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4
악녀는 마리오네트 4장. 결혼을 준비하는 방법(4/33)
4장. 결혼을 준비하는 방법
황성의 궁정인 사이에서 카예나의 별명이 새로 생겨났다.
‘맹수 조련사.’
그 불경하기 짝이 없는 별칭은 감히 대놓고 꺼내진 못했지만,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그만큼 레제프를 진정시킨 일이 많은 사람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또한, 그녀가 화상을 입었음에도 관용으로 시녀를 돌본 일도 같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 소식이 에스테반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는 제 손으로 만들어 온 간식을 풀어 놓는 딸을 묘한 눈으로 보았다.
“성년식 준비는 잘되어 가느냐?”
카예나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보살펴 주신 덕분에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어요.”
차질이 어찌 없었겠는가?
그간 카예나는 독을 마셨고 화상도 입었다. 액운이 꼈다 싶을 정도로 일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사건이 끊이질 않았던 것에 비해 황궁은 평온했다. 카예나가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황제는 카예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 한심하게 여겼거늘, 그래도 제 피가 흐르는 게 맞는구나 싶었다.
“성년이 되는 생일이란 것은 생에 단 한 번뿐인 일이니 각별하게 신경 쓸 것이 많겠지.”
뒤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들이 주르륵 늘어서며 손에 든 것을 공손히 내밀었다.
“좀 늦긴 했어도 보태 쓰거라.”
연회는 정해진 예산으로 돌아간다. 원래의 카예나가 정해진 예산에서 상당 부분을 의상에 쏟았기에 연회 준비는 사실 빠듯한 감이 있었다. 황제는 그걸 알고 추가로 패물을 하사한 것이다.
카예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부황을 향해 인사했다.
“베풀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폐하.”
“이번 성년식은 너에게도 중요한 일이지.”
황제의 말대로 이번 성년식은 참으로 중요하다.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카예나 힐이 신랑감을 찾기 위한 본격적인 연회이기 때문이다.
“몸은 좀 괜찮으냐?”
평소라면 묻지도 않았을 말이었다. 황제는 대쪽 같았던 자신도 나이가 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연고만 꾸준히 바르면 되는걸요.”
“벤제만 가문 하나쯤은 처리해도 황가는 끄떡없거늘.”
카예나는 조용히 웃으며 작은 크리스탈 그릇에 만들어 온 푸딩을 담았다. 진짜 벤제만 가문을 내치려고 작정했다면 손속이 과하다고 질책당했을 게 뻔하다.
“달지 않으니 조금 드셔 보세요.”
카예나가 만들었다는 간식은 그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최근 자신을 이렇게 탐탁하게 했던 이가 있던가?
황제는 망나니 같은 레제프가 요즘 제 누이의 말을 잘 따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녀라는 것이 지금 네가 보기엔 그저 수발이나 드는 아랫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런 아랫사람을 잘 들이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는 딸을 위해 조언했다.
“루든 시종장처럼 말이지요?”
곁에 서 있던 루든이 부드럽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그가 넉살 좋게 웃으며 그리 말하자 황제도 웃었다.
“루든은 내 일생에 가장 잘 둔 신하지.”
“폐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시녀를 몇 들이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황제는 황녀궁에 포진한 시녀가 모두 레제프의 부름을 받은 이들임을 잘 알았다. 지금까지는 그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카예나가 제 사람을 직접 들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들여 봤자 레제프의 손아귀에 떨어지겠지.’
황제는 은스푼을 그릇에 내려놓았다.
‘명분도 없이 사람을 다 내칠 수는 없으니.’
귀족 사회에서 명분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명분 없이 멋대로 권력을 휘두른다면 누구도 황족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해결할 문제였다.
황제는 딸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품긴 했어도 특별히 귀애할 정도로 총애하진 않았다.
카예나도 그 점을 잘 알았다. 이 모든 건 앞으로 할 일의 초석일 뿐이다.
‘어쨌든 시녀들을 모두 물갈이해야 하니까.’
자신이 그럴 의지를 갖고 있음을 알려 놓는 것과 아닌 것엔 차이가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행동할지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카예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현명함이란 이 정도였다. 아직은 깊은 식견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대신 푸딩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그것이 상대에게 그다지 필요한 정보가 아니란 사실은 중요치 않다. 카예나가 요즘 관심 보이는 일, 행동반경을 무의식에 심어 주는 일이었다. 그녀는 마치 결혼과 가정을 꾸리는 일에 막 관심을 가진 소녀인 척했다.
황제의 늙은 시종들은 딸로서 도리를 다하는 카예나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있다 보니 황제가 아무리 냉혹한 아버지일지언정 자식이 자주 찾지 않는 걸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카예나는 바로 그 낡은 생각을 이용했다.
루든 시종장이 황제에게 넌지시 말했다.
“곧 황녀 전하께서 결혼하여 황궁을 떠나시면 많이 적적하시겠습니다, 폐하.”
카예나의 시선이 루든 시종장을 향했다.
그가 아주 살짝 웃으며 카예나에게 윙크를 했다.
‘좀 거들어 줄 모양이네.’
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에스테반 황제는 루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년이 되면 결혼도 조만간이겠구나.”
카예나는 모르는 척 말했다.
“서두를 필요 있나요? 이렇게 폐하 곁을 지키다가 때가 되면 결혼하는 것도 좋지요.”
후사 문제가 직결된 황자의 결혼이면 몰라도 황녀의 결혼은 정치 동맹으로 이용되기 십상이었다.
루든은 정답을 정확히 말한 카예나에게 웃어 보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다른 자매도 없어 결혼 준비에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흐음…….”
황제는 새삼 카예나의 결혼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카예나에게도 이런 문제를 돌봐 줄 유모가 있었다. 그녀는 클로렌스 엘리반이라는 이름의 남작 부인이었는데, 오래 전 레제프가 황족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보내 버렸다.
이후로 레제프의 유모가 카예나를 같이 돌보았는데, 카예나가 레제프의 유모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마저도 금방 손을 뗐었다.
‘지금 황녀궁의 시녀들도 전부 미혼의 젊은 영애뿐이지.’
보통 귀족 영애는 결혼 전까지 유모나 대모 격의 샤프롱을 통해 결혼 생활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카예나에게 그런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황녀궁에 사용인 수가 적긴 하구나.”
“이 정도면 충분한걸요.”
에스테반 황제는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네 샤프롱을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첫 번째 삶에서 그녀는 샤프롱 없이 성년식을 치렀다. 레제프가 제 유모를 샤프롱으로 하는 건 어떻겠냐고 추천했지만, 그녀가 거부했다. 결혼한 여자 황족들은 방만한 카예나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때 루든이 말했다.
“클로렌스 엘리반 남작 부인은 황녀 전하의 결혼 준비를 제 자식 일처럼 돌볼 겁니다.”
그 말에 시종들이 얼어붙었다.
카예나도 푸딩 그릇을 정리하다가 잠깐 손을 멈출 정도였다.
‘설마 엘리반 부인을 바로 언급할 줄이야.’
선황후의 젖동무이자 그녀의 유모였던 엘리반 부인이 샤프롱으로 제격이긴 했다.
카예나는 일찍 죽었던 모친 대신 그녀에게 의지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해 냈다.
“……엘리반 부인이 그립네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사용인들이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반 남작부인을 유배 보내는 일은 레제프 뿐만 아니라 황제도 동의한 일이었다. 자신을 배신했던 선황후를 떠올리게 하는 엘리반 부인을 황궁에 두기 싫었기 때문이다.
‘세월이란 것이 참 무상하구나.’
죽을 날만을 앞둔 에스테반은 그간 자신의 삶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그 과정에서 용서하지 못했던 일을 용서하게 되었고 슬퍼하지 않았던 일을 슬퍼하게 되었다. 냉혹한 성정은 그대로지만 많이 너그러워지게 되었다.
루든은 그것을 꿰뚫어 보았고 카예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간언을 올린 것이다.
‘어릴 땐 황후를 많이 닮았더니, 이젠 날 닮은 구석도 보이는구나.’
카예나의 미모는 대부분 황후에게서 물려받았다. 다만 도도해 보이는 눈매나 얼어붙은 듯 밝은 벽안은 에스테반 황제를 쏙 닮아 있었다.
황제는 카예나를 위해 황녀궁의 시녀를 모두 갈아치워 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유모 하나를 다시 황궁에 불러 주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 줄 마음이 있었다.
“클로렌스 엘리반 남작 부인의 근신령을 풀어 주어라.”
카예나가 얼른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짐은 이만 쉬어야겠구나.”
카예나는 그가 침대에 누울 수 있게 돕고 나서 침실을 나갔다. 루든은 직접 카예나를 에스코트해 배웅했다.
“고맙네, 루든.”
“요즘 황녀 전하 덕분에 폐하의 기분이 좋으십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전하를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루든이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를 공략하려면 루든의 인심을 얻어야 겠군.’
카예나는 바구니를 든 채 기다리고 있던 시녀에게 손짓했다.
“푸딩을 넉넉히 만들었으니 다들 맛이라도 보게.”
시종이 얼른 바구니를 건네받았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카예나가 빙긋 웃었다.
“나야말로.”
과연 아무나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완 좋은 너구리 같은 루든은 카예나의 잠재력을 바로 꿰뚫어 보았다.
문지기가 응접실 문을 열어주자 카예나는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은 금방 멈췄다. 복도의 의자에 앉아 있던 라파엘로와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다섯 번이나 연달아 만남을 거절한 게 좀 심하긴 했지.’
그렇다고 라파엘로가 설마 자신을 이렇게 대놓고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가 거머리처럼 굴던 카예나에게 제 발로 찾아오다니.
카예나를 발견한 라파엘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완벽한 궁중식 예법으로 인사했다.
“라파엘로 키드레이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반갑네, 키드레이 경. 부황을 뵈러 온 것인가?”
“아닙니다.”
라파엘로는 제 용건을 돌려 말하지 않았다.
“저는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사람 착각하게 하는 화법은 여전하네.’
직설적인 그의 화법은 상대에게 망상을 불러일으키기 쉬웠다.
역시나 카예나의 뒤편에 서 있던 시녀들이 하나같이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혹시 이게 어떤 로맨틱한 신호는 아닐까 하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카예나는 조금도 오해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내가 대접한 차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모양이지?”
카예나의 말에 라파엘로가 대답했다.
“차는 확실히 맛있었습니다.”
“……감상을 물은 건 아니지만.”
“그에 대한 답례를 드릴까 하여.”
라파엘로가 손짓하자 수행원이 베라에게 융단으로 감싼 상자를 건넸다.
상자를 열자 은으로 된 원통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통은 아름다웠다. 뚜껑의 손잡이는 원형으로 커팅한 루비였다.
‘…이거 경매로만 살 수 있다던 찻잎 아닌가?’
워낙 유명하여 카예나도 잘 아는 패키지였다. 돈이 있어도 생산량 자체가 적어서 구하기 어렵다고 소문난 브랜드의 홍차였다. 그저 답례품이라기엔 약간 지나치지 않나 싶지만 어쨌든 재회의 이유로는 나쁘지 않았다.
“이런 걸 다.”
카예나는 아랫것들에게 찻잎과 함께 부황에게 하사받은 패물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시녀 몇 명과 하인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답례까지 준비한 걸 보니 지난번에 들려준 이야기가 꽤 유익했던 모양이지?”
조언이라고는 고작 올리비아를 만나라는 게 다였고 그녀와는 아직 대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정확히 말해서 그녀의 말처럼 그의 고민을 해결해 줄 방법은 아니었다.
“올리비아 그레이스 영애와는 아직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의 말에 카예나가 창밖을 한 번 내다보고 말했다.
“날이 좋으니 산책을 하는 건 어떻겠는가?”
나가서 마저 이야기하자는 뜻이었다.
라파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둘의 산책이 순식간에 결정되자 베라가 말했다.
“그럼 양산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전하.”
“괜찮아. 가끔은 햇볕을 좀 쬐는 것도 좋으니까.”
라파엘로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서 에스코트를 청했다.
카예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팔을 아주 살짝만 잡았다.
‘그는 사람과 접촉하는 걸 싫어하니까.’
그녀는 그 부분만 신경 쓰느라 라파엘로의 묘한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후원 산책로로 가지.”
후원 한구석엔 한적한 시골길처럼 꾸민 산책로가 있었다.
카예나는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산책로 앞에 도착한 카예나는 시녀들을 떨어뜨렸다.
“너희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렴.”
“예, 전하.”
라파엘로도 자신의 수행원들에게 따라올 필요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한적한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따라붙는 시선이 사라지자마자 카예나가 그의 팔에서 손을 뗐다.
라파엘로가 잠시 멈칫했다가 팔을 내렸다.
“키드레이 경이 나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지 않는 건 뜻밖이네.”
그 말에 라파엘로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카예나의 옆얼굴에 닿았다. 그는 볼 위로 살짝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을 무심결에 눈으로 좇았다.
“제가 피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카예나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가 또 평소처럼 경에게 과하게 들러붙어 짜증스럽게 굴면 어쩌려고?”
그녀가 변했다는 건 느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신랄하게 언급할 줄은 몰랐다. 마치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카예나를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카예나는 그것으로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경이 내 말을 곧바로 신뢰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과는 하고 싶어.”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둘 사이에는 두 걸음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적당히 예의를 차린 거리였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어.”
사람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꿀 수 있을까?
보통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사과에 진심이 담겼는지 그렇지 않은지 함부로 재단하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돌변해서 또 멋대로 애칭으로 불러도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심인지와는 별개로 이런 사과를 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 있었다.
‘이건 정치적 제스처야.’
황족인 그녀는 남자 하나가 마음에 들어서 좀 귀애할 수도 있다. 그 상대가 키드레이 공작가의 소가주라고 할지라도 정상 참작된다. 라파엘로에게 흥미가 식으면 그것으로 없던 일처럼 굴면 그만이다.
하지만 카예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치부를 대놓고 말하며 사과했다. 그와 은원을 풀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뭘까.’
그것이 지난번에 고민을 해결해 주겠다고 나섰던 일의 연장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치 않으니 거두어 주십시오.”
라파엘로는 방어적으로 나가 보았다.
카예나는 그럴 것을 예상한 사람처럼 이번엔 명예를 걸었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어.”
이쯤 되니 정말로 궁금해졌다. 대체 뭘 협상하고 싶기에 이렇게 나오는 걸까? 그는 카예나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려면 이 사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미 과거는 잊었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라파엘로는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했지만 카예나의 사과에는 사실 진심이 반쯤 담겨 있었다. 이렇게 사과하고 그가 받아들이는 일이 카예나의 마음에 찜찜하게 남아 있던 부채감을 조금 해소해 주었다. 어차피 라파엘로는 기억도 못 할 회귀 전 삶에 대한 죄책감일지언정.
“고마워.”
그래서 꽤 후련하게 웃을 수 있었다.
마침 부는 바람이 살짝 흘러내렸던 금빛 머리카락을 살랑 휘날렸다.
그 미소가 보기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좀 이상했다.
저 미소에 내가 어떤 감상이 들었다고?
그는 고개를 살짝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이 상황, 이 분위기, 자신의 감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눈치챘겠지만, 진짜 용건을 이야기해야겠지.”
그 감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카예나가 본격적인 용건을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카예나의 입가에 맺혀있던 미소는 용건으로 인해 사라졌다.
그게 이상한 아쉬움을 남겼다.
“그레이스 영애를 만나 보라고 한 건 그녀 자체의 훌륭함도 있지만, 정치적인 이유도 있어.”
그녀는 다시 후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 이유를 말했다.
“이제 곧 황녀궁 시녀로 올리비아 영애를 발탁할 예정이거든.”
이미 레제프가 시녀로 입궁을 요청한 상태지만 그건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키드레이 공작 부인의 반응이 대충 예상되지 않아?”
“그레이스 가문의 후원을 끊고 혼담도 없던 일로 돌리시겠군요.”
“그렇겠지. 그런데 중요한 건 올리비아만 그런 게 아닌 거야.”
“제게 혼담이 들어왔던 다른 두 영애도 시녀로 발탁할 예정이란 말씀이십니까?”
카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신 그 집안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가 생길 예정이지.”
그 집안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
라파엘로는 당장 떠오른 것을 말해 보았다.
“황자 전하나 하인리히 대공자를 차기 황제로 지지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성사되기만 한다면 참 좋은 방법이지만 단시간에 해내긴 좀 어렵겠지.”
카예나는 원작 소설을 읽어 상당히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어느 가문의 비리나 스캔들 같은 것들.
“귀족들은 일하지 않다 보니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지. 그들은 돈이 화수분처럼 생겨나는 줄 알아.”
“채권이 넘어가며 집안이 다른 가문에 저당 잡힌단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되면 실질적인 가주가 바뀌게 될 테고요.”
드물지만 제법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사실 장부를 확인해 보지 않는 이상 잘 알기 어려운 일이거든.”
카예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에이반 가문 채권이 곧 넘어가서 가문 존속 자체가 위태로워질 거야. 그 채무를 공작가에서 갚아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일에 하인리히 대공자가 끼어 있다면 어떠할까?”
“하인리히 대공자……?”
그 교활하기 짝이 없는 개망나니는 자신의 세력을 불리는 일에 빚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한 가문을 파산위기로 몰아넣고 제 아래로 복속시켰다. 그런 식으로 제 세력의 덩치를 빠르게 키워 낸 것이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브루킨 가문이겠군. 하지만 결국 이쪽도 결혼 이야기가 무산될 거라 나는 확신하네.”
“어째서입니까?”
“리타 브루킨의 광증은 유전병이거든. 지금은 가문 내에서 쉬쉬하고 있지만, 곧 사교계로 새어나갈 거야.”
가문을 상속하기 위해 후계자를 낳고 끊임없이 대물림해야 하는 귀족 사회에서 유전병이란 것은 치명적이었다.
“자, 이로써 키드레이 공작 부인이 선택한 가문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네. 파혼을 축하해, 키드레이 경.”
이 일에서 카예나가 직접 움직인 것은 올리비아 그레이스를 포섭하는 것뿐이었다.
‘둘이 무조건 잘되어야 하니 다른 가문에 흠이 있을 수밖에.’
그리고 그 덕분에 카예나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정보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말씀대로라면 한동안 결혼하란 소리는 듣지 않겠군요.”
“그렇지.”
“그럼 전하께서는 어떤 이득을 보십니까?”
카예나는 망설일 것 없이 대답했다.
“경의 신뢰.”
라파엘로는 뜻밖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신뢰? 그것이 왜 필요하지?
“이제 내가 믿을 만한 모략가라고 신뢰할 수 있겠지?”
상대를 설득하는 일에는 반드시 이익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것이 감정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말이다.
지금은 라파엘로에게 감정적인 이익을 주며 설득해야 했다.
“제 신뢰가 필요하다는 말씀은,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이 전하께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겠군요.”
“역시 영민하네.”
이미 한차례 황당한 칭찬을 받아서인지 저번만큼 어이없진 않았다.
“그리고 이 말을 해주시는 것은 전하께서도 저를 신뢰할 수 있을지 시험하시는 거겠고요.”
“절대 키드레이 경에게 손해는 없을 거라고 장담해. 만약 내가 요구한 일 때문에 경에게 손해가 난다면 어떻게든 그걸 보상할 생각이니까.”
황녀라는 직위는 훌륭한 보증서 역할을 해줄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일 레제프를 황제로 추대하고자 한 일이라면, 지금의 방식은 말이 되지 않는다. 효율도 낮았다.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은 키드레이 가문을 공략하는 게 아니라 다른 유력한 지주 가문을 포섭하는 게 훨씬 낫다.
그런데 카예나는 자신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황위 계승과 관련이 없다는 말인가? 황녀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이 뭐가 있을까?
카예나의 느긋한 미소를 보니 지금 그 사실을 알려 줄 것 같진 않았다.
“아, 그런데 올리비아 그레이스와 잘 어울릴 거라고 했던 건 진심이야.”
또 이상한 건, 카예나가 어쩐지 자신을 올리비아와 엮이도록 권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꽤 진심으로.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혼담이 곧 취소될 건데, 제가 굳이 누구를 만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의 말대로긴 했다.
카예나가 두 사람이 이어질 예정이라는 사실만 몰랐어도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 것이다.
“강제할 마음은 없어. 어쨌든 모친의 강압이 있다면 올리비아 그레이스 양을 만나 보길 추천하는 것뿐이지.”
“저는 전하께서 올리비아 그레이스 영애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카예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뭐, 그랬지. 그런데 그런 게 다 부질없다고 느꼈을 뿐이야.”
따로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그 말에 라파엘로를 향한 애정도 포함되어 있단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인가?’
진짜 그녀가 오랜 집착을 끝내고 그에게서 마음을 털어 냈단 말인가?
라파엘로는 오랜 시간 시달린 기억 때문에 선뜻 믿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맹세했다.
공증인 없는 맹세이긴 하다. 그래도 카예나가 뭔가에 대해 맹세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쯤에서 다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이런 장소에서 너무 오래 같이 있으면 좋지 않으니.”
“알겠습니다.”
카예나는 한 번 심호흡하고 뒤를 돌았다.
사실 지금 구두를 신은 상태라 포장되지 않은 흙바닥을 걷는 게 부담스러웠다. 길은 잘 돌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해 길이 더 험했다. 그래서 이용객이 없어 일부러 이 산책로를 택한 것이었다. 하이힐과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는 이곳에 전혀 맞지 않았다.
“앗!”
돌을 잘못 밟은 카예나가 휘청거리자 라파엘로가 그녀의 허리를 받치며 보호해 주었다. 얼결에 그의 품에 안기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조심하십시오.”
카예나는 불에 덴 사람처럼 그에게서 떨어졌다. 지나치게 접촉을 경계하는 태도에 라파엘로의 한쪽 눈썹이 휙 올라갔다.
‘이런.’
카예나는 그가 사람과 접촉하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최대한 닿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막 이미지 회복을 시작했는데 마이너스로 돌아갈 수 없어.’
나중에 그녀의 실체 없는 부군을 만들어 내는 일을 위해서는 라파엘로의 전면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서부 공작령에 도시 국가 하나를 편입시키는 일에 내가 브로커가 될 예정이니까.’
그 도시 국가에 가상의 인물을 하나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돈 많고 젊고 잘생긴, 자신의 남편이 될 남자였다.
“길이 좀 험해서. 미안하네.”
카예나는 변명처럼 덧붙이며 라파엘로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그거 좀 도와줬다고 벌써 불쾌해하는 건가?’
라파엘로는 오히려 정반대의 이유로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바닥이 고르지 않으며 카예나가 힐을 신고 있단 것도 알았다.
‘그런데 왜 에스코트를 받지 않지?’
지금도 그렇다.
그녀는 또 스스로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그에게 에스코트를 요청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사람과의 접촉을 싫어한단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른다.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오래 지켜본 제레미가 아니고서야 모친도 모르는 증상이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제 불쾌감을 억눌러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그게 정상적이기도 하고.
에스코트를 하느라 잠깐 역겹고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끼는 건 인내할 수 있었다.
라파엘로는 선뜻 손을 내밀었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전하.”
이게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행동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진짜 상식적인 일이니까 하는 건가.’
그런 것치곤 방금 그는 조금도 억지로 에스코트를 자처하지 않았다.
카예나는 여기서 그를 더 불쾌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으므로 단칼에 거절했다.
“그럴 것 없네.”
그 행동에 라파엘로는 확신을 얻었다. 황녀가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었다.
‘원래 나를 좋아하던 게 아니었나?’
착각이 아니었다. 엘다임에서 카예나가 라파엘로에게 마음이 있단 사실을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빨랐으니까.
그런 마음이 어찌 한순간에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황제의 처소 앞에서 오랜만에 만난 카예나는 꼭 껍데기만 같은 대역 같았다.
‘지금까지 한 행동이 모두 연기였나?’
만약 그런 거라면 무서운 일이었다. 그만큼 전과 지금은 동일인 같지 않았다. 말투나 행동이 노련한 정객처럼 의미심장했다. 마치 생을 몇 번 살아 보고 온 사람처럼.
‘…말이 안 되는 거겠지.’
라파엘로는 자신이 지나친 가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미묘하게 변한 표정을 보지 못하고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이힐은 버리고 낮은 굽 구두로 다 바꾸라고 해야겠어.’
그녀는 걷기 불편한 구두에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는 조경이 화려한 화원만 산책했기에 굽이 높은 구두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카예나가 가진 구두는 모두 굽이 높았다.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바닥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에스코트하는 대신 걸음만 그녀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대화 없이 오직 걷는 일에만 집중하니 입구까지 순식간이었다.
카예나의 시녀들과 라파엘로의 수행원이 두 사람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각각 저들 주인을 보좌하며 눈치를 살폈다. 어딘가 분위기가 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분이 왜 이렇게 서먹하게 나오셨지?’
분명 산책로를 들어갈 때만 해도 에스코트를 받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둘이 서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역시 소문이 사실인가?’
카예나가 라파엘로의 알현 요청을 다섯 번이나 거절한 일은 황궁은 물론이고 사교계까지 은밀히 소문났다. 그들은 카예나가 라파엘로에게서 마음이 떴다는 근거 중 하나로 그 사실을 꼽기도 했다.
오늘 둘이서 시간을 보냈음에도 카예나가 남처럼 떨어져 걸었다는 사실이 또 소문날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어중간한 거리를 두고 황성을 향해 걸었다.
문득 카예나가 말했다.
“산책을 마쳤으니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지만 바쁜 경을 놓아주어야겠지.”
원래 이런 만남은 차와 다과를 대접하고 길게는 만찬까지 같이 들어야 한다. 선물로 찻잎까지 받았는데 같이 마시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은 사실 나쁘게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카예나는 라파엘로를 생각해서 이만 가 보라고 말했다. 그가 자신을 거북해했던 과거도 그렇지만 애초에 이런 시간을 보내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배려인 건지, 껄끄러워하는 건지 알 수 없군.’
정작 라파엘로는 오늘 카예나를 만나기로 작정하고 외출했던지라, 이후의 스케줄이 없었다. 평소의 카예나를 생각했을 때 오후 티타임은 물론이고 만찬까지 붙잡혀 있을 수 있다고 내심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짧은 산책 후, 가 보라니.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진짜 바쁜 일이 있어 가 봐야 하더라도 황녀가 베풀어 준 친절에는 괜찮다고 대답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의례적으로 말한 것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괜찮다고 생각한 것일까.
카예나는 그가 의례상 하는 말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선물받은 찻잎으로 가장 맛있는 홍차를 끓일 수 있을 때 초대장을 보낼 테니 무리할 것 없네.”
주변에서는 카예나의 말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라파엘로의 보좌관인 제레미가 가장 경악했다.
그는 황녀가 달라졌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다른 모습을 보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황녀 전하께 이런 재치가 있으셨나?’
정확한 날짜를 기약하지 않되, 홍차가 떨어지기 전에 초대장을 보내겠다니. 거절을 위한 말이었더라도 배려가 돋보이는, 적절한 수위의 메시지였다.
‘그’ 카예나가 한 말이라니 믿겨지지 않았다.
제레미는 라파엘로를 힐끗 보았다. 원래도 생각을 읽기 어려운 표정이었지만 오늘은 더욱 오묘했다.
‘……저런 표정은 처음 보는데.’
굳은 듯, 부드러운 듯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저런 표정은 처음 본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주인님도 전하의 변화가 이상하긴 한 모양이네.’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럼 다음번엔 다과를 선물로 준비하겠습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었다.
카예나는 그가 자신의 손등에 키스하려고 하는 뜻임을 알았다.
‘이제 이런 예의는 굳이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야 하나?’
카예나는 그렇게까지 하기엔 너무 내외하는 것 같은 인상이 되리라 생각했다.
‘장갑을 끼고 있으니 좀 낫겠지.’
그녀는 한숨을 삼키며 마지못해 손을 살며시 내밀었다. 이 행동이 부디 그에게 특별한 불쾌감을 주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영광입니다.”
라파엘로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쥐었다. 지금까지의 이 행위를 할 땐 불쾌감으로 마음이 얼룩져 있었다.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해 얼른 끝내 버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작고 연약한 손이군.’
그런데 생각보다 이 접촉이 견딜만했다. 아니, 견딜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이상하리만큼 괜찮았다. 평소와 달리 추근거리지 않아서 마음이 편해진 탓일까?
그는 문득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카예나의 손이 이렇게나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대화할 때는 이렇게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자연스럽게 두른 위엄과 기품 때문인지 그녀는 결코 약하다거나 작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 숙여 카예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결 좋은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카예나는 순간 쓰다듬으면 촉감이 부드러울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라파엘로의 입술이 떨어지고 막 일어났을 때였다.
“여기에 계셨군요, 누님.”
익숙한 목소리에 카예나와 라파엘로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레제프가 수행원을 이끌고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냥 시즌을 대비하느라 바쁠 텐데.’
유력한 가문의 가주나 후계자들과 어울리며 사냥 다녀야 할 때였다. 그때 쓸 새로운 병장기를 여럿 구매해야 하기에 바쁠 줄 알았는데 라파엘로를 보러 온 모양이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라파엘로 역시 그를 향해 예를 갖췄다.
“라파엘로 키드레이가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레제프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카예나가 라파엘로와 같이 산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이곳으로 온 참이었다.
“누님과 산책 중이었다지?”
키드레이 공작가는 그가 반드시 포섭해야 할 가문이었다. 레제프는 군사 명령권이 없다는 약점이 있었는데, 그에 반해 하인리히 대공자는 병사를 보유한 가문을 몇이나 제 편으로 포섭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다 합쳐도 키드레이 공작가만 못했다. 키드레이 공작가는 정예 중에서도 정예였으며, 오래 전부터 국경선을 지키는 군사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가장 큰 곡창 지대를 보유한 에반스 후작가가 있지.’
레제프는 군사력이 약한 대신 에반스 후작가의 풍요로운 곡창 지대를 기반으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에반스 가문은 레제프를 전폭 지지했고, 자신은 키드레이 공작가의 군량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다. 둘이 손을 잡으면 서로의 약점을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셈이다.
“난 마침 누님과 오후 티타임을 같이할 생각이어서 누님을 찾으러 왔다네. 그런데 경도 같이 있었을 줄은 몰랐군.”
여기까지 부러 찾아온 레제프가 라파엘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막 헤어지려던 참이었어.”
“아,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카예나는 레제프가 그에게 오후 티타임을 같이하자고 말할까 봐 얼른 말했다.
라파엘로도 그 기색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카예나의 옆얼굴에 닿았다.
“그럼 조심히 가게, 키드레이 경.”
아까와 달리 지금은 그를 얼른 보내려는 듯한 말투였다. 라파엘로는 그 생경한 태도에 천천히 시선을 늘어뜨렸다.
“살펴 들어가십시오, 전하.”
레제프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어쩐지 원래 알고 있던 그들 사이와는 상당히 달라 보였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에게 추근거리지 않았고 라파엘로는…….
‘그다지 기분 나빠 보이진 않는군.’
누이가 처신을 잘한 탓인지 아니면 라파엘로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괜찮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우호적인 관계를 이렇게 지속해 나간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누님께서 그와 이리저리 얽힐 일을 계속 만들어 내는군.’
건방지게도 그레이스가에서 아직도 시녀로 발탁하겠다는 서신에 답변하지 않고 있지만 시간문제였다.
‘올리비아 그레이스와 혼담이 오갔다고 했었지?’
레제프는 카예나에게 다가가 에스코트했다. 카예나가 서슴없이 손을 잡고 몸을 기댔다. 그런데 라파엘로는 자리를 뜨기 전 그것을 묘한 눈길로 보더니 걸음을 돌렸다.
‘방금 그 시선은 뭐지?’
레제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흐음…….”
그가 짧게 침음성을 흘리자 카예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그러니?”
레제프는 누이를 내려다보았다.
얼음 심장이라도 금방 녹여 버릴 듯이 아름답고 자상한 누이.
그는 익숙한 가면을 썼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래도 라파엘로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 * *
“아버지!”
리디아는 황궁을 찾아온 벤제만 백작을 향해 비명처럼 소리치며 달려갔다.
“황자 전하께서 뭐라고 하셔요? 잘 풀린 것 맞죠?”
그가 황궁을 방문한 이유는 따로 없었다. 얼마 전 리디아가 친 사고 때문이었다.
카예나가 아무리 무늬만 황녀라 해도 어쨌든 황족이다. 그런 그녀에게 화상을 입히다니. 어리석은 딸 때문에 실망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정말 큰 실수였다.
“에반스 경이 수습해 줬다. 다시는 그런 경거망동을 해선 안 돼. 알겠느냐!”
그의 꾸지람에도 리디아는 찔끔하는 기색이 없었다.
“너무 갑갑해요, 아버지. 에반스가에서는 대체 언제쯤 저를 황자비 후보로 추천할 생각이래요?”
백작은 혀를 끌끌 차다가 방금 나온 본성을 힐끔 보았다.
‘에반스 가문에도 혼기가 찬 여식이 있었지. 그를 두고 내 딸을 황자비로 밀어 줄 리 없어.’
그는 자신이 황자비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딸을 바라보았다.
‘레제프 황자의 수족 노릇이나 잘하면 그만이지.’
큰 욕심을 부리다가 에반스 가문에 밉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가능성은 있으니 딸이 상심하지 않게끔 말했다.
“너무 조급해 말아라. 이왕이면 황녀 전하와 사이도 원만하게 지내고.”
리디아는 뾰족하게 말했다.
“그 여자가 일부러 파이를 엎게 했단 말이에요! 제 손을 보세요, 아버지!”
백작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여자라니, 리디아!”
뜨거운 파이를 막 옮긴 접시를 쥐었다가 손가락을 살짝 데었다. 리디아는 카예나가 일부러 그랬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전하께 간식을 내가라고 말하면서 시녀들의 경쟁을 부추겼어요! 주방 하인이 아니고서야 파이를 식혀야 한단 사실을 누가 알겠어요?”
그녀의 의심은 나름 정확한 구석이 있었다.
“일부러 팔을 걷고 파이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그걸 빌미로 레제프 황자 전하의 동정심을 사려고 말이에요.”
“말조심 좀 해라! 여기가 황궁이라는 사실을 잊었느냐?”
리디아는 쓸데없이 몸 사리며 소극적인 부친을 답답해했다.
“아버지, 제발요. 건방진 것들이 자꾸 저를 무시한단 말이에요.”
최근 리디아는 심하게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베라는 물론이고 다른 시녀들까지 리디아와 어울리는 걸 조심스러워해서 분통이 터졌다.
백작은 딸을 타일렀다.
“어차피 그것들은 이 아비가 한마디만 하면 다시 정신 차릴 거다. 그러니 너는 마음을 추스르고 황녀를 잘 감시하거라.”
부친의 말에 리디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감시할 것도 없어요. 황궁을 나가지도 않고 맨날 침실에만 있는걸요. 예산은 썩어 넘치는데 파티 한 번 열지를 않는단 말이에요.”
“예산이 많은데도 파티를 열지 않는다고?”
그러고 보니 독살 미수 사건이 터지고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갔다. 지금까지 칩거할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는 시기에 카예나의 성년식이 거행된다. 고작 한 달 조금 넘게 남은 시점이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따로 만나는 사람은 없고?”
“라파엘로 키드레이 공자와 몇 번 보긴 했어요. 아주 잠깐이었지만요.”
“으음.”
“요즘 레제프 황자 전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요. 전하를 자주 볼 기회가 생긴 건 좋지만, 이상하게 전하께서 예전 같지가 않아요. 맹수 조련사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은 들으셨어요? 기가 차서!”
‘뭔가 이상해.’
레제프 황자가 최근 꽤 고분고분해졌단 이야기는 들었다. 거기에 카예나 황녀의 영향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다. 하지만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헛소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새삼 황녀의 의도와 거동이 의심스러웠다. 가령 황자의 즉위에 관여하여 섭정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그럴 수 있어.’
후계자의 모친이나 누이, 혹은 비가 권력을 제 것처럼 휘둘러 대는 역사는 빈번했다. 심지어 카예나에게는 하멜 백작가라는 번듯한 외가도 있지 않은가. 레제프 황자가 갑자기 카예나의 말을 듣고 고분고분해졌다. 이게 무얼 뜻하겠는가?
그러고보니 리디아의 일로 제논 에반스와 이야기할 때도 뭔가 이상했다. 그가 카예나 황녀를 상당히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탓이다. 자꾸만 뭔가 음모가 있을 것 같단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리디아의 어깨를 붙잡고 은밀하게 말했다.
“카예나 황녀가 아무래도 수상하구나. 누군가와 접촉하고 있지는 않은지 면밀하게 살펴보아라. 진상품이나 그런 것들 전부!”
“네에? 진상품이 얼마나 많은데…….”
“다른 시녀들도 시키면 되질 않느냐? 이 아비가 말해 놓을 것이니 네 말을 잘 따를 거다.”
갑자기 임무를 받게 되어 썩 내키진 않았다. 그래도 시녀들이 다시 제 말을 잘 따르게 해 주겠다는 부친의 말은 마음에 들었다.
“알겠어요.”
* * *
카예나는 창가에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심각한 얼굴로 장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예산이 너무 남는데.’
내명부를 다스리는 권한은 레제프에게 있다. 선황후 대신 그 일을 수행했어야 할 카예나가 무능했기 때문이다.
레제프는 이번에 황녀궁 예산을 전례 없이 파격적으로 조정했다. 카예나를 아끼는 마음을 외부에 드러내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원래의 나였다면 이 예산도 부족하게 옷을 사들였겠지.’
아니면 정원이나 침실을 뜯어고쳤을 지도 모른다. 며칠 지나면 시들어 처치 곤란할 꽃을 한가득 사서 파티를 열었을 수도 있고.
지금은 파티도 열지 않고 모임도 하지 않고 옷을 더 맞추지도 않으니 돈 쓸 곳이 없었다. 그나마 최근 가장 돈을 많이 쓴 일이라고는 구두를 바꾼 것 정도였다.
“다과가 좀 늦는구나.”
다른 시녀들이 자리를 비워 홀로 시중을 들던 베라가 자수 놓던 손을 멈췄다.
“알아보고 올까요?”
카예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 저었다.
“아냐.”
원래 일을 저지르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요즘 베라를 제외한 시녀들은 시간이 날 때면 꼬박꼬박 침실을 나갔다. 베라의 말로는 뭔가를 찾는 것 같다고 했다.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의 소임을 더 소홀히 했다. 카예나가 전혀 혼내질 않으니 더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카예나가 외출도 안하고 손님을 맞이하지도 않으니 점점 시녀들은 할 일이 없었다.
“오후 티타임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전하.”
“그렇기는 하구나. 그래도 내가 만들어 놓은 버터 쿠키가 있으니 괜찮아.”
“과자만 드시면 몸 상하십니다. 제가 직접 챙겨 오겠습니다.”
베라는 그렇게 말하며 침실을 나갔다.
그녀는 최근 시녀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거의 따돌림을 당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베라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폭풍 전야다.’
베라는 레제프의 변화를 정면으로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가 카예나를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극적으로 달라졌는지 두 눈으로 보았다. 카예나는 계속 자신을 살살 흔들어 댔다. 뭔가를 이제 슬슬 선택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은근한 종용이 느껴졌다.
‘시녀들을 모두 물갈이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하지만, 대체 어떻게? 황제도 명분 없이 함부로 사람을 내치지 못한다. 그걸 황녀는 어떻게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때 하녀가 다과를 챙겨 들어왔다. 도나였다.
“시녀들은 어쩌고 네가 전하의 간식을 가져왔느냐?”
베라가 의아하게 묻자 도나가 대답했다.
“베라 님이 이곳에 계시니 괜찮을 거라며 간식만 골라 주고 가 버렸습니다.”
그녀는 미심쩍은 눈으로 도나를 보았다. 부쩍 카예나의 수발을 자주 드는 하녀였다.
‘뭔가 있어.’
“……이리 다오.”
도나가 간식이 담긴 은쟁반을 베라에게 넘겼다.
그녀는 간식을 받아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 응접실에서 그것을 확인해 보았다.
“…….”
베라의 표정이 더없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 정신 나간 것들이……!”
간식 중에 견과류 쿠키가 섞여 있었다.
카예나는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 시녀들은 견과류가 든 음식이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 후에 상에 올려야 한다. 이건 심각한 직무 태만이었다.
달칵-.
침실 문이 열리고 옅은 실내용 드레스 차림의 카예나가 걸어 나왔다.
“들어오지 않고 뭘 하니?”
“죄송합니다. 다과에 문제가 있어 다시 준비해 오겠습니다, 전하.”
“어머, 그럴 것 없어.”
그녀가 빙긋 웃었다.
“그건 아주 잘 준비된 간식이란다.”
“……예?”
카예나는 쟁반을 놓아둔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정확히 견과류 쿠키를 들었다.
“전하, 그건……!”
“견과류가 든 쿠키지.”
“……?”
“난 이걸 먹을 생각이야.”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베라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너는 레제프에게 오후 티타임에 맞춰 내가 만든 간식을 내가렴. 내 심부름을 하느라 견과류 쿠키가 다과에 섞여 들어왔단 사실을 몰랐던 거지.”
“전하.”
“난 방에 홀로 쓰러져 있을 테고 놀란 도나는 당장 의원을 부르겠지. 물론 부황께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그건 도나가 도와줄 거야. 하지만 너는 이 모든 걸 몰라야 한다.”
그녀는 이제야 알아차렸다.
“잘할 수 있겠니?”
베라는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카예나는 이 사건 한 방으로 시녀들을 내칠 계획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전원이 그렇게 될 것이다.
베라는 당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전하의 사람으로 쓰일 것입니다.”
그러자 카예나가 빙긋 웃었다.
“그거 고마운 말이구나.”
* * *
레제프는 검과 활, 새로운 견장을 확인해 보았다.
“하인리히 대공자 측에 심어 둔 세작의 말을 들어 보니 투창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투창?”
하인리히 대공자가 뭐 하러 투창을 샀단 말인가?
“괜히 창을 날려 대다가 말들이 놀라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살펴보아라.”
“예, 전하.”
그는 망토를 풀어내고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러자 하인들이 테이블 위에 놓인 병장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누님은?”
제논은 다른 테이블에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침실에 계십니다.”
요즘 황녀는 이상할 정도로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의원의 말로는 독을 마신 건 이미 다 나았다고 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전하, 황녀궁의 시녀가 알현하길 청합니다.”
“들어오라고 해.”
베라가 하녀 하나만 데리고 들어왔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레제프는 그녀의 손에 들린 은쟁반을 보고 픽 웃었다. 또 누이가 간식을 만들어 보낸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황녀 전하께서 오후 티타임에 맞춰 직접 준비하셨습니다.”
“가져와라.”
이제는 이 일도 낯설지 않았다.
제논이 자리에서 일어나 쟁반을 받아 들고 시중 하인에게 간식을 먹였다. 이상이 없는 걸 확인 후 레제프가 버터 쿠키를 맛봤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자네가 자주 오는군.”
“황녀 전하께서 소인을 신임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래?”
그는 속내를 뜯어보듯 파란 눈동자로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베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마주쳤다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누님은 뭘 하고 계시지?”
“방금까지 황녀궁 예산이 너무 많아 골치를 앓고 계셨습니다.”
그 말에 레제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돈이야 쓰려면 얼마든지 쓰는 것인데.”
그것을 핑계로 누이랑 이야기나 하러 가 보려던 찰나였다.
그때 하인이 응접실로 다급히 들어왔다.
“황자 전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황녀 전하께서 쓰러지셔서 의원이 황녀궁으로 갔습니다!”
“뭐? 누님이 쓰러져?!”
레제프는 황녀궁으로 달려갔다.
* * *
“견과류 섭취로 인한 알레르기 증상입니다.”
의원은 요즘 악재가 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건 독을 마신 날부터 시작되었다. 살리지 못하면 목이 잘릴 게 뻔했다.
다행히도 치명적인 독도 아니고 섭취량도 적어서 약을 잘 쓰니 잘 회복되었다. 그러더니 또 갑자기 시녀 때문에 화상을 입었다. 미쳐 날뛸 줄 알았던 황녀는 오히려 잠잠했고 레제프가 사달 낼 뻔했다.
근데 이젠 시녀도 없이 혼자 방에 쓰러졌다. 그것도 견과류 쿠키를 먹은 상태였다. 알레르기는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견과류가 들어간 쿠키라니. 시녀가 대체 이런 것 하나 살피지 않고 뭘 한 건지.’
그는 옆에 간식이 담긴 접시를 보고 속으로 한숨지었다.
‘그런데 이렇게 쓰러질 만큼 상태가 나쁘지 않은데……. 발진도 없고. ……최근 몸이 쇠약해지신 탓인가?’
알레르기로 쓰러진 것치곤 꽤 건강한 상태였고 발진도 없다.
하지만 좀 이상하다고 말하기엔 서슬 퍼런 분위기라 눈치가 보였다.
의원은 쿠키를 베어 문 흔적을 확인해 보았다. 부러뜨려 먹은 건지 잇자국이 있진 않았다. 하지만 그 양이 아주 적었다.
‘큰일이 나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뭐.’
그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섭취량이 적어서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의원은 묘하게 조용한 레제프의 눈치를 살피다가 진료 기구를 거뒀다. 옆엔 카예나의 시녀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레제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옆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가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나가 봐.”
레제프의 허락이 떨어지고 의원은 진료 가방을 챙겨 곧바로 나갔다.
침실 안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너.”
그가 베라를 가리켰다.
“일어나서 상황을 설명해 봐.”
베라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뢰었다.
“제가 전하께 간식을 전달하러 간 사이 황녀 전하께서 드실 다과 중 견과류 쿠키가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자리를 비운 소인을 죽여 주십시오.”
“황녀가 먹을 다과를 확인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부분은 시녀들이 할 것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었다. 최근에 그들의 기강이 한껏 풀어진 상태였다. 매사에 조심하지 않으며 대충 넘겨 버렸다. 그랬기에 자신들을 따라온 하녀, 도나가 견과류 쿠키를 같이 담는 것도 몰랐다.
“그래. 견과류 쿠키가 섞여 들어갈 수 있지. 그런데 누님께서 왜 혼자 침실에 쓰러져 계셨단 말이냐?”
레제프의 침착한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황녀를 뒷조사하느라 모두 자리를 비웠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왜 다들 말이 없느냐?”
“……송구합니다, 전하.”
레제프는 바로 옆에 있는 유리 화병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꺄악!”
그는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왜 누님께서 홀로 침실에 쓰러져 계셨느냐?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으면 위급했을 수도 있다는데.”
그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 황실에서 그런 일이 있었지. 견과류 알레르기를 이용해서 황족을 죽인 사건 말이야.”
레제프는 광소하며 시녀들에게 말했다.
“그게 바로 황후 폐하이시구나!”
시녀들은 그 말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자칫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가문까지 멸문당할 위기였다. 그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살려 주십시오, 전하! 저희는 절대 아무런 의도가 없었습니다!”
리디아가 도나를 가리켰다.
“저 하녀가 한 짓이 틀림없습니다. 저희를 모함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도나가 바로 무릎을 꿇었다.
“저는 쟁반을 받아 운반하기만 했습니다. 주방 하인들이 제 결백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러고는 도나가 고개를 휙 들어 억울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하인리히 대공가에서 보낸 다과 상자에서 저 쿠키를 꺼내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인리히 대공가라고?”
“말도 안 됩니다!”
시녀들은 소릴 내질렀다.
그러다 누군가가 눈물을 매단 채로 리디아를 가리켰다.
“리디아 벤제만이 황녀 전하의 거동이 수상하다며 진상품을 수색하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저희더러 말을 따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겁박하였습니다, 전하!”
동료 시녀의 배신에 리디아의 얼굴이 완전히 창백해졌다.
이대로 모의를 뒤집어쓸 수 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벤제만이니 저들보다 더 발언권이 있으리라.
그녀는 당장 소리쳤다.
“모함입니다! 전하, 저런 어리석은 것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이건 전하의 세력을 뒤엎으려는 간계입니다. 저들 중 세작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증좌도 없이 저 살겠다고 서로를 고발하는 시녀들을 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한심하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날 기만하는 걸 한 번으로 그치지 않은 것을 보니 너희 중 세작이 있는 게 분명하구나.”
레제프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시녀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덜덜 떠는 시녀 하나를 붙잡아 당겼다.
“아악!”
“너냐? 네가 하인리히가 보낸 첩자더냐?”
“전하! 소인은 절대 첩자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냐? 너야?”
“꺄아악!”
레제프가 시녀의 머리 장식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인제 보니 너희들이 감히 날 우롱하고 있었구나!”
“살려 주십시오!”
“억울합니다, 전하!”
레제프가 벽난로 옆에 걸린 쇠꼬챙이를 가져와 그들에게 휘두르려 했을 때였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난장판이 된 분위기를 뚫고 문지기의 외침이 들렸다. 곧 침실의 문이 활짝 열리고 창백한 낯빛의 황제가 루든 시종장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들어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레제프는 손에 든 쇠막대를 놓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침대에 누워 있는 카예나부터 엉망이 된 꼴로 바닥에 엎드린 시녀들과 레제프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한마디를 내뱉었다.
“한심한 것.”
“…….”
황제는 무릎을 꿇은 상태의 레제프에게 일어나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부축하는 중인 루든을 불렀다.
“루든.”
“하명하십시오, 폐하.”
“여기 시녀들을 전부 매질하여 황궁에서 내쫓고 수도에 발길을 금하라는 교지를 내려라.”
시녀들 사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사들이 시녀들을 끌고 나가려 했을 때였다.
“그 시녀는 놔두어라.”
황제가 베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베라는 당장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네가 현명하게 처신했다 들었노라. 저 시녀에게는 패물을 하사토록 하라.”
“황명을 받듭니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레제프를 바라보았다.
“짐이 모른 척하고 있으니 정말 바깥일에 어두운 줄 아느냐?”
그는 레제프가 카예나에게 독을 먹인 범인이란 사실을 알았다. 카예나가 제 위기를 기회 삼아 잘 처신하기에 넘어갔을 뿐이었다.
레제프는 어금니를 아득 물었다.
“레제프 황자는 잘못을 뉘우칠 때까지 황자궁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레제프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황명을 받듭니다.”
“황녀의 시중을 들 시녀는 짐이 선별할 것이다. 그리 알고 썩 나가 보아라.”
레제프는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 침실에서 나갔다. 그 불충한 태도에 다들 침음을 흘렸다.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베라에게 말했다.
“하녀를 보내 줄 터이니 그동안은 네가 알아서 황녀궁을 잘 꾸려 보아라. 필요하다면 적당한 직위를 내려 주마.”
“가문의 영광입니다, 폐하.”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행원을 데리고 침실에서 나갔다.
침실엔 카예나와 베라 둘만이 남은 상태였다.
베라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다들 나갔습니다, 전하.”
그 말에 카예나는 눈을 감은 채로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