에서 떨어졌다. 고요하지만 진심이 짙게 밴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와 평생을 함께해 주세요.”
그것이 결혼의 형태이든, 은밀하게 감춰진 형태이든 상관없었다. 라파엘로는 이게 자신이 욕심부릴 수 있는 최대치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짐이 되고 싶지도 않다. 든든한 아군이자 친우, 연인으로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자신은 카예나를 절대 놓을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결혼해 달라고 생떼를 쓰고 있는 거네요?”
카예나의 일축에 라파엘로가 실소했다. 그래, 거추장스러운 말 따위는 다 집어치우고 핵심만 말하자면 그러했다.
“네. 결혼해 주신다면 제 바람이 가장 완벽하게 이뤄지기는 합니다.”
“정부로 두면 내 죄책감을 콕콕 찌를 테고?”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정부로 만들어 버린 다른 남자가 조금 위험에 빠질지는 모르겠지만.
“귀족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고 계속 홀로 지내거나 연인만 두는 것은 큰 흠이기도 하죠.”
“사회적인 시선이 거슬리면 어디든지 전하께서 원하는 곳으로 도망쳐 버리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카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녀가 왼손을 쭉 펼쳤다.
“날 만나겠다고 건물을 기부하던 사람이 청혼 때에는 왜 아무것도 없어요?”
“부담스러워하실까 봐요.”
“방금까지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게 저를 협박하던 사람이 그런 것도 신경 써요?”
카예나의 놀림에 라파엘로가 고개를 살짝 내젓더니 품에서 상자를 하나 꺼냈다. 척 보아도 반지 케이스였다. 카예나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예 작정하고 온 거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래는 이렇게 충동적으로 당신께 말씀드릴 생각이 아니었거든요.”
언젠가 청혼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이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카예나가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은 채 보낸 일주일이 그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케이스를 열자 백금에 사각형의 손톱만 한 블루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심플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양은 심플하지만 가격은 전혀 그렇지 않으리라. 카예나는 이만한 크기의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가 어디서 그냥 뚝딱 튀어나왔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이 반지는 뭐예요?”
“언제고 드려야 할 때가 있을 것 같아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카예나의 성년식 선물 중 하나로 준비해 둔 청혼용 반지였다. 어쨌거나 그녀의 성년식이 결혼을 위한 것임은 확실했고 혹시라도 이상한 남자와 결혼할까 내심 마음을 졸였다.
‘이를테면 바옐이라든가.’
카예나는 어이가 없어서 작게 웃다가 화려하게 세공한 케이스 안에 담긴 반지를 보았다. 라파엘로가 반지를 빼내며 카예나의 왼손 약지에 천천히 끼워 주었다.
“만약 전하께서 황위를 물려받으시겠다고 하시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카예나가 언제든지 왕관을 쓸 수 있도록 모든 조치는 해 두었다. 남은 것은 그녀의 선택밖에 없었다. 그가 청혼은 했으나 꼭 명확한 형태를 갖출 필요가 없다고 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꼭 사원의 공증을 받은 결혼일 필요는 없습니다.”
카예나는 가만히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약간 헐렁한 반지가 꼭 제게 어떻게 할 건지 묻는 것 같았다. 이대로 숨어서 한가로운 일상을 지내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되면 라파엘로를 비롯해 다른 이들이 조금 고생하겠지만. 자, 이제 어떻게 할래?
카예나는 피식 웃었다. 이건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고 결정만 하면 될 문제였다.
“당신에게 남편을 만들어 달라고 했던 게 생각났어요.”
그랬었다. 라파엘로도 당시가 떠올랐다. 그 질문을 들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가? 그게 벌써 아주 먼 옛일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내 남편이 되어 줘요, 라파엘로.”
대답을 들은 라파엘로가 안도의 미소를 짓더니 카예나를 끌어안고 이마에 키스했다. 고마움과 기쁨, 충만한 행복이 느껴졌다.
“다만 아직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잖아요.”
그 말에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마음에 결심이 섰다는 것을 알았다.
“이델이 성년식을 치를 때까지만 기다려 줘요.”
그때가 되면 왕관을 벗고 기꺼이 카예나 키드레이 공작 부인이 되리라. 회귀 전에 그토록 꿈꿨던 라파엘로와의 결혼이었는데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카예나는 참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황제가 되는 게 가장 뜻밖이지.’
카예나는 라파엘로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가죠?”
품 안에서 몸을 기댄 채 고개를 들어 올린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라파엘로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들이 있다. 황제가 서거했으니 대귀족으로서 황궁에 일찍 들러 조의를 표하고 대사원으로 가야 한다. 게다가 내일은 신성 재판도 열린다. 라파엘로도 배심원으로 신성 재판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아쉬움을 담아 그녀의 허리를 안고 짧게 키스했다.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스스로 내뱉고서도 참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돌아와서도 카예나가 자신의 집에 있으리라는 생각에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그녀의 온화한 향취가 듬뿍 밴 침대에 나란히 누워 품에 안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큰 축복이다. 자제할 필요가 없는 밤도 얼른 찾아오면 더 좋겠지만.
“기다리고 있을게요.”
카예나의 대답에 참을 수 없어진 라파엘로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얽어 넣고 숨을 깊게 섞기 시작했다. 말캉한 살을 살짝 깨물고 집요하게 쫓다가 점점 짙어진 손길로 얇은 원피스 위를 쓸어 만졌다.
“으음.”
‘아, 이런.’
그는 카예나가 목 안에서 잠긴 듯한 소리를 내는 것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정신은 들었는데…… 움직임을 멈추는 게 쉽지 않았다. 이대로 카예나를 안아 들고 침대로 직행하고 싶다는 충동이 그를 뒤흔들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스킨십의 수위가 가파르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아, 라피…….”
그녀에게서 오랜만에 애칭을 듣게 된 라파엘로가 멈칫했다.
‘하…….’
이쯤 되니 어쩐지 시험에 든 기분이었다. 그는 억지로 정신을 붙잡았다. 여기서 한발만 더 나가면 절대 자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그는 간신히 그녀에게서 몸을 떨어뜨리며 사과했다.
“죄송할 것까지야.”
카예나는 살짝 숨을 고르다가 약간 상기한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그게 매혹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아마 제 마음의 문제일 것이다. 라파엘로는 괜히 차가운 음료를 들이켰다. 음료가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정말로 나가 봐야 할 시간이라는 게 그제야 실감 났다.
카예나가 그의 양 볼을 붙들고 입술에 여러 번 짧은 키스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슬슬 라파엘로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 우리에게 시간이 많잖아요.”
수명을 되찾았으니 전처럼 시간이 모자라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질리도록 뒹굴 때가 언젠가는 찾아오리라.
‘그 시간조차 모자랄 것 같기는 하지만.’
라파엘로는 굳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손깍지를 끼고 별채의 입구로 향했다. 카예나가 그를 떠나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정한 입맞춤을 한 뒤 손을 흔들었다.
“다녀와요.”
라파엘로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 * *
라파엘로는 황궁에 그 흔한 국화 한 송이조차 준비해 가지 않았다. 황제는 가장 비참한 말로를 맞아야 한다. 그의 폭력이 아니었다면 세상이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누군가에게 그 답을 묻고 싶었다.
라파엘로는 황궁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몇몇 귀족들이 상복 차림으로 도착해 있었다. 그들 사이로 어머니가 보였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꼿꼿하게 세운 허리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차림에서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금방 알아차렸다. 어머니도 부친이 레제프가 쏜 총에 맞고 즉사했다는 사실을 들었으리라.
“왔구나.”
그녀는 한결같은 음성으로 아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라파엘로는 노아 대부인이 부친의 죽음에 조금도 유감을 느끼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죽은 황제의 시신은 침실에 정리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사원에서 장례를 치르겠다고 합니까?”
황제가 마법사이지 않으냐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사원에서도 섣불리 일을 정할 수 없을 것이다. 노아 대부인이 대답했다.
“장례 문제는 내일 신성 재판까지 보류하자더구나.”
“……그렇군요.”
그렇다는 것은, 신성 재판에서 명확한 판결을 내리겠다는 뜻이다. 라파엘로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미엘른 대사제는 부패한 종교인이다. 그는 이미 황자파와 대공자파를 박쥐처럼 오가며 여기저기서 돈을 받아 챙겼다.
‘그런 자가 돈줄이 다 끊겼는데 가만히 있을 리 없지.’
마침 황위도 후계자 자리도 다 공석이 된 상태다. 자신이 주무를 수 있는 황제를 세워 제국을 조종하려 들 게 뻔했다. 그렇다면 이델을 노릴까?
‘아니. 틀어쥘 약점이 있는 레제프에게 손을 내밀겠지.’
레제프는 지금 별채에 갇혀 있다. 이목을 끌지 않고 그곳을 은밀하게 방문해서 모종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내일 신성 재판에서 레제프의 발언으로 마법사가 누구인지 가려지게 되리라.
‘카예나가 그 악마라고 인정하면 판을 뒤집을 수 있겠지.’
하지만 순순히 당해 주기에는 라파엘로도 사원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황궁을 벗어나 데니안 사제가 있는 사원으로 향했다.
“사전에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데니안 사제는 여전히 사람이 없는 고요한 사원 안에서 홀로 기도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신을 믿을까?’
갑자기 그런 의문이 불쑥 들었다가 사라졌다.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대귀족이신 공작님이 제게 두 번이나 도움을 구하실 줄은 몰랐군요.”
데니안 사제가 그에게 자리를 권유했다. 라파엘로는 자리에 앉지 않고 생각한 바를 말했다.
“대사제가 되십시오.”
“…….”
둥글게 휘어 있던 데니안 사제의 눈에서 점차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사제라……. 뜻밖의 요청을 하시는군요.”
“미엘른을 끌어내릴 생각입니다. 저는 당신이 대사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미엘른 대사제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으음.”
데니안 사제의 말문이 막혔다.
“특별히 대단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어서라거나 가진 능력이 상당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당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라파엘로의 말에 데니안 사제가 헛웃음을 지었다.
“신랄한 말씀이시군요.”
그 말이 불쾌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 귀족적이지 않은 적나라한 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제가 믿을 수 있는 이로 안전망을 구축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를 잘 알지 못하시는데 믿을 수는 있다는 말씀입니까?”
“바옐을 믿으니까요.”
데니안 사제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벌써 그런 신뢰를 쌓은 관계인 건가? 조금 의아하기는 했으나 생각해 보면 바옐의 행동도 뜻밖이기는 했다. 그는 인간사에 그다지 얽히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인간 친구들을 사귀게 된 모양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거물들을.
데니안 사제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벽에 걸린 교리가 쓰인 판을 내리자 네모로 홈이 파인 벽이 드러났다. 벽을 누르자 바로 옆에 있던 다른 판에서 탁! 하고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 판을 열자 안에 금고가 보였다. 곧 금고가 열리고 데니안 사제가 서류와 책 같은 것을 빼냈다. 이내 그 자료들을 모두 라파엘로에게 건넸다.
“제가 모아 둔 미엘른 대사제의 비리입니다.”
라파엘로가 자료를 확인해 보았다. 하나같이 결정적인 비리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데니안 사제가 다시금 부드럽게 웃었다.
“이 또한 신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라파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연락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