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32
악녀는 마리오네트 외전 2장. 이후의 이야기(32/33)
외전 2장. 이후의 이야기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지, 누군가의 연인이 된 지, 그리고 황제가 된 지 7년이 흘렀다. 그 일상이라는 게 나라를 다스리거나 마법사로서 적응해나가는 것이라 유별난 구석이 있기는 했다. 그래도 이건 분명 ‘일상’이다.
카예나는 오늘도 늘 그렇듯 오전 업무를 보고 회의를 진행했다. 점심을 먹을 때쯤에는 바옐이 그녀를 들렀다.
-이상 없지?
“응.”
카예나는 태어날 때부터 마법사였던 사람이 아니다. 비정상적인 각성을 통해 중간에 갑자기 마법사가 된 케이스였다. 바옐은 카예나의 상태를 점검해보다가 그렇게 말했었다.
-네가 마법을 계약했던 당시에 지나치게 큰 능력이 개화하면서 아예 체질이 바뀐 것 같아.
수명에도 몸에도 이상이 없어보였지만, 라파엘로가 워낙 걱정했기에 바옐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카예나의 상태를 확인해주기로 했다.
-네 남편한테 작작 하라고 좀 말해. 내가 네 주치의냐?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불안을 잘 이해했다. 그는 아직도 종종 그녀가 물거품처럼 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카예나가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라파엘로는 그녀와 같이 시간을 보낼 때면 뜬눈으로 날을 새웠다. 언제쯤 그 불안이 사라질까. 카예나는 그의 트라우마가 사라지려면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해가 지날수록 점점 더 나아지기는 했다.
“미안. 그래도 도움이 필요할 때 상부상조하잖아.”
-흥!
그녀는 그사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평판을 쌓았다. 마법사 협회에서 도움을 요청하면 빼지 않고 협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바옐의 정원은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대관식이라면서 뭘 또 일하고 있어?
“그러게.”
바옐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참나. 아무리 그래도 임기 마지막 날까지 이러냐?
“마지막이 뭐 별건가.”
카예나는 그렇게 말하며 제법 다사다난했던 삶을 돌이켜보다 가느다란 웃음을 지었다.
카예나는 황제라는 명칭의 회사원 내지는 공무원이 된 기분으로 살았다. 실제로 그것과 비슷하기는 했다. 그래서일까. 이델의 대관식인 오늘, 그녀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퇴사가 이런 기분인가.”
-얼씨구.
회사에 다닐 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퇴사하면 어떤 기분일까. 이 지긋지긋한 일에서 해방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막상 그 비슷한 상황에 부닥쳐보니 생각보다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이제 끝났구나. 그럼 내일부터 황제로서 오전 업무와 회의를 보지 않겠구나. 그 정도 생각만 들었다.
“아직 별로 실감이 안 나서 그런 건가.”
원래 카예나는 감정 기복이 큰 편은 아니다. 그건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수장 자리에서 내려오는데 너도 참 너다.
똑똑. 누군가가 황제의 처소를 찾아왔다. 바옐은 순식간에 모습을 숨겼다.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지자 올망졸망한 외모의 시녀가 손에 은쟁반을 든 채 집무실로 들어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시녀 복이 잘 어울리는구나, 아리아.”
그러자 아리아의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제다이어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불치병을 앓았던 티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성격도 밝았고 제다이어와 혈연이 맞는다고 증명이라도 하듯 유능했다.
“폐하께서 보살펴주신 덕분에 제가 시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폐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네 오라비가 성심껏 도와주고 있으니 너는 좀 적당히 해도 돼.”
그들 남매는 카예나의 수족이 되어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아리아는 카예나의 곁으로 다가가 공손한 태도로 쟁반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편지 하나와 작은 상자가 놓여있었다. 카예나는 그게 누가 보낸 것인지 잘 알았다.
“고맙구나.”
아리아가 말했다.
“그분께서 최근 목재를 이용해 작은 장식품을 만드는 취미를 가지셨다고 합니다.”
그 말에 카예나의 시선이 상자에 닿았다.
“…그래.”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은 표정으로 상자를 집어 들며 아리아를 내보냈다. 이 익명의 편지는 해마다 그녀를 찾아왔다. 황궁 전령이 남부로 내려가 레제프의 상태를 살피다가 편지를 받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카예나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뜯지 않은 편지들이 일렬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녀는 그 편지를 가장 마지막 자리에 끼워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오늘로 황제 임기가 끝난다. 그러니 이제는 이 편지들도 서랍에서 치워야 할 때였다. 카예나는 나직한 한숨을 지으며 제 앞에 상자를 하나 소환했다. 그 안에 편지를 채우던 중 아까의 상자가 눈에 걸렸다. 잠깐 상자를 매만지던 카예나는 이내 그것을 확 열어젖혔다.
“…….”
형태를 알 수 없는 형편없는 장식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예나는 망설였던 것이 무색해져 실소했다.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그녀는 상자 안에 든 나뭇조각을 이리저리 보았다.
“…체스 말인가?”
너무 형편없어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으나 그것은 체스 말인 것 같았다. 머리에 쓴 십자가 왕관이라면 ‘킹’인 듯했다.
“이제 그 아이가 스물다섯 살인가…….”
레제프는 용서할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다. 회귀 전에 자신이 살려달라고 수도 없이 편지를 보냈지만, 읽지 않고 다 태워버렸던, 동생의 비정함을 확인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카예나는 매년 전령을 보내 그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몇 년 동안은 항상 좋지 못한 소식이 들렸다. 여전히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인 레제프는 사고만 쳐댔다.
언제부터인가 레제프는 그러기를 그만두었다. 전보다 성질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오늘, 그가 취미가 생겼다며 직접 깎아 만든 체스 말을 보냈다. 카예나는 오늘 도착한 편지를 열었다. 긴 고민이 무색하게도 엉성한 ‘킹’처럼 편지에는 별말이 없었다.
「잘 살아.」
잘 살아. 그리고 킹.
카예나는 그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상자에 넣었다. 그 전의 편지들에 어떤 말이 얼마나 쓰여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카예나는 딱 이 정도의 결말만 알고 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똑똑. 또 누군가가 집무실을 찾아왔다. 카예나는 상자를 치워놓고 들어오라고 했다. 들어온 사람은 라파엘로였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작게 미소지은 다음 살짝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수고하셨어요.”
라파엘로가 그렇게 말하며 카예나의 등을 살짝 토닥여주었다.
“아직 그런 인사를 받기에는 일이 꽤 남았어요. 황위만 물려줄 뿐이지 한동안은 수도에 붙잡혀있어야 하잖아요.”
카예나의 가벼운 투덜거림에 라파엘로가 웃었다.
“올해도 황제로 지내는 마지막 해라 겨울에도 바빠서 당신 생일도 제대로 못 챙기고…….”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라파엘로는 진심으로 말했다. 카예나가 황제로 즉위하여 제국을 다스리는 7년간 라파엘로도 영지 문제로 많은 일을 겪었다. 그녀와 원하는 대로 마음껏 같이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인내했다. 황위를 이델에게 물려준다는 뜻은 그와 곧 결혼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카예나는 그가 왜 괜찮다고 말하는지 눈치채고 웃었다. 라파엘로는 짐짓 그녀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관식이 시작될 시간이군요. 이제 갈까요?”
라파엘로가 손을 내밀며 에스코트를 청했다. 카예나는 빙긋 웃으며 그와 함께 대관식이 치러질 그랜드 홀로 향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곳에는 이미 대사제인 데니안이 있었다. 물론 오늘의 주인공인 이델도 붉은 망토를 두른 채 기다리는 중이었다.
황제가 현역일 때 왕관을 물려주는 일은 없었다. 이 이례적인 일에 의전관들은 식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고민했었다. 보통은 대사제가 왕관과 왕홀을 건네고 축복을 내리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사제는 축복을 내리는 역할만 하고 왕관을 씌워주는 건 카예나가 하기로 했다.
카예나는 단상에 올라 이델이 계단 아래에서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제 머리에 쓰고 있던 왕관을 이델에게 씌워주었다. 제국의 통치자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카예나가 왕관을 씌워주며 말했다.
“즉위를 축하해, 이델.”
이델이 화답하듯 빙긋 웃었다.
“누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잘 해내겠습니다.”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들은 가볍게 포옹했다. 이델은 무사히 대사제의 축복을 받고 식을 마무리했다. 카예나는 황위를 내려놓고 선황녀가 되었다.
이내 통치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연회가 시작되었다. 각국의 대사들도 참석한 자리에서 이델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그들을 상대했다.
‘옆에 붙어서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네.’
“누님.”
이델이 연회장에서 카예나를 찾아왔다.
“선생님은요?”
그가 의아하게 물었다. 선생님이란 라파엘로를 뜻했다.
“먹을 만한 걸 좀 챙겨온다고 해서.”
하인이 하는 일이지만, 라파엘로는 굳이 카예나가 먹을 걸 직접 다 확인했다. 벌써 그가 애처가라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이델은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카예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이렇게 자랐을까. 이델은 어느새 완전히 남자가 되어 있었다. 격세지감을 느낀 카예나가 문득 물었다.
“올리비아는 어떻게 됐어?”
그 물음에 이델의 미소가 약간 침울해졌다.
‘음, 또 차였구나.’
괜한 걸 물은 모양이다.
“이제 저도 같은 성인인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올리비아는 그가 어리고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거절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일곱 살이나 차이 나기도 하고 너는 이제야 성년이 되었잖니.”
카예나는 이델에게 부드럽게 말해주었다.
“올리비아도 난감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을 거야. 너무 당기지 말고 조금 밀어보기도 하면서 여유를 줘. 네가 정말 괜찮은 남자라면 올리비아도 마음을 열지 않겠니?”
“누님은 자상하게 너무하신 말씀을 하시네요.”
“어머, 그런가?”
이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파엘로 선생님이 왜 그렇게 남의 속을 잘 뒤집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뒤에서 라파엘로가 나타나며 여상스럽게 물었다.
“제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이델은 찔끔한 표정을 하다가 당당하게 말했다.
“네. 누님과 선생님이 서로 닮으신 것 같아서요.”
라파엘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빈자리에 앉았다.
“좋은 이야기였군요.”
“……예.”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이것저것 살뜰하게 챙기는 모습에 이델은 배가 아팠다. 염장 지르는 건가? 황제의 염장을 질러도 되는 거야?
“이제 두 분도 결혼하시겠네요.”
그건 이미 7년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라파엘로는 결혼이라고 하자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니께서 ‘그’ 장미의 개량에 성공해 대량으로 재배 중이라고 하십니다. 결혼식에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 이야기를 들은 이델이 웃었다.
“실은 이 결혼을 가장 기다린 게 대부인 아닌가요?”
노아 대부인은 카예나와 라파엘로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우려나 반대는커녕 바로 결혼식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놀라운 추진력 덕분에 카예나는 따로 결혼 준비 기간을 가질 것도 없었다.
‘나를 몹시 마음에 들어 해서 의아하긴 한데…….’
정작 라파엘로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폐하를 본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뿐이었다.
“연회가 끝나면 바로 대공저로 가시려고요?”
카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계속 황성에 머무르면 영향력이 나뉘겠지.”
그녀가 이제는 제국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었다.
“결혼식 전까지는 조용히 지낼 거야. 혹시 어려운 일이 있다면 대공저로 전령을 보내렴.”
“예, 누님.”
카예나는 그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려고요?”
“그래. 내가 적당히 물러나야 섭정할 의지가 없다고 받아들여질 테니까.”
이델은 짤막하게 한숨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치적으로 계산하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떤 미친 인간이 감히 누님을 적대하겠어요?”
그게 사실이기는 했다. 빙긋 웃어보이는 카예나의 곁으로 라파엘로가 다가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결혼식 때 봐, 이델.”
* * *
결혼식은 황궁에서 열렸다. 식이 진행될 홀과 정원은 온통 꽃잎을 마치 드레스처럼 풍성하게 겹겹이 피운 분홍빛 장미가 가득했다. 바로 개량 장미, ‘카예나’였다.
카예나는 신부대기실에서 면사포를 쓴 채, 부케에도 쓰인 ‘카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서 위험, 위기를 알리는 오브젝트가 다름 아닌 장미다. 그런데 그런 장미에 제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 세계의 위험 요소이자 악녀였다. 그리고 이제는 악녀도, 황제도 아니었다. 그저 마법을 좀 쓸 줄 아는 평범한 대공비일 뿐이었다.
신부대기실로 곧 그녀의 직속 시녀였던 이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그들은 카예나의 들러리를 서기로 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신가요?”
줄리아가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흰 면사포에 얼굴이 가려져 있었으나 희미한 실루엣으로 카예나가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다가 있는 따뜻한 곳이 좋을 것 같더구나.”
“바다! 너무 좋죠. 해수욕도 하고 진귀한 해산물도……. 해산물은 안 좋아하시니까 안 되겠네요.”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오늘이 결혼식이 아니라 어느 티파티라도 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똑똑. 문이 열리고 하인이 말했다.
“식이 시작됩니다, 선황녀 전하.”
카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예나가 식장에 나타나자 조금 소란했던 공간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다가오자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그는 카예나의 손을 잡고 홀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서로 사랑하는 한 쌍의 연인이 완전히 결합하는 순간을 축복하는 음악이 홀을 울렸다. 기사들은 그들이 행진하는 길을 검을 든 채 지키고 섰다. 라파엘로는 결혼반지를 나눠 끼고 카예나의 입술에 살짝 입 맞췄다.
“이제 여보라고 부를 수 있겠군요.”
카예나는 그의 말에 하마터면 이목이 쏠려있다는 것을 깜빡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녀가 웃음기를 매단 채 말했다.
“그렇네요, 여보.”
라파엘로는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카예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어리둥절할 때 그가 말했다.
“피로연은 알아서들 즐기시게. 전하께서 피곤하신 것 같아 먼저 가보지.”
카예나가 피곤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쌩하니 피로연에 참석도 하지 않고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파엘로는 이제야 연인, 부부로서의 삶을 즐기기로 작정했다. 카예나는 아예 소리 내며 웃었다. 여보라는 한마디로 행복할 수 있는 삶이라니.
‘좋네.’
그녀가 원하던 자유가 찾아왔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모든 게 평온했다.
* * *
이델이 황위를 물려받았음에도 카예나는 결혼 후 몇 년동안 수도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델의 나이가 아직은 어려 카예나가 한동안 그의 길잡이가 되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는 수도에 계속 머무를 수 없었다. 대공령이 경제 규모며 인구 수까지 어지간한 왕국 수준으로 커졌기에 그가 직접 나서야 할 부분이 많았다.
사실상 신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를 황좌에 앉아있던 때와 비슷하게 보내게 된 것이다. 그래도 밤이 되면 카예나는 마법으로 서부 대공령을 침실을 찾아왔다. 그들은 어지간하면 같이 잠을 자며 밤이라도 꼬박 같이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카예나는 얇은 잠옷 차림으로 라파엘로의 침실에 나타나 침대 옆의 테이블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여보, 이것 좀 볼래요?”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여보’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았다.
“네, 여보.”
또한, 자신이 그녀를 여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도 너무나 기뻤다. 그는 카예나가 앉은 의자 뒤에서 상체를 숙여 그녀를 안다시피 했다.
카예나는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의전 예산이 너무 낮게 책정된 것 같은데. 혹시 당신이 이델이랑 뭔가 이야기한 거라도 있어요?”
“의전 행사에서 사용될 물품 중 일부는 작년보다 낮은 금액으로 수급하는 게 가능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도 이 예산은 확실히 너무 낮게 책정되었군요.”
예산이 낮으면 의전 준비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마찰이 일어난다. 행사에 필요한 물품이나 식자재, 인건비 등을 관리하는 부서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의전 행사 관리자의 이름을 찾으려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파엘로가 카예나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
“라피!”
그녀가 순간 놀라 그의 애칭을 부르며 타박했다.
“이 정도는 황궁에서도 금방 오류를 잡아낼 겁니다.”
“그래도…….”
카예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꾸만 과도하게 검사하고 완벽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델이 조금이라도 실수하여 카예나보다 못하다는 식의 험담을 듣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느끼는 부담감이나 부채감은 잘 알았으나 그 또한 이델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뒤에서 카예나를 안으며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였다.
“오늘도 저 혼자 재울 겁니까?”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금빛 머리카락을 반대편으로 넘기며 손가락 끝을 세워 그녀의 목덜미를 훑었다.
카예나가 그 야릇한 감각에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같이 자요. 네?”
그의 투정 아닌 투정에 카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라파엘로는 그대로 카예나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로 향했다.
두 사람이 누워도 넉넉하게 남는 침대였다. 그들은 그 위에서 한 몸이 된 듯 몸을 겹쳐 안았다. 보드라운 이불 안이 금세 농밀한 분위기로 채워졌다.
카예나는 그와 짙은 스킨쉽을 나누다가 문득 말했다.
“미안해요.”
라파엘로가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해서요.”
“거의 매일 같이 한 침대에서 자잖아요. 제게는 이게 평범한 결혼 생활입니다.”
그의 말에 카예나는 더욱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의 매일 한 침대에서 자기는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었다. 카예나가 마법으로 수도 대공저에서 서부 대공저를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되니까.
라파엘로는 정말 괜찮다는 듯이 그녀의 입술에 잘게 키스하며 애정을 퍼부었다.
카예나도 결국 키스 세례에 졌다는 듯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이번에는 농염한 입맞춤이 오갔다. 입술이 떨어지며 뜨거운 숨결이 터져 나왔다.
라파엘로는 살짝 숨을 고르다가 카예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조금 바쁘면 어떻습니까. 부부니까 이해해야죠.”
카예나는 부부라는 말에 아직도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약간 어색한 표정을 했다. 이렇게 깊게 몸을 섞으면서도 부부라는 말 하나에 부끄러워하는 자신이라니. 스스로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제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아니면 서부 대공저로 오는 시기를 조금만 더 당겨주시면 좋구요.”
그의 은근한 흥정에 카예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벌써 다섯 번이나 그렇게 말한 거 알죠? 그래서 대공저로 가는 예정일이 일 년이나 줄었는데.”
“그랬던가요?”
라파엘로는 능청스럽게 굴었다. 그러고는 카예나가 더 추궁하지 못하게 허리를 붙잡더니 강하게 파고들었다.
“읏!”
그 약은 짓에 카예나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 했으나 라파엘로의 움직임에 완전히 휘말리고 말았다.
* * *
카예나는 늘 그렇듯이 국무 회의 내용을 검토하며 이델의 보좌관 내지는 제왕학 선생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 절기를 대비한 방책과 그 일에 필요한 인력을 배치하다가 멈칫했다.
‘오류가 생긴다고 해도 그걸 금방 발견해낼 만한 유능한 이들이 황궁에 많이 있지.’
이델의 바로 곁에는 올리비아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베라, 줄리아, 수잔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것이 분명했다.
‘이제 이델의 나이도 적지 않고…….’
카예나는 워낙 조그마한 시절의 이델을 봤기에 아직도 그가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나도 이런 생각을 그만두어야겠지.’
그녀가 먼저 정리한 자료를 이델에게 보여주며 그대로 하라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남편 말을 듣는 게 좋겠네.”
카예나는 피식 웃으며 서류를 한곳에 모았다. 이건 그냥 폐기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시녀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비 전하.”
“당장 서부 대공저로 출발할 것이니 준비하거라.”
시녀는 잠깐 놀란 표정을 했다가 곧장 고개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 *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벌써 이 주째 침실에 오지 않아 의아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수도의 대공저로 연통을 보냈으나 그저 일이 좀 바쁘다는 답신만 돌아왔다.
그냥 일이 바쁜데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는다니……. 라파엘로는 불현듯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권태기인가?’
그는 초조한 마음에 제레미를 불렀다.
“수도 대공저에서 무슨 소식은 없었나?”
“특별한 소식은 없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라파엘로는 밤에 제 침실로 카예나가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어 그냥 얼버무렸다.
그때 누군가가 라파엘로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하인이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집무실을 들어와 아뢰었다.
“주인님, 그… 대공비께서 오셨습니다.”
“…뭐?”
라파엘로는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당장 본성 앞으로 나가보았다. 때마침 카예나가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햇살 아래에서 눈부시게 웃었다.
“나 왔어요.”
라파엘로는 그녀를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지금 뭔가 환각이라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훤한 대낮에 카예나가 서부에 나타날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지금은 황실이 가장 바쁜 시기였다.
“어머, 내가 반갑지 않은가 봐. 나 돌아갈까요?”
라파엘로는 그대로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제야 그녀가 왜 이 주간 나타나지 않았는지 이해되었다.
그녀는 아예 서부로 온 것이다. 자신과 함께 하기 위해.
“더 늦기 전에 제대로 신혼생활은 해봐야 하잖아요.”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라파엘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잘 오셨습니다.”
그는 진심을 담아 제 아내를 환영했다. 라파엘로는 언제든지 카예나가 쓸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던 침실부터 직접 소개하기 시작했다.
“전에 봤을 때보다 달라지기는 했네요.”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라파엘로는 이미 성을 안내해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벌써 세월이 제법 흘러서인지 그때 기억과는 다른 부분이 많았다. 카예나는 이렇게나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냈다는 사실을 여기서 가장 크게 실감했다.
“아, 그리고 여기는 나중에 아이가 쓸 방입니다.”
라파엘로가 안내한 곳은 아직 아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방이었다.
카예나는 아이라는 말에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다.
“당신은 딸이 좋아요, 아들이 좋아요?”
그녀의 물음에 라파엘로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말했다.
“글쎄요. 딸이든 아들이든 어차피 다 우리의 자식이니 상관없습니다.”
“그럼 딸 하나, 아들 하나 낳으면 되겠네요.”
“……둘이나 낳으실 생각입니까?”
라파엘로는 금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후계자 때문에 자식을 낳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카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의지할 피붙이가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나아요. 혼자서 이 커다란 가문을 이끄는 건 가혹한 일이잖아요?”
일반적인 다른 귀족들은 당연히 홀로 가문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혈육이라는 존재는 제 파이를 탐내기만 한다고 생각하거나 정치적 도구로만 여길테니.
하지만 카예나는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런 생각의 피해자였으니까.
“이것도 단순하게 보면 집안일이잖아요. 집안일은 가족들이 다 같이 나눠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에 라파엘로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엷게 웃었다.
“그렇군요. 가족이니까.”
그들은 가족의 온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온전한 부모 형제를 지녀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라파엘로와 함께 이루는 가정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과거를 이겨냈듯이 계속해서 좋은 길잡이, 버팀목이 되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강력한 확신이 들었다.
카예나는 라파엘로를 마주 안으며 말했다.
“우리는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것처럼 평범하게, 말이지요.”
카예나가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