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31
악녀는 마리오네트 외전 1장. 스무 살이 된 라파엘로(31/33)
외전 1장. 스무 살이 된 라파엘로
카예나가 황제로 즉위하고 제국을 다스린 지도 3년이 되던 해. 사교계의 가장 큰 이슈는 단연코 라파엘로의 대공위 승격 소식이었다. 황궁의 궁정인들은 요즘 모이면 다들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키드레이 공작님이 제국의 유일한 대공이 되시는 거겠네요?”
“그렇죠. 하인리히 대공이 서거하고 가문 자체가 바로 황실에 환수되었으니까요.”
누군가가 염려 섞인 표정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대공령이 독립국 선언이라도 하면 어떡하죠? 가뜩이나 하임벨과 영지를 합치면서 영향력도 커졌는데.”
키드레이 공작가는 하임벨을 삼키며 독립국과 다름없는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카예나는 그의 영향력과 공적에 걸맞은 작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대공위를 내리겠노라 선언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너무 큰 권한을 준 게 아닌가 하고 우려했다.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한 궁정인이 피식 웃었다.
“글쎄요……. 저는 과연 폐하께서 멀리까지 내다보신다고 감탄했는데요.”
다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폐하와 대공 전하의 사이가 심상치 않잖아요.”
“그런데 그거 정말이에요? 두 분 사이가 꽤 돈독해 보이기는 하지만….”
“거참. 이런 건 눈치죠, 눈치.”
사람들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자 찰떡같이 말을 못 알아듣는 이들에게 답답하다는 듯이 손가락을 가리켰다.
“폐하께서 항상 빼놓지 않고 끼고 다니시는 파란 다이아몬드 반지만 봐도……”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한가하신가 보군요.”
궁정인들은 몸을 빳빳하게 세웠다.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상급 시녀이자 황제의 측근인 애니가 보였다. 애니는 차분하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폐하께서는 제국을 위해 밤잠 줄이시며 일하시는데, 이곳에서 뭣들 하시는 거죠?”
“어… 잠깐 쉰다는 게……. 하하, 얼른 가겠습니다!”
애니는 부리나케 사라지는 궁정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근 라파엘로는 영지가 커지자 여러 제도적인 문제를 해결하느라 수도에 발길이 뜸했다. 원래도 사교계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았던 라파엘로가 수도에도 잘 오지 않자 사람들은 그의 소식을 몹시 궁금해했다.
애니는 궁정인들을 더욱 단속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폐하, 애니입니다.”
카예나는 오전 업무 시간이라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애니가 간식을 건네며 방금 있었던 일을 전달했다. 그러자 카예나가 작게 웃었다.
“뭐, 나와 대공의 사이가 비밀은 아니니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생길 것이라 짐작했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와의 사이를 굳이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라파엘로와 사전에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이참에 공식적으로 발표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제국민 사이에서 대공 전하의 지지율도 만만치 않으니 다들 두 분의 결합을 반대하지는 않을 텐데요.”
카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제국민들은 내가 황위를 내려놓는 일에 준비되지 않았어. 그런 와중에 라파엘로와의 사이가 공식적으로 알려지면 괜한 구설에만 오를 뿐이야.”
바람 잘 날 없이 거센 폭풍이 몰아치던 제국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부패한 자는 쓸려 가고 충신들이 기세를 잡았다. 제국은 눈에 띄게 부강해졌다. 태평성대가 찾아왔다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카예나는 ‘어두운 곳에 등불을 밝히는 지배자’라고 불릴 만큼 역대 황제 중 비교할 자가 없을 정도로 제국민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그게 카예나에게 문제가 되었다. 그녀는 이델이 스무 살 성년식을 지르면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황제가 된 게 싫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은 카예나에게 피로한 공간임은 확실했다. 첫 번째 삶과 이번 삶까지 그녀를 물고 할퀴고 엉망으로 굴려 댔던 장소였다.
그녀는 자신이 특별히 선하거나 어떤 소명 의식이 특출한 사람이어서 제국을 잘 다스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쁘게 굴 이유가 없어서. 딱 그 정도의 서늘한 이유였다. 카예나가 괜히 악녀 출신이 아니었다.
“이델이 별 탈 없이 물려받으려면 변수를 줄여야 해.”
라파엘로와의 사이를 입 밖에 내지 않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애니의 시선이 카예나의 손가락에 닿았다.
“그러시면서도 반지는 늘 착용하시잖아요.”
카예나는 라파엘로에게서 받은 약혼반지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로만 안 꺼내면 돼.”
생각하는 것과 공식 입장을 듣는 건 다른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은근히 티 내야 귀족들이 알아서 행동을 정리하거든.”
제국민들은 카예나의 손에 낀 반지를 보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귀족들은 다르다. 그들은 카예나의 손에 계속 자리하는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를 유심히 지켜볼 것이다. 대체 저게 뭔데 계속 끼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의미심장한 반지에 다들 나와 라파엘로 사이에 뭔가 더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녀의 미모는 가만히 있어도 온갖 것들이 꼬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미혼의 권력자이기까지 하니 헛된 욕심을 부리는 자들이 간혹 튀어나왔다. 그런 이들을 떨쳐 내기 위해 카예나는 일부러 궁정인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과하게 단속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도 너무 무섭게만 하지 말고. 황궁 실세가 애니라는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카예나가 짓궂게 웃으며 말하자 애니가 당혹스러워했다. 그녀를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친 사람이 다름 아닌 베라였다. 거기다 애니의 성격도 원래부터 철두철미한지라 그녀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다들 끙끙 앓는다는 말이 들렸다.
“제가 그리 까다로운 상사는 아닙니다, 폐하…….”
애니가 변명하자 카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 황제에 그 시녀라고 하기는 하더구나.”
그 말에 애니도 웃어 버렸다. 사실 카예나야말로 아랫사람들을 앓아눕게 하는 상사였다. 특히 카예나와 함께하는 국무 회의는 지옥이었다. 카예나에게는 귀족들 사이에서 새롭게 은밀한 별명이 붙었다.
폭군.
그녀의 기준에 맞지 않는 허접한 의견을 내놓는 인간은 그날로 카예나에게 찍혔다. 질문 폭탄이 쏟아지고 대부분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회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카예나가 작정하고 갈아 버리려고 하는 질문에 좋은 답변을 내놓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카예나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주까지 보고서로 작성해서 제출하라.”
물론 그 숙제들은 고작 일주일 만에 끝날 수 없는 양이었다. 국무 회의의 우등생은 늘 베라나 올리비아의 차지였다. 그 둘을 제외한 이들은 한 번 이상은 꼭 그 업무 폭탄을 경험했다.
애니가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하렴.”
카예나는 애니가 가져온 따뜻한 차만 홀짝거리며 업무에 집중했다. 계절은 겨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혹한기를 대비하기 위해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아 일거리가 많았다. 그래도 겨울이 되면 좋은 점이 있었다.
‘나도 라파엘로도 겨울에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라파엘로는 매년 겨울이 되면 한 달 정도 수도에서 머물렀다. 이번에는 대공위 수여식 때문에 조금 더 일찍 수도에 올 것이다. 카예나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났다. 그와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려면 미리 대부분의 일을 처리해 놓는 게 좋다.
방금 떠오르는 것 같았던 해가 빠르게 저물었다. 카예나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눈가를 문질렀다.
치직-!
“……?”
뭔가 선연한 느낌이 들었다. 카예나가 눈가에서 손을 떨어뜨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였지? 뭔가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가 났는데. 아니, 찢어지는 소리였나?’
치지직!
“-!”
시공간이 가로로 길쭉하게 찢어지다가 다시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카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마법……? 하지만 누가……?”
치지직! 치지지직-!
집무실 내부가 제멋대로 편집되고 엉뚱한 곳에 붙었다. 카펫 일부가 천장에 옮겨 붙고 책상의 절반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대로 이 장소가 완전히 어그러질 것 같았다.
카예나는 살갗에 정전기 같은 것이 따끔하게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다 파르스름한 스파크가 서서히 크기를 키워 가며 위협적으로 튀기 시작했다.
“바옐!”
카예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옐의 이름을 외쳐 보았으나 응답이 없었다. 바옐은 라파엘로의 집에 머물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그녀는 이곳을 나가야 할지 이대로 침착하게 기다려야 할지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다. 혹시 제멋대로 나갔다가 이 현상이 다른 곳까지 번지면? 그러다 인명 피해가 생기면? 차라리 혼자 죽는 편이 나았다.
파지직! 새파란 전격이 더욱 굵어졌다. 카예나는 서서히 창가로 움직였다. 바깥은 정원이라 사람이 없다. 여차하면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똑똑. 그때 집무실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황명이다!”
카예나의 날 선 외침에 되레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눈을 한 라파엘로가 다급히 들어온 것이다.
“폐하!”
위협적으로 넘실거리는 스파크가 카예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당장 새파란 전격이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저 남자가 왜 지금 여기에 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예나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도망쳐요!”
라파엘로는 제 몸을 스치는 스파크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카예나를 향해 달려왔다. 당장 이곳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가 전격을 뚫고 들어와 카예나를 붙잡았다.
그 순간 섬광이 터졌다. 파아앗! 너무 강대하여 섬뜩한 기운이었다. 섬광은 집무실 내부를 완전히 지워 버릴 듯이 하얗게 집어삼켰다. 순간 하얗게 물든 공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콰아아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응집된 기운이 폭발했다. 시야를 지워 버렸던 빛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카예나가 비명을 터뜨렸다.
“라파엘로!”
라파엘로가 집무실 끝으로 튕겨 나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 * *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 아픈 건 머리만이 아닌 것 같았다. 온몸의 근육이 다 찢어질 정도로 격하게 훈련한 다음 날처럼 몸이 무거웠다.
‘아냐… 얼마 전까지 치렀던 전쟁에서 이랬던 것 같은데. 등에 가시 채찍을 맞았지.’
라파엘로는 미간을 찡그린 채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낯선 공간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여기가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모양의 커튼과 가구, 침대의 차양이 눈에 들어왔다. 라파엘로가 두리번거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일어났어요?”
그가 눈뜨기를 애타게 기다린 것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단번에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의아해서 고개를 돌렸다.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여자가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연보랏빛 드레스는 마치 그녀를 감싼 꽃잎 같았다. 자신을 향해 뻗는 희고 고운 손과 쏟아지는 금빛 머리카락이 현실감 없는 장면들처럼 느껴졌다. 라파엘로는 이렇게 지독하리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황녀 전하께서 어찌 여기에 계십니까?”
그의 말에 카예나의 손이 미처 라파엘로에게 닿지 못한 채 멈췄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황망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라피……?”
‘또 저딴 애칭.’
라파엘로는 서늘한 눈으로 황녀를 보았다.
‘……그런데 내가 알던 황녀와 모습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애정이 스며 있는 건 똑같았다. 다만 제 기억보다 훨씬 차분하고 깊은 느낌이었다. 외모도 조금 달랐다. 어쩐지 어린 티를 벗어 낸 성숙한 여인처럼 느껴졌다.
카예나가 그의 이마를 짚었다. 라파엘로는 몸을 흠칫하며 그녀의 손을 쳐 냈다.
‘아, 이런.’
라파엘로는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깟 역겨움은 잠깐 참으면 그만인데.’
황녀가 또 울고불고 난리 치는 것을 두고 보는 것보다 역겨운 접촉이 나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잠깐 예민해진 탓에 실수했습니다.”
그런데 황녀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우는 대신 탄식을 터뜨렸다.
“설마…….”
그 반응이 의아하기는 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라파엘로는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어제 뭘 하고 있었지?’
그때 카예나가 불쑥 물었다.
“키드레이 경, 지금 몇 살이죠?”
이건 또 무슨 질문이야? 그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순순히 대답했다.
“스무 살입니다.”
카예나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미치겠네.”
황녀가 방만한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상스러운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나? 라파엘로는 눈을 깜빡거렸다. 카예나가 그의 얼굴을 보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곧 궁정 의원으로 발탁된 발데마르가 침실로 들어왔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의 인사에 라파엘로가 흠칫하며 주변을 휙 훑어보았다.
‘여기에 에스테반 황제가 있나?’
그러나 사람이라고는 오직 카예나와 그가 전부였다. 그때 카예나가 말했다.
“예를 거두거라. 대공이 깨어났으니 어서 진단해 보아라.”
라파엘로의 붉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카예나에게 향했다. 발데마르가 라파엘로를 발견하더니 화색을 띠었다.
“깨어나셨군요, 대공 전하.”
‘대공?’
눈을 뜬 순간부터 이해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라파엘로는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머리를 부여잡았다.
“라파엘로!”
카예나가 깜짝 놀란 눈으로 그의 앞으로 훌쩍 다가갔다.
“괜찮아요?”
장갑도 끼지 않은 곧고 가느다란 손이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흠칫! 라파엘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순간 손을 쳐 내려던 것을 억지로 참아 냈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아무렇지도 않지?’
그때 카예나가 순식간에 손을 거뒀다.
“아, 미안해요. 싫어할 텐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황녀는 그가 누군가와의 접촉에 역겨움을 느끼는 것을 모른다. 그런데 꼭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몸에 이상은 없으십니다. 타박상도 경미한 수준이고요.”
카예나는 잠깐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입술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 대공이 자신의 나이가 스무 살이라고 하는구나.”
“……이런.”
라파엘로는 계속 미간을 찡그린 채 이야기를 듣다가 물었다.
“제가 스물인 것이 문제입니까?”
카예나가 조심스럽게 그의 근처에 걸터앉았다. 그러면서도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였다.
“음, 키드레이 경. 경은 현재 스물여섯 살이에요. 곧 겨울이 지나면 스물일곱 살이 되겠지요.”
“…….”
카예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대공으로 승격했고 나는 이제 황녀가 아니라 엘다임 제국의 황제예요.”
하나같이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리고 가장 이해되지 않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지금 당신으로서는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예요.”
“그게 무슨……?”
그때 그의 뇌리로 어떤 기억이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카예나. 그녀를 바라보며 깊이 안도하는 자신. 그녀를 품에 안았던 기억. 그리고 파란 다이아몬드 반지.
그 파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지금 카예나의 손에도 버젓이 끼워진 상태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반박하려던 라파엘로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발데마르가 두 사람 눈치를 힐끗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부분 기억 상실인 듯합니다.”
“기억 상실이라고……?”
라파엘로는 머리가 텅 비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마치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았다.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이리라.
발데마르가 나가자 라파엘로도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여기가 황궁이라면 그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가려고요?”
“……제게 하대하십시오, 폐하.”
카예나가 황제라는 사실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으나 일단 장단은 맞췄다. 라파엘로의 태도에 카예나는 우는 듯 웃는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스무 살 때도 당신은 당신이네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옆에 놓인 외투를 들었다. 그의 것이었다. 카예나는 죄책감에 물든 얼굴로 외투를 건넸다.
“미안해요, 라파엘로. 나 때문에 당신에게 해를 입혔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를 구하려다가 당신이 휘말리는 바람에 기억을 잃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말투, 표정들에서 하나같이 진심이 느껴졌다. 또한, 진심 이상의 정중함도 느껴졌다.
라파엘로는 눈앞의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나름 잘 알았다. 그러나 지금 이 사람은 너무나 낯설었다. 거죽만 비슷한, 완전히 초면인 사람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알던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 감각은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그때 라파엘로의 앞으로 부드러운 황갈색 털을 가진 고양이가 반짝 나타났다.
-어, 이제 일어났네? 괜찮으냐?
뭐야, 이건?
라파엘로는 고개를 탈탈 흔들고서 다시 앞을 보았다.
-마력 폭풍에 휘말렸는데도 멀쩡한 걸 보면 확실히 이 녀석도 정상이 아니라니까.
고양이가 말하고 있었다.
카예나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어, 바옐.”
-뭐가? 네가 마법사로 각성한 건 특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명과는 상관없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그게 아니라……”
“마법사?”
라파엘로가 되묻자 바옐이 동공을 가느다랗게 좁힌 채 그를 보았다.
-뭐냐, 이 반응? 얘 왜 이래?
라파엘로는 말하는 고양이를 휙 들어 올렸다.
-캭! 이 싹퉁머리 없는 자식이! 허락 없이 들어 올리지 말라니까!
“……너, 날 알아?”
-뭐라는 거야, 갑자기! 네가 어디 소설의 기억 상실에 걸린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냐?
카예나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맞아…….”
-엥?
“라파엘로, 지금 기억 상실이라고.”
고양이의 커다란 눈이 깜빡거렸다. 그러다 입이 떡 벌어졌다. 바옐이 숙연하게 말했다.
-이 새끼, 크면서 특별하게 싸가지가 없어진 줄 알았더니 원래 싸가지가 없었구먼.
고양이의 말에 라파엘로가 피식 웃었다. 입 밖으로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몇백 년을 살아 놓고도 나잇값 못 하잖아.”
-뭬야!
라파엘로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방금 뭐라고 말한 거야?’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나는 이 고양이를 모르는데.’
버럭 화냈던 바옐도 쩝,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상태가 이상하네.
바옐이 몸을 뒤틀어 침대 위로 풀썩 내려오더니 라파엘로를 마법으로 강제로 눕혔다.
풀썩!
“……!”
라파엘로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뭔가가 그를 강제하고 있었기에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바옐이 라파엘로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그의 이마에 앞발을 턱 얹었다.
-마력의 흔적이 몸에 남아 있네. 그것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증상 같아.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쓰다 보면 금방 회복할 거야.
“……정말로 마법사인가?”
바옐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가짜 마법사겠냐?
카예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옐을 휙 들어 올리더니 품에 안았다. 라파엘로의 심신 안정에 바옐이 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파엘로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정확히는 기분이 더러웠다. 황녀에게서 저 고양이를 당장 떨어뜨려 놓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휙!
“……라파엘로?”
그는 그렇게 생각만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만 한 게 아니었다. 라파엘로는 어느새 제 손에 치즈 고양이가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뒤질래?
“…….”
진짜 내가 왜 이러지?
* * *
“대공 전하!”
제레미가 생소한 호칭을 입에 담았다.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제레미는 기억 상실이라는 단어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에둘러 말했다.
“대공저로 가시지요.”
“……그래.”
라파엘로는 최측근에게만 그의 상태를 알리고 외부에는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함구했다. 그는 황궁을 떠나기 전 뒤를 힐끗 보았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서 있던 카예나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마치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한 미소였다. 그게 이상했다. 그녀는 그런 배려심 있는 성격이 아닌데.
마차에 올라 공작저로 향했다. 아니, 이제는 대공저다. 라파엘로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게 너무나 스트레스였다. 자신이 아는 것과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돌아가는 동안 제레미가 6년의 공백을 채울 만한 굵직한 사건만 줄줄 읊어 주었다.
“에스테반 황제가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현재와 가진 기억의 괴리가 6년이다. 6년이 긴 시간은 맞지만, 이렇게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처럼 달라질 수 있는 시간이었나?
에스테반 황제는 죽고 레제프 황자는 유배되었다. 하인리히 대공자는 신성 재판에 따라 사형되었다. 양친은 이혼했고 아버지는 레제프의 손에 죽었다.
“레제프 황자가 아버지의 혼외 자식이라고…….”
머릿속으로 어지럽게 어떤 기억들이 떠돌았다. 황자궁에서 그와 뒤엉켜 주먹을 날리던 장면. 레오 프란시스를 향해 총을 발포하는 레제프.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계속해.”
제레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제국의 주인은 카예나가 되었다. 더더욱 믿기지 않는 점은, 그녀가 치세하는 지금이 제국의 전성기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대공이라니.
“외부에는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만, 폐하께서는 이델 황태제 전하께서 성년식을 치르고 나면 곧바로 황위를 물려주실 예정이십니다.”
“그러고 나서 나와 결혼한다는 건가?”
이 사실이 가장 믿기지 않았다. 자신과 카예나가 결혼한다니. 머리가 또 욱신거렸다.
대공저에 도착했다. 다행스럽게도 대공저는 자신의 기억에서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제 침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외부가 아니라 내부가 뭔가 이상했다. 옷이나 장신구가 원래 즐겨 쓰던 색상이 아니었다. 온통 파란색 아니면 노란색 보석으로 된 장신구가 즐비했고 밝은색 셔츠가 가득했다.
“설마.”
내가 이걸 고른 건 아니겠지. 라파엘로는 구석에 처박힌 검은 옷을 꺼내 입었다.
“엇, 제가 시중을 들려고 했는데요.”
바스턴이 후다닥 달려왔다.
“괜찮다.”
라파엘로는 원래도 스스로 잘 환복했다. 누군가와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바스턴은 주인이 스무 살 때까지의 기억만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목을 긁었다. 그 반응이 묘하게 라파엘로의 신경을 건드렸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그저…… 확실히 예전의 주인님 모습이 보여서 좀 생소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
“옙, 실언했습니다.”
라파엘로는 한숨을 머금은 채로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남자는 확실히 자신이 맞았으나 익숙한 모습은 아니었다. 좀 더 단단한 선이 생긴 얼굴, 기억보다 약간 부드러워진 인상, 그리고 사라진 등의 상처.
그는 야만족과의 전쟁 중 등에 가시 채찍을 맞고 길게 찢어진 상처가 생겼다. 워낙 깊은 상흔이라 흉터가 되어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그 상처가 온데간데없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녀가 한 일일까?’
“황녀…….”
라파엘로는 말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황제 폐하께서 정말로 나와 미래를 약속하신 게 맞느냐?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러자 바스턴이 기겁했다.
“지금 부분 기억 상실이라는 건 들었지만 절대! 지금의 감정대로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폐하께서 지금 주인님의 상태를 충분히 고려하실 분이시지만, 기억 돌아오시면 피눈물 흘리실 거라고요!”
“내가 피눈물을 흘려?”
라파엘로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바스턴이 조마조마한 표정을 했다.
아, 이 주인님이 진짜 실수하면 안 되는데!
“제 목을 걸고 확언합니다. 절대 기억이 돌아와서 후회할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아셨죠?”
그는 대답하지 않고 바스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툭 말했다.
“그런데 바스턴, 상당히 늙었군.”
“늙다니요! 저 밖에 나가면 동안 소리 듣는다고욧!”
“흠.”
라파엘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셔츠나 마저 입었다. 바스턴은 저 얄미운 입은 과연 어릴 적부터 독보적이었다고 생각하며 씩씩댔다. 그러다 문득 현실적인 고민이 퍼뜩 들었다.
“앗, 그러고 보니 대공위 수여식은 어떡하죠? 식의 규모는 크지 않게 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주요 인사는 다 참석하는 자리인데…….”
라파엘로는 대공의 지위는 받았으나 그것을 공표하는 식은 치르지 않은 상태였다. 이번에 수도로 내려오면서 식을 치를 예정이었는데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내가 6년 뒤의 나이에도 특별히 말이 많은 사람일 것 같지는 않은데.”
그의 말에 바스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절대 누구와 먼저 말을 섞지 않으십니다. 아, 바옐 크로노스 백작님만 제외하고요.”
“바옐 크로노스?”
“예, 전하의 절친한 친우분이십니다. 3년 전에 사귄 친우분이시라 기억은 못 하시겠지만요.”
“바옐…….”
라파엘로는 그 이름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가 치즈 고양이를 떠올렸다. 그 고양이의 이름이 바옐이었는데.
“고양이가 아니었나……?”
고양이와 친구라니, 좀 뜻밖의 말이었으나 이내 그러려니 했다. 잠시 후 그의 침실로 하인이 찾아왔다. 바스턴은 하인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파엘로에게 보고했다.
“발데마르 씨가 저택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는 상태가 완전히 낫기까지 발데마르 의원을 저택에 상주시키기로 했다. 곧 발데마르가 라파엘로의 침실을 방문했다. 발데마르는 그의 상태를 다시금 진단해 보더니 말했다.
“집 안에 있지 말고 자주 가시던 장소를 다니셔야 합니다. 그래야 기억이 빨리 돌아와요.”
바스턴이 첨언했다.
“그러면 황궁만 한 곳이 없기는 하네요.”
라파엘로는 입매를 굳혔다.
그렇다는 말은, 카예나와 마주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알았으니 다들 나가 보아라.”
라파엘로는 축객령을 내리고 홀로 침실에 남았다.
“내가 기억 상실이라니.”
라파엘로는 한숨을 내쉬며 제 침대로 향하다가 멈칫했다. 또 낯선 기억이 그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온화한 체향과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과 야릇한 감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카예나.”
그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미쳤군.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어. 자신이 그녀와 몸을 섞었다니. 라파엘로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며 마른세수를 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자신이 누군가와 그렇게 깊은 접촉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데 이 기억들은 뭘까?
라파엘로는 그녀가 제 얼굴을 감싸 쥐었을 때 아무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애써 잊었다.
“읏…….”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들에 두통이 짙어졌다. 깨질 듯한 두통과 동시에 어떤 생각이 들었다.
‘스물여섯 살의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이지?’
확실한 건,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라파엘로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상하게 이곳에서 어떤 향취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누군가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라파엘로의 시야가 까무룩 어두워졌다.
* * *
해가 서서히 떠오르며 빛이 스며드는 것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라파엘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주 이상한 꿈을 꿨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그러나 제 침실은 어제 보았던 그대로였다. 라파엘로는 자신이 진짜 스물이 아니라 6년의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바스턴이 시중을 돕기 위해 침실로 왔다.
“주인님, 바스턴입니다.”
“들어와.”
그는 스스로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바스턴이 시중을 들려 하자 하는 대로 맡겨 두었다. 이것도 익숙해져야 할 일이다. 바스턴은 라파엘로가 거의 입지 않았던 밝은색 셔츠를 꺼내 오고 노란 토파즈로 된 커프스단추를 채워 주었다.
“……훈련복이 아니라 왜 외출복이지?”
그는 오전 시간을 보통 훈련으로 보냈다. 그런데 지금 몸에 걸친 옷은 아무리 보아도 외출용 옷이었다.
“전하께서는 지금 휴가 중이시거든요. 겨울마다 수도로 오셔서 한 달 정도는 꼭 폐하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또 카예나 이야기였다.
라파엘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내 기억에 너는 분명히 황녀 전하가 이상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에이, 그게 언제 적 이야기입니까? 우리 황제 폐하처럼 좋은 분은 없어요!”
라파엘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 그게 내가 지금 외출복을 입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황궁으로 가셔야죠!”
저렇게 말할 줄은 알았지만 역시 내키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차라리 대꾸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마쳤다. 이동할 장소야 자신이 정하면 되는 거니까. 그는 마차 대신 말을 몰았다.
그에게 익숙한 장소라면 황궁 말고도 더 있으리라. 가령 황립 아카데미나 황립 도서관 같은 곳 말이다. 라파엘로는 황궁 대신 그곳으로 향했다. 그래. 분명히 황립 아카데미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폐하께 전하께서 오셨다고 아뢰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자신은 대체 왜 황궁에 도착한 거지? 라파엘로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시종에게 말했다.
“아니다. 그냥 돌아가겠……”
“라파엘로!”
그의 말이 미처 다 이어지기도 전에 카예나가 직접 문을 열고 나타났다. 어제 침실에서 환상처럼 느꼈던 온화하고 부드러운 체향이 그를 향해 훅 끼쳤다. 그는 몸을 움찔했다. 저도 모르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카예나를 끌어안을 뻔했다. 이상하게 눈앞의 여자가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미친 게 틀림없지.’
라파엘로는 뻣뻣하게 굳은 채 다가오는 카예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괜찮은 거예요?”
카예나는 한가득 기대를 담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저 얼굴은 아마 자신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을까 기대하는 것이겠지?’
그녀의 입장에서 그런 기대는 당연했다. 당연한 일인데…… 이유 모를 짜증이 치밀었다. 지금 저 여자는 스물여섯 살의 라파엘로를 사랑하고 있다. 스무 살의 라파엘로가 아니라.
분명히 자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관심을 몹시 귀찮을 정도로 받아 왔다. 조금도 달갑지 않은 관심이었는데. 그렇다면 지금도 그렇게 느껴야 정상일 텐데.
카예나의 얼굴에 미소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래도 미소는 여전했다. 다만, 씁쓸한 기색이 스며 있었다.
“어서 와요, 키드레이 대공.”
애칭도 이름도 아니었다.
라파엘로는 순간 기시감을 느꼈다. 그녀가 제게 이렇게 거리를 둔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그는 우선 카예나를 향해 예를 갖췄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카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파엘로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적정 거리 유지였다. 라파엘로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들어와요.”
그는 순순히 카예나를 따라 그녀의 개인 집무실로 들어갔다. 카예나가 애니에게 말했다.
“차를 좀 준비해 줄래?”
“알겠습니다, 폐하.”
집무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카예나가 걱정스럽게 그를 보았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다.”
묘하게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예나는 스무 살의 라파엘로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생각할지 잘 알았다. 당시의 카예나는 무척 어리석고 방만했다. 라파엘로에게 무례한 짓을 서슴없이 했었다. 그녀는 다시 라파엘로에게 정중한 태도로 거리감을 유지했다.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었죠? 이것저것 설명했어야 했는데.”
라파엘로는 어제 미처 묻지 못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럼 마법사이신 겁니까?”
카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갑자기 각성하게 되었어요. 그전에 바옐과 계약해서 계약 마법사로 지낸 적도 있죠.”
라파엘로는 그 말을 듣자 또 생소한 기억이 떠올랐다. 장소는 사냥터였고 카예나가 마법을 쓰는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그렇군요.”
그는 자신이 카예나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예나는 지금 이 상황을 몹시 어색해하는 라파엘로를 보며 작게 웃었다. 하긴. 그가 자신을 먼저 찾아온 건 스물세 살 때였다. 그것도 첫 번째 삶이 아닌 이번 생에서였다.
“사실 날 찾아오리라고 생각 못 했어요. 당신이 스무 살 때 우린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라파엘로는 그 말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저답지 않게 반박했다.
“저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느껴 본 적 없습니다.”
그의 날 선 반박에 카예나가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그 표정을 본 라파엘로가 아차 했다.
“제가 신사답지 못하게 말씀드렸군요. 부디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에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카예나는 엷게 웃었다.
“그냥 좀, 다행이다 싶어서요. 분명히 당신이 날 끔찍하게 여겼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야 당신이 싫어할 행동을 너무 많이 했으니까요.”
라파엘로는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 제가 사람과의 관계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말씀드렸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어쩌다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조심하려고 했고요.”
라파엘로는 아까의 기시감이 괜한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 카예나는 그가 누군가와의 접촉 따위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적정 거리를 유지했다.
지금도, 언제인지 모를 과거에도. 그는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원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카예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파엘로가 더욱 확실하게 대답했다.
“당신께서 저를 만지는 게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확실히 뜻밖의 말이었다. 카예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당신을 만져 봐도 될까요?”
정말 이상한 요구였다. 그런데 라파엘로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곧장 대답했다.
“네. 그러십시오.”
카예나는 내내 참았던 불안감을 터뜨리듯이 그를 끌어안았다. 코끝을 간질이던 향이 훨씬 짙게 그를 감쌌다. 도저히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황홀한 감각이었다. 라파엘로는 거의 본능적으로 카예나를 마주 안았다. 그녀를 품에 가두려는 것처럼 강하게 끌어안아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 감촉이다. 그는 이상하게도 여기서 어떻게 하면 카예나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지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라파엘로가 그녀의 목에 이를 세웠다. 그러자 카예나가 움찔했다. 반응이 왔다. 라파엘로는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욕구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중독적이었다. 이대로 본능을 따라 행동하고 싶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간신히 인내했다. 결혼을 약속했다고는 해도 자신의 기억에는 없는 약속이다. 지금 그녀는 제게 명백한 남이다. 기억이 돌아온다면 모를까 단순히 욕구에 져서 그녀를 안을 수는 없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를 놓아주었다. 카예나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은 너무 이성적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로의 뺨에 입을 맞췄다.
“-!”
라파엘로가 깜짝 놀라 제 뺨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카예나는 그 모습을 보고 하마터면 실소할 뻔했다.
‘이렇게 순진한 반응이라니. 스무 살이면 갓 성년이 되었을 때지. 당연한 건가?’
카예나는 좀 더 뻔뻔하게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라파엘로는 어쩌지도 못하고 알아서 조금 비켜났다.
똑똑. 그새 노크가 들리며 시녀가 들어왔다. 애니는 두 사람이 어정쩡하게 다정한 모양새로 있자 빙긋 웃었다.
“대공 전하께서 드실 차는 이것입니다.”
라파엘로는 의아하게 애니를 보았다.
‘왜 차를 따로 주는 거지?’
카예나가 이유를 설명했다.
“이게 진하게 우린 차예요. 당신 취향이죠.”
‘내게 취향이라니.’
라파엘로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대체 6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까지 제게 취향이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약간 미심쩍었으나 진하게 우린 홍차가 든 잔을 들었다. 일단 향은 괜찮았다. 한 모금 마셔 보았다. 그런데 향이 입안에 착 감기며 확실히 잘 넘어갔다.
“괜찮죠?”
“……네.”
카예나의 물음에 라파엘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또 어떤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아직은 차갑던 봄날에 카예나가 그에게 차를 내주던 장면이었다. 그때의 자신은 황녀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과 비슷하게.
“혹시 전에도 이렇게 제게 진한 차를 내주셨습니까?”
“맞아요.”
카예나가 눈에 띄게 화색이 도는 표정으로 그렇다고 긍정했다. 뭔가 더 기억났나? 그렇게 기대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라파엘로는 차를 내려놓았다.
“왜 더 마시지 않고……?”
그녀가 의문을 표하자 라파엘로가 대답했다.
“그냥 괜찮은 거지 제 입맛에 잘 맞는 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건 원작에서 확인한 확실한 정보이기도 했고 실제로 지금까지 그는 진하게 우린 차를 즐겨 마셔 왔다.
‘그렇다면 이건 그냥 심술부리는 것 같은데.’
카예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지금 질투해요?”
그러자 라파엘로가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잖아요. 지금 당신, 원래의 라파엘로에게 질투하고 있잖아요.”
라파엘로는 순간 욱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씀은 이상하군요. 원래의 라파엘로가 바로 접니다.”
오호라. 카예나는 완전히 감 잡은 표정을 했다.
‘기억은 잃었어도 나에 대한 마음은 남아 있는 건가?’
라파엘로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조금은 상처받았다. 자신이 뜻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완전히 마법사로 각성하는 도중에 벌어진 사고였으니 꾹 참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반응을 보니 라파엘로의 무의식에 자신을 향한 감정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여차하면 다시 꼬시지, 뭐.’
그녀는 묘한 미소를 걸쳤다. 애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카예나는 둘만 남자 아까와 달리 말도 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라파엘로의 어깨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까 만져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기는 했지만 이런 뉘앙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싫으면 말라며 손을 빼기라도 할까 봐 조용히 숨죽이기까지 했다. 카예나는 그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이번에는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또 움찔. 귀여운 반응에 카예나는 더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아까 내 목을 깨물던 그 남자 맞아요?”
카예나가 빙글빙글 웃으며 라파엘로에게 놀리듯 말했다. 그러자 라파엘로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당혹스러움을 좀처럼 능숙하게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허술한 라파엘로라니.
‘이게 바로 스무 살의 풋풋함인가?’
성숙한 분위기를 지닌 라파엘로는 섹시하고 남성적이다. 그런데 지금의 라파엘로는 확실히 스무 살 특유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서툰 느낌이 있었다.
“당신한테 이렇게 귀여운 면이 있었다니.”
라파엘로는 이제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딘가 초조한 기색도 느껴졌다. 카예나는 조금 고민했다.
‘여기서 더 놀리면 내가 나쁜 건가?’
그녀가 조금 고민했을 때였다. 라파엘로가 벌떡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갑자기요?”
카예나도 따라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 안 했는데 가면 어떡해?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어, 잠깐……!”
라파엘로는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꾸벅 고개 숙이더니 미처 카예나가 붙잡기도 전에 집무실에서 나갔다.
그는 자신이 바보같이 보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더 있다가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진짜 미치겠네.”
* * *
홀로 남은 카예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음, 너무 놀렸나?”
스무 살의 어린 영혼에게는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나?
‘키스라도 했다가는 아예 서부로 가 버리는 거 아닐까?’
하지만 아까 끌어안았을 때는 그가 더 적극적이었다.
“자연스럽게 계기를 마련해 주면 되는 건가?”
카예나는 이래저래 고민해 보다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러는 자신이 스무 살짜리를 어떻게 해 보려는 파렴치한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공간을 이동해 다시 업무 책상에 앉았다.
‘라파엘로의 몸에 남은 마력이 언제쯤 다 사라질까?’
바옐은 그것이 그의 기억 회로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 건 좋았다. 이제 그녀를 위협할 건 거의 없지만 이 능력은 확실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덕분에 애인은 기억 상실에 걸려 버렸지만…….
카예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얼른 대공위 계승식부터 해치우고 납치라도 할까?”
아까 보니까 무의식에 카예나를 향한 감정은 물론이고 짙은 스킨십을 나누던 버릇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흐음, 질투가 많은 남자이니 조금 건드리면 괜찮을지도.”
카예나는 이델을 호출했다. 상부상조할 때가 온 듯했다.
* * *
라파엘로는 밤잠을 설친 탓에 까칠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최근 며칠 동안 일어나자마자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잠을 설치고, 쉬지도 못했다. 계속 카예나만 생각났다. 그러다 보물찾기처럼 그녀와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혹시 이건 그 마력 폭풍인지 뭔지 때문에 생긴 부작용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온종일 카예나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는 며칠 전, 황궁으로 카예나를 찾아갔던 날 이후, 밖에 나가지 않았다. 바스턴이 곁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러다가 파혼당하시겠어요!”
그는 제 주인을 보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보기만 해도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여기서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황제 폐하를 노리는 날파리들을 떼어 내러 나가셔야 한다고요! 젊고 잘생긴 놈들이 폐하께 살살 꼬리 치는 걸 두고 보실 겁니까?”
라파엘로가 미간을 좁혔다.
“폐하께서 손에 약혼반지를 끼고 계시는데 누가 그딴 짓을 한다는 말이냐?”
“어이구.”
바스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순진해 빠진 주인님 같으니.
“요즘 같은 세상에 약혼이 대수입니까? 그런 건 깨 버리면 그만인데요.”
“폐하께서 그러실 리 없다.”
‘얼씨구.’
카예나를 온통 부정하는 듯하더니 이건 또 무슨 행동이람?
‘이게 바로 입덕 부정기인가?’
바스턴은 주인이 아무리 스무 살까지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지만 가지가지 한다는 불경한 생각을 품으며 말했다.
“만인지상의 주인이신 폐하께서 곁에 어리고 잘생기고 싱싱한 남자 여럿 거느리는 건 흠도 아니지요.”
그 말에 라파엘로의 표정이 슬쩍 구겨졌다. 바스턴은 자신이 지금 맞을 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나불거렸다.
“아니지. 아예 폐하의 애인 자리를 두고 경연 대회를 벌이면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들걸요. 그중에 주인님을 뛰어넘는 미모를 지닌 남자라도 나오면 어떡합니까?”
라파엘로가 손에 든 신문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스턴.”
“예?”
“내가 기억을 찾으려면 자네와 훈련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군. 지금 당장 연무장으로 가지.”
당장 가서 흠씬 두들겨 패 주겠다는 뜻이었다. 바스턴은 그제야 자신이 맞을 각을 재지 않고 너무 나불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쿠! 저도 그러고 싶은데 제가 이미 보좌관직을 맡은 지 오래되어서 주인님 상대를 해 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그것을 충분히 감안하여 상대해 주마.”
라파엘로는 봐줄 생각이 없었기에 바스턴의 목덜미를 쥐었다. 그대로 연무장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으아악! 잘못했어요!”
바스턴은 피도 눈물도 없는 라파엘로가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굴려 댈 것을 알았기에 싹싹 빌었다.
“저는 충심으로 드린 간언이었을 뿐입니다! 어흐흑!”
그가 라파엘로를 붙들고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버텼다. 그때 라파엘로가 멈칫했다.
“……왜 아무렇지 않지?”
카예나야 그렇다 쳐도, 지금 저도 모르게 바스턴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역질이 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떼더니 의아하게 제 몸을 훑어보았다. 바스턴은 눈치를 살살 보다가 라파엘로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주인님께서는 날이 갈수록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게 아무렇지 않게 되셨습니다. 다 황제 폐하 덕분이죠.”
자신이 모르는 시간 동안 절대 바뀌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해결되다니. 라파엘로는 대체 제게 카예나가 어떤 의미인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생각해 보기도 두려웠다.
‘만약, 그녀가 제 세상의 전부이면 어떡하지?’
라파엘로는 그런 관계성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늘 혼자였다. 누구에게 의지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리라고 짐작해 본 적도 없었다. 카예나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자신의 모습이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똑똑. 제레미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어딘가 난처한 기색이 있었다. 라파엘로가 의아해하는 사이 제레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하, 황태제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황태제?”
황태제라면 에스테반 황제와 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들었다.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전하께서는 황태제 전하의 선생이십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라파엘로는 머리가 약간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황태제 전하께서는 대공 전하의 상태를 모르십니다. 그냥 몸이 불편하시니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릴까요?”
“……아니다. 계속 아무도 안 만날 수는 없겠지.”
그냥 평범한 안부를 나누고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만 않으면 될 거다. 라파엘로는 황태제를 응접실로 모시라고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익숙하게 검은 셔츠를 꺼내다가 멈칫했다.
아까 바스턴이 나불거렸던 말이 뇌리에 찝찝하게 남았다. 자신보다 더 젊고 잘생긴 남자라. 라파엘로는 거울로 제 얼굴을 확인했다. 기억만큼 스무 살 특유의 앳된 느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의 수려한 외모는 기억보다도 더욱 무르익어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그는 약간 자신감이 사라진 상태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번도 제 외모에 크게 신경 써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의식하기 시작하니 다 이상해 보였다. 그는 괜히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겨 보았다. 반듯한 이마와 한 올 한 올 그려 낸 듯 완벽한 눈썹이 휙 드러났다가 다시금 가려졌다.
“……부족한가?”
그는 누가 들으면 재수 없다 못해 뒤로 넘어갈 소리를 했다. 라파엘로는 손에 든 검은 셔츠를 내려놓고 피처럼 붉은 실크 셔츠를 들었다. 몸에 걸치니 묘하게 야한 분위기가 풍겼다.
‘이건 너무 과한 것 아닌가?’
붉은 셔츠를 걸치고 타이와 화려한 보석 장신구를 몇 개 매치하니 수려한 외모가 더욱 화려해 보였다. 그는 긴 로브 형태의 외투까지 걸쳤다. 그러자 야릇하고 나른한 느낌을 자아냈다.
라파엘로는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레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라, 기억이 좀 돌아오셨나?’
이런 성숙하고 매혹적인 분위기의 차림은 스물여섯 살의 라파엘로가 즐겨 하는 것이었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제레미는 이델이 있는 응접실로 그를 안내했다.
“황태제 전하,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라파엘로는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년을 보고 흠칫했다. 카예나를 빼닮은 소년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던 탓이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라파엘로는 그의 인사에 정신 차렸다.
“황태제 전하를 뵙습니다.”
제레미는 분위기를 살피며 차와 다과를 준비했다. 이델에게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들켜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많은 권한을 가진 자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라파엘로는 최대한 상식 선에서 생각하여 이델에게 말했다.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게 이상했다.
“……갑자기 왜 예의를 차리십니까? 둘이 있을 때는 황태제고 뭐고 없다고 하셨으면서.”
“……?”
‘내가 그런 미친 소리를 했다고?’
제레미가 이델의 뒤편에서 고개를 열렬히 내저으며 입을 벙긋거렸다.
‘반말 쓰세요!’
라파엘로는 자연스럽게 제 상황에 맞춰 말을 돌렸다.
“……조금 점잖게 하려 했을 뿐이다.”
이델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예? 선생님이요?”
‘음. 대체 이후의 나는 뭘 하고 다닌 거지?’
라파엘로는 제 성격상 아무리 사제지간이라 해도 황태제에게 그럴 리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무슨 일로 왔지?”
이델은 라파엘로가 좀 묘하다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 이상한 백작이랑 어울리면서 변하시더니 오늘따라 초반에 뵈었던 선생님 같아지셔서 좀 어색하네요.”
“이상한 백작?”
“바옐 크로노스 백작이요. 선생님의 절친한 친우분.”
“…….”
대체 그 고양이랑 자신은 어떤 사이이기에 다들 그러는 거야? 게다가 그 고양이는 말을 상당히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선생님은 누님과 연애하신 지도 이제 꽤 되셨잖아요.”
“…….”
이델은 풀 죽은 얼굴로 말했다.
“선생님은 누님께 어떻게 고백하셨어요?”
라파엘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고백한 기억이 없는데.’
그는 대답을 회피하며 반문했다.
“그건 갑자기 왜?”
이델은 잠깐 머뭇거렸다.
“제가 그레이스 백작을 좋아하거든요.”
‘그레이스 백작은 누구지?’
라파엘로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갑자기 또 새로운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 기억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뭐지? 나와 연적이었던 것 같은 이상한 기억만 떠오르는데.’
그때 의문을 해소해 주기라도 하듯이 이델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그레이스 백작이 누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잖아요. 누가 보면 누님과 결혼한 사이인 줄 알겠다고요…….”
그 말에 순간 울컥하고 불쾌감이 치솟았다.
“그레이스 백작은 폐하의 충실한 신하일 뿐이다. 언젠가는 꼭 떨어져 지낼 사이라고.”
이델은 애잔하다는 눈빛으로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누님의 총애가 그레이스 백작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수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요.”
라파엘로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를 줄줄 말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신하를 향한 거라니까. 그렇게 치자면 베라렉턴 백작도 똑같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요. 이러다 누님이 황좌에서 내려오시면 서부까지 따라갈 기세란 말입니다.”
“추방할 거다.”
“……그렇게 유치하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저도 좋았겠죠.”
라파엘로는 갑자기 속이 끓었다. 젊고 어린 남자도 모자라서 성별을 가리지 않고 꼬이다니.
‘지금도 위험한 것 아닌가?’
일이 바빠도 매년 수도에 내려와 카예나와 한 달씩 시간을 보냈다더니, 아무래도 날파리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럼.’
그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당장 카예나의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카예나를 피했던 시간이 아까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궁으로 가야겠다.”
“예? 저 지금 연애 상담하고 있잖아요. 선생님이면 이 정도 고민은 좀 들어 줘요.”
“사랑은 스스로 쟁취해. 난 바빠.”
라파엘로는 냉정한 가르침을 내리고는 당장 마차를 준비시켰다. 그 과정에서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은 다름 아닌 바스턴이었다.
‘드디어 주인님이 정신 차리셨어!’
* * *
라파엘로는 기별도 하지 않고 바로 입궁했다. 왠지 그래도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자신은 늘 이렇게 그녀를 보러 갔던 것 같다. 황궁에서 일하는 궁정인들은 되레 그가 며칠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 며칠간에 두 사람의 불화설마저 생길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황궁에 유달리 젊은 남자 귀족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그들은 라파엘로의 등장을 발견하더니 흠칫 놀란 표정들을 지었다. 라파엘로는 이 상황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방문 소식을 들은 애니가 쪼르르 달려왔다.
“황제 폐하께서는 현재 국무 회의 중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시각, 카예나는 회의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국무 회의에 한바탕 시달린 대신들이 너덜너덜해진 표정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원래도 회의가 빡빡한 편이지만 최근 카예나는 더욱 험난하게 그들을 굴렸다. 라파엘로를 집 밖으로 불러내기 위해 대공위 계승식을 앞당기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폐회한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행정 관료가 된 수잔이 나직한 목소리로 절규했다.
“으윽, 폐하는 폭군……!”
베라가 수잔을 핀잔했다.
“폐하께서 들으십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안경을 잠깐 벗고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수잔이 그 안경을 힐끗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시력도 좋으면서 무슨 안경이에요?”
베라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야 폐하께서 무리하지 말라고 휴가를 주시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쉬고 싶으면 머리를 써야 했다. 카예나가 먼저 자리를 뜨자 대신들도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서 나가죠. 오늘도 폐하께서 내리신 숙제가 산더미네요.”
“으으…….”
수잔은 베라의 손에 붙들린 채로 질질 끌려 나갔다.
회의장 밖으로 나오자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둘은 금방 이 분위기의 근원을 찾아냈다. 라파엘로가 입궁한 것이다. 라파엘로는 대전 바깥에서 카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던 카예나가 라파엘로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죠?”
라파엘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예를 갖췄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는 카예나의 손등에 키스했다. 원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들이 술술 나왔다. 카예나는 이델이 그의 질투심을 잘 찔렀구나, 생각하며 모르는 척 움찔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자신을 피한다고 착각하고 조급해졌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카예나는 못 이기는 척하며 그의 팔에 손을 둘렀다. 라파엘로는 그녀의 손가락에 여전히 약혼반지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고 약간 안도했다.
“아, 잠시.”
라파엘로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주변에서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분위기만 보면 당장 입술이라도 맞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래요?”
카예나가 의아하게 묻자 라파엘로가 짐짓 아무것도 아닌 척 말했다.
“속눈썹이 볼에 붙어 있어서요.”
“그래요?”
카예나가 제 뺨을 쓸어 보려고 하자 라파엘로가 그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이제는 없습니다.”
그는 카예나를 아까보다 제게 더 깊이 기대게 하며 걸음을 옮겼다. 라파엘로는 뒤를 힐끗 보았다. 그러자 카예나 뒤를 졸졸 쫓아오던 몇몇 미혼의 남자 귀족들이 멈칫했다.
그들도 라파엘로와 카예나의 다정한 행동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파엘로의 서늘한 눈매가 매혹적으로 휘었다. 카예나에게 붙어 있었던 것은 속눈썹이 아니라 저런 파리들이었다. 그들이 분한 표정으로 더 따라오지 못하는 것을 보니 속이 편안해졌다. 이 광경을 쭉 지켜보던 베라가 말했다.
“감시하러 오신 거네요.”
“정확하게는 경고하러 온 거죠.”
그때 베라와 수잔 뒤에서 줄리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폐하의 눈에 저런 오징어들이 보이기나 하겠냐고요. 하여간 못생긴 것들이 주제도 몰라.”
줄리아는 성년을 넘기며 점점 더 원숙해지더니 상당히 신랄한 입담을 가지게 되었다. 한 번씩 수잔이 흠칫할 정도였다.
“그러다 오징어들이 듣겠어요, 에반스 후작.”
베라가 만류하자 줄리아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러다 누구 하나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라, 올리비아 언니는 어디에 있어요?”
“어제부터 황태제 전하의 학업 지도 선생으로 발탁되었어요.”
줄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네? 그럼 혼자서 회의 지옥을 쏙 빠져나갔다는 거예요?”
“어쩌겠어요? 올리비아는 실제로 황립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으니까요.”
“그럴 수가……. 나도 회의 참석 안 하고 싶은데…….”
카예나를 존경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회의는 정말 싫었다.
“어쩌겠어요? 다들 조금만 힘냅시다. 대공위 계승식만 끝나면 좀 여유가 생길 거예요.”
그들은 카예나가 어서 연인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러 떠나기를 고대했다. 그래야 일거리가 줄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들은 라파엘로와 카예나 사이의 애정 전선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라파엘로는 자신이 저질러 놓고도 믿을 수 없는 행동에 약간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이런 짓을 자주 했나?’
아까의 그는 뭔가에 씐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다른 남자 귀족들을 견제했다. 라파엘로는 자신을 냉혹하게 평했다.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그러나 아까까지 그를 괴롭혔던 불안감과 초조함은 말끔하게 가셨다. 라파엘로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사랑 앞에서 상당히 유치하게 구는 사람인 모양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갑자기 카예나가 그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뗐다. 라파엘로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왜 그러십니까?”
그의 물음에 카예나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대공이 다행스럽게도 불쾌감은 느끼지 않지만, 기분의 문제가 있잖아요. 내가 이렇게 당신을 붙잡고 있는 걸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내리까는 시선이 어딘가 처연했다. 라파엘로는 걸음을 뚝 멈췄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카예나도 같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보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습니다.”
“……대공.”
“저를 그렇게 부르지 않으셨잖습니까? 왜 제게는 대공이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카예나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 남자는 이런 식으로 행동했었다. 기억을 잃어도 라파엘로는 똑같았다.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불쾌해할까 봐요.”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에 제 손을 얽으며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불쾌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똑같았다. 카예나는 이 한결같은 남자에게 키스를 퍼붓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라파엘로는 카예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 순진한 스킨십에 카예나는 웃을 뻔했다.
“스물여섯의 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저는 폐하가 좋습니다.”
그의 고개가 아래를 향하며 카예나와 곧 입을 맞출 것처럼 가까워졌다. 라파엘로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여 물었다.
“그러니 지금의 저를 사랑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설마 이렇게 저돌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카예나는 당혹스럽기도 했고 난감하기도 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라파엘로는 라파엘로다. 스물이 되었든 스물여섯이든 그녀에게는 똑같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기억을 가진 자신과 스물여섯의 라파엘로를 분리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스물의 라파엘로는 정말…….
‘앞뒤도 재지 않고 저돌적이네.’
카예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타일러보고자 했다.
“라파엘로.”
그녀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라파엘로는 완전히 몰두하는 표정을 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에게 마음이 있었죠. 그건 당신도 알죠?”
“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 스무 살이었던 당신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거라구요.”
라파엘로도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 제게서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습니다.”
6년이라는 간극이 있으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곤란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유대를 쌓고 시간을 공유했던 라파엘로다. 라파엘로는 어렴풋이 지금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폐하를 곤란하게 해드렸군요. 죄송합니다.”
라파엘로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져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아니…, 라파엘로.”
카예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붙잡았다.
“…우선 우리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할까요?”
“어디로요?”
그가 반응을 보이자 카예나가 빙긋 웃으며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녀가 손을 뻗어 라파엘로의 시야를 가렸다.
“놀라지 말아요.”
그 말과 동시에 카예나는 공간을 이동했다.
* * *
라파엘로는 뭔가 기이한 느낌이 전신을 스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내 카예나의 손이 눈에서 떨어지자 그는 깜짝 놀랐다.
“여긴…….”
근처에 인적이라고는 없는 한적한 장소에 작은 저택이 홀로 지어져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양식의 건물이었다.
“들어가요.”
카예나는 그를 그 안으로 이끌었다.
라파엘로는 기억이 없겠지만, 이 저택은 카예나가 현대의 주택 양식을 토대로 지은 건물이었다. 그녀가 라파엘로와 휴식을 취할 때 쓰는 별장이기도 했다.
“여기에 앉아요.”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권한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카예나는 그를 테이블에 앉히고 주방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카예나가 입고 있던 화려한 예복이 형태가 바뀌며 현대의 간편한 복장이 되었다. 라파엘로는 그녀가 마법을 쓰는 것을 목격하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당신도 옷차림을 좀 바꾸는 게 좋겠네요.”
딱! 라파엘로의 옷도 간편한 니트와 슬랙스로 바뀌었다. 저 쪽 세상의 차림을 하니 오히려 큰 키와 완벽한 비율의 몸매, 길쭉한 다리가 더 돋보였다. 카예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간단한 요리를 준비했다.
라파엘로는 황제가 손수 요리하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게다가 카예나의 차림은 차마 바라보고 있기가 민망했다. 몸의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내는 옷차림이라니……. 속옷이 저렇지 않던가. 그는 도대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서 자꾸 시선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묘한 긴장감에 두 손을 꼭 쥐어야 했다.
“자, 여기.”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상태는 조금도 알지 못한 채로 간단한 식사를 만들어냈다.
“오늘 아침부터 회의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요. 당신은요?”
“저도 딱히 먹은 건…….”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갑자기 제 옆에 딱 붙어 앉자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
“먹은 건?”
카예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라파엘로와 시선을 마주쳤다. 라파엘로는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딱히 먹은 건 없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왜 내 시선을 피해요?”
“…….”
라파엘로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소파에 걸린 담요를 발견하고는 냉큼 그것을 들고 왔다. 그는 카예나의 몸에 담요를 둘둘 둘러주었다. 카예나는 황당해하는 얼굴로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게 뭐예요?”
그러자 라파엘로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그녀의 곁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도 그런 차림으로 계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카예나는 자신이 뭘 입었었는지 헷갈려서 담요를 풀어내 확인했다. 그냥 평범한 검은 니트와 팬츠인데? 물론 몸에 조금 달라붙은 형태이기는 했다.
“폐하!”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담요를 풀어헤치며 또 그 남세스러운 차림을 드러내자 얼굴을 붉히며 다시 담요로 꽁꽁 감싸주었다. 카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그녀가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담요를 벗어 던졌다. 그 뒤에 라파엘로가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그의 무릎에 앉았다. 라파엘로의 몸이 얼어붙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카예나가 빙긋 웃으며 라파엘로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무리 스무 살이라 해도 이 뒤에 뭘 해야 하는지까지 내가 알려줘야 하는 건 아니죠?”
라파엘로는 짤막하게 탄식을 내뱉다가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뒤편에 침실이 있었지.’
일단 본능에 충실한 후에 생각을 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 * *
궁정인들은 바쁘게 발을 놀리다가 정원에 그림처럼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어머, 요즘 자주 입궁하시네.”
라파엘로는 하얀 모피가 달린 두툼한 망토를 입은 탓인지 유달리 앳되어 보였다. 아니, 표정이나 분위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원래 그는 표정을 거의 드러내지도 않고 하는 행동도 의미심장하여 대체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 카예나 앞에서의 라파엘로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도저히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감정을 내비쳤다. 그것만이 아니라 아예 그녀의 애완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온종일 졸졸 쫓아다녔다.
확실히 스무 살의 라파엘로는 요령을 몰랐다. 라파엘로는 정원을 한참 서성이다가 카예나가 황궁에 돌아온 것을 발견했다. 그가 쪼르르 다가가 카예나가 마차에서 내려오는 것을 에스코트했다. 그 모습을 쭉 지켜보던 궁정인들이 부럽다는 듯이 한숨지었다. 애틋하다 못해 꿀이 뚝뚝 떨어지는 애정이었다.
“참 지극정성이시라니까.”
덕분에 카예나와 라파엘로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소문은 아예 확정적으로 변했다. 아직 약혼이나 결혼을 약속한 사실은 퍼지지 않았으나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사실은 수도의 귀족이 모두 알게 되었다. 충격 따위는 없었다.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물론 긍정적인 반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부정적인 반응이 뜻밖의 반향을 일으켰다.
“한 손에는 제국을, 한 손에는 대공가를 움켜쥔 황제를 대적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귀족들은 카예나의 견고한 권력에 기가 바짝 눌렸다. 과거를 잊고 서서히 활개 치려던 이들이 납작 기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카예나도 라파엘로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순조로운 분위기 속에서 대공위 계승식 날이 다가왔다. 그리고 라파엘로는 기억을 조각조각만 되찾았을 뿐, 여전히 스무 살의 기억까지만 온전하게 갖고 있었다.
“라파엘로.”
라파엘로는 점점 카예나가 마법으로 불쑥 침실에 찾아오는 것에 놀라지 않게 되었다.
“오셨습니까.”
그는 오늘 치러질 계승식에 맞춰 예복을 다 갖춰 입은 상태였다.
“먼저 축하 하려구요.”
카예나는 라파엘로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라파엘로는 자연스럽게 카예나의 허리를 안아 입을 맞췄다. 카예나는 이럴 때마다 그가 기억을 되찾은 게 아닌가 하고 조금 헷갈렸다.
“오늘 계승식이 끝나는 대로 또 별장으로 가요.”
“네.”
카예나는 라파엘로가 온순한 표정으로 순순히 대답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뺨을 붙잡고 쪽쪽 키스하니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카예나는 문득 라파엘로가 기억을 잃었음에도 이렇게 또 서로 사랑하게 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라파엘로가 카예나의 두 손을 잡고 키스하며 말했다.
“이럴 때마다 저는 지금의 제가 너무 싫습니다.”
“어째서요?”
“폐하를 사랑하게 된 게 겨우 삼 년 전부터였다고 들었으니까요. 저는 정말 바보였군요.”
카예나는 쿡쿡 웃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녀가 두 번의 생을 거쳐 성숙해지고 난 이후였다. 원래의 카예나는 얼굴만 지독하게 예쁜 인형이자 악녀였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습니다.”
라파엘로는 계속해서 자신이 잘하겠다고 말한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카예나는 그게 고마웠다.
“나도 잘할 거예요. 당신이 스무 살이든, 스물여섯 살이든, 언제든요.”
“그렇다면 당장 서른 살이 되고 싶습니다.”
“그건 또 왜요?”
“그때 폐하와 결혼할 수 있잖아요.”
카예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놀랍지 않은 말이네요.”
이번에는 라파엘로가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그야 매년 듣는 말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라파엘로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들은 서로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채 입술을 맞춘 후 떨어졌다. 곧 계승식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연회가 마무리되고 카예나는 몇몇 일거리만 정리한 후 별장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서 더 편하고 따뜻하게 휴가를 보내겠어요.”
카예나는 마법으로 불을 피우며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
그의 말에 카예나가 이리로 오라며 손짓했다.
“당신은 인간 담요가 되어줘요. 아, 여기서는 폐하라고 부르지 말고.”
“그럼 뭐라고 부르면 좋겠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불러요. 스무 살의 라파엘로는 나를 뭐라고 부를지 궁금한데요?”
라파엘로는 그 말에 조금 고민하더니 카예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여보?”
“어쩜.”
카예나의 반응을 본 라파엘로가 못마땅하게 표정을 찡그렸다.
“설마 이것도 원래의 제가 부르던 애칭이었습니까?”
카예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평소보다 일찍 시작된 휴가는 또 새로웠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에게 이곳에서 지내는 방법을 다시 알려주었다. 평범하다기에는 조금은 특수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확실히 행복한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품에서 눈을 떴다. 라파엘로는 일찍 잠에서 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나 눈빛만 보아도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리는 순간이 있다.
카예나가 말했다.
“기억이 돌아왔군요.”
스무 살의 라파엘로도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지만 지금 이런 눈빛을 지니지는 못했다. 이것은 시간과 같이 겪은 고난이 만들어낸 눈빛이었다. 라파엘로는 제 팔을 베고 누운 카예나를 다정히 바라보며 별다른 말 대신 한마디만 했다.
“다행입니다.”
카예나는 그날 집무실에서 일어난 마력 폭풍에 그녀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임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라파엘로의 품에 깊이 파고들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
“당신도요.”
이상하게도 전보다도 더 오랜만에 그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특별하지만, 여전히 평온한 아침이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