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30
악녀는 마리오네트 27장. 귀환(30/33)
27장. 귀환
레제프는 황궁 별채에 갇혔다. 별채 바깥에는 기사들이 울타리처럼 서서 그를 감시했다. 예전이었다면 칼을 뽑아 들고 감히 주제넘은 짓을 한다며 피를 보았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레제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기력했다. 잠깐 끓어올랐던 살의는 황제와 생부인 레오를 죽이고 나서 잠잠해졌다. 지독한 공허감이 다시 자신을 붙들고 늘어졌다.
오늘이 며칠이지? 누이는 언제 사라졌었지? 기억이 흐릿해 아무것도 제대로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손에 잡혔던 드레스의 감촉과 눈물로 흠뻑 젖은 눈동자만 방금 일어난 일처럼 선명했다. 카예나가 어디로 갔을까?
라파엘로의 저택을 가장 먼저 조사해 보았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면 그가 심은 세작이 힘을 쓰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제대로 더 알아보기도 전에 황제가 군사 통솔권을 박탈해 버려서 정보가 미미했다.
카예나가 사라진 후, 처음에는 후회스러웠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카예나가 했던 말이 가슴에 사무쳤다. 이후로 끔찍한 죄책감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까무룩 잠들었다. 그마저도 악몽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촛불의 마지막 심지처럼 빠르게 마음이 마르고 정신이 피폐해졌다. 그러다 분노가 솟았다. 꼭 그렇게 매정하게 자신을 떠나야만 했나?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이에게 양보하거나 배려해 본 적 없다. 항상 양보하는 척,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척하며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했다.
그렇지만, 그럴 수도 있잖아. 대신 내가 화려한 드레스, 아름다운 보석을 주면 되잖아. 파티를 열어 주고 마음껏 놀고먹게 해 주잖아. 어차피 누이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그녀를 좀 더 쓸모 있게 만들어 준 것뿐인데.’
그런데 카예나가 갑자기 그에게 말했다. 도구 취급은 그만하라고.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데?’
어떤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레제프는 그것을 이겨 내는 방법을 빠르게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알 수도 없었다. 다 해 주겠다는데도 싫다고 하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더 생각하기도 싫고 화만 치솟았다. 그는 익숙하게 카예나를 탓했다. 그녀가 잘못했다. 피해자는 자신이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제는 그 주인 없는 원망도 관두었다. 결국, 자신이 다 잘못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양보할 필요가 없고 배려할 이유가 없어서 그랬어. 나는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어. 계속 용서해 줄 줄 알았어. 당연히 내 곁에 있을 줄 알았어. 레제프는 눈가를 손으로 감싸 쥐고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공허하게 같은 말을 반복해 보았지만, 그 말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늦었다. 만회하고 싶은데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없다. 카예나는 떠났다. 아마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레제프는 별채에 갇힌 채 다 끝났음을 완전히 실감했다.
똑똑. 그 순간 누군가가 별채를 찾아왔다. 문이 열리고 미엘른 대사제가 들어왔다. 대사제는 성호를 그으며 자애로운 척 가장한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레제프를 바라보았다.
“황자 전하, 참회는 하셨습니까?”
대사제의 말에도 레제프는 천장을 향한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꼭 미엘른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 같았다. 미엘른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민중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던 황녀는 사라졌다. 레제프가 생부를 죽이자, 정통성은 물론이거니와 동정의 여론도 싹 걷혔다. 게다가 예이스터는 신성 재판을 앞두고 있다.
‘마침 황제도 딱 죽었지.’
그에 반에 사원은 신성 재판을 준비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권위가 드높아져 있었다. 미엘른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사제답게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그간 그는 에반스 후작가와 하인리히 대공가에서 어마어마한 액수의 뇌물을 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그런데 최근 수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로드릭 후작과 예이스터가 동시에 실각했다. 돈줄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번엔 약점투성이인 레제프에게 손을 내밀어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 생각이었다.
‘내가 제국을 집어삼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미엘른이 레제프의 근처로 다가갔다.
“실은 전하께 긴히 제안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가 은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황위 계승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레제프는 여전히 대사제를 향해 시선을 주지 않았다. 미엘른은 레제프가 지금 상황에 무척 상심한 상태라고 이해했다.
“황녀 전하께서 사라지시고 황제 폐하께서도 서거하셨으니 어서 차기 황제를 세워 제국을 안정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카트린은 황후로 책봉되기 전이다. 따라서 이델은 아직 공식적으로 황자가 되지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레제프가 황위를 계승할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러니 황녀만, 황녀만 저지하면 된다. 미엘른은 눈앞의 욕심에 애가 달았다.
“귀하신 분이 이렇게 별채에 갇혀 계시면 안 되잖습니까? 세간에 떠도는 불미스러운 소문은 제가 수습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저…….”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은 사원의 힘으로 틀어막으면 그만이다. 대신 레제프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일 열리는 신성 재판에서 예이스터 경이 주장하는 사실에 증인으로서 동의하십시오.”
그제야 레제프의 고개가 미엘른을 향해 움직였다. 예이스터가 주장하는 것. 바로 카예나가 마법사라는 이야기였다. 레제프도 그녀가 마법을 쓰는 것을 정면에서 지켜보았다. 그 힘으로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대사제가 간교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 쉽지 않습니까? 그저 황녀가 악마라고 말하면 되니까요. 그 한마디면 전하께서 제국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
레제프가 다시금 고개를 젖히다가 시선을 바로 하고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아까와 달리 잘 정리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대사제에에게 말했다.
“신성 재판에 참석하겠습니다.”
미엘른의 입가로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 * *
대사원에서 신성 재판이 열렸다. 어차피 귀족을 상대로 하는 재판은 짜고 치는 카드 게임 같은 것이다. 이미 피고인이 유죄일지 무죄일지 정하고 하는 재판이라는 말이었다. 예이스터는 후계 싸움에서 진 패자이니 죄가 인정되어 처형될 예정이었다.
재판에는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배심원 중에는 막 에반스 가문의 주인이 된 줄리아도 있었다. 줄리아는 라파엘로를 먼저 알아보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키드레이 공작님을 뵙습니다.”
“에반스 후작님을 뵙습니다.”
라파엘로가 손을 내밀었다.
“재판장까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줄리아가 후작위를 계승한 것은 사실 그녀의 힘이 컸다기보다는 상황에 맞춰 약간 얼렁뚱땅 이뤄진 일에 가까웠다. 그렇다 보니 혈족들이 줄리아 개인의 역량을 의심하고 자칫 이용하려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라파엘로는 그녀와 친분이 있음을 과시하며 줄리아에게 힘을 실어 주려 했다. 물론 줄리아는 제국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가 에스코트하겠다고 하니 그 사실만으로 신이 났다.
“어머…… 고맙습니다, 공작님.”
요즘 늙고 못생기고 심술궂은 남자들만 주야장천 상대했더니 눈이 피로했던 탓이었다.
“준비는 되셨겠지요?”
라파엘로의 말에 좋았던 기분은 싹 날아갔다. 대신 결연한 긴장감이 줄리아를 휘감았다.
“……물론이죠.”
오늘 신성 재판에서 미엘른 대사제를 끌어내리는 역할은 줄리아가 맡게 되었다. 배심원으로 참석한 귀족들에게 제대로 출사표를 던지려는 의도였다.
곧 배심원석에 사람이 꽉 들어찼다. 라파엘로는 시선을 들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미엘른 대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엄숙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으나 묘하게 안색이 밝았다.
‘역시 레제프와 손잡은 건가?’
정녕 이대로 제 누이를 악마로 규정하고 왕관을 차지하려는 걸까?
그때 약간 소란이 이는 것 같더니 문이 열리고 예이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결박된 채로 팔라딘에게 이끌려 재판장의 한가운데에 섰다. 완전히 죄인으로 낙인을 찍은 채 시작하는 재판이었다.
“예이스터 하인리히 경. 악마와 거래하여 사특한 마법으로 괴수를 부린 것이 사실이오?”
“…….”
고위 사제의 물음에 예이스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은 필요 없었다. 고위 사제는 다음 질문을 했다.
“갑자기 사냥터 일대를 내려앉게 한 그 힘은 누구의 것이오?”
그러자 넋이라도 나간 듯했던 예이스터의 눈에 광기가 맺혔다.
“카예나아아-! 그 악마를 당장 붙잡아라! 당장-!”
배심원들은 그 광포한 외침에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예이스터는 당장에라도 이곳을 뛰쳐나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기세로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년이 악마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똑똑히 봤다고!”
“커흠, 정숙하는 게…….”
미엘른 대사제는 딱히 그 말을 막을 생각이 없었기에 미미하게 말리는 시늉만 했다.예이스터가 배심원들을 돌아보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말했다.
“이 개돼지만도 못한 무지렁이들아. 사냥터에서 있었던 일을 벌써 잊었느냐! 당장 황녀가 여기에 나타나 이곳을 무너뜨리고 다 압살할 수 있다는 걸 모르냐고!”
그 무엄한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대번에 불편해졌다.
탁, 탁! 그제야 미엘른 대사제가 정숙 하라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대공자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으니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는 증인을 모셔 왔다.”
대사제가 손짓하자 곧 예이스터가 나타났던 반대편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레제프가 걸어 나왔다.
“증인 레제프 힐, 신께 맹세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사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는 맹세를 끝내고 증인석에 섰다. 미엘른 대사제가 기대감을 잔뜩 품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께서 말씀해 보시지요. 하인리히 경의 말대로 정말로 황녀 전하가 마법사입니까?”
재판장에 모인 모든 이의 시선이 레제프에게 닿았다.
“누님은…….”
그의 말 한마디에 상황이 뒤집히리라는 것을 모두 직감했다. 줄리아는 입술을 꼭 깨물며 어제 라파엘로가 건네주었던 미엘른 대사제의 비리가 적힌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윽고 잠시간의 침묵이 끝나고 레제프의 입술이 열렸다.
“카예나 힐 황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레제프의 말에 장내가 크게 술렁거렸다. 미엘른 대사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약속했던 것과 다르잖아!’
그는 어제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황자는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하겠다고만 말했지, 카예나 황녀가 마법사라고 말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저, 저 천지분간도 못 하는 머저리 같은 황자 새끼가……!’
절로 이가 갈렸다. 이렇게 해서 대체 얻는 게 뭐지? 황위를 제 발로 차는 짓이 아니던가!
설마 단순히 카예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런 말을 지껄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간 레제프가 황녀를 어떻게 다뤄 왔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돌파구가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자포자기한 건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개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레제프 황자!”
예이스터는 분노로 파르르 떨며 레제프를 당장 잡아다 족칠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사실 지금 레제프의 말에 가장 분개한 사람은 대사제보다도 예이스터였다. 레제프의 시선이 무심하게 그에게 향했다. 꼭, 어쩌라고? 하며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황녀는 마법사다! 네놈의 침실에서 사라진 것도 마법의 힘이거늘 감히 거짓말을 해?!”
“내 누이는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자들에게 붙들려 사라지셨다. 아마도 황제 폐하께서 보낸 사람들이겠지…….”
레제프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처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미엘른 대사제가 성서를 내리치며 이목을 끌었다.
쾅! 쾅!
“모두 정숙하세요!”
그러고는 그가 레제프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증인, 레제프 황자. 황자 전하께서 하신 말씀 중 거짓이 없음을 정녕 신께 맹세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레제프가 신을 걸고 한 협박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까도 맹세했잖습니까?”
“그……!”
미엘른은 분통이 터져 미칠 지경이었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티 낼 수도 없으니 더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예이스터가 버럭 소리쳤다.
“황자, 네놈이 내게 암흑가에서 미쳐 날뛰던 메데이아가 바로 황녀라고 하지 않았나!”
그 말에 다시금 장내가 들썩거렸다. 그들도 암흑가의 마담 메데이아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황녀가 사라지고서 그 메데이아 그년도 사라졌지. 그년이 내 저택을 부수고 마법사들과 결탁하는 걸 봤단 말이다!”
그때 라파엘로가 손을 들었다.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이었으나 분노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이 진땀이 나는 상황에 뻘뻘 땀 흘리던 고위 사제는 라파엘로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라파엘로가 예이스터에게 말했다.
“황녀 전하를 향한 모함은 작작해라, 예이스터.”
예이스터의 고개가 라파엘로를 향해 휙 돌아갔다.
“조디악 저택에 설치된 화약과 네놈의 화약 창고에서 나온 화약이 같은 것이라는 증거가 내게 있다.”
“그건-!”
사람들의 눈빛에 곧바로 불신이 서렸다. 저런 무도한 자가 하는 말이니 그럼 그렇지. 여론이 뒤집히려 하고 있었다. 미엘른 대사제는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이 계획한 일이 다 어그러지리라고 직감했다. 이때 얼른 선수 쳐야 한다.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대사제의 호통에 다시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미엘른은 엄숙함을 가장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신성 재판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음에 다시 열겠습니다.”
대사제의 지시에 따라 팔라딘들이 예이스터를 끌고 나갔다. 레제프도 죄인의 신분이었기에 감시 아래에 밖으로 이동했다. 상황이 정리되는 것 같으니 사람들도 이만 나가려고 할 때, 줄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판을 이대로 끝낼 수 없습니다.”
“……?”
그녀는 다들 당황한 틈을 타서 배심원석에서 나와 앞으로 나섰다. 손에는 밤새도록 정리한 서류가 한 뭉텅이 들려 있었다.
‘카예나 황녀 전하셨다면.’
줄리아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며 생각했다. 만약 카예나였다면 어떤 목소리와 말투로 사람들을 사로잡았을까? 어떻게 이 사람들을 설득할까? 마치 남의 것처럼 낯선, 침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재판을 청구합니다.”
그녀는 고위 사제들이 일렬로 앉은 테이블에 다가가 서류를 나눠 주었다. 배심원들에게도 똑같은 자료가 배부되었다.
“지난 십수 년간 거액을 횡령해 온 것도 모자라, 정치에 청렴해야 할 사원에서 여러 가문에서 꾸준히 부정 청탁과 뇌물을 받아 온 미엘른 대사제와 사원의 수뇌부들을 구속하기를 청원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사제는 그간 사원에서 저지른 일을 상세히 기술한 서류를 힐끗 보더니 와락 구기며 반박했다.
“어디서 감히 나를 모함하는 것이오, 에반스 후작!”
“부끄럽게도.”
줄리아는 그의 살기 어린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말을 이었다.
“에반스 가문은 꾸준히 대사제를 비롯해 사원의 수뇌부에 뇌물을 써 왔고 각종 청탁도 했습니다. 로드릭과 제논이 그간 헌금을 핑계로 뇌물을 바쳤던 내역이 쓰인 장부와 관계자들도 이미 가문 내에서 확보해 둔 상황입니다.”
설마 자신의 가문에 직격타가 될 일을 들고 나올 줄 몰랐던 대사제와 수뇌부들이 사색이 되었다.
“내가 이딴 모함을 그냥 넘어갈 것 같소!”
어차피 상대는 힘없고 어린, 막 가문을 계승하여 지지 기반도 위태로운 후작에 불과했다. 에반스의 위상은 제논과 로드릭으로 인해 예전 같지 않다. 대사제가 팔라딘들에게 명령했다.
“팔라딘들은 당장 사원을 보호하라!”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던 팔라딘들이 대사제의 명령에 척척 움직이며 줄리아 앞을 가로막았다. 무장한 남자들이 위협적으로 다가오자 줄리아가 움찔했다.
그러나 이 일을 일찍이 계획했던 게 바로 라파엘로였다.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것이 바로 키드레이 공작가가 아니던가? 라파엘로가 손짓했다. 바스턴이 그 손짓을 보더니 재판장 문을 활짝 열며 소리쳤다.
“키드레이의 기사들이여! 제국을 지켜라!”
“와아아!”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이 재판장 내부로 침입하며 팔라딘을 비롯해 사제들을 향해 무기를 들었다. 미엘른 대사제가 눈을 부릅뜨며 고함쳤다.
“키드레이 공작!”
사원과 전쟁을 벌일 게 아니라면 지금 이 행동은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순순히 재판을 받아들이십시오, 미엘른 대사제. 진실 여부를 가리고 난 이후에 팔라딘을 일으켜도 될 것 같습니다.”
라파엘로가 앞으로 나서며 줄리아를 제 뒤로 당겨 주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자라고 곧바로 위협하려 들었던 팔라딘들을 경멸스럽게 훑었다.
“정확한 정황을 기술한 서류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무력으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하다니. 너무 수상쩍은 행동이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요! 신을 모시는 사원을 핍박하려 드니 그런 것 아니겠소? 저 줄리아 에반스가 사특한 뜻을 품고 이런 일을 벌인 게 틀림없소!”
“제가 보기에는 가문이 입을 타격을 무릅쓰고서라도 정의를 실현하려는 용맹한 전사 같습니다만.”
대사제는 제정신이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이건 사원만 타격 입을 일이 아니었다. 어디 사원과 같이 비리를 저지른 가문이 에반스 후작가와 하인리히 대공가가 전부이던가! 그는 당장 자신에게 동조해 줄 귀족을 찾으려 배심원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배심원 구성이 뭔가 이상했다. 대사제가 자주 보았던 귀족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등골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흘렀다. 상황이 명확히 이해되고 있었다. 처음부터 짜 놓은 각본이었다. 대사제의 편을 들어 줄 귀족은 미리 손써서 배심원으로 참석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라파엘로도 같이 주변을 한차례 훑어보다가 말했다.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 모습이 꼭, 죽을 준비는 마쳤냐고 묻는 악의 심판자 같은 모습이었다.
* * *
데니안 사제가 모았던 비리 증거는 너무나 정확했다. 횡령이나 뇌물은 차라리 죄질이 가벼운 비리였다.
사원이 예이스터를 도와 귀족 가문의 주인을 저들 입맛대로 바꾼 것이 귀족 사회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어 뜨뜻미지근하게 굴던 귀족들마저도 완전히 분개했다. 썩을 대로 썩고 곪을 대로 곪았던 제국에 심판의 낫이 서슬 퍼렇게 날을 세워 부패를 제거했다. 점차 제국을 드리우고 있었던 어둠이 걷혀 갔다. 그야말로 대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다음 황위를 이을 자를 찾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공작저의 별채에서 카예나와 차를 마시며 바깥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현재로서는 이델 님이 가장 유력합니다.”
황위를 이을 혈족 중 가장 직계에 가까운 것이 바로 이델이다. 다만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카예나가 찻잔에 든 찻물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에스테반 황제가 이대로 악마로 규정되면 그 후손의 정당성 등을 꼬투리 잡을 자들이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대로 황조가 뒤바뀔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황권이랄 게 없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이니 별수 없는 일이죠.”
카예나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하게 우려낸 홍차 맛에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그녀가 마치 예언처럼 말했을 때였다.
“주인님.”
제레미 보좌관이 그들의 시간을 방해해서 대단히 죄송스럽다는 듯이 다가왔다.
“바옐 크로노스 백작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자가 이 시기에 갑자기? 라파엘로의 시선이 카예나에게 닿았다. 시선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뭔가 꾸미셨습니까?’
카예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라고 모든 일을 다 꾸미는 것은 아니었다.
‘친절한 고양이가 혹시 한 발 보태 줄까 기대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카예나가 한 일은 아니었다. 라파엘로는 홀로 바옐을 직접 에스코트하러 본관에 갔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어느새 익숙해진 밝은 다갈색 머리의 바옐이 눈을 치뜨며 라파엘로를 바라보았다.
“손님이 왔으면 빨리 좀 와라.”
바옐은 혼자서 오지 않았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먼저 제다이어가 깍듯하게 그에게 인사했고…….
“으어어…….”
엉망인 꼴로 포박된 남자가 거의 눈이 뒤집히려 했다. 옷은 구깃구깃하기는 했으나 상당히 부유한 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뭐지?”
라파엘로의 물음에 바옐이 대답했다.
“선물.”
저게 선물이라고? 라파엘로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고양이는 보통 쥐를 잡아 오지 않나?”
바옐은 뭔 소리냐고 되물으려다가 또 자신이 고양이 취급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그냥…… 다음번에는 코뿔소쯤으로 모습을 바꿔야 정신을 차리지!’
정체를 숨기기 쉽고 기동성이 좋아서 고양이를 선택한 것뿐이지 원한다면 당장 위협적으로 큰 동물로 변신할 수도 있었다. 바옐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눈치챈 제다이어가 재빨리 붙들어 온 남자의 정체를 밝혔다.
“저 사람은 하임벨 영주입니다.”
‘하임벨 영주……?’
라파엘로의 시선이 다시 그 남자에게 닿았다. 보통 영주가 바뀌면 서로 안면을 트고 친목을 도모하며 우호적인 관계임을 확인하는 작업을 한다. 라파엘로는 작위 계승 후, 서부 공작령에 들르지 못해 주변국의 지배자들과 안면을 틀 일이 없었다. 하임벨 영주의 얼굴도 오늘 처음 보았다. 그는 카예나가 예전에 데니안 사제의 신전에서 말해 준 적 있었던 계획을 떠올렸다.
“여기 상황은 대충 정리해 두고 서부 공작령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임벨을 흡수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바옐이 손가락을 튕기자 하임벨 영주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황녀는 깨어났어?”
그의 물음에 라파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마신 모양이네.”
바옐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근데 공작아.”
“그냥 라파엘로라고 불러라.”
“그래, 라파엘로야. 혹시 너희 집 좀 크냐?”
이건 대체 무슨 의도를 담은 질문이지? 라파엘로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다가 대답했다.
“황성만큼 크지는 않아도 현존하는 귀족의 성 중 가장 클 거다.”
바옐이 만족스럽게 손뼉을 짝짝 쳤다.
“다행이다. 그럼 나 건물 하나만 줘.”
“……내게 맡겨 놓은 건물이라도 있는 건가?”
“너 때문에 데니안이 대사제가 되면 내가 머물 곳이 사라지잖아!”
라파엘로는 못마땅해졌다.
“하지만 내 어머니는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캭! 고양이 아니라니까!”
그래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곳은 나중에 카예나와 자신의 신혼집이 될 텐데 군식구까지 데리고 살아야 한다니. 사실 아직도 바옐을 향한 은근한 견제가 남아 있었다. 라파엘로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바옐이 눈살을 찌푸렸다.
“야, 설마 너…….”
바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너 진짜로 나한테 무슨 마음이 있는 거 아니지……?”
성년식에서 라파엘로가 아무렇지 않게 했던 그 성…… 뭐라는 단어에 받았던 충격이 여전히 생생했다. 가뜩이나 황녀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데…….
‘저 새끼도 정상이 아니야.’
그 말에 라파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고양이 하나쯤은 내 집에 머물게 해도 될 것 같군.”
“뭐라고? 이 공작 놈이!”
제다이어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생각했다.
‘귀족이나 마법사나 다 좀 이상한 사람들이네…….’
역시 이런 높은 사람들의 생각은 자신처럼 평범한 소시민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별채로 자리를 옮기지.”
라파엘로는 그렇게 말하며 바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바옐이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짧은 순간 동안 고뇌에 빠졌다.
‘……에스코트인가?’
근데 그거 남자한테도 하는 거였나? 인간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사이에 예법이 바뀐 건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왠지 유행에 뒤떨어진 늙은이가 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옐이 그 손 위로 제 손을 턱 얹었다.
“…….”
“……?”
라파엘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바옐이 후다닥 손을 떼며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여기서 바로 별채로 이동해 달라고 손을 내민 거였는데.”
“그, 그런 거면 말로 했어야지!”
바옐은 괜히 예법에 밝은 척,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척, 안 늙은 척하려다가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 그가 씩씩거렸다.
“그리고 난 순간 이동할 때 접촉할 필요 없거든!”
마법도 모르는 무식한 놈! 바옐이 그렇게 매도하듯 호통치자 라파엘로가 순순히 인정했다.
“아, 내가 잘 몰라서.”
“이익……!”
더 약이 올랐다. 저 건방진 공작 놈에게 뭐라고 혼쭐을 내고 싶었으나 솔직히 이길 자신은 없었다. 바옐은 괜히 진 빼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응접실에 있던 세 사람이 순식간에 카예나가 있는 별채 앞으로 이동했다. 카예나가 바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바옐.”
“흥!”
심통 난 바옐은 카예나의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카예나가 쟤 왜 저러냐는 표정으로 라파엘로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모르겠다는 듯이 시치미를 뗐다.
제다이어를 제외하고 다들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황녀, 공작, 마법사 사이에 같이 껴서 앉기에는 신분 차이가 너무 컸다. 제다이어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본 카예나가 빈자리를 가리켰다.
“당신은 여기에 앉아.”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이었는데 카예나가 신경 써 주자 제다이어는 살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지배 계층이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써 주는 것은 대단한 배려였다.
“감사합니다.”
다들 자리에 앉자 바옐이 말했다.
“하임벨 영주는 잡아 뒀어. 이제 어떻게 처리할 건지 정하는 일만 남았는데, 어떻게 할래?”
카예나가 말했다.
“생각한 시기보다는 일이 너무 빨리 처리됐어.”
원래대로라면 제다이어가 하임벨 영주를 키드레이 공작 성으로 피신시키기까지 한 달을 보았다. 수도로 그 소식이 전달되려면 또 보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예상했다. 빨리 처리해서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상황이 무르익을 필요가 있었다.
“황위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이들이 생기며 좀 더 엉망이 됐을 때 공작가에 하임벨이 흡수되었다는 소식이 퍼져야 해.”
카예나가 그리는 그림은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었다. 레제프는 이미 실각했고, 현재 귀족들은 다음으로 유력한 이델에게 관심을 보이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 라파엘로가 이델의 가정 교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견제할 이들이 수두룩하다. 이델은 어리고 공작가의 힘은 강력하다. 어린 황제를 세워 섭정하려는 게 아니냐며 탄원할 수 있었다.
‘혹은 공작가보다 훨씬 만만한 이델을 공격하거나.’
카예나는 후자의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부패한 귀족들이 작당해서 저들 입맛에 맞는 방계 황족으로 황조를 바꾸려 들 때를 노려야 해.”
그렇게 썩어 빠진 제국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대대적으로 개선할 생각이었다.
“하임벨의 부유함을 공작가에서 흡수했다는 점과 이로써 율령 왕국과 국경선이 맞닿게 되었다는 사실이 귀족들에게 경각심을 주게 되겠지.”
더는 제국의 3대 가문 중 하나가 아니라 키드레이 공작가가 독보적으로 득세한 가문이 될 것이다. 나중에 그녀가 라파엘로와 결혼하게 된다면 공작가로는 격이 낮으니 자연스럽게 대공가로 격상할 발판도 마련할 수 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바옐이 말했다.
“결론은 무력과 재력으로 깽판 치겠다는 뜻이잖아? 거기까지는 이해했는데, 그래서 그 이델인가 뭔가 하는 애가 몇 살인데?”
“열세 살이야.”
“열세 살짜리를 황위에 앉히겠다고?”
카예나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 너무 가혹하겠지. 이델이 성년식을 치를 때까지는 내가 제국을 통치하려고 해. 그러는 편이 귀족들도 훨씬 말을 잘 들을 거고.”
그녀가 황제로 등극하면 카트린을 황태후로, 이델을 황태제로 삼을 생각이었다.
제국의 체질 개선까지 가이드라인이 다 잡힌 상황이다. 여기서 남은 문제는 카예나였다.
“그럼 너는 어떻게 황위에 오르려고?”
“나야 뭐, 그냥 짠 하고 다시 황궁에 들어가도 상관없지. 나는 여전히 국정 대리인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등장하면 재미없잖아?”
‘대체 뭐가 재미없다는 건지.’
바옐은 괜히 머리가 아플 것 같으니 묻지도 않고 테이블에 놓인 간식을 집어 들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역시 달콤한 것이 최고였다.
“윽.”
그런데 달아도 너무 달았다.
“이거 뭐야? 이게 쿠키야, 설탕 덩어리야?”
“설탕 쿠키야.”
“……그래.”
바옐은 입을 다물었다. 라파엘로가 달지 않은 간식이 담긴 접시를 그에게 건네주며 카예나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델 영식에게 공작가를 정식으로 방문하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그때 전하께서도 영식과 만나 보시겠습니까?”
“제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걱정할 것 같은데……. 공작가를 방문하면 별채에서 잠깐 보면 좋겠네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예나는 바옐이 불평했던 설탕 쿠키를 한 입 먹었다.
‘적당히 달고 맛있는데.’
어쨌든 이제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전처럼 하루빨리 무언가를 해낼 시간이 아니었다.
카예나가 기다리는 반응들이 끓어올라 폭발할 시간이었다.
* * *
레제프는 이변 없이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었다면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그러지 않았다. 신성 재판에서 레제프가 카예나를 보호했던 일 때문이었다. 다만 딱 거기까지다. 레제프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관용은 그게 적정한 수위였다.
황제가 죽고 황녀가 사라지고 황자는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황좌를 언제까지고 비워 둘 수도 없다. 민중은 지배자의 부재를 국력 약화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민심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
카예나가 예상한 대로 귀족들은 차기 후계자로 가장 유력한 이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카예나의 외가인 하멜 백작가는 카트린을 가문에 입적했을 뿐인데 온갖 이득을 취할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되었다.
황녀의 외숙부인 조나단 백작은 눈치 볼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벌써 제국의 주인이라도 된 양 굴었다. 이대로 잘 풀리면 자신이 황제의 외숙부가 되는 것이다. 조나단 백작은 사교계를 활발하게 누비며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조카가 된 이델을 원할 때 언제든 볼 수 있는 사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제가 바쁘다 보니 이델을 못 본 지도 꽤 되었군요. 친척 간에 교류가 잦아야 가정이 화목해지는 법인데 말입니다.”
그 속내가 빤한 말에 사람들은 겉으로 미소만 지었다. 그때 한쪽 입꼬리만 휙 올려 웃던 노신사가 점잖게 말했다.
“이델 군은 키드레이 공작가를 들르느라 외숙부보다 더 바쁜 듯하던데…… 굳이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의 일침에 주변에 있던 신사들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조나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황녀 전하야말로 하멜 백작의 친조카가 아닙니까? 뭐, 찾는 시늉도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다지 화목할 의지는 없으신 모양입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노신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이미 이델을 내치기로 한 자가 대부분이었다. 가뜩이나 강력한 키드레이 공작가의 힘이 독보적으로 강해지면 곤란하다. 그들은 황조를 바꾸며 새로운 3대 가문이 탄생할 때가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정말 세간의 말대로 에스테반 황제 폐하께서 악마가 맞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분의 장례가 이토록 조촐하게 치러졌을 리가 없지요.”
사람들은 황제의 부덕함, 그가 마법사라는 소문, 실제로 부실하게 치러진 장례를 두고 여론을 조성하려 했다.
“그런 분의 핏줄이라니……. 또 똑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고, 솔직히 우려스럽습니다.”
“이, 이델은 마법사가 아니에요!”
조나단은 몹시 당혹스러워하며 극구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슬그머니 불안감이 들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자칫 악마의 핏줄과 엮인 가문이라고 같이 규탄받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조나단 백작은 이후로 카트린을 하멜 백작가에서 곧장 제명했다. 그 매정한 처사에 다들 혀를 끌끌 찼으나 이해는 했다. 혹시 악마의 아들이라고 땅땅 확정 나 버리면 그때는 하멜 백작가도 연대 책임을 질 수 있으니까.
귀족들은 연합처럼 뭉쳐 열심히 불온한 소문을 조장하고 이델을 궁지에 몰았다. 또한 키드레이 공작가가 어린 이델을 데리고 섭정하려 한다며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모두 카예나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그 무렵 중대한 소식이 수도를 강타했다. 하임벨이 키드레이 공작령에 복속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가뜩이나 강대한 군대를 보유한 가문이 어마어마한 금력까지 가지게 되었다.
더불어 율령 왕국과 국경선이 맞닿게 되며 키드레이 공작령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키드레이 공작가가 사실상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이 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수많은 귀족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여기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지도상에서 그들 가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이델이 황제가 되고 키드레이 공작이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겠구나. 다들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상하게도 키드레이 공작가에서는 이델을 황위에 올리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태도였다.
* * *
황제가 죽고 후계자도 없이 지낸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어갔다. 민중은 새로운 통치자가 없다는 사실에 몹시 불안에 잠겼다. 곧 어느 국가에서 이때를 기회 삼아 제국에 쳐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제국은 사분오열로 갈라져 자신들의 터전이 사라져 버리겠지.
전쟁에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고통 받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민중이다. 그들은 이 상황이 일촉즉발, 세상이 무너지기 전 잠깐의 고요함 같다고 생각했다. 불안에 잠긴 민중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카예나 황녀 전하를 찾아라!”
제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사라져 버린 자신들의 영웅을 찾기 시작했다. 황녀의 초상화는 따로 제작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제국 전역에 황녀의 초상화가 뿌려져 갤러리라도 차린 것처럼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이 한창 황녀 찾기에 혈안일 동안 공작저의 별채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카예나의 직속 시녀들이 찾아온 것이다.
“전하!”
그들은 지금껏 카예나가 괜찮다는 이야기만 듣고 얼굴을 보지 못해 속앓이했다. 그런데 오늘 보게 된 카예나는……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다들 오랜만이구나.”
카예나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간 급변하는 제국 정세에 휩쓸리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 애쓴 이들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수고들 많았다. 이제 다들 마음 놓아도 돼.”
카예나가 마음을 놓아도 된다고 하면 정말 상황이 끝난 것이다. 이제야 자신들이 승리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간 수고가 많았습니다, 줄리아 후작.”
카예나의 경칭에 줄리아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막 황궁에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굳건해진 표정과 태도로 카예나를 향해 예를 갖췄다.
“이 모든 것이 전하 덕분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평생 전하를 주군으로 모시며 곁에서 보필할 것입니다.”
줄리아의 모습을 다들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디 말씀을 낮춰 주세요. 언니들도요.”
그들은 서로 다독이며 그간의 안부를 묻는 등 이야기를 풀었다. 대화 주제는 곧 최근 제국민들이 황녀를 찾는 것으로 흘렀다. 수잔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참에 건국 신화는 비비지도 못할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내는 게 어떨까요?”
베라가 대꾸했다.
“하늘이 내린 군주, 카예나 황제 폐하! 이런 느낌이요?”
카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다들 이 주제가 마음에 쏙 들었는지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하늘이 내린 군주라는 말에 아, 하고 말했다.
“하늘에서 구름 계단을 타고 내려오셨다고 하면 신의 딸 같으면서 신비롭지 않을까요?”
줄리아가 말했다.
“어디서 보니까 알에서 태어난 왕도 있대요. 황금으로 된 알이면 괜찮을 것 같아요!”
“할 거면 차라리 꽃이 낫죠. 거대한 꽃송이에서 짠 하고 나타나는 거예요.”
“붉은 망토를 두르고 백마를 탄 채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나시는 것도…….”
카예나가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다들 재미있니?”
그 물음에 다들 까르르 웃었다. 카예나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언제쯤 황위를 계승하실 생각이신가요?”
베라의 물음에 카예나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우며 어딘가 착잡하게 말했다.
“……레제프가 수도를 떠나면.”
다들 카예나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했다. 올리비아는 침실에서 일어난 참상을 직접 당하고 목격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쓰라렸다. 그녀가 카예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러자 카예나가 고맙다는 듯이 눈을 힘없이 휘며 손을 마주 잡았다.
유배형을 선고받은 레제프가 곧 수도를 떠난다. 카예나는 그가 이곳을 떠나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레제프…….’
모든 게 다 해결되었다. 그러나 그 문제만큼은 카예나에게는 평생 풀지 못할 숙제 같았다. 그녀는 모든 일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언제나 정답에 가깝게 살려고는 했다. 그게 뜻처럼 잘 풀릴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카예나는 레제프가 바로 그런 잘 풀리지 않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때 베라가 말했다.
“전하께서 선택하신 게 옳아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한 치도 의심할 것 없다는 듯이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뒤이어 수잔도 줄리아도 동조했다.
“가장 최선을 다한 선택을 하셨다고 생각해요.”
카예나는 그들의 말이 고마웠다. 이들을 모을 때만 해도 이렇게 끈끈한 우정을 나누리라고 짐작했었던가? 절대 아니었다.
‘그래. 이게 삶이구나.’
계속해서 선택하고 성공과 실패가 아닌 애매한 일이 삶에 흔적을 남겼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절대 있을 수 없었던 형태였다.
“다들 고맙구나.”
카예나는 자신을 옥죄며 조종하던 실을 이제야 완전히 벗어 낸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 이제야.’
이제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베라가 카예나에게 물었다.
“키드레이 공작님은 아직도 서부 공작령에 계시나요?”
라파엘로는 하임벨을 공작령에 복속시키기 위해 바옐과 함께 서부로 떠난 상태였다. 얼마 전에 수도로 하임벨이 복속되었다는 소식이 도착했으니 아마 일이 거의 마무리 단계일 것이다.
“한동안은 그곳에 머물러야겠지. 나도 슬슬 공작령으로 출발해야 할 테고.”
카예나가 서부 공작령으로 간다는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수잔이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살림을 차리러 가시는 건 아니시죠?”
“수잔.”
너무 거침없는 질문에 베라가 얼른 그녀를 만류하려 했다. 카예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살림은 7년 후에 차리겠지.”
그 말에 다들 눈을 반짝 빛냈다. 뉘앙스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청혼받으신 거예요?”
카예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더니 가느다란 목걸이를 풀어 거기에 달린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여 주었다.
“어머!”
다들 입을 틀어막았다.
“진짜로 결혼하시는 거예요? 그럼 키드레이 공작님이 국서로……?”
공작이 국서가 되면 키드레이 가문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이 혼란스러워하자 카예나가 설명했다.
“내가 황위를 이델에게 물려준 다음에 결혼하기로 했어.”
“아아!”
“와, 그러면 최소 7년은 연애한 다음에 결혼하시는 건가요?”
카예나가 긍정하자 누구보다도 크게 탄성을 내지른 것은 줄리아였다.
“너무 로맨틱해요……!”
사실 귀족 사회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연애한 후에 결혼하는 일은 없다. 보통 집안이 맞아서 곧바로 약혼하고 결혼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카예나도 그 점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가 연애결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 생에 결혼은 팔려 가는 결혼 아니면 가상의 남편을 만들어 낸 가짜 결혼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수잔이 히죽 웃었다.
“전하를 두고 앞으로 키드레이 공작님이 애가 많이 타시겠어요.”
그건 다들 공감하는 바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게요. 부마 경쟁도 치열했는데 국서 경쟁이라니.”
“그래도 키드레이 공작님이 곁에서 두 눈 부릅뜨고 있으면 누가 그 자리를 넘보겠어요?”
“7년이면 국서 자리를 노리고 덤벼들 사람이 한둘은 분명 있을 것 같기는 해요.”
그들은 한마디씩 보태다가 라파엘로가 고생할 것은 자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공작령은 왜 가시는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올리비아의 물음에 카예나가 대답했다.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하임벨을 삼킨 것을 율령 왕국이 두고 볼 리가 없지. 그들 입장에서는 지금 엄청난 비상사태거든.”
“그렇겠네요. 갑자기 제국과 국경선이 맞닿게 되어 버렸으니까.”
“게다가 야만족은 키드레이 공작님을 두려워한다고 들었어요. 그들은 이제 자연스럽게 율령국을 약탈하겠네요.”
베라가 정확하게 분석했다. 야만족은 서부 공작령이 침체기일 때 야금야금 영역을 넓히다가 라파엘로에게 한 번에 정리당했다. 그 후로 야만족은 라파엘로가 있는 공작령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하임벨을 위협하며 약탈해 왔다.
그런데 하임벨이 공작령에 흡수된 것이다. 베라의 말대로 그들은 라파엘로를 건드리는 대신 율령 왕국으로 시선을 돌릴 것이다. 올리비아가 뒤이어 말했다.
“그러면 율령 왕국에서 접촉을 시도하겠군요. 협상이든 협박이든 하려고 하겠지요.”
“그런 곳에 전하께서 가시겠다고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혹시 율령 왕국에서 군대라도 끌고 와서 뒤엎으려 들다가 휘말리면 어쩌려고 그곳에 가겠다는 것일까?
“전쟁을 들먹이며 시비를 걸어올 게 뻔한데 국정 대리인은 당연히 나가 줘야지. 내가 자연스럽게 복귀할 좋은 상황도 만들어질 테고.”
하지만 카예나가 공작령에 가려는 이유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임벨이 키드레이 공작령에 흡수되면서 제국의 귀족들은 부수적인 이득을 얻었다.
‘예를 들어 교역로를 이전보다 훨씬 낮은 수수료로 이용할 수 있다든가.’
그런데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하임벨을 가로채려 하면서 전쟁을 거론한다? 욕심 많은 제국의 귀족들이 용납할 리 없었다.
카예나의 설명에 그녀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전하께서 환궁하시는 날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때는 세상의 주인이 바뀌게 되리라.
* * *
며칠 뒤, 바스턴이 별채를 찾아왔다.
“레제프 황자의 유배지가 결정되어 오늘 마차에 실려 떠난다고 합니다.”
“……알려 줘서 고맙구나.”
카예나가 조용히 대답했다. 바스턴은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수도의 공작저 별채에서 죽은 사람처럼 존재감 없이 지내는 것도 이제 끝이었다. 마법의 힘이 사라진 시점에서는 무모한 짓을 하기보다는 그저 이대로, 완전히 고리를 끊어 내는 편이 좋겠지. 카예나가 입술을 열었다.
“바옐.”
그녀의 부름에 이제는 친숙하기까지 한 치즈 고양이가 등장했다.
-마침 타이밍 좋네.
“왜?”
바옐이 말했다.
-율령국에서 보낸 사절단이 공작성에 도착했거든.
얼추 때가 비슷하게 맞아떨어지리라고는 생각했다. 카예나는 자신의 차림새를 확인했다. 별채에서 많은 사용인을 부리며 호화롭게 지낼 수 없으니 옷차림은 단출하게 유지했지만 사절단 앞에서 평민이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등장할 수는 없었다.
“으음, 드레스가 필요한데. 어떻게 안 될까?”
카예나의 말에 바옐이 혀를 끌끌 차더니 꼬리를 바닥에 내리쳤다. 탁! 그러자 발아래에서부터 새하얀 빛무리가 그녀의 몸을 감싸며 위로 올라왔다. 그 둥근 빛무리가 지나간 자리부터 카예나의 옷차림이 변하기 시작했다.
슬리퍼는 공단으로 덧입혀 보석을 달아 놓은 구도로 바뀌었고 연두색 원피스는 우아한 형태의 검은 드레스로 탈바꿈했다. 황제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상복을 입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금빛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위로 틀어 올려져 장신구로 고정되었다.
카예나는 별채 안에 있던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해 보았다. 완벽한 예복 차림이었다. 마치 회귀 전에 읽었던 신데렐라가 왕실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요정 대모의 도움으로 아름답게 변신했을 때의 그 장면 같았다.
“꼭 요정 대모 같네. 아니, 요정 고양이인가?”
-흥, 헛소리할 시간 없어. 방금 율령국 사신이 도착했다고.
탁!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야가 바뀌었다.
-괜찮아?
바옐의 말에 카예나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뭐가?”
-몸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러자 바옐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예나가 마법사일 때 공간을 편집해서 붙여 넣었다면 바옐은 실체가 아주 빠른 속도로 순간 이동을 하는 방식이다. 그랬기에 순간 이동할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반발력으로 인해 평범한 인간은 심하게 앓아눕는다.
‘그런데 아무런 여파가 없는 것처럼 멀쩡하다고? 계약 마법사였기 때문인가…….’
바옐도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기에 뭐라고 딱히 결론짓지는 못했다.
-뭐,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는 카예나를 데리고 능숙하게 성안을 누볐다. 곧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서더니 그가 앞발로 벽에 달린 줄을 가리켰다.
-저걸 당기면 그 제레미인가 뭔가 하는 자가 올 거야.
카예나는 바옐의 설명대로 줄을 몇 번 잡아당긴 후 잠시 기다렸다. 달칵. 제레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카예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반가워요, 제레미 경.”
카예나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보았다. 붉은 깃발 행렬이 눈에 보였다.
“율령국에서 누가 왔죠?”
“아… 뤼힌 왕태자와 왕녀가 방문했습니다.”
‘왕녀?’
이런 자리에 왕녀를 데리고 왔다는 것은…….
‘결혼 동맹을 원하는 건가?’
라파엘로는 아직 미혼이며 약혼자도 없다. 전쟁으로 협박하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왕녀를 들이밀며 결혼으로 설득하는 편이 훨씬 낫다.
“왕태자가 아예 머리가 없는 편은 아닌 모양이네요.”
“아하하…….”
제레미는 황녀의 신랄한 말에 억지로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강대국의 왕태자를 두고 저렇게 말하다니. 등골이 다 서늘했다.
‘역시나 담이 남다르시다고 해야 할지.’
“지금쯤 다들 다이닝 룸에 도착하셨을 겁니다. 그곳으로 모실까요?”
카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가죠.”
* * *
서부 키드레이 공작가로 붉은 용이 그려진 깃발을 매단 거대한 행렬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모두 율령국의 사신이었다. 선두 쪽에 휘황찬란한 장식이 돋보이는 마차가 보였다. 이내 마차가 공작가 앞에서 멈춰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가무잡잡한 피부색에 거대한 몸집의 30대 남자가 내렸다. 라파엘로와 달리 초콜릿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과 선이 완전히 짙은 이목구비였다. 그가 바로 율령국 왕태자, 뤼힌이었다.
율령은 왕국이지만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나라다. 제국에 비하면 부족하다고는 해도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한 군대를 소유하기도 했다. 엘다임 제국 바로 다음이라고 해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뤼힌 왕태자 전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뤼힌은 제게 정중히 예를 갖추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엘다임 제국의 허여멀건 남자들은 하나같이 비리비리했다. 진정한 남자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라파엘로만큼은 인정해야만 했다. 건장한 체격의 뤼힌에 견주어도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키와 체격, 게다가 외모는 아름다웠다.
“키드레이의 새로운 주인이 되신 것을 축하하오, 공작.”
뤼힌의 입가로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내 손아래 누이도 동행했는데 에스코트를 부탁해도 되겠소?”
곧 왕태자가 내린 마차 바로 뒤편의 마차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키가 훌쩍 크고 육감적인 몸매의 미인이 내려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파엘로 키드레이입니다.”
여자가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처음 뵈어요, 키드레이 공작님. 율령 왕국의 제5 왕녀 사히르라고 해요.”
사히르 왕녀가 등장하자 역시나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직하게 탄성을 내질렀다.
‘무식하게 전쟁으로 협박질하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야.’
뤼힌 왕태자는 미인계를 이용해 키드레이 공작을 회유할 생각이었다.
‘듣자 하니 엘다임의 제1 황녀가 그렇게 미인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고작 스무 살 된 애송이가 아니던가?’
튀힌 왕태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곧이어 라파엘로가 성안으로 안내하기 위해 사히르 왕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사히르가 눈가를 휘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아름다워 보이는지 잘 아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라파엘로는 무심코 살짝 웃었다. 갑자기 카예나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카예나만큼 미모를 무기로써 적절히 잘 휘두르는 사람을 본 적 없었다.
‘미모보다는 지략으로 상대의 무릎을 꿇리는 것을 더 잘하시지만.’
예비 아내가 될 분이 워낙 호락호락하지 않으시니 혹시라도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지.
바로 곁에서 라파엘로의 흐드러지게 핀 미소를 발견한 사히르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어릴 때부터 라파엘로의 미모가 남달랐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실물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 남자와 결혼한다면…….’
사히르는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 왜 동행했는지 잘 알았다. 그녀는 제 미모가 통하지 않았던 순간을 경험해 본 적 없었다. 그랬기에 그림 같은 선남선녀가 운명처럼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사히르가 그의 팔을 조금 더 깊이 붙잡았다. 그러자 라파엘로의 몸이 살짝 움찔했다. 그 미세한 떨림을 느낀 왕녀가 입가로 옅은 웃음을 머금고 살짝 위를 올려다보았다. 라파엘로의 붉은 눈동자와 그대로 마주쳤다.
흠칫. 사히르의 입가에 지은 미소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대신 불쾌한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라파엘로의 눈빛이 무감하다 못해 냉혹했다.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이럴 리가 없었다. 자신에게 이런 눈빛을 보내는 남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곧 자신이 착각이라도 한 것처럼 라파엘로는 특유의 건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이닝 룸의 문고리를 잡고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 네.”
사히르는 다시 정신 차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창으로 바깥의 아름다운 조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다이닝 룸이었다.
라파엘로는 연회라도 벌일 듯한 규모의 정찬 대신 내밀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를 선택했다. 어차피 하하 호호 웃고 떠들자고 마련한 자리가 아니다. 뤼힌 왕태자는 키드레이 공작가가 율령 왕국의 스파이처럼 비치도록 행동하고 있었다. 사히르 왕녀를 데려온 것도 속내가 뻔했다.
‘황제가 죽고 후계자도 없는 상황에 이런 식의 접촉은 제국 내의 내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기도 하니.’
이 자리는 어디까지나 약식이며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저들에게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차려졌다. 뤼힌은 은근한 미소로 라파엘로에게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키드레이 공작이 아직 미혼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약혼자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히르는 그의 무덤덤한 대답에 아까 보았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내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사히르 왕녀의 미모는 율령에서도 최고로 손꼽힙니다.”
“그렇군요.”
뤼힌은 라파엘로가 상당히 무관심하게 대꾸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키드레이 공작의 짝으로 율령의 왕녀라면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기도 할 테고.”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마음에 둔 정인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불편하니 거두어 주십시오, 왕태자 전하.”
그의 말에 뤼힌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갑자기 정인이라니? 정인이 있는데 왜 약혼도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말이 되지 않았다.
“……공작에게 정인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라파엘로는 싸늘해진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예. 카예나 황녀 전하이십니다.”
뤼힌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설마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은 아니겠지?”
왕태자의 표정이 슬슬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가 손에 쥔 나이프를 꽉 움켜쥐고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앞에서 지금 사라진 황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해질 무렵이었다.
똑똑. 라파엘로의 보좌관인 제레미가 문을 두드린 후 잰걸음으로 들어와 공손하게 아뢰었다.
“마지막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마지막 손님이라고?”
뤼힌이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채 역정 내듯 물었다.
“감히 율령의 왕태자가 직접 방문했는데 다른 손님을 들여?”
그가 당장에라도 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노기를 흘렸을 때였다.
“늦어서 미안하군요.”
긴장감을 단숨에 흩트리는 청아한 음성이었다. 사뿐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이어지며 고아한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인이 등장했다. 얼굴을 반쯤 가린 망사를 걷자 그려 낸 듯 완벽한 미형의 외모가 드러났다.
“아니…….”
뤼힌이 당장 집어 던질 듯이 콱 틀어쥐고 있던 나이프를 테이블 위로 툭 떨어뜨렸다. 사히르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비견해도, 아니, 비교하기도 싫을 정도로 압도적인 미모의 여자였다.
카예나가 빙긋 웃었다. 자신이 어떻게 웃으면 가장 아름다운지 잘 아는 확신에 찬 미소였다.
“엘다임 제국의 제1 황녀이자 국정 대리인, 카예나 힐입니다.”
라파엘로는 당장 카예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기분을 억지로 눌렀다. 대신 다정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모습에 사히르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깨달았다. 라파엘로가 자신의 손등에는 입을 맞추지 않았다는 것을.
뤼힌은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카예나에게 완전히 홀린 듯한 표정을 했다. 그러다가 카예나가 말한 ‘국정 대리인’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제가 사라진 지금, 국정 대리인인 카예나가 제국의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얼른 정중하게 예를 갖춰야 마땅했다. 그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카예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율령의 왕태자, 뤼힌이 인사드립니다.”
뒤이어 사히르 왕녀가 예를 갖췄다.
“제5 왕녀, 사히르가 카예나 황녀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카예나의 시선이 사히르 왕녀에게 닿았다.
‘흐음, 사히르 왕녀라…….’
원작에서 사히르 왕녀는 크게 다뤄지지 않았지만, 분명 뤼힌 왕태자 쪽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조합은 뭐지?
‘감시역인가? 그렇다는 건 뤼힌을 물 먹이는 일에 도움을 줄지도 모르겠네.’
카예나는 쓸 만한 카드가 하나 손에 들어왔음을 직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뤼힌은 카예나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다가도 의아해졌다.
“황녀 전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이곳에서 뵙게 될 줄 몰랐군요.”
그는 상대가 정말 황녀가 맞는지, 대체 왜 이곳에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랬기에 의구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카예나는 청산유수처럼 미리 준비했던 대로 말했다.
“위기의 순간에 여기 라파엘로 공작님이 저를 구해 주셨어요. 덕분에 공작령에서 안전하게 몸을 숨기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카예나는 가련한 모습으로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황가의 치부를 이렇게 제 입으로 꺼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리네요…….”
그러니까 무례하게 남의 가정사를 더 캐묻지 말렴. 딱 그런 뜻이었다.
“아아, 제가 실례했습니다.”
뤼힌도 그 뜻을 알아듣고 한발 물러났다. 이제 성년이 된 황녀가 국정 대리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의아했다. 그런데 이렇게 대면하니 알 수 있었다.
‘얌전한 척하지만, 그 속에 발톱 이상의 것을 품고 있구나. 과연 허투루 국정 대리인이 된 게 아니라는 건가?’
재미있는 여자였다. 외모도 처신도 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때 잠깐 카예나와 시선이 부딪쳤다. 멈칫. 뤼힌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뭐지? 비웃는 것 같았는데.’
그러나 지금은 우아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뤼힌은 왠지 느낌이 이상했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카예나가 여유롭게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럼 이제 식사를 좀 들까요?”
순식간에 주도권이 카예나에게 넘어갔다. 마치 그녀가 이 정찬을 준비하기라도 한 듯 자연스러웠다. 라파엘로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카예나를 극진히 에스코트했다. 아까 사히르 왕녀를 에스코트하던 딱딱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뤼힌은 자리에 천천히 앉으며 둘의 모습을 묘한 눈초리로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라파엘로가 황녀를 두고 제 정인이라고 표현했다.
“두 분이 상당히 친밀해 보이십니다. 아까 키드레이 공작이 황녀님을 두고 정인이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의 말에 카예나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네, 사실이에요.”
뤼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면 곧 키드레이 공작 부인이 되시는 겁니까?”
카예나는 차가운 음료가 담긴 잔을 내려놓으며 뤼힌과 눈을 마주쳤다.
“공작령까지 오신 이유가 라파엘로 공작님이 누구와 결혼할지 알아보려는 것은 아닐 것 같은데요?”
쓸데없는 잡설은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넘어가자는 말에 뤼힌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좀 밟아 줄 필요가 있겠어.’
뤼힌은 카예나가 제법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만만하게 보았다.
“아아, 그렇지요. 상당히 중대한 사건이 있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니.”
그는 상체를 뒤로 나른하게 젖히며 일부러 서두를 깔아 분위기를 잡았다.
“하임벨 영주가 키드레이 공작령으로 귀화하기를 청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것은 하임벨 영주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임벨은 키드레이 공작령보다 오히려 율령과 더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하임벨 영주가 키드레이 공작령에 복속되기를 원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율령이 하임벨을 마치 식민지처럼 여겨 왔기 때문이지.’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으니 하임벨의 입장에서는 율령이 요구하는 대로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에 반해 라파엘로는 첫 번째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하임벨에 무관심했다. 하임벨 영주는 라파엘로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것 같으니 잘 구슬려 제 뜻대로 움직이려 키드레이 공작령으로 도망쳤으리라.
‘물론 이번 생에서는 바옐이 나서 주며 조금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지만.’
어쨌든 카예나는 이미 모든 정황을 다 꿰뚫고 있었기에 뤼힌 왕태자의 같잖은 말을 비웃지 않으려 애써 노력했다.
“하임벨은 엄연히 자주국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귀화를 판단할 수 없다니…….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씀이시군요.”
뤼힌은 카예나의 말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든 조금이라도 말실수하면 꼬투리를 잡아챌 것 같았다.
“자주국인 것과는 별개로 하임벨은 율령과 오랜 시간을 형제국으로 지내 왔습니다. 지금까지 율령에서 하임벨을 보살피는 대가로 여러 답례를 받기도 했지요.”
“아하, 그렇구나…….”
카예나는 뤼힌이 하는 뻔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에 성의 없이 반응했다. 라파엘로는 하마터면 피식 웃을 뻔했다가 음료로 목을 축이는 척 꾹 참았다.
“그 세월이 벌써 10여 년입니다. 율령에서는 하임벨을 귀화시키려 준비 중이었습니다. 아마 하임벨 영주가 좀 경황이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모양인데-”
“그럼 계약서가 있나요?”
뤼힌은 카예나가 말을 끊자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게 무슨 계약서가 필요한 일입니까? 하임벨은 우리 율령과 계속해서 형제국으로 지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임벨 영주를 불러 주십시오. 그와 직접 이야기해야겠으니!”
“뤼힌 왕태자.”
라파엘로가 나직한 목소리로 뤼힌을 불렀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섬뜩한 살기를 피웠다.
“황녀 전하 앞에서 행동을 조심했으면 하는데.”
뤼힌은 라파엘로가 감히 제게 경어를 쓰지 않는 것에 발끈했다가 분을 삭였다. 여기서 뭐라고 내질렀다가는 피를 볼 느낌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이런 쪽에서는 감이 몹시 예리했다.
“……제가 너무 흥분한 모양입니다.”
카예나가 약 올리기라도 하듯 빙긋 웃었다.
“어머, 왜 그렇게 흥분하셨지? 저는 깜짝 놀랐지 뭐예요. 국가 간의 동맹이나 귀화는 분명히 계약서가 필요한 일인데 형제국이라며 얼버무리려 들다니.”
그녀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점차 싸늘한 조소로 변했다. 뤼힌이 아까 기분 탓인가 여겼던 그 비웃음이었다.
“감히 엘다임 제국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율령이 내게 그딴 태도를 보일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녀의 서슬 퍼런 기세에 뤼힌이 몸을 움찔했다. 카예나는 입맛이 떨어졌다는 듯이 식기를 챙그랑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율령의 사절을 대접하려 내 직접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거늘. 왕태자는 눈앞의 내가 국정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지?”
“그, 그건……!”
그 부분에서 뤼힌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카예나는 현재 사실상 황제와 같은 위치였다. 국가 통치자가 아니라 아직 후계자에 불과한 뤼힌은 그녀와 동급이 아니었다. 이것은 명백히 카예나가 그를 대우하고 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정식으로 황위를 계승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뤼힌은 이런 어린 계집에게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황녀께서는 제가 지금 상당히 배려해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카예나는 계속해 보라는 듯이 조소를 머금으며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엘다임 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도 이웃 국가로서 율령이 한 배려를 정녕 이해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다른 국가였다면 당장 이것을 기회로 군대를 일으켰을 겁니다!”
“아아, 그 말은 율령에서 지금 엘다임 제국을 칠 수도 있는데 봐주고 있다는 뜻인가?”
“욕심이 지나치면 탈이 나는 법입니다.”
정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카예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왕태자가 머리가 좀 잘 돌아가는 줄 알고 놀랐었다. 그러나 역시나, 그는 멍청했다.
‘소설에서도 분명히 멍청했거든. 갑자기 똑똑해진 줄 알고 놀랐네.’
뤼힌이 왕태자일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장남이어서였다.
‘그것도 곧 동생에게 뒤통수 맞고 폐위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뤼힌의 몰락은 예정된 것이다. 그 말은 뤼힌이 실수하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그 기회를 카예나가 만들어 주면 덥석 물어 내분을 일으키리라.
“그럼 그렇게 해.”
카예나의 말에 뤼힌이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다시 친절하게 웃으며 말해 주었다.
“전쟁을 일으켜 보라고.”
“……황녀!”
“다만 그렇게 되면 각오해야 할 거야.”
카예나가 아까 테이블에 던지듯 놓았던 나이프를 들어 그를 가리켰다.
“지금 당신, 적진에 맨몸으로 들어와 있는 거 알아?”
스릉! 뤼힌 왕태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당장 검을 뽑아 들었다.
“제법 영특한 줄 알았더니 미친 황녀였군.”
전쟁은 입에 쉽게 담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타국의 후계자에게 대놓고 협박질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꺄악-!”
카예나가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벌컥! 다이닝 룸의 문이 활짝 열리고 당황한 표정을 한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들은 뤼힌 왕태자가 홀로 자리에 일어선 채로 검을 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율령의 왕태자가 갑자기 검을 빼 들고 나를 겁박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수도 공작저에 있다가 라파엘로를 따라온 정예 기사들이었다. 그랬기에 카예나의 얼굴을 금방 알아보았다.
“화, 황녀 전하?”
갑자기 여기에 황녀가 왜 나와? 그들의 표정이 딱 그러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벌인 판에 장단을 맞추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뤼힌 왕태자를 막아섰다.
“정녕 전쟁이라도 선포할 생각인가, 뤼힌 왕태자!”
뤼힌은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이 미친것들이-!”
그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카예나를 가리켰다.
“내게 나이프를 들고 죽이겠다고 협박해 놓고 뭐가 어째!”
그때 사히르 왕녀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흐흑…… 오라버니, 대체 왜 그러세요? 율령을 위기에 빠뜨리려 하시다니요!”
그녀는 당장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카예나에게 사죄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황녀 전하! 이것은 율령의 뜻과 다릅니다. 뤼힌 왕태자 전하의 독단입니다!”
“사히르! 미쳤느냐?”
뤼힌이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사히르를 다그쳤다. 그러나 사히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사사롭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자는 율령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카예나는 사히르 왕녀의 연기력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었다. 이렇게 뛰어난 연기력으로 자신을 도와주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사히르 왕녀를 보호하라.”
기사들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사히르 왕녀와 뤼힌 사이를 가르며 그녀를 보호했다.
“감히, 감히 나를 모함하려 들다니!”
카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카예나 힐은 국정 대리인으로서, 뤼힌 왕태자가 보인 행동에 대해 율령에 공식 서한을 보내겠다.”
그러니 그쪽 왕가 내에서 알아서들 치고받고 싸우시길.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다이닝 룸을 떠났다.
* * *
뤼힌 왕태자가 공작가 내에서 전쟁을 거론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는 사실에 비상사태가 되었다. 자칫 당장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율령국에서 온 사절들은 왕태자의 방만하고 어리석은 행동에 경악했다. 이대로 공작가의 군대가 그들을 둘러싸 모두 척살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어찌 왕태자께서 그런 무모하고 무도한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절단으로 같이 왔던 율령의 원로들이 노발대발했다. 그들은 다행스럽게도 사히르 왕녀가 당장 사죄를 구하며 사태를 무마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뤼힌 왕태자는 키드레이 공작가를 고작 귀족 가문 중 하나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해는 했다. 그는 어쨌거나 왕족이며 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이니 작은 영토 하나 다스리는 귀족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키드레이 공작령은 수도로 직결되는 전방 전선이다. 그만큼 제국에서도 손꼽히게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원로들은 이 사태를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이대로 뤼힌 왕태자를 후계자 자리에 두었다가는 제국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 미치겠군요. 사히르 왕녀 전하는 어디에 계십니까?”
“엘다임의 황녀와 이야기 중이라고 합니다만…….”
그들은 황녀 이야기에 동시에 표정을 와락 구겼다. 사라진 줄 알았던 황녀가 대체 왜 이곳에서 튀어나온 것인가!
“사히르 왕녀 전하라면 영민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분이시니 잘 해결하시겠지요.”
원로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카예나와 사히르의 독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 * *
카예나는 라파엘로에게 부탁하여 사히르 왕녀와 단둘만 있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사히르 왕녀는 응접실로 이동하자마자 카예나를 향해 예를 갖췄다.
“황녀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인사에 카예나가 빙긋 웃었다. 마치 뜻을 같이하기로 작당한 사이처럼 교묘하게 말하는 게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예나는 호락호락하게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
“사히르 왕녀라면 나와 말이 통하리라고 생각했어요.”
뜻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서론이었다. 사히르는 멈칫하다가 얼른 미소를 걸쳤다.
“……저를 너무 후하게 평가해 주시는군요. 무려 제국의 국정 대리인이신 황녀님과 제가 말이 통하다니.”
카예나는 사히르를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정보들이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제게 유리하게 연출하는 능숙함. 기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을 때 일거에 상대를 제압하는 전략적인 성향. 둘은 비슷한 과였다. 왕녀는 방어적으로 말했다.
“이번 일로 뤼힌 왕태자는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려질 겁니다. 그러니 부디 그의 무례가 율령의 뜻과 다르다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이런 경우는 원만하게 넘어가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 그러나 카예나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율령이 엘다임 제국과 전쟁을 원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 사절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율령의 뜻이라는 것에 이견은 없겠지요?”
사히르 왕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카예나는 미처 그 긴장감을 인식하지 못한 척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임벨은 탐나는데 공작가보다 명분은 부족하고. 제국의 정세가 완전히 어그러진 것 같으니 전쟁이 벌어질 만한 상황에 소극적으로 나올 것 같고.”
말이 길어질수록 사히르 왕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카예나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때 슬쩍 압박해서 운이 좋으면 하임벨을 넘겨받는 거고, 안 되면 말고.”
“……황녀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찔러나 보자 싶어서 사절을 보낼 수도 있죠. 이해해요.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카예나가 그들의 속내를 직구로 적나라하게 풀어내 버렸다. 왕녀는 설마 카예나가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 몰랐기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말 하나하나가 율령의 정확한 심정이었다. 하임벨을 얻어 오면 좋고 안 되더라도 그것을 빌미로 뤼힌 왕태자를 끌어내리고. 율령의 입장에서는 조금도 손해가 없는 일이었다. 카예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죠? 나라면 그렇게 했을 테지만 내가 당하는 건 싫어서.”
“…….”
사히르 왕녀는 자신의 역량으로는 카예나를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가 당장 저자세로 사죄했다.
“저로서는 제국의 뜻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제 부족함을 보아 넘겨 주십시오.”
“어머, 물론이에요. 저는 율령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걸요.”
사이가 좋아지려면 율령은 감히 제국을 이용하여 저들의 잇속을 채우려 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우선 하임벨에 관련한 문제는 앞으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완전히 서류로 정리했으면 하는군요.”
하임벨 영주가 키드레이 공작가로 귀화를 요청했다고 해도 둘이서만 그렇게 하자고 말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 하임벨은 국가 간의 암묵적인 합의 아래에 사실상 불가침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으로 인해 하임벨에서도 많은 편의를 받았다. 율령에서 걸고넘어지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카예나는 그 사실을 정리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오늘 일어났던 무도한 일에 비하면 내가 요구하는 것은 별것 아닐 것 같은데, 아닌가요?”
사히르는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뤼힌의 실수를 바랐지만 이렇게 대책 없는 사고를 치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아니, 황녀만 없었어도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았을 텐데.’
“황녀님의 뜻을 율령에 전달하겠습니다.”
“역시 우리는 말이 통할 줄 알았어요.”
사히르는 조금 불안해졌다. 듣자 하니 제국에 후계자가 공석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황녀가 차기 황제가 된다는 뜻인가?
‘제국은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겠구나.’
절로 탄식이 쏟아질 일이었다. 이후로 대화를 좀 더 나눈 뒤 일이 마무리되자 카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히르 왕녀가 부디 내 뜻을 왕국에 잘 전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카예나는 황위에 오르기도 전부터 율령을 압도했다. 이 사실이 수도에 퍼지기를 기다린 후 금의환향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하인의 안내를 받아 라파엘로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방으로 들어오자 자상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일은 잘 마치셨습니까?”
“그럼요.”
몇 주간 보지 못했던 터라 그들은 잠시 서로를 꼭 안으며 온기를 나누었다. 그 고요하고 평온한 감각에 안정감이 들었다. 평생을 같이할 동반자라는 확신이 주는 그런 유대감이었다. 라파엘로는 부디 이곳이 카예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랐다. 언젠가 이곳이 그녀의 집이 될 테니 편안하게 머물렀으면 했다.
“성을 구경시켜 드릴까요?”
그의 마음이 카예나에게도 느껴졌다. 그녀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그들은 손을 잡고 키드레이 공작성을 같이 거닐었다. 수도의 대저택도 라파엘로의 집이지만 이 공작성이야말로 키드레이 공작가의 진정한 본거지이다. 군대를 보유한 가문다운 기강이 여실히 느껴졌다. 바깥의 정원의 규모도 대단했다. 기본적으로 말을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 여기저기 조성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노아 대부인도 수도의 여느 귀부인답지 않게 체격이 좋았다.
카예나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은 이미 공작성 내부에 일파만파 퍼진 상태였다. 공작성의 사람들은 황녀가 이곳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라파엘로와 연인이라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라파엘로의 태도였다.
‘세상에, 우리 주인님이……?’
그들은 라파엘로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수 있으리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더군다나 누군가를 애틋하고 살뜰하게 챙기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로 여겼다. 결혼도 하지 않을 것처럼 굴던 라파엘로가 사랑에 빠진 모습이라니. 그들은 이 충격적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러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막 시작한 연인의 풋풋함과 두 사람의 성숙함으로 인해 느껴지는 안정감이 섞이며 참으로 보기 좋았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체력을 고려해서 적당히 안내한 다음 가장 중요한 장소를 소개했다.
“여기가 나중에 전하께서 쓰실 공간입니다.”
그곳은 공작가의 안주인이 쓸 침실과 접객실이었다. 대부인은 이곳을 이용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벽의 장식이나 가구 위로 흰 천이 다 덮여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카예나는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는 않았으나 언젠가 자신의 공간이 될 방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그렇게 말했다.
라파엘로가 방을 둘러보는 중인 카예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슬픔이나 기쁨 같은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카예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 안아 주었다. 카예나는 제 허리를 감은 그의 팔을 쥐며 설핏 웃었다.
“결혼이라는 게 잘 상상이 안 가네요.”
이미 첫 번째 생에서 결혼은 해 보았다. 비록 누군가의 축복 속에서 혼례를 치르거나 멀쩡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일까? 카예나는 자신이 결혼하면 어떻게 될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라파엘로와 결혼해서 이곳의 안주인으로서 생활하고 언젠가 아이를 낳고 기르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게 당장은 남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우리의 일상이 되어 있을 겁니다. 부부가 되어 같이 잠들고 일어나서 생활하고, 그렇게 서로의 시간을 나누게 되겠지요.”
카예나가 천천히 뒤를 돌아 라파엘로를 바라보았다. 그가 담백하지만 진솔하게 말했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그게 라파엘로의 진심이었다.
“어서 당신을 부인이라고 부르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하지만요.”
그 말에 카예나는 웃고 말았다.
“그럼 저는 당신을 여보라고 부르게 되겠네요?”
그러자 라파엘로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가 약간 침음을 흘리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기뻐서 곤란하군요.”
언젠가, 그리고 조금은 빨리 그때가 오기를.
* * *
율령은 카예나에게 뭐라도 더 꼬투리 잡힐까 봐 황급히 공작령에서 물러났다. 그러고는 곧 공식 서한을 황궁으로 보냈다. 황녀와 구두로 이야기했던 하임벨 귀화 문제에 대해 율령에서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뤼힌 왕태자의 무례를 공식적으로 사과하며 그는 폐위했으니 부디 양국의 사이에 문제가 없기를 바란다고 쓰여 있었다.
덕분에 수도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럼 황녀 전하께서 지금 공작가에 머물러 계신다는 뜻인가?”
그들이 뜬금없는 이야기에 혼란스러워할 때 이번에는 공작가에서 보낸 파발이 도착했다. 황궁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황녀가 공작가에 도움을 요청하여 몸을 숨겼다가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여 등장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반 남작가를 비롯하여 에반스, 도티 가문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귀족 회의를 열었다.
“지배자가 이토록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서 황녀 전하를 모셔 와서 황위를 계승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미 세는 카예나에게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직계 황족이 다 사라진 줄로만 알고 새로운 황조를 세울 단꿈에 빠져 있던 이들은 모두 납작 엎드렸다. 황위에 앉기도 전에 율령이라는 강대국을 벌써 기선 제압한 것은 보통 사람이 해낼 일은 아니었다. 카예나가 또다시 제 능력을 스스로 검증해 낸 것이다.
카예나의 활약은 제국민 사이에서도 금방 퍼졌다. 황녀를 찾아 헤매던 그들은 카예나가 제국을 위해 혜성처럼 다시 나타난 것에 열광했다.
카예나의 귀환식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키드레이 공작가의 기사들이 황녀가 탄 마차를 철두철미하게 보호하여 황궁까지 이동했다. 선두에는 흑마를 탄 라파엘로가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거리로 나온 제국민이 꽃잎을 뿌리며 소리 높여 카예나를 칭송했다.
“황녀 전하 만세!”
“황녀 전하 만만세!”
그들은 곧 자신들의 영웅을 황녀 전하가 아니라 황제 폐하라 부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축제라도 열린 듯한 분위기였다.
곧 마차가 황궁에서 멈춰 섰다. 하인은 수십 명의 귀족이 미리 모인 대회의장으로 달려가 알렸다.
“황녀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러자 긴장감 혹은 환희 같은 것이 회의장 내에 맴돌았다. 대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카예나가 라파엘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등장했다.
카예나는 은은한 광택을 뿌리는 하얀 드레스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은 길게 풀어 내린 채였으며 다이아몬드로 된 장신구 세트를 제외하면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았다. 수수한 차림새였으나 존재감은 대단했다. 신이 현현하기라도 한 것 같은 위풍당당한 귀환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귀족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예를 갖췄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이곳에 모인 귀족은 모두 가문의 수장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황녀를 향해 갖출 예로는 과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카예나를 향해서는 조금도 과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관식만 치르지 않았을 뿐, 사실상 이미 제국의 주인이었다.
카예나는 황좌로 걸어가 그곳에 앉았다. 황금으로 만들어 붉은 쿠션을 깐 거대한 의자에 앉았음에도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애초에 카예나를 위해 만든 자리처럼 완벽하게 어울렸다.
“모두 자리에 앉도록.”
그녀는 귀족들을 향해 경어를 쓰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빈자리에 앉았다.
“다들 수도를 굳건히 지켜 주어 고맙구나.”
그 말에 다들 고개를 조아렸다.
“율령처럼 제국의 상황이 혼란한 틈을 타 다른 마음을 먹는 자들이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나는 국정 대리인으로서 황궁으로 돌아와 제국을 안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
모인 이들 중 실제로 다른 마음을 먹었던 자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엘리반 남작이 나섰다.
“소신이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허한다.”
“제국 정세를 빠르게 안정시키려면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서론에 모두 다음 말을 짐작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엘리반 남작이 강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이 시간 이후로 황위를 계승하시길 청원합니다.”
이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이미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카예나의 황위 계승을 예상했다. 그랬기에 엘리반 남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너도나도 주군을 향한 예를 갖췄다.
“황위를 이어 주십시오!”
카예나는 황좌에 앉은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그대들의 염원에 따라, 짐이 제국을 다스리겠노라.”
귀족들이 새로운 황제를 향해 부복한 채로 외쳤다.
“황제 폐하 만만세!”
카예나가 황제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 일 이외의 것을 처리해야 했다.
“카트린과 이델은 황가의 직계 혈족으로서 힐의 성을 사용할 수 있으며 황태후와 황태제 위를 내리겠다.”
“명을 받듭니다.”
“드뷔시 재상은 직위를 파하고 엘리반 남작에게 후작위를 수여하여 차기 재상으로 발탁한다.”
순식간에 후작으로 격상한 엘리반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성심을 다하여 폐하를 보필하겠습니다.”
“짐을 보좌하였던 네 명의 직속 시녀에게는 모두 백작위를 수여하겠다. 줄리아 에반스 후작에게는 작위를 대신하여 하임벨의 교역로에 대한 이권을 주겠다.”
그러자 이곳에서 같이 자리하고 있던 줄리아가 들뜬 표정으로 얼른 일어나 감사 인사를 올렸다.
“폐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줄리아와 눈이 마주친 카예나가 살짝 웃어 주었다. 카예나는 굳이 엄숙하게 위엄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들 그녀의 입이 열릴 때마다 마른침을 삼켜 댔다. 제국의 권력 구도가 실시간으로 개편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빠른 안정화를 위해 그대들이 노력해 주리라 믿겠네. 그럼 이만 폐회하지.”
카예나는 폐회를 선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위를 계승한다고는 했지만 당장 대관식을 치를 상황은 아니었다. 지배자가 부재한 기간이 너무 길었다. 그간 쌓인 업무를 처리할 생각에 벌써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베라와 올리비아만큼은 황궁 내에 직책을 마련해서 붙들어 놓아야지. 가능하면 수잔도.’
그들은 작위만 있을 뿐인 귀족이니 충분히 부려 먹을 수 있으리라. 그녀가 대회의장 입구에서 멈춰 선 채 뒤를 휙 돌아보았다.
“라파엘로 공작은 짐을 따라오도록.”
그 말에 라파엘로가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명을 받듭니다, 폐하.”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귀족들이 슬그머니 카예나와 라파엘로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 눈초리들에 묘한 기색이 스며 있었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회의장을 나왔다. 밖에서는 이미 베라와 올리비아, 수잔이 대기하고 있었다.
“황위 계승을 축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마음 같아서는 축배를 들었으면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베라가 말했다.
“폐하께서 쓰실 침소는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베라는 율령에서 보낸 공식 서한이 도착하자마자 황궁을 갈아엎었다. 특히 카예나가 사용하게 될 황제의 침소는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했다.
“카트린 황태후 마마와 이델 황태제 전하께서 사용하실 공간도 정비해 놓았으니 언제든지 입궁하셔도 됩니다.”
“고맙구나.”
역시 그녀의 시녀들은 유능했다. 이제 직속 시녀로 곁에 두지는 못하더라도 의전 시녀로 삼아 중요한 자리에는 꼭 붙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백작위를 주신 것에도 감사드립니다.”
올리비아의 말에 카예나가 빙긋 웃었다.
“너희가 없었다면 이런 날을 맞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나를 도와 다오.”
그녀의 소탈한 말에 다들 손을 내저었다.
“폐하께서 저희를 이끌어 주셔야지요! 저희가 무엇이라고 폐하를 돕겠습니까?”
그 말에 카예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내가 일을 많이 시킬까 봐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수잔이 대답했다.
“……조금은요?”
이미 카예나의 아래에서 혹독하게 굴러 보았던 이들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수잔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멀리서 줄리아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설마 저만 쏙 빼놓고 회포를 푸신 건 아니시죠!”
격의 없는 말에 베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이제 시작이다. 황녀궁 시절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나를 믿고 따라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러자 다들 씩 웃었다.
“당연한 말씀을요.”
라파엘로는 대답 대신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것만으로 든든하게 의지가 되었다.
이들이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으리라. 오늘은 역사가 시작된 첫날이었다.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