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3
악녀는 마리오네트 3장. 악녀의 역할에 관하여(3/33)
3장. 악녀의 역할에 관하여
카예나는 레제프에게 말한 대로 아프다며 황녀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자처하여 새장 안의 새가 된 동안 사교계는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았다.
“키드레이 경이 초상화를 받았다면서요?”
결혼용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많지 않다. 미화하는 솜씨가 빼어날 것, 그것이 전부였다.
너도나도 가장 솜씨 좋은 화가에게 초상화를 맡기다 보니 소수의 화가들이 이 일을 독점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누구의 집안에 누구의 혼담이 들어갔는지도 금방 소문이 났다. 현재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인 라파엘로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랬다.
“황녀 전하께서 이런 상황을 가만히 놔둔다고?”
최근 황실에서 흘러나온 정보와 지금의 상황이 맞물리면서 묘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황녀가 라파엘로 경에게서 마음이 떴다!’
이대로라면 그 판화의 아가씨 중 진짜 라파엘로의 짝이 탄생할 수 있었다. 차기 공작부인은 누가 될 것인가? 귀족들은 사교계의 새로운 이슈에 온 관심을 쏟았다.
* * *
“좋은 신랑감을 구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그레이스 영애?”
본격적으로 사교 시즌에 접어들기 전, 수도의 주요 가문들은 개인적인 모임을 자주 갖는 편이다.
올리비아는 여태껏 그런 곳과 인연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판화가 키드레이 공작부인에게 넘어갔다는 소문이 나자, 수많은 초대장이 도착했다. 지금도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한 모임에 참석을 한 참이었다.
“마음 맞는 상대를 찾는 일에는 시간이 걸리니까요.”
올리비아가 어물쩍 대답했다. 그녀는 로랑스 거리의 마르레뜨 문학 살롱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레제프 전하는 대체 어떤 보석을 찾아내실까요?”
“제논 경도 아직 미혼이시잖아요. 에반스 가문도 훌륭하시죠.”
하지만 그 모든 게 라파엘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지금 사교계의 이슈는 아주 재미있는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레이스 양에게 좋은 인연이 생길 기회가 찾아왔다고 들었어요. 그렇죠?”
그들은 올리비아가 이 기회를 당연히 기뻐하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진짜로 올리비아와 라파엘로가 맺어지게 된다면 황녀도 더는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이보다 더 완벽한 복수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올리비아의 가문은 가난했다. 가문에 줄줄이 딸린 식구들이 많아 장녀인 올리비아의 마음고생이 심했을 터였다. 그녀가 결혼을 잘해야 아래의 동생들 인생도 피는 것일테니.
“그런가요?”
그러나 올리비아는 미소만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자리에 모인 영애들은 올리비아가 시큰둥해 보이니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내가 황녀궁 시녀로 들어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단 소문은 아직 퍼지지 않았어.’
가문에서 그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탓이다.
‘황녀가 나를 곁에 두려고 할 리가 없을 텐데.’
카예나가 올리비아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당사자인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게 공교로웠다. 황녀궁으로부터 자신을 시녀로 들이고 싶다는 요청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청혼서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 들어 왔었다.
‘우연이 아니겠지.’
올리비아로서는 카예나가 혼담을 예측하고 보낸 요청이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그레이스 자작가는 키드레이 공작가의 후원을 받기에 요청에 응할 수 없다. 제위 싸움에 물러나 있는 공작가의 뜻에 따라 그레이스 자작가도 정치색을 띠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반쯤은 공작가의 가신 가문이나 다름없었다. 올리비아가 레제프 황자의 요청을 받아 황녀궁 시녀가 되면 누군가에게는 키드레이 공작가의 뜻처럼 비칠 수 있다. 그레이스 자작가를 통해 은밀히 발을 걸쳐두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만약 레제프 황자가 강제하면 어쩔 수 없이 따라야겠지만 아직은 요청 상태에서 그쳤다.
‘무엇을 위한 요청일까?’
카예나 황녀는 올리비아를 꼴도 보기 싫어한다.
‘벼락출세나 다름없는 황녀궁 시녀자리를 줄 리가 없는데.’
황녀를 모시는 시녀는 품계가 매우 높은 상급 시녀다. 카예나가 올리비아를 감시하고자 불러들이는 자리라기엔 상당히 고위관직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올리비아는 가문의 마차가 자신을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올리비아 그레이스 양이십니까?”
하녀가 마차를 부르러 간 사이 낯선 여자가 그녀를 찾아왔다.
“누구시죠?”
여자는 모자에 망사를 둘러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경계하자, 여자는 핸드백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짧은 사이 올리비아는 핸드백 안감을 눈여겨보았다. 얼핏 가문의 문양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왕관? 왕관을 쓴 무언가가 수놓아져 있었어. 그런 문양을 쓰는 가문은 몇 없는데.’
편지봉투에도 붉은 촛농 외에는 아무런 인장이 없었다. 정체를 숨긴 편지였다.
“제 주인께서 전달을 부탁하셨습니다.”
“…제가 누가 보내셨는지도 모를 이걸 읽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주인님께서 그레이스 양이 그렇게 반문하면 전하라고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망사를 쓴 여자가 입을 열었다.
“영민하고 호기심 많은 그대라면 최근의 상황에 대해 의문이 들었겠지. 이걸 본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
“…….”
올리비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게 하대로 말을 전했다.’
그 말은 상대가 자신보다 높은 작위를 가졌단 말이었다.
여자가 말하는 주인이라는 사람이 누굴까? 마치 자신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정체를 숨긴 편지. 왕관을 쓴 핸드백 안감 문양. 그곳에 많은 힌트가 있었다.
‘카예나 황녀다.’
올리비아는 편지를 공손하게 받았다.
“주인께서 당신이 충분히 자신을 유추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생각대로인 것 같군요.”
곧 마차가 도착했다. 삯마차였다.
“답장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마차의 문을 닫았다.
올리비아의 마차는 여자가 탄 마차 때문에 조금 더 늦게 도착했다. 그녀는 여자가 자신의 발을 묶어두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임을 깨달았다.
‘황녀가 내게 은밀히 편지를 전달한 이유가 뭘까.’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웠다.
“아가씨?”
하녀가 마차 문을 열고 올리비아를 불렀다. 올리비아는 편지를 숨기며 마차에 올라탔다. 하녀는 마부의 옆에 탔으므로 마차 안에는 그녀밖에 없었다.
올리비아는 곧바로 편지를 뜯었다.
⌜다음 요청까지 기다리는 게 집안의 입장에서는 더 나을 거야. 존재감을 드러내지 말고 최대한 조용히 기다려줬으면 해. 곧 그대와 만날 날을 기대하지.⌟
“다음 요청을 기다려라……?”
그리고 곧 만날 날을 기대한다, 라.
‘황자의 요청에 응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뜻 같은데.’
그런데 다음 요청이 있다고?
게다가 하는 말을 봐서는 그들의 만남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투였다.
‘황명을 내리시려는 걸까.’
그건 더 말이 되지 않았다. 황제는 이런 일에 무관심하다. 특히 황녀와 사이가 나쁘단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올리비아는 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인 거지……?”
그녀는 자신이 어떤 폭풍에 휘말리게 되었단 사실을 직감했다.
* * *
베라는 시중 하녀의 빗질을 받으며 편안하게 독서 중인 카예나에게 아뢰었다.
“전하. 오늘도 라파엘로 경의 알현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카예나는 미지근하게 반응했다.
“…몸이 좋지 않으니 다시 약속을 잡도록 해라.”
“그리 전하겠습니다.”
혼담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로 벌써 다섯 번째 거절이었다. 그동안 사교계에는 라파엘로의 혼담 소문이 퍼졌고 황성엔 수많은 방문객이 들락거렸다.
“레제프는 지금 뭘 하고 있니?”
“도미닌 백작을 응대하고 계십니다.”
“사파이어 광산을 가졌다는? 부인과 사별한 지 꽤 되었다지?”
“그렇습니다.”
부마 자리를 원하는 귀족들이 쉴 새 없이 황성을 찾아오는 바람에 레제프가 바빠졌다.
황제는 미령하고 카예나도 아직은 병환 중이었기 때문에 방문객을 나눠 받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카예나가 레제프에게 만들어 준 기회였다.
그동안 레제프는 엉덩이가 무거운 지주 계층의 대귀족들과 인연을 쌓았다. 권력자들끼리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치적 이권이 오가기 마련이다. 카예나의 결혼이 레제프에게 아주 좋은 계기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최근 하인리히 대공자 때문에 단단히 열이 받았던 레제프는 카예나가 가져온 흐름을 크게 기뻐했다.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사람은 누이밖에 없다며 공공연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는 카예나를 치하하고자 황녀궁 예산까지 늘려 주었다. 카예나는 그 예산으로 시녀들의 사치품을 챙겨 주었다. 그들의 태도가 더욱 방만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레제프에게 간식을 좀 만들어 가야겠어.”
베라는 그 말을 당연히 간식을 준비해 놓으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되물었다.
“어떤 것으로 준비할까요?”
카예나가 말했다.
“내가 직접 만들 거란다.”
“……전하께서요?”
이곳에 있는 시녀 중 누구도 그녀가 부엌에 들어가는 모습을 본 적 없다. 듣기로는 유모가 황성에 있던 시절엔 간식을 같이 만들기도 했다고 하지만, 그게 대체 언제 적 이야기란 말인가?
심지어 그건 어린 시절의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하며 카예나와 같이 주방으로 향했다.
* * *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주방에 상주하는 주방 하인들은 그녀의 기습 방문에 화들짝 놀랐다. 황녀가 이곳에 방문할 일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베라가 주방 하인들에게 말했다.
“황자 전하께 드릴 간식을 직접 준비하신다고 하네.”
그 설명이 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우리가 일을 잘못하기라도 했나……?’
“다들 하던 일 계속하렴.”
카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매를 걷고 직접 준비된 식료품을 확인했다.
“제게 말씀하십시오, 전하. 당장 필요한 것들을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정말 괜찮아.”
그는 황녀의 어른스러운 투에 순식간에 무안해졌다.
카예나는 밀가루, 버터, 설탕, 계피를 꺼냈다. 레시피를 묻지도 않고 재료를 준비하는 게 부엌일이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주방장은 제 눈을 슥슥 비볐다. 이젠 카예나가 칼을 들고 사과를 툭툭 잘라 껍질을 벗겨 내는 게 보였다.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렴.”
카예나는 금방 주방장에게 사과와 칼을 넘겨 버렸다.
주방장은 사과를 마저 깎으려다가 멈칫했다. 카예나는 칼 한 번 잡아 보지 못했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껍질을 아주 얇게 깎아 놓았다.
‘이 정도야 우연일 수 있지.’
그는 사과를 깎다가 준비된 것들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과 파이를 하시려는 겁니까?”
카예나는 기특하다는 듯이 주방장을 칭찬했다.
“이것만 보고도 알아차리다니. 역시 주방장답구나.”
카예나는 주방장이 사과를 졸일 동안 반죽할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방장은 바로 곁에서 보조를 맞추다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문가의 실력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상당히 능숙했다.
“전하의 솜씨가 이토록 탁월하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시녀들은 자신들이 보기에도 카예나가 능숙해 보여서 의아하던 차였다. 그런데 주방장까지 그녀를 칭찬하니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재료 손질도 참으로 훌륭합니다. 속도도 무척 빠르시고요.”
그 말에 카예나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도도한 인상의 미인이 그런 표정까지 지으니 가진 매력이 배가 되었다.
“무리해서 칭찬할 것 없다.”
‘그야 전의 삶에서 자취만 몇 년을 했는데.’
편모 가정에서 자란 데다가 모친이 병환으로 타계 후엔 쭉 혼자 살았기에 부엌일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모친은 제빵사이기도 했다.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매끄럽구나.”
그녀는 새침하게 주방장을 핀잔했다. 주방장은 허둥거리며 손사래 쳤다.
“아, 아닙니다, 전하! 정말 진심입니다!”
그것은 누가 들어도 아첨하는 말투라 시녀들은 그럼 그렇지, 하며 의구심을 거뒀다.
“그렇게 아첨하지 않아도 네게도 하나 줄 것이다.”
카예나는 속을 다 채운 파이 두 개를 예열한 오븐에 넣고는 핀잔하듯 말했다.
그는 카예나의 말에 무척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황족이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받다니. 대대손손 자랑할 일이었다.
주방장의 황홀해하는 반응에 시녀들은 더욱 확신했다. 카예나의 미모에 홀린 주방장이 주책을 떤 게 분명했다.
‘공연히 재주 많은 사람으로 보일 필요는 없지.’
뭐든 남들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 괜히 이것저것 잘하는 모습을 보여 봐야 경계심만 높일 뿐이었다.
“파이를 두 개 구웠으니 다들 맛은 볼 수 있겠구나.”
그들은 그럴듯해 보였던 파이를 떠올리며 기대했다.
“황자 전하께는 어찌 갖다드릴 생각이십니까?”
리디아는 레제프의 얼굴을 볼 기회라고 생각하여 사심을 담아 물었다.
카예나는 원래 간식을 전달할 사람으로 베라를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리디아의 말을 듣고 보니 간식을 전달하길 원하는 시녀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 베라를 보내면 분열은 더 쉽게 일어나겠지만…….’
베라를 회유하는 일에 그런 악의가 담긴 행동을 해서는 충정을 얻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시녀들끼리 경쟁이나 붙이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너희 중 누구든 다녀오렴.”
카예나의 말에 시녀들은 서로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파이가 다 구워지자 카예나는 삽으로 미리 준비한 다른 접시에 옮겼다. 충분히 식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파이를 옮기기가 무섭게 손이 불쑥 들어왔다.
“이건 제가 전하께 가져다드릴게요!”
리디아는 옮겨 담은 파이를 냉큼 집어 들었다.
“어, 그건……!”
그걸 본 주방장이 깜짝 놀라 만류하기도 전에 리디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악! 뜨거워!”
그녀는 손을 데어 접시를 던졌다.
바로 앞에 있던 카예나의 팔에 파이가 날아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하!”
요리하느라 소매를 걷고 있던 카예나의 맨살에 뜨거운 파이가 그대로 닿았다.
* * *
“의원을 불러라!”
베라는 카예나의 팔에 찬물을 부었다.
카예나는 쓰라림에 미간을 찌푸렸다. 다행히 아주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기에 화상이 심하지 않았다.
리디아는 바닥에 엎드려 카예나를 향해 용서를 구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전하!”
황족의 몸에 실금이라도 가게 하는 것은 중죄였다. 그런데 황실 유일한 황녀의 몸에 화상을 입히다니. 당장 태형을 받아도 모자랄 일이었다.
“리디아! 네가 미쳤구나!”
“됐다.”
카예나는 베라를 저지했다.
“내가 공연히 여럿 놀라게 했구나. 뜨거운 파이를 식혀야 한다고 설명하지 않은 내 잘못이니 그러지 말렴.”
그게 어찌 카예나의 잘못이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 의원이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의원이 도착했습니다, 전하!”
그녀는 의원에게 붉게 달아오른 팔을 내보였다. 약간 쓰라릴 뿐 상태는 양호했다.
“며칠 연고만 잘 발라 주시면 됩니다.”
그 말에 다들 내심 안도했다.
“가벼운 화상이라 다행이네.”
큰 화상은 아니었으나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카예나는 너그럽게 리디아를 다독였다.
“많이 놀랐겠구나, 리디아.”
“소, 소인이 미흡하여…….”
“괜찮아. 아직 어리니 실수할 수도 있지.”
‘리디아는 전하와 나이가 같단 말입니다.’
베라는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이왕 준비한 것이니 남은 파이라도 반 나눠서 레제프에게 보내야겠구나.”
카예나는 그동안 남은 파이가 식은 것을 보고 그것을 다른 다과와 준비하도록 명했다. 침착하고 너그러운 모습에 주방 하인들은 몹시 감동하였다.
“이건 약속대로 자네 몫이네.”
주방장은 이 혼란을 관용으로 넘어가는 카예나의 태도에 감복하며 공손히 파이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전하.”
카예나는 시녀들에게도 말했다.
“다들 많이 놀랐을 테니 리디아를 데리고 가서 쉬도록 해.”
“……네, 전하.”
베라는 상황을 수습하고서 카예나를 침실로 모셔 갔다.
“리디아는 이번 일을 절대 뉘우치지 않을 겁니다, 전하.”
그녀는 그간 시녀들의 방만을 꾹꾹 참아 왔으나 오늘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어찌 그리 너그러우십니까?”
거즈로 둘둘 감아 놓은 팔을 내려다보던 베라는 한숨처럼 물었다.
카예나는 베라의 걱정 어린 말에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내가 진짜 호의로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님을 너는 알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베라가 멈칫했다.
‘다 의도하신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추측하던 것을 사실로 확인받으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지 않았니?”
“……!”
베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알았지? 자신이 그렇게 티를 냈던가?
그녀는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고 목소리를 냈다.
“…제가 어리석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카예나는 ‘정말?’ 하고 되묻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베라가 마른침만 삼키고 있을 때였다.
“전하, 간식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어찌할까요?”
하녀가 들어와 말했다.
카예나는 지금 일어난 일을 어떻게 전달할지 시험하는 것처럼 임무를 내렸다.
“네가 레제프에게 간식을 전달해 주고 오렴.”
“……예, 전하.”
베라는 심경 복잡한 얼굴을 하며 명을 받들었다.
* * *
레제프는 아침부터 입맛이 없었다.
“……피곤하군.”
최근 들어 황성을 방문하는 귀족도 많고, 하인리히 대공자도 견제하다 보니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누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시지?”
그가 버릇처럼 부관을 향해 물었다.
“황녀궁의 주방으로 가신 게 마지막 보고였습니다.”
방문객을 상대하느라 카예나를 마주할 시간이 부족해진 레제프는 하루에 수십 번도 더 그녀의 행적을 물었다. 덕분에 제논은 카예나의 행방이라면 이 성내에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레제프는 생각지 못한 장소를 듣게 되어 고개를 갸웃했다.
“주방?”
카예나와 전혀 인연이 없어보이는 곳이었다.
“거기서 뭘 하는데?”
“시녀들이 전하를 모시느라 자세한 보고는 받지 못했습니다.”
‘주방에서 뭘 하려는 거지?’
레제프는 궁금증이 일었다.
요즘 그가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은 카예나였다.
독을 마시고 쓰러졌던 이후로 그녀는 완전히 변했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인해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은 레제프, 자신이었다. 특히 이번 카예나의 성년식을 준비하면서 얻은 수혜가 많았다.
황가와 엮일 수 있다는 생각에 엉덩이 무거웠던 귀족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찌되었던 카예나가 황실 유일한 황녀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카예나의 가치도 높아졌다. 레제프는 그녀의 쓸모를 재평가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정치적 이점을 제외하고서라도 그녀의 변화로 인해 그에게 미친 긍정적인 부분이 많았다.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러워진 카예나는 옆에만 있어도 그의 비위를 잘 맞춰주었다. 어리석고 아름답기만 한 인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레제프는 카예나와 보내는 시간이 생각보다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언제부터 그녀가 저에게 이렇게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지? 그런데 그게 썩 나쁘지 않았다. 결혼으로 떠나보내기가 꽤 아쉬울 정도였다.
“황녀궁의 시녀가 찾아왔습니다. 어찌할까요?”
부관의 말에 그는 안으로 들이란 뜻으로 가볍게 손짓했다.
곧 베라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됐다.”
그는 쓸데없는 절차는 생략하라며 답지 않은 호의를 보였다.
그건 베라가 자신의 사람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카예나가 보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베라는 작게 감사 인사를 올리며 손에 든 은쟁반을 에반스에게 넘겼다.
“황녀 전하께서 손수 준비하신 간식입니다.”
베라의 설명을 들은 레제프가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누님이? 직접?”
“그렇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곁에 선 제논도 의아한 눈치였다. 주방에 간다는 보고는 들었으나 카예나가 간식을 만들었다니.
“가져와.”
제논이 쟁반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덮개를 여니 사과 파이 향이 은은하게 났다.
베라를 따라온 하녀가 건넨 접시엔 쿠키와 스콘, 잼, 버터크림 등이 있었다. 차가 담긴 주전자는 따뜻했다. 그것에서 레제프는 알 수 없는 온기를 느꼈다.
“이 사과 파이는 황녀 전하께서 손수 만드신 겁니다.”
레제프는 미심쩍은 눈으로 사과 파이를 관찰했다. 일단 생김새는 멀쩡했다. 향도 좋았고.
“진짜 누님이 만드셨다고?”
“그렇습니다.”
베라의 담담한 대답에 그는 사과 파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덥석 집어 먹었다.
곁에서 은침을 든 채 독을 검사하려던 제논이 깜짝 놀랐다.
“전하!”
간식에 무슨 해코지를 했을 줄 알고 겁도 없이 바로 먹는단 말인가!
게다가 상대는 카예나 황녀다.
에반스는 최근 들어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카예나를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정작 레제프는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생각보다 입맛에 잘 맞아서 놀라고 말았다. 아침부터 입맛이 없었는데 적당히 상큼하면서도 지나치지 않은 단맛이 식욕을 자극했다.
“이 향은 뭐지? 사과 향 말고. 마음에 드는데.”
사과 파이라고 했는데 묘한 향이 더 났다. 베라가 곁에서 설명했다.
“계핏가루를 넣으셨습니다.”
“아아, 계피.”
그는 쌉싸름한 맛과 향의 계피도 마음에 들었다.
피로감에 약간 날카로워져 있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고작 간식 하나에 이런 기분이 되는 게 우습기도 했다.
베라가 곁에서 따뜻한 꿀차도 가득 따랐다. 그러고는 직접 준비한 은으로 된 티스푼을 잔에 담갔다. 변화는 없었다.
“누님께 이런 재주도 있었나?”
레제프는 파이를 두 쪽 먹은 다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유 시간도 있으니 카예나와 차 한잔 곁들여 같이 먹고 싶었다.
“지금 누님은 뭘 하고 계시느냐?”
베라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부복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은 주방에서 사고가 있었습니다.”
물을 적신 냅킨에 손을 닦던 레제프가 멈칫했다.
그는 냅킨을 내려놓으며 베라를 빤히 보았다.
“사고?”
“시녀 중 하나가 실수로 파이를 전하의 팔에 엎질러서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그 말에 레제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화상이라니?”
베라가 뭐라고 말을 더 잇기 전에 의원이 알현을 요청해 왔다. 카예나의 상처를 돌봤던 의원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쭈뼛거렸다.
“황녀 전하의 부상을 보고드립니다.”
레제프의 싸늘하게 식은 파란 눈이 의원에게 향했다.
의원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을 느꼈다. 저건 그의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을 때 종종 보이곤 하는 눈빛이었다.
“식지 않은 파이가 왼팔에 닿았으나 실제 화상 넓이는 반 뼘 정도입니다. 며칠간 연고만 잘 바르시면 흉은 남지 않을 겁니다.”
“파이가 누이의 팔에 닿을 이유가 뭐지?”
“그건…….”
의원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베라가 대신 입을 열었다.
“시녀, 리디아 벤제만이 식지 않은 파이가 담긴 접시를 들다가 놓쳤습니다. 그게 전하의 팔에 닿았다가 떨어졌습니다.”
황족을 다치게 했으니 카예나가 리디아를 죽이겠다고 난리 쳐도 모자랄 상황이었다. 하지만 벤제만 가문은 제법 쓸 만한 곳이므로 그렇게 두긴 아까웠다. 게다가 벤제만 가문은 에반스 가문과 밀접하게 연관된 곳이기도 했다. 곡물 창고를 관리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괜찮다고 용서하셨습니다.”
제논은 카예나가 그 성질머리로 시녀를 용서했다는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역시 최근의 카예나 황녀는 너무 이상했다. 어찌 됐든 다행인 일이었다. 제논은 레제프의 뒤편에 서 있었기에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아뢰었다.
“벤제만가는 아직 쓸 만한 구석이 많습니다. 이렇게 넘어가게 되어 다행이군요.”
그러나 레제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주제를 모르는 걸 아주 싫어했다. 하인리히 대공자처럼 말이다.
레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싸늘히 말했다.
“황녀궁으로 간다.”
* * *
황자궁에서 황녀궁까지는 중앙성을 지나쳐 복도를 한참 걸어야 한다. 그 먼 거리를 레제프는 긴 다리로 망토 자락이 휘날리게 성큼성큼 걸었다. 달리지만 않았을 뿐 굉장히 빠른 걸음이었다. 베라를 포함한 보좌관들이 레제프보다 한참 뒤처져 서둘러 따라와야 할 지경이었다.
레제프는 시녀들이 휴식하고 있다는 방을 찾아 손수 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혔다.
“전하! 소신이 하겠습니다!”
간신히 그의 걸음을 따라잡은 보좌관이 깜짝 놀라 만류했다.
레제프는 대꾸도 않고 황녀궁에서 카예나가 사용하는 방 다음으로 가장 좋은 방을 열었다.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전하?”
테이블에 놓인 과자와 차, 분수에 맞지 않는 지나치게 화려한 실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향로에선 원래 카예나가 쓰던 값비싼 향냄새가 났다.
그건 제국에 소량만 수입되는 고급 향이었다. 그 향이 독특해 레제프도 잘 알고 있었다. 절대 시녀가 쓸 수 있을만한 향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녀로서는 누릴 수 없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그것도 레제프는 허락한 적 없는.
시녀들은 다급히 차림을 확인하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레제프는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옆의 장식장에 걸터앉았다. 그의 시선이 시녀들을 쭉 훑었다. 베라를 포함한 보좌관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기묘한 침묵에 걸음을 멈췄다.
“나는 사람이 어리석은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마디가 떨어졌다.
“실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시녀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서로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주제를 넘는 건 끔찍하게 싫어.”
그제야 시녀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그러자 레제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아주 정확히 잘 아는구나.”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너희는 죽을죄를 지었다.”
레제프는 성큼성큼 걸어 한 시녀를 거칠게 붙잡아 일으켰다. 리디아였다.
“나는 시녀에게 화상을 입은 황족 이야기는 들어 보질 못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리디아는 사색이 되었다.
“전하,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녀는 두려움에 눈물까지 흘리며 애원했다.
“실수였습니다, 전하! 황녀 전하께서도 괜찮다고 하셨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아악!”
레제프는 리디아의 팔을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꽉 쥐었다.
“네 팔을 잘라야 오늘 일의 경중을 알겠지? 어디까지 잘라 줄까?”
스릉-.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궁정인들은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전하.”
보좌관들 사이에서 제논이 나타나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레제프의 표정을 목격한 그는 혀를 짧게 차고 뒤로 물러났다. 저 상태의 레제프는 누구도 만류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사달이 나도 제대로 날 상황이었다.
“레제프.”
그때 이 험악한 분위기를 뚫고 어울리지 않게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란을 듣고 카예나가 직접 나타난 것이다.
레제프는 검을 내리치려던 손을 멈췄다.
“그만하렴.”
레제프는 그 말에 거짓말처럼 리디아를 붙들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검은 아래로 늘어뜨린 채였다.
그의 손에서 풀려난 리디아가 바닥에 주저앉자 모두 숨을 멈췄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게 뭐지?’
미쳐 날뛰는 레제프를 카예나가 말 한마디로 진정시킨 것이다!
카예나는 어쩔 줄 모르는 궁정인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검을 늘어뜨린 상태지만 레제프는 여전히 광기로 얼룩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리디아가 레제프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주제 파악.’
에스테반 황제가 레제프를 길러 낸 방식이었다.
레제프는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자신이 정확히 무엇에 분노한 건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카예나는 여전히 검을 든 채로 뭔가를 베어 버릴 것만 같은 레제프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은 저 모습을 살기등등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예나의 눈으로 보았을 땐 그게 아니었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카예나는 원작을 통해 레제프가 겪은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레제프가 용서받지 못할 악인이기는 해도 그가 왜 그런지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황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내처질 수 있는 게 레제프였다.
부황이 직접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많은 걸 누리는 대신 많은 걸 박탈당했다. 처음에 박탈당한 건 가족이었다.
“네게 가족이란 건 없다. 너의 주체성, 자율성은 황자로 있을 때만 가질 수 있노라.”
레제프는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철저히 버려졌다.
“짐은 언제든 널 내칠 수 있단 사실을 명심하라. 네 쓸모를 스스로 증명해 내지 못하면 너란 존재는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에게 황위 쟁탈이란 생존과 직결한 문제였다.
가족은 없고 주변의 사용인은 전부 황제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사생아인 레제프를 무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숙청이었다.
그게 고작 여덟 살 때의 일이다. 카예나는 알지 못했던 그의 비사이기도 했다.
‘어쨌든 동생이니까.’
카예나는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그의 앞에 섰다. 그녀는 레제프의 손에 들린 검을 뺏어 근처에 있던 제논에게 내밀었다.
제논은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검을 건네받았다.
시녀들은 발발 떨었고 리디아의 숨죽인 흐느낌만이 들렸다.
하나같이 한심한 작태다. 카예나는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표정과 눈빛으로 레제프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게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그녀는 엄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그리 화를 내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니?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사냥도 자주 나갈 텐데.”
“…….”
레제프는 점차 눈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를 조금도 알지 못한 궁정인들은 그저 뜨악한 얼굴로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께서 미치신 게 아닐까?
그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러다 제대로 열 받은 레제프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겁났다.
시종인들이 멀뚱히 서 있기만 하자 카예나는 냉랭한 얼굴로 다그쳤다.
“무얼 그리 보고 섰느냐?”
언성을 높이진 않았으나 서슬 퍼런 위엄에 모두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녀가 제멋대로 화내거나 성질을 부리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차갑게 일갈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얼결에 레제프가 있음에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꼭 그리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주변을 정리해라.”
그들은 그제야 주변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게 풀어진 기강에 카예나가 혀를 찼다.
“베라.”
그녀는 베라에게 시녀들을 이끌고 가라고 눈짓했다.
눈치 빠른 베라가 잰걸음으로 방에 들어와 시녀들을 데리고 나갔다.
“네가 이럴 줄 알았다면 내가 진즉에 리디아를 내쳤을 거야.”
카예나는 소매를 걷어 왼팔에 감은 거즈를 풀었다.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흉도 남지 않을 이런 상처로 엄하게 처벌하면 누구도 황궁에 들어오고 싶지 않을 거란다.”
레제프는 조심스럽게 카예나의 새하얀 팔을 쥐었다. 그는 그곳에 선명하게 난 붉은 화상을 물끄러미 보았다. 생각보다 깊은 화상은 아닌 것 같지만, 여전히 화가 났다. 시녀가 감히 황족의 권위에 도전한게 아닌가.
“황족의 몸에 상해를 입힌 것은 대역죄입니다, 누님.”
그녀가 원한다면 당장 리디아를 쫓아가 목을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카예나는 더욱 엄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예기치 못했던 사고였을 뿐이었어.”
“꽤 아프실 텐데요.”
그 물음에 카예나는 약간 실소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프지 않으면 상처가 아니겠지. 고작 며칠 연고만 바르면 될 일이야.”
이젠 레제프가 그녀를 설득하려는 듯이 굴었다.
“세탁실에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를 세탁실에 보내는 건 몹시 가혹한 처벌이다. 귀족 영애가 아닐지라도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카예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이 걱정을 너무 무섭게 하는구나.”
그녀의 타박에 레제프는 눈을 찬찬히 깜빡이다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무서우셨습니까?”
“아니, 조금도.”
레제프는 그녀의 새초롬한 말에 큭큭 웃고 말았다. 카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좀 진정되니?”
“……예.”
“따뜻한 차라도 조금 마시자꾸나.”
카예나가 그의 손을 잡고 제게 가볍게 이끌었다.
같이 황궁을 탐방했던,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같았다.
레제프는 마치 깃털처럼 그 손길에 응했다. 마음이 누그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자신을 챙겨 주는 건 유모도 있었고 시녀나 보좌관도 있었다. 그런데 카예나가 챙겨 주는 건 느낌이 달랐다.
일단 이렇게 그를 혼내는 사람 자체가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혼나는 기분은 상당히 묘했다.
“이건 이리 주십시오.”
레제프는 카예나의 손에서 거즈를 받아 그녀의 팔에 조심스럽게 감아 주었다. 훈련을 받다 보면 다치는 일이 잦다. 그러다 보니 붕대를 감는 일 정도는 잘하게 되었다.
카예나는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화상을 가려 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그의 상태가 상당히 안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분노로 미쳐 날뛸 때 주변에서는 항상 쩔쩔매고 그를 화나게 한 상대를 벌하기만 했다. 누구도 레제프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지 않았다.
그러니 레제프는 쉽게 분노했고 참을성이 없었다. 뭐든 제멋대로 했다. 부황의 인정을 받고자 점점 교활해지기만 했다.
카예나는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떠올려 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반대편 팔을 들어 레제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레제프는 손을 멈칫했다가 거즈를 다시 고정했다.
이상하게 칭찬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힐 황가를 위해 다른 왕국과의 교역을 뚫기도 했고 유력 귀족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기도 했다. 그 모든 일은 당연한 것이라서 칭찬 들을 것도 없었다. 그런데 고작 붕대를 좀 잘 감았다고 칭찬을 받는다니.
레제프는 카예나가 누이 노릇을 하려고 드는 게 웃겼다. 그런데 그게 좋았다.
“많이 바쁘니? 화원으로 가서 차를 마시면 좋을 것 같은데.”
그는 너그러워진 마음만큼 부드럽게 풀린 미소를 지었다.
“누님의 말대로 따르겠습니다.”
레제프는 제 망토를 벗어 카예나의 얇은 드레스 위로 덮어 주었다.
카예나는 망토를 스스로 여미며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리디아의 팔은 진짜 잘렸을 게 뻔하다. 그의 잔악함엔 조금의 자비도 없으니까.
그녀는 뒤따라왔던 시중 하녀, 애니에게 말했다.
“후원의 티 테이블에 차와 다과를 준비하렴.”
“예, 전하.”
레제프는 리디아 때문에 완전히 눈이 뒤집혔던 건 어느새 잊어버린 사람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카예나의 허리를 받치며 다정하게 에스코트했다.
호위와 보좌관들이 뒤로 물러나며 길을 텄다. 그들은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얼떨떨해하는 표정이었다. 카예나의 말과 행동에 레제프가 영향 받는 걸 처음 목격하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제논 에반스는 이 사태에 가장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제프가 망나니여도 그를 지지한 것은 하인리히보다 휘두르기 쉬워서였다. 차라리 그렇게 계속 날뛰어 주는 것이 제 발언권을 높여 주었기에 기껍기도 했다. 그런데 카예나가 갑자기 레제프에게 미지의 영향력을 끼쳤다.
‘앞으로 황녀를 주시해야겠군.’
제논은 날카로운 눈으로 카예나를 주시했다.
카예나는 이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고서도 태연하게 에스코트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오늘 일은 여러모로 내게 유리하게 소문이 나겠구나.’
카예나는 실권 하나 쥐지 못한 황녀다. 그녀의 성격이 고약한 것과는 별개로 얼마든지 황실에서 고립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녀의 빼어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호사는 조금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그 카예나가 마치 맹수 조련사라도 된 것처럼 레제프의 분노를 잠재웠다. 이 사건의 파급력이 어떨지는 굳이 예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레제프는 부황도 내버려 두었으니.’
사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어디 레제프뿐이었으랴? 그런 일로는 카예나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면에선 둘은 참으로 남매다웠다.
‘나 하나라도 정신 차려서 다행인 건지.’
황궁은 권력의 온상지이며 차후 레제프의 무기가 된다.
첫 번째 삶에서는 레제프가 그 힘으로 올리비아를 포함해 수많은 무고한 이를 죽였다. 또한, 자신의 종말도 초래했고.
지금의 카예나는 그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사실 첫 번째 삶에서는 레제프가 라파엘로에 의해 죽기 전에, 카예나 자신이 먼저 길리안 자작에게 살해를 당했기 때문에 제국이 그런 결말을 맞았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가족에게 특별한 애착은 없다. 레제프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있지만, 친동생이라는 친밀감은 적었다. 자신은 그에게 이용당하다 버려졌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동생이니까, 라는 게 정확한 심정일 것이다.
‘이곳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황녀 노릇을 좀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망나니 동생을 돌보는 것도 그 일 중 하나가 아닐까?
후원의 테이블에 앉은 카예나는 그제야 레제프의 얼굴을 자세히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며칠 사이에 좀 여윈 것 같구나.”
레제프의 뼈대가 좀 더 도드라져 보였다.
최근 일이 바빠 끼니를 자주 걸렀을 것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그가 좋아하는 계피를 듬뿍 넣은 사과 파이를 준비했다.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자신은 그에게 그런 취향이 있는 줄도 몰랐으리라.
“입맛이 좀 없었습니다.”
레제프는 그렇게 말하다가 제 서재에 있을 사과 파이가 생각났다.
그는 보좌관 하나를 불러 명했다.
“누님께서 만들어 주신 사과 파이를 이리로 가져오너라.”
“명을 받듭니다.”
카예나는 방금 내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에게 물었다.
“파이가 입맛에는 맞았니?”
“무척이나.”
레제프는 한가로운 햇살과 기분 좋게 부는 봄바람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걸쳤다. 워낙 선한 인상이라 그렇게 웃으니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카예나가 만든 사과 파이가 든 접시가 곧 테이블에 놓였다.
“입맛이 없어도 끼니를 너무 거르지는 말렴. 검술 훈련도 하잖니.”
“네, 누님.”
레제프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뭔가 묘한 기분이 되었다. 이상하게 그녀가 자신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에게 그다지 관심 없는 사람이다. 곧 사냥 시즌이라 레제프가 사냥 나갈 일이 많으리라는 것도, 검술 훈련을 꾸준히 받는다는 사실도 몰라야 정상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제 입맛에 꼭 맞는 사과 파이를 만들어 낸 것처럼 자신을 잘 아는 듯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황성에 자신이 숨 쉴 공간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 기분을 카예나에게서 느낄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그다지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 이런 걸까?’
그녀의 레몬색 금발은 이 순간에도 보석처럼 빛났고 길게 드리운 속눈썹은 명화 같았다. 결점 하나 없는 피부와 만들어진 듯이 완벽한 골격이 예전엔 그저 인형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에게서 독특한 생기가 느껴졌다. 카예나란 인형에 신이 생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전과 너무나 다르게 보였다.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레제프는 마냥 남처럼 느껴졌던 카예나에게 어떤 기대감을 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많은 재화를 손에 넣었을 때도 꼴 보기 싫은 하인리히를 물 먹였을 때도 이런 충족감을 느낀 적은 없다.
“누님은 정말로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그래서 그는 새삼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카예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눈꼬리가 사르르 접혔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다음에 또 사과 파이를 만들어 줄 거야.”
농담으로 치부하는 태도였다. 레제프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의 인형.’
아니. 이제 그녀를 두고 인형이라 부르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레제프는 지금 그녀에게 아주 어울리는 단어를 찾아냈다.
‘나의 안온.’
자상하고 아름다운 나의 안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