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5
악녀는 마리오네트 5장. 같은 인물, 새로운 무대(5/33)
5장. 같은 인물, 새로운 무대
카예나가 이곳으로 회귀한 이후 황녀궁은 줄곧 때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고요했다. 그 침묵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들은 그것을 두고 얌전해졌다고 말했다.
베라는 달랐다. 그녀는 침묵에 발맞추며 예민하게 눈과 귀를 열어 두었다. 언제 이 황녀궁에 거대한 폭풍이 불어올 것인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 순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분명 견과류 쿠키를 먹고 기절했다고 한 카예나는 멀쩡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 앞은 애니와 도나가 지키고 있었다. 창엔 커튼을 쳤고 초를 켜 방을 밝혔다.
“베라.”
카예나가 베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베라는 얼른 침대맡으로 다가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손을 맞잡았다.
“네 집안이 사활을 걸고 레제프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안단다.”
자신이 황자의 사람임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에도 베라는 놀라지 않았다. 지금의 카예나라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레제프를 황제로 만들 생각이다.”
“…….”
베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보다 더 심오한 말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마치 오후 티타임의 다과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고민하는 듯 태평하게 말했다.
“네가 나를 따르는 것이 집안과 레제프를 배신하는 일이 아니란 뜻이다.”
“……전하.”
“레제프가 섬세한 아이는 아니지. 네가 그를 위해 아무리 발 벗고 뛰어도 준남작도 될 수 없다.”
뼈아픈 말이었다.
지금까지 그것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 항상 불안감은 안고 있었다. 이 모든 게 허튼짓은 아닐까 하는 현실적인 생각이 마음을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진 탓이라고 외면했다.
“황실 내 직위를 받는 것과 작위를 받는 건 참 다른 일이지.”
작위는 단순히 ‘너를 이제 남작으로 임명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당히 까다로운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에 매달릴 만큼 베라는 작위가 절실했다.
“네 가문에서 너를 사촌과 결혼시키려고 하니 도망치듯 내 시녀를 자처한 것을 알아.”
“어찌……!”
베라는 놀란 눈으로 카예나를 보았다.
“그 파렴치한이 널 안주인으로 들이고 동생들까지 첩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도 알아.”
그녀의 표정엔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담담하게 사실을 읊는 그 모습이 어딘가 섬뜩하기까지 했다. 베라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네가 직접 새로운 작위를 받아서 동생들을 데리고 나올 작정이었지?”
카예나가 다 안다는 듯이 베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유능하고 성실한 시녀는 책임감도 지나치게 강했다. 낡은 생각을 지닌 부모에 대항해 자신과 동생들의 삶을 보호하려 이 모진 황궁을 직접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나이가 고작 스물다섯 살이다. 그런 무게를 감당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카예나도 두 번째 삶에서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에 병든 모친을 모시느라 고생한 기억이 있다. 혼자서 모든 걸 다 해내기엔 그때의 ‘여자’도 너무 어렸다. 그래서 카예나는 기꺼이 베라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너는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베라는 눈을 꾹 감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후두둑 흘러내렸다.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안도감이었다.
“……제 동생들은 아직 어립니다.”
“그래.”
“아버지는 딸을 재산으로만 여기십니다.”
귀족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베라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저도 제 동생들도 집안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녀는 카예나라면,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이해해 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황성에 완전히 고립된 채 황제든 황자든 원할 때 휘둘려야 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니까.
카예나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이 무척 애달파서 베라는 이 순간 자신보다도 카예나가 가엽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작위 하나만 받아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카예나는?
베라는 침착하게 감정을 다스린 후 눈물이 마른 얼굴로 물었다.
“전하께서는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사뭇 비장한 물음이었다.
카예나는 이미 생각해 둔 다음 계획을 말했다.
“혹시 내 드레스 중에 초라한 게 있니?”
* * *
궁정인들은 난간 너머로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잠옷인지 실내복인지 알 수 없는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무릎을 꿇은 카예나가 있었다.
“전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알레르기로 쓰러졌다던 황녀가 눈뜨자마자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궁정인이든 기사든 모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황녀가 중앙성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데 그 앞을 어찌 지나간단 말인가?
얼결에 황성에 갇힌 꼴이 되었다. 모두를 대상으로 한 인질극이었다.
카예나는 비통한 얼굴로 초라하게 자릴 지켰다. 기댈 곳이라고는 제 동생이 전부인 나약한 황녀처럼 보였다. 그녀의 곁엔 유일하게 살아남은 시녀, 베라가 부축하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십니다……!”
황녀가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자 궁정인들이 난감해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 소식을 가장 기뻐한 건 당연하게도 레제프를 지지하는 귀족 세력이었다.
레제프의 무기한 근신령으로 인해 제논을 주축으로 긴급 회의가 열렸다. 그 와중에 들려온 희소식에 한 귀족이 말했다.
“아니, 황녀가 어쩐 일로 우리에게 이런 큰 도움을 준답니까?”
레제프가 직접 카예나를 휘둘러 수확한 결과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카예나가 자발적으로 이렇게나 큰 도움을 준 것은 단연 처음이었다. 모두 이 뜻밖의 상황에 횡재했다며 기뻐할 때 제논만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과연 레제프 황자를 위한 행동일까?’
과거의 카예나였다면 큰 고민 없이 진심을 헤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번 사건 한 번에 황녀궁 시녀가 모조리 내쳐졌다. 레제프의 영향력이 크게 위축된 것이다. 거기다 레제프는 황제의 진노를 고스란히 받아 무기한 근신령에 처했다.
여기서 카예나가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시녀를 황궁에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카예나의 모략에 당했다고 보는 게 가장 합당한 추론이었다.
‘견과류를 먹은 건 진짜일까?’
하다 하다 그런 의심까지 들 지경이었다.
‘아냐, 지나친 생각이지.’
어쨌든 지금 레제프를 위해 청원 올리는 중이라고 하니 이건 기회였다.
“폐하께서는 어떻소?”
“꿈쩍도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들은 황제의 노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제논이 나서서 말했다.
“오늘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하인리히 대공자 쪽으로 기세가 기울 겁니다.”
“맞소. 이럴 시간이 없으니 다들 어서 입궁하지!”
* * *
“폐하,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밖에서 카예나가 무릎을 꿇은 채 청원하고 있는 것을 물은 것이다.
“그러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세 시간입니다.”
카예나는 얇고 초라한 드레스 차림으로 벌써 세 시간째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의원의 말로는 이대로 계속 더 무리하다간 큰일 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때 시종이 침실로 들어와 말했다.
“폐하, 귀족들이 알현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제논 에반스를 비롯한 유력 귀족들의 이름이 쭉 흘러나왔다.
“기회다 싶어 덥석 무는구나.”
이것은 명백히 카예나가 만들어 준 기회였다. 그는 손짓하며 말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자 열댓 명의 귀족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망토를 젖히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 부디 황녀 전하를 가엽게 여겨 주십시오!”
황제의 싸늘한 파란 눈동자가 귀족들을 훑었다.
“너희가 황녀를 가엽게 여기란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
“이 모든 것은 오해입니다! 시녀들의 불민함을 단속하지 못한 황자 전하의 잘못은 명백하나 이것은 과한 처사입니다!”
“짐이 과했다?”
그들은 저물어 가는 태양을 예전처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 아들을 감금하는 아비는 마땅히 지탄받을 만하기도 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폐하!”
그들이 고개 숙이며 다 같이 그리 외쳤다. 이것은 일종의 힘자랑이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유력 귀족들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때 하인이 다급히 뛰어들어 와 상급 시종에게 귓속말을 전달했다.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며 송구스럽단 듯이 말했다.
“폐하, 황녀 전하께서 쓰러져 의원이 보살피는 중이라고 합니다.”
귀족들은 이때다 싶어 애통하게 외쳤다.
“폐하!”
황제는 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가증스럽게 연기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황자의 처벌은 아직 내리지 않은 상태다.”
“폐……! 예?”
귀족들은 순간 멍한 얼굴을 했다.
황제는 루든을 향해 말했다.
“레제프는 열흘간 근신이다. 곧 교지를 내릴 것이니 나가 보아라.”
그들은 긴 실랑이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처벌 내용을 정정해 버리는 황제의 태도에 어리둥절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다 곧바로 고개 숙였다.
“예, 폐하.”
귀족들은 황제의 처소를 나왔다. 무릎을 꿇고 청원하던 카예나 황녀는 자리에 없었다.
“최근 폐하와 황녀 전하의 사이가 돈독해지셨다더니 효과가 좋은데?”
오늘의 공신은 단연 카예나였다. 쉽게 거둔 승리에 희희낙락할 동안 제논은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애초에 레제프 황자가 근신령을 받게 된 게 누구 탓인데.’
가문만 화려하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 * *
카예나가 쓰러졌다는 것은 과장이었다.
‘세 시간을 무릎 꿇고 있었는데 멀쩡히 일어날 수 있을 리가.’
그녀가 바로 바닥에 주저앉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카예나가 쓰러졌다고 난리를 피웠다. 옷이 얇아 추위에 떠느라 파래진 입술과 창백한 얼굴도 그 오해를 부추겼다.
“고생하셨습니다, 전하.”
베라는 카예나의 다리를 마사지하며 말했다.
“너야말로 나 때문에 고생했구나.”
“당치않습니다.”
카예나는 자신이 가진 실내복 중 가장 단출한 것으로 입었다. 유행 지난 드레스라 장식도 다 떼 버린 채 내버려 두었던 그것을 입고 무릎 꿇고 있었다.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면 어쩌려고 하셨습니까?”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던 카예나가 웃으며 말했다.
“부황이 진짜 레제프를 황자 자리에서 폐할 작정이 아니라면 그런 명령을 내렸을 리 없지.”
“그렇……겠지요.”
듣고 보니 그랬다. 무기한 근신이라는 말은 결국 후계자로서 유명무실해진다는 말이 아니던가? 황제의 냉혹한 성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럴 바에야 차라리 황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내가 어떻게 대처할지를 지켜보신 거겠지.”
그 순간에 그런 계산이 들었단 말인가? 베라는 혈육임에도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한 이들의 사고방식에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황가의 피라는 것은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흐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시험에 통과하신 겁니까?”
카예나는 대답 대신 빙긋 웃기만 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애니가 들어왔다.
“전하, 루든 시종장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황제의 늙은 시종장, 루든이 손에 융단으로 감싼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그는 손에 든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베라는 얼른 그에게 다가가 상자를 건네받았다.
“황자 전하의 근신은 열흘로 조정되었습니다.”
“부황의 너그러운 자비에 감사할 따름이네.”
베라는 상자를 열어 카예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보석이 박힌 열쇠였다.
“황명입니다.”
그 말에 카예나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한쪽 무릎을 꿇은 베라도 마찬가지였다.
“엘다임 제1 황녀, 카예나 힐은 들어라.”
루든은 허리를 곧게 펴고 황명을 전달했다.
“엘다임 제1 황자, 레제프 힐은 근신 중 내명부를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 이에 제1 황녀인 카예나 힐에게 내명부 권한을 임시 이임한다.”
베라는 손에 쥔 상자를 저도 모르게 콱 쥐었다.
‘임시지만 처음으로 황녀 전하께 실권이 주어졌다!’
카예나는 19년 만에 처음으로 받은 실권에도 흐트러짐 없는 태도였다.
“감사합니다.”
아니, 19년이 뭔가? 첫 번째 삶에서는 죽을 때까지 실권 하나 잡질 못했다. 그녀의 별명 중 하나가 ‘종이 황녀’였으니 그 치욕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감축드립니다, 전하.”
루든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카예나를 향해 축하의 말을 전했다.
카예나는 베라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상자 안의 열쇠를 쥐어 보았다. 금을 입힌 화려한 열쇠. 대대로 황후만이 관리해 온, 그녀의 모친이 한때 쥐었을 열쇠였다.
“내가 아직 어리고 부족함이 많으니 잘 도와주시게.”
“전하께서는 훌륭히 잘 해내실 겁니다.”
루든은 다시 예를 갖추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약소하게 권한 이임한 것을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내 어찌 모르겠는가?”
루든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는 이만 물러나겠다고 말하며 나갔다.
“전하.”
베라는 어딘가 벅찬 얼굴로 카예나를 보았다.
카예나는 열쇠를 다시 상자에 담으며 베라를 놀리듯 말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담이 그리 작아서야 쓰겠니?”
“하지만…….”
고작 열흘 근신이다. 그 시간 동안 레제프의 수족이 내명부 일을 처리하면 된다. 이렇게 통솔할 사람을 바꾸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런데 굳이 권한을 카예나에게 넘겨주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공표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카예나의 말대로 이것은 시작일 터였다.
“내가 정답을 잘 맞힌 모양이구나.”
베라는 내심 황제를 향해 청원하는 행위가 선을 넘은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그런데 돌아온 결과를 보라. 그녀는 자신이 감히 황녀를 의심했다는 사실을 뉘우쳤다. 그녀는 첫 행보를 완벽하게 밟아 낸 카예나의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전하의 다음 계획은 무엇입니까?”
카예나는 그 물음에 미약한 한숨을 머금었다.
할 일이야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심지어 순서를 잘 정해서 진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 어그러지고 만다.
‘그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일이 없으니.’
“우선 황녀궁 시녀를 발탁해야지. 황제 폐하의 교지를 내려 올리비아 그레이스를 정식 발탁하겠다.”
베라는 그 이름을 듣고 의아해졌다.
“그 영애는 이미 레제프 전하께서 영입하는 중 아닙니까?”
“그레이스 가문은 키드레이 공작가의 후원을 받고 있다. 그런데 레제프의 요청을 따라 내 시녀로 들어올 리가 있겠니?”
따로 애니를 시켜 혹시라도 시녀로 들어오지 않게끔 편지까지 보냈다. 모두 이날을 위해서였다.
“레제프의 요청에 따라 들어오게 되면 직간접적으로 그를 후계자로 지지하는 꼴이 되고 말아. 그러니 최대한 숨죽이고 있겠지.”
“그러나 황제 폐하의 교지라면 이야기가 다르겠군요.”
베라의 말에 카예나가 빙긋 웃으며 기특하게 보았다.
“그래, 네 말대로야.”
새로운 시녀를 선별하여 황녀궁으로 들이는 작업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어떤 가문과 접촉할 것인지, 앞으로 어떤 세력을 꾸려 갈 것인지를 나타내는 지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자 내게 가장 강력한 카드가 될 올리비아는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해.’
또한,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할 망망대해에서 올리비아를 지켜 내려면 그편이 좋았다. 레제프나 하인리히는 카예나의 시녀가 된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카예나는 따뜻한 차로 다시 목을 축였다.
“차 맛이 참 좋네.”
그 여유로움에 베라는 자신이 더 조급해지는 것 같았다.
“황자 전하의 근신은 고작 열흘입니다. 그 안에 또 무얼 하실 예정이십니까?”
카예나는 찻잔을 옆의 협탁에 내려놓았다.
“이간질이지.”
카예나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웃었다.
이간질이라니, 참으로 악녀다운 계책이지 않은가? 치사하고 더러운 수법이라고 괄시당할 만한 계략이지만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간질…… 말입니까?”
베라는 그 상대 중 하나가 레제프이리라고는 추측했다. 그러나 레제프와 누구의 사이를 이간질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그녀가 고민에 빠지자 카예나가 답을 주었다.
“제논 에반스.”
레제프의 부관이자 황자파의 핵심 인물 중 한 명. 그가 바로 이간질의 대상자였다.
* * *
다음 날이 밝고 카예나는 레제프의 방 앞에 멈춰 섰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문지기들을 포함하여 기사들이 그녀를 향해 바짝 군기가 든 예를 올렸다.
“일어나라.”
제국에서 제일가는 가희의 말이라 할지라도 카예나의 고운 목소리와 섞이면 불쾌한 소음에 불과하리라. 기사들은 카예나의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훔쳐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오늘 카예나는 머리카락을 하늘색 리본으로 반만 묶어 차분히 늘어뜨렸다. 은은한 광택을 내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어 누구나 꿈에 그릴 만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카예나와 가까이 마주하며 과연 죽음을 부르는 아름다움이라고 불릴 만하다고 생각했다.
“레제프를 만나고 싶은데.”
카예나는 가장 앞에 선 기사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녀의 눈길을 받게 된 기사는 온몸을 바짝 얼렸다. 그는 자신이 긴장으로 떨고 있단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그, 그것은 불가합니다.”
“하지만 동생이 너무 걱정되는데…….”
살짝 찌푸린 미간, 가녀리게 떨군 파란 눈동자, 작아진 목소리에 다들 안절부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근신은 황제의 명이었으므로 절대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카예나를 두고 단호히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누나가 동생을 보는 것 뿐인데 막아야 하나……?’
은근히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차라리 카예나가 떼를 쓰거나 강압적으로 행동했다면 그들은 정신을 차렸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기에 카예나는 절대 거칠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게……. 이것 참…….”
그들이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해서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레제프의 부관, 제논 에반스가 황녀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카예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제논의 표정에 어린 그녀를 향한 경계심이 한눈에 읽혔다.
“에반스 경이로군.”
“기억해 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카예나가 내명부 권한을 가져간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그래놓고 뻔뻔스럽게 황자궁으로 발걸음을 하다니.’
제논은 카예나가 가증스러웠다. 최근의 카예나가 방심할 수 없는 상대가 되었다는 건 머리로 알았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그 사실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카예나는 그저 얼굴만 예쁜 멍청한 여자였다.
“경이 와서 다행이야. 어서 문을 열어 주게. 레제프가 걱정되어 밤새 잠도 이루지 못했어.”
뻔한 수작질에 제논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바로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절대로 황자와 카예나를 만나게 할 수 없다.’
제논은 공손한 태도로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저희들은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해 주십시오.”
“레제프는 지금 어떠한가? 그대는 잘 알겠지?”
“황자 전하는 괜찮으십니다. 하지만 황녀 전하께서 이곳에 오래 머무르시면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카예나는 걱정스럽게 두 손을 꼭 쥐었다. 그것이 참으로 애처로워 보였기에 기사들은 못마땅한 눈으로 제논을 흘겼다. 말이라도 좀 곱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은가?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제논은 이 한심한 작태에 환멸이 들려 했다.
“나는…….”
카예나는 어딘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굳게 닫힌 문을 힐끗 보았다.
제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정도로 아름다우면 가히 재앙이라고 여겨도 부족하지 않겠구나.’
실제로 지금 이 자리에 카예나에게 홀리지 않은 남자는 제논이 유일했다.
“알았네. 내가 괜히 자네들을 곤란하게 했군.”
“아, 아닙니다, 전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기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아름다운 사람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들수록 반대로 제논을 향한 적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럼 에반스 경. 에스코트를 좀 부탁해도 되겠나?”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요청에 제논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카예나는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돌아가는 길에 레제프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듣고 싶어.”
“그건…….”
제논의 떨떠름한 반응을 본 기사가 헛기침하며 눈을 부라렸다.
“크흠, 응당 신사라면 전하를 에스코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반스 경.”
사실 카예나는 지금 시녀 하나에 시중 하녀 둘이라는, 어찌보면 황녀의 일행이라고 하기에는 단출한 인원이었다. 레제프의 최측근인 그가 에스코트하는 것이 보기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이다.
“……영광입니다, 전하.”
제논은 예를 갖췄다. 주변의 눈도 있고 여기서 더 빼면 황녀의 체면을 구길 것이다. 제논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팔을 내밀었다.
카예나는 그 팔을 감싸 쥐었다. 황자궁에서 황녀궁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황성은 가로로 길쭉한 생김새라 그곳까지 걸어가려면 꽤 걸어야 했다.
“그 아이의 성격상 제 사람들을 크게 문책할 수 있을 텐데, 괜찮은가?”
제논은 황자의 침소를 떠올렸다. 지금 그곳에서 멀쩡한 것이라고는 천장밖에 없었다. 레제프가 휘두르는 검이 닿지 않는 높이였기 때문이다.
‘다른 곳으로 처소를 옮겨야겠지.’
열흘 동안 방을 최소 열 번은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대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군.”
“아닙니다, 전하.”
카예나가 다정하게 그를 위로했다.
제논이 보기엔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조금만 조심했으면 그렇게 시녀들을 내보내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논은 속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순간 진짜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그만큼 그녀의 애처로움이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쯧. 얌전하게 굴었다면 어련히 예뻐했을 텐데.’
그때 카예나는 자신을 낮잡아 보는 제논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고갤 돌려 눈을 마주쳤다. 제논은 수를 읽을 수 없는 카예나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무심결에 마른침을 삼켰다.
“어서 새로운 시녀를 발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레제프의 사람을 다 쳐낸 게 당신이잖아. 그래서 그 빈자리는 누구로 채울 작정이지?’
과연 카예나 황녀가 뭐라고 나올지 궁금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게 요즘 가장 골치 아프다네. 그런데 에반스 경에게 여동생이 있지 않았던가?”
에반스는 뜻밖의 말에 눈썹을 휙 치켜들었다.
“……예. 줄리아 에반스라고, 황녀 전하와 연배가 비슷할 겁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지? 내 시녀로 들일 사람이라면 믿을 만한 사람의 가족이면 더 좋을 테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제논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기껏 레제프의 사람을 다 내쳐 놓고 에반스 가문의 사람을 들이겠다니?
‘나쁘지 않아. 아니, 좋은 기회야.’
에반스 후작가에서는 은근히 레제프와 여동생이 이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차기 황후를 배출해 내는 일이니 욕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둘은 좀처럼 만날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여동생이 황녀궁 시녀로 들어온다면 레제프와 마주칠 일이 많아질 테니 좋은 기회가 생기게 될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황녀?’
역시 아무 생각이 없는 멍청한 여자일 뿐이었나?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황녀궁이 가까워졌다. 제논은 입술을 질근 물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한데.’
그때 카예나가 말했다.
“참, 내가 레제프를 주려고 만든 간식이 있는데 그것과 함께 차라도 들지 않겠나?”
속내를 탐색해보려고 일부러 자릴 만드는 노골적인 제안이었다.
제논은 그녀의 무구해 보이는 미소에서 뭔가를 읽어 내 보려 노력했지만,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날씨도 좋고 후원에 꽃도 제법 피었으니 그곳에서 마시면 좋겠는데.”
‘……좋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아내야겠어.’
그는 자신이 카예나의 진의를 꿰뚫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카예나는 빙긋 웃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제 현명함만을 믿는 오만한 자는 제 꾀에 넘어지기 마련이었다.
* * *
둘은 화원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카예나는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의뭉스럽게 물었다.
“에반스 경은 아직 미혼이던가?”
“그렇습니다.”
“경처럼 훌륭한 남자가 어찌 약혼자도 없지? 에반스 후작이 신경 써 주지 않는 건가?”
제논은 제국에서 손꼽는 규모의 곡창 지대 중 한 곳을 소유한 에반스 후작가의 차남으로 그 위세가 대단하다. 제논쯤 되는 남자가 지금까지 약혼자도 없이 미혼인 것은 드문 경우였다. 특히나 대지주의 동생이라면 더 희귀한 경우였고.
“어쩌다 보니 시기를 놓쳤습니다.”
“놓쳤다는 건 부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경은 아직 한창때인데.”
그는 고작 20대 후반이었다. 냉혹해 보이는 인상이 흠이긴 해도 그만하면 준수한 외모였다. 꾸준한 훈련을 통해 단련한 강건한 신체는 남성적인 매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제논은 여자란 존재는 자신의 발목이나 붙잡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대지주 가문의 차남에게 어울리는 여자도 도통 없었다. 미모를 갖추면 지성이 부족하고 지성을 갖추면 가문이 떨어졌다.
“내 성년식을 기념하는 연회때 경의 짝도 찾아보는 것이 좋겠군. 그땐 젊은 귀족들이 많이 몰려들 테니까.”
“전하의 짝을 찾는 자리에서 제 짝이나 찾아다니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카예나가 태평하게 맞받아쳤다.
“우리에게 허락된 밤은 유한할진대 때를 가려서야 운명을 찾을 수 있겠는가?”
“……낭만적인 말이로군요.”
“사랑이란 것은 사고처럼 한순간에 찾아오기도 하니까.”
카예나의 한마디, 한마디에 차분한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카예나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갈증이 일었다.
‘이 사람이 이제 막 성년이 될 여자일 수가 있나?’
자신은 그녀보다 훨씬 연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예나가 조금도 연하의 여자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자신이 마치 혈기왕성한 연하의 남자라도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정말 묘하군.’
설마 카예나 황녀를 상대하면서 이런 긴장감을 느끼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보라. 오히려 동부의 패자나 다름없는 제 형님을 대할 때보다도 카예나가 훨씬 신경 쓰였다.
“……전하께서는 그런 사랑을 찾으셨습니까?”
이 질문은 명백히 라파엘로를 노리고 한 것이었다.
카예나는 빙긋 웃었다.
“나는 찾지 않아.”
에반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때였다.
카예나가 테이블에 팔을 괴고 몸을 살짝 기울였다.
“날 찾아 주길 기다리고 있지.”
카예나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로 제논을 보았다. 그 미소에 제논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틀어쥐었다.
황녀가 당돌하게도 자신을 도발하고 있었다.
‘네게도 기회를 줄 테니 어디 열심히 나를 유혹해 보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회유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회를 준다고? 그게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묘한 호승심을 자극했다.
‘황녀라.’
한번도 그는 카예나를 자신의 결혼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아름답긴 하지만, 어지간한 귀족 영애보다 떨어지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카예나는 달랐다.
‘재미있군.’
마음속 어딘가에서 저 도발에 응하고 싶다는 욕심이 솟구쳤다. 그는 이 팽팽한 긴장감에 혀로 입술을 축였다.
카예나와 이어진다면 굳이 레제프의 밑에 몸을 숙이고 있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지금은 섣불리 저 늪에 발을 담글 수 없었다. 이렇게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어렴풋하게 느끼던 것이 확실해져 갔다.
카예나 황녀는 위험하다. 그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같은 여자였다. 또한,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이다. 그는 남들만큼 아름다운 이성에 관심이 있는 보통의 남자다. 지금까지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성에 차는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사고처럼 마음에 소유욕이 날아와 박혔다.
“전하께서는 저를 혼란스럽게 만드시는군요.”
카예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웃었다.
“혼란스러운 건 모르기 때문이지. 정답을 알면 혼란이란 건 없어.”
이로써 관계 구도는 명백해졌다.
제논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예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아 깊이 키스했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제논은 그녀의 도발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승리하리라고 확신했다. 날고 기어 봐야 카예나는 종이 황녀니까. 그것이 어리석은 착각인 줄 모르고서 말이다.
* * *
카예나는 황녀궁까지 마저 에스코트하겠다는 제논을 거절했다.
‘오만한 남자는 다루기가 쉽지.’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시녀를 하루빨리 발탁해야겠구나.”
카예나는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황제에게 올릴 상소를 작성했다.
그녀는 베라를 포함하여 단 네 명의 시녀만 거느릴 생각이었다. 황녀궁의 시녀가 된다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대단한 특권이라는 특권 의식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시녀를 단 네 명만 데리고 있겠다고 판단한 것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내명부 권한을 크게 네 가지로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황녀의 손님을 접대하고 파티나 모임을 관리하는 등의 일상의 예와 절차를 도맡는 시녀 하나. 황녀가 먹는 것, 그러니까 식사와 약 처방에 대한 모든 부분을 통솔하는 시녀 하나. 황녀의 의복, 처소, 도구 등을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시녀 하나. 황녀궁에 소속된 모든 사용인의 품행과 직무를 단속, 처벌하는 시녀 하나.
‘일해야 권력이 따라오는 법이지.’
지금까지는 레제프가 내명부의 권한을 본인이 가졌다는 이유로 황녀궁의 모든 일에 간섭했다. 황녀궁의 시녀들은 보여 주기식에 지나지 않아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
카예나는 그것부터 고쳤다. 짧은 기간이지만, 레제프가 다시 복권하더라도 황녀궁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게 체계를 잡아야 했다.
“베라. 네게 앞으로 황녀궁에 소속된 시녀들의 품행과 직무를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
그것은 그녀의 시녀들이 할 일 중에서도 가장 신중해야 할 일이었다. 베라는 그 일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성심을 다하여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나머지 권한에 대해서도 이미 적임자를 생각해 두었다. 올리비아는 카예나의 손님을 접대하는 등의 전령 같은 역할을 맡을 것이다.
‘올리비아의 사교계 영향력을 키워 주어야지.’
올리비아는 여주인공 답게 타고난 관찰자이자 통찰력이 있었다. 그녀는 분명 그 일의 적합자였다. 이제 나머지 둘을 추려야 했다.
“줄리아 에반스와 수잔 레폴을 황녀궁 시녀로 발탁할 것이다.”
베라는 뜻밖의 인사에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에반스 후작가의 금지옥엽이라는 줄리아와 레폴 백작가의 차녀, 수잔이라…….
“집안으로 보자면 두 사람 다 흠잡을 곳 없이 훌륭합니다만, 개인의 역량에 대해서는 의문스럽습니다. 특히 줄리아 에반스 양은요.”
줄리아 에반스가 황녀궁으로 들어온다면, 레제프도 반대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환영하면 더 환영하겠지.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할테니까.
그러나 동부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에반스 가문의 외동딸이 시녀로서 직무를 잘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게다가 레폴 백작가의 차녀, 수잔은 어떠한가. 그녀도 마찬가지로 노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수잔은 그 성정이 상당히…….
“수잔은 성정이 괴팍하다고 알려졌지.”
조용한 성정의 레폴 백작과는 달리 수잔은 입에 칼을 문 독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머리도 좋고 가진 재주도 많았지만 사람을 쉽게 하찮게 여겼다. 독설하기도 주저하지 않아서 사교계에서 썩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수잔 영애는 레제프 황자 전하께서 허락하실까요?”
레폴 백작가는 하인리히 대공과 외가 쪽으로 친인척 관계였다. 하지만 이렇게 강행하는 이유가 있었다.
‘원작에서 수잔 레폴은 올리비아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니까.’
수잔은 회귀 전, 카예나에게 감히 와인을 끼얹거나 대놓고 비웃음을 터뜨리기도 할 만큼 배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가문이 하인리히 대공과는 친인척일지언정 하인리히 대공자와는 남남이잖니.”
레폴 가문 역시 아직 어느 후계자도 지지하지 않은 가문 중 하나였다. 다만 하인리히 대공의 친인척이니 다들 은연히 그쪽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잔은 하인리히 대공자를 무척 싫어해.’
물론 그녀는 레제프도 몹시 싫어한다. 여러모로 기회가 닿을 때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면 좋았다.
“레폴 백작가는 충성스러운 변경백 가문이니 남들 보기에도 좋지. 그리고 레제프의 사람과 하인리히의 사람, 키드레이의 사람이 한곳에 모이는 게 얼마나 의미심장하겠니?”
그 말에 베라가 감탄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이 황녀궁에 엘다임 제국의 가장 대표적인 세력 셋이 모이게 되는 것이다. 비록 수잔은 하인리히의 사람이 아니지만, 사회의 시선으로 볼 때는 그랬다.
* * *
카예나는 이번엔 편지지를 펼쳤다.
⌜친애하는 엘리반 부인.⌟
그녀는 펜을 잠시 멈췄다.
원래 카예나는 쓸데없는 인사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문장력을 뽐내길 좋아했다. 그러나 그건 내용과는 맞지 않는 미사여구의 연속이었다.
두 번째 삶에서는 회사 용어에 절어 있었다. 물론 간결하고 격식을 차린 말투이긴 했다. 그렇다고 유모에게 ‘다름이 아니오라, 환궁의 건으로 인해 서신을 보내드립니다.’와 같은 식으로 쓸 수는 없었다.
‘……진심을 담아 써 보자.’
⌜그간 무탈하셨나요?
제가 미우시거나 혹은 남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벌써 떨어진 지 10년이나 흘렀으니까요.
제 연락을 기다리지는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곧 생일을 맞아 성년이 됩니다. 아마 그곳에도 소식이 전해졌을 것 같네요. 저는 요즘…….⌟
카예나는 다시 펜을 멈췄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쓰려니 난감했다. 독도 마시고 환생도 해 보고 황자를 근신당하게도 했다. 그걸 편지에 쓸 수는 없었다.
⌜저는 요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파이나 쿠키를 굽고 있어요.⌟
사실 두 번째 삶에서 모친에게 배운 것이지만 약간의 기억 보정과 미화는 필요한 법이다.
⌜엘리반 부인과 같이 주방을 난장으로 만든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그때 부인의 녹색 드레스를 제가 새하얗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추억과 그리움은 별개로 부인의 선택을 존중하겠어요. 꼭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가끔 수도의 커피 하우스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게 된다면 무척 기쁠 것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나의 마지막 어머니.
그리움을 담아, 카예나.⌟
카예나의 유모는 귀족이자 선황후의 오랜 지기였다. 엘리반 부인의 아이가 어린 시절 열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그 이후로 카예나를 제 두 번째 자식처럼 길렀다.
마지막 어머니. 그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
‘엘리반 부인이 부황보다도 더 애틋하게 느껴지다니.’
카예나는 자신이 쓴 편지를 다시 읽으며 묘한 감상에 젖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드는 게 대체 얼마 만의 일인지 모른다.
편지를 봉투에 넣고 촛농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위로 황실의 문양이 음각된 도장을 찍었다. 오늘 내로 해야 할 중요한 일과 두 가지를 완료했다. 이제 그다음으로 중요한 일을 할 차례였다.
“황립 도서관으로 가야겠구나.”
“……도서관이요?”
카예나와 인연이 없는 장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도서관을 첫손에 꼽을 수 있었다.
베라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은 하루하루를 아주 소중하게 써야 할 황금 같은 시기가 아니던가? 세력 구축을 위해 유력 귀족을 만나고 다녀도 모자라지 않는가? 그녀가 의아하게 고갤 기울였을 때, 카예나가 말했다.
“앞으로의 일에 무척 중요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거든.”
* * *
엘다임 황립 도서관은 황립 아카데미와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귀족이나 아카데미의 학생만 이용 가능하며 그 규모가 수도에서 가장 컸다. 그만큼 카예나가 원하는 자료가 많았다.
카예나는 괜한 소란을 피하고 싶었기에 일부러 망사가 달린 모자를 썼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황립 도서관에 수행원을 줄줄이 이끌고 들어온 카예나에게 순식간에 이목이 집중 되었다.
곧바로 사서가 다가왔다.
“혹시 어디에서 방문하셨는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베라가 사서에게 말했다.
“이분은 제1 황녀 전하이시네.”
“…….”
사서는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제국에 황녀는 하나뿐이고 그렇다면 눈앞의 얼굴을 가린 여자가 소문 자자한 카예나 황녀란 말이었다.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다.
‘그 황녀가 극장이면 몰라도 도서관에 올 리가 없는데…….’
그것은 합당한 의심이었다.
카예나는 손을 내밀었다.
“이걸로 확인되겠는가?”
황제의 적녀임을 증명하는 반지였다.
사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진짜 황녀라고? 그 증거를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어려웠다. 진짜 황녀가 황립 도서관을 이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 카예나가 망사를 걷었다.
사서는 망사가 걷히는 순간 현실성 없는 아름다움에 잠시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사서는 입을 떡 벌렸다. 수도에 카예나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화, 화, 황녀 저, 전하!”
그는 말을 심하게 더듬다가 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도서관에서 소란 피우고 싶지 않다.”
그러자 사서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카예나가 망사를 내리며 빙긋 웃었다.
“그럼 신원 확인된 것으로 알겠네.”
베라는 사서가 영 넋을 빼놓은 것을 보고 작게 헛기침했다.
“전하를 모실 만한 장소를 안내하시게.”
그제야 사서는 정신 차리더니 부산스럽게 주변을 확인했다.
“회의용 테이블이 지금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있으니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베라도 가장 구석에 있는 긴 테이블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게.”
카예나는 20인이 앉을 수 있는 길쭉한 회의용 테이블을 홀로 차지했다.
소란을 느낀 관리자들과 사서가 이곳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망사 너머의 흐릿한 실루엣을 훔쳐보며 공손하게 물었다.
“어떤 책을 찾으시는지요?”
그들은 카예나가 틀림없이 뭔가 대단한 것을 찾으러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다.
황위 계승 후보인 레제프가 열흘 근신을 명 받고 임시지만 내명부 권한이 그녀에게 이임되었다. 온 사교계가 그녀의 행보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노리고 황녀가 황립 도서관에 방문했을까?
그들은 카예나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카예나가 용건을 말했다.
“엘다임 제국 전역의 여행기를 가져오너라.”
여행기라는 말에 사서들은 물론이고 베라와 호위 기사들까지 의아하게 그녀를 보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쨌든 황녀의 명이니 그들은 재빨리 장서 중 여행 기록서를 찾아다녔다.
곧 사서들이 찾아온 책을 테이블에 지역별로 나눠 쌓기 시작했다. 호위 기사들이 앞에서 방벽처럼 서서 이곳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했다.
카예나는 망사를 앞만 살짝 걷어 책을 읽었다.
‘황궁을 나와서 살 곳을 미리 알아봐야지.’
이건 카예나에게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부황이 살아 있을 때 내가 상속받을 봉토를 조정해 놔야겠어.’
카예나는 힐 황가에서 소유한 봉토 중 괜찮은 곳을 몇 곳 상속받게 되어 있다. 다만 상속될 땅 대부분이 동부라는 것이 문제였다.
‘동부는 에반스 가문 때문에 안 돼.’
수도에서 떨어져 있고 유력 귀족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장소가 어디 없을까?
사실 처음엔 서부에 편입해 몸을 숨기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파엘로나 올리비아가 날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으니까.’
실체가 없는 부마의 존재를 만들고 결혼해서 생활할 장소는 카예나가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장소를 물색해 그곳을 정리해 두어야 한다.
튼튼하고 깨끗한 저택, 허브 몇 종류를 키울 작은 정원, 조금 걸으면 바다나 호수가 있는 그런 곳이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일부러 이 시기에 황립 도서관을 찾은 이유도 있었다.
‘경계심을 낮출 필요가 있지.’
지금 그녀의 행보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 지켜보는 자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카예나가 다가올 사교 시즌에 맞춰 휴양을 갈 만한 곳을 찾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상당히 카예나다우면서도 최근 보인 행보와는 정반대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여행기를 훌훌 넘기며 성의 없는 것처럼 읽었다. 그러다가 그림이 나오면 꽤 꼼꼼하게 살폈다. 주변에서 글은 읽지 않고 그림이나 본다고 여길 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카예나는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내용을 모두 읽고 있었다. 수능을 겪어 본 세대라면 누구나 지문을 빨리 읽고 핵심을 파악하는 훈련을 하지 않던가? 그 버릇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앞으로의 계획을 정립하는 동안 도서관에는 점점 이용객이 늘고 있었다. 카예나 황녀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이 벌써 퍼진 것이다.
베라는 황녀가 진귀한 구경거리처럼 취급되자 불쾌해졌다.
“전하, 날이 흐리니 이만 환궁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카예나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창을 보았다. 확실히 하늘이 잿빛이었다.
“몇 권은 대출해서 가자꾸나.”
카예나는 사교계에서 그녀가 무슨 책을 빌렸는지 소문날 것을 계산해서 적당한 휴양지를 골랐다.
‘사람이 꽤 많아진 것 같은데.’
그녀는 자신 때문에 사람이 몰렸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베라가 적절한 때에 환궁을 제안한 것이다.
“으음.”
바깥은 황녀를 보러 온 귀족들 때문에 마차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베라도 속으로 혀를 차고는 카예나에게 물었다.
“휴게실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 같으니 이 앞을 좀 걷자꾸나.”
“비가 곧 쏟아질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카예나가 고개를 돌려 옆을 가리켰다.
“지붕이 있는 외부 통로로 다니면 되겠구나.”
그녀는 베라와 같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여행 서적을 본 것은 내게 집중된 이목을 좀 분산할 필요가 있었단다. 실권을 잡자마자 뭔가 노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면 견제 세력이 생기기 마련이지.”
“확실히 그렇겠군요.”
“내명부 권한을 받자마자 여름 휴양지를 물색하는 게 얼마나 나다운 일이니?”
베라는 차마 그 말에 긍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원래 카예나라면 당연했을 행동이었다. 걸음에 찰랑찰랑 흔들리던 망사는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더니 그녀의 눈이 드러날 정도가 되었다.
“전하, 망사를 다시 고정해 드릴까요?”
카예나가 망사를 걷어 올렸다가 내리는 걸 반복했더니 고정이 느슨해진 모양이었다. 곧 마차를 타고 환궁할 테지만 괜히 이 근처로 다가오는 귀족들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해 다오.”
베라는 모자에 고정된 망사를 다시 풀었다. 그러고는 다시 모자에 팽팽하게 망사를 달려고 했을 때였다.
“전하!”
뒤에서 누군가가 반갑게 그녀를 불렀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카예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카예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짙은 갈색 머리칼과 음험하게 어두운 검은 눈동자, 얇은 입술. 기억보다는 좀 더 어린 얼굴. 그래,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헨버튼 길리안.’
카예나를 학대하고 살해했던 전남편이었다.
그와 마주하자 마치 먼 과거의 일처럼 흐릿했던 기억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레제프에게 보냈던 살려 달라고 빌었던 편지들. 멍을 감추려고 여름에도 고수했던 긴 옷. 숨바꼭질하듯 그의 성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에 몸을 감췄던 기억들. 카예나는 달리 살려 달라고 빌 곳이 없었다.
레제프는 그녀를 철저히 버렸다. 그래서 마지막엔 라파엘로에게 편지를 썼다. 자비를 바랐던 편지는 키드레이 공작저로 가지 못했다. 길리안에게 발각된 것이다.
‘그래. 그날 라파엘로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았냐며 미쳐 버린 길리안이 날 죽였어.’
카예나는 내면 깊숙하게 각인된 공포로 떨리는 손을 마주 쥐었다.
“어디 가문의 영식인가?”
그녀는 다행히도 담담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길리안은 실망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예를 갖췄다.
“……헨버튼 길리안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목소리를 듣는 것도 고역스러웠다. 어째서 길리안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너무 끔찍해서 무의식적으로 그 기억을 꺼내지 않았던 걸까?
카예나는 냉정함을 가장하여 말했다.
“길리안 자작가의 영식이었군.”
“저번 연회장에서 같이 춤도 췄었지요.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며 카예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냉정하게 뿌리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카예나는 그의 눈 속에 깃든 광기를 알아보았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리 말하니 기억나는 것 같구나.”
그녀의 대답에 길리안이 또다시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세 걸음 남짓 남았다.
“그때 저와 두 번이나 춤추셨습니다. 그날 이후로 계속 다시 뵙길 고대하였는데 오늘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군요.”
우스운 말이었다. 분명 카예나가 이곳에 있단 말을 듣고 이제 막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카예나는 대화를 더 잇고 싶지 않았다.
곁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베라가 끼어들었다.
“전하, 마차가 도착한 것 같으니 이만 가시지요.”
길리안의 섬뜩한 시선이 베라를 향했다.
카예나는 걸음을 옮기려고 했으나 이대로 한 걸음 떼면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려. 이제 사라진 일일 뿐이야.’
그녀는 계속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지금 길리안은 자신을 가두고 때리거나 칼로 찌르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실들을 상기할수록 숨이 더 가빠지기 시작했다.
망사라도 얼굴에 두르고 있었더라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미 많은 심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이만 가 보겠네.”
길리안은 카예나가 먼저 떠나지 않는 이상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카예나가 작별을 고하자 길리안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서며 팔을 내밀었다.
“그럼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전하!”
그게 카예나에게는 끔찍한 위협처럼 느껴졌다. 순간 번들거리는 눈으로 칼을 들고 달려들던 길리안, 그리고 직전의 삶에서 그녀를 찔렀던 남자와 겹쳐 보였다.
카예나는 뒤로 다급하게 물러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 뒤로 넘어갔다. 아찔한 고통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을 때.
탁! 누군가의 너른 품에 안겼다.
등을 단단히 받치는 가슴, 옆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몸을 감싸 안은 돌덩이 같은 팔. 은은하게 풍기는 잉크 냄새. 카예나는 누군가에게 완전히 휘감기듯이 안겼고 바닥에 쓰고 있던 모자만 툭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나직한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별빛처럼 총기가 흐르는 붉은 눈동자가 시야에 선명히 날아 박혔다.
아아…….
카예나는 날카롭게 일어서있던 경계심이 완전히 해제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입에 머금듯 불렀다.
“……라파엘로.”
* * *
라파엘로는 가문에서 후원하는 학생의 장학 제도 문제로 처리할 일이 있어서 카예나보다 먼저 황립 아카데미를 방문한 상태였다.
“들으셨습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종자가 어디서 뭘 듣고 호들갑 떨며 수행원들과 수다 떠는 걸 귀 기울여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종자의 들뜬 목소리가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무슨 일인데?”
종자만큼이나 가십을 좋아하는 바스턴이 냉큼 물었다.
“옆의 황립 도서관에 지금 카예나 황녀 전하께서 방문하셨답니다!”
“뭐? 황녀 전하라고?”
멈칫. 황녀라는 말에 라파엘로가 서류를 작성하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지금 학생들도 황립 도서관에 가겠다고 방문증 끊고 난리랍니다. 최근 외출을 한 번도 안 하셨잖아요.”
“그러게. 그런데 오랜만의 외출을 황립 도서관으로 하시다니…….”
바스턴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서관은 카예나와 영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무슨 소란이야?”
그때 제레미가 응접실로 들어오며 물었다.
“제레미님! 들으셨어요? 지금 황립 도서관에……”
“주군께서 일하시는 데 방해된다, 이 녀석아.”
종자는 라파엘로를 힐끗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제레미는 라파엘로에게 다가갔다.
“검술 수련을 참관하려면 좀 기다리셔야 하는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40분은 걸린다고 합니다.”
라파엘로는 창밖으로 보이는 황립 도서관을 쳐다보았다. 거리가 가까우니 잠깐 다녀오면 시간이 맞을 듯했다.
“기다릴 동안 잠깐 황립 도서관에 다녀오겠다.”
그러자 종자와 바스턴의 눈이 반짝 빛났다. 라파엘로가 황녀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제레미가 물었다.
“마차를 준비해 올까요?”
그 말에 종자가 얼른 들은 정보를 말했다.
“외람되오나, 지금 황녀 전하를 뵙기 위해 마차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마차로 가면 오래 걸리실 거예요.”
“거리도 가까우니 걸어서 다녀오마.”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바스턴이 부리나케 라파엘로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의 붉은 눈이 바스턴을 한 번 훑었다.
“혼자 다녀오겠다.”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휙 나가 버렸다.
“오……. 확실히 우리 주인님이 좀 이상한데?”
바스턴은 느끼한 눈으로 멀어져 가는 라파엘로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제레미가 그의 머리를 서류로 탁 때리며 혼냈다.
“불충한 놈! 괜한 소리 입 밖에 내지 마라.”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황녀 전하를 먼저 찾아뵙는 게 이번으로 벌써 두 번째잖습니까.”
“그럼 당연히 가 보시겠지. 요즘 사교계든 정계든 황녀 전하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단 사실을 모르느냐?”
제레미는 그렇게 타박했지만 실은 그 말을 하는 본인도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라파엘로가 따로 말한 적은 없지만, 사람과의 접촉이나 관계 맺는 일을 내켜 하지 않는단 걸 알았다. 그런데 먼저 자처해서 황녀를 두 번이나 만난다는 것은 꽤 특이한 일이었다.
‘최근 황녀가 좀 변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봤던 방종한 태도가 인상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마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혼담을 더욱 강행하실 것 같은데.’
그는 눈썹을 긁다가 한숨만 푹 내쉬었다.
라파엘로는 황립 아카데미에서 도서관까지 난 통로를 따라 걸었다.
‘비가 오겠는데.’
아침부터 하늘에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이젠 잿빛이었다. 한 시간 내로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황녀가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할 수도 있겠군.’
그는 발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어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절대 사사로운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요즘 정세가 워낙 뒤숭숭하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직접 목소리를 들으며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카예나가 궁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실제로 최근 황궁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다. 카예나가 알레르기로 쓰러졌으며 황제의 명으로 시녀들이 모조리 내쳐진 것. 거기다 레제프 황자가 근신을 명 받았다.
‘황자를 위해 세 시간이나 무릎 꿇고 간청을 올리다 쓰러졌다던데.’
그러고 나서는 황제가 그녀에게 내명부 권한을 임시 이임했다. 지금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건을 두고 권모술수인가, 우연인가 논쟁이 한창이었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계략이라고 판단했다.
‘황녀 때문에 워낙 세간이 시끄러워 알려지지 않았지만, 벌써 내게 들어온 혼처 중 하나가 그녀의 말대로 사라졌어.’
에이반 백작가는 빚을 갚지 못해 하인리히 대공자의 세력으로 흡수되었다. 그 사건은 황궁에서 벌어진 흥미진진한 일보다 훨씬 재미없었기에 사람들의 입에 잠깐 올랐다가 금방 잊혔다.
라파엘로는 통로를 따라 걷던 중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황녀로군. ……저건 길리안 자작가의 영식인가?’
통로에는 그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길리안 영식이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게 보였다. 제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행동에서 기묘한 광기가 읽혔다.
라파엘로는 저도 모르게 거의 달리다시피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탁!
카예나의 가녀린 몸이 품에 쏙 안겼다. 그는 은은하게 끼치는 부드러운 향에 잠시 숨을 멈췄다.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라파엘로는 영문 모를 제 감정을 수습하며 최대한 담담함을 가장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품에 안은 카예나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 라파엘로가 미간을 좁혔다.
‘뭐지?’
그때 카예나가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올려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겁에 질려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달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와 눈이 마주치자 두려움에 젖어 있다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었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든든한 원군이라도 된 듯한 착각이 드는 극적인 변화였다.
“……라파엘로.”
그녀의 입에 담긴 제 이름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최근엔 계속 키드레이 경이라고만 불렸기 때문인가? 카예나는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웠다. 라파엘로는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그녀는 조금 정신없어 보였다. 여전히 라파엘로의 팔을 붙잡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라파엘로도 지금 자신이 접촉에 아무런 불쾌함을 느끼고 있지 않단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베라가 격노한 얼굴로 매섭게 길리안에게 쏘아붙였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들도 때마침 도착했다.
“무슨 일입니까?”
“저자를 당장 뒤로 떨어뜨리시오. 감히 황녀 전하께 위해를 끼치려 했으니!”
길리안이 귀족 영식임을 알았기에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는데 사달이 날 뻔했다.
그들은 당장 길리안을 붙잡고 뒤로 떨어뜨렸다.
“아니, 난 에스코트를 해 드리겠다고 했을 뿐이오. 이게 무슨 짓이오!”
길리안은 끓는 눈으로 소리쳤다.
“그렇게 비신사적인 에스코트는 처음 보았습니다! 감히 위협적으로 손을 휘두르다니!”
베라는 당장 뺨을 올려붙일 듯이 경멸을 담아 길리안을 노려보았다.
길리안은 분노에 끓던 얼굴을 순식간에 풀었다.
“오해이십니다. 저는 전하께서 호위도 없이 시녀와 계시기에 좋은 마음으로 호위를 자처한 것입니다. 제가 긴장하여 손이 뻣뻣하게 나간 건 사실이지만 결코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럴듯한 말이었기에 호위 기사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라파엘로가 입을 열었다.
“헨버튼 길리안 영식.”
그러자 길리안의 시선이 라파엘로에게 닿았다.
잠깐 그의 시선이 카예나의 손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저도 뒤에서 방금의 상황을 보았습니다. 불순한 의도가 없으셨다고 하셨지만 레이디에 대한 배려는 분명 없어 보였습니다.”
“……키드레이 경. 제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실수를 뉘우치고 있습니다.”
길리안은 가증스럽게 참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카예나는 그가 바깥에서는 신사처럼 행동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신을 학대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거짓말에 능했다.
“…내가 최근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과민 반응한 모양이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 거즈를 풀지 않은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뜨거운 파이에 덮쳐진 적도 있던 황녀이니 당연히 돌발 행동에 놀랄 수 있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했다.
“길리안 영식이 좋은 의도로 에스코트를 제안했단 것을 믿겠네. 그래도 제국의 황녀가 설마 호위도 없이 다닐 리가 있겠는가?”
“제 불찰입니다, 전하. 송구스럽습니다.”
호위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고했다.
카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신사라면 시녀와 조용히 있는 걸 보고 다가오는 경우가 잘 없으니 그대들도 의아했으리라 생각해.”
그녀는 호위를 용서하는 척 길리안의 무례를 지적했다.
“영식도 놀랐을 테니 이만 일 보러 가게.”
길리안은 미소 짓고는 있었으나 섬뜩한 눈으로 카예나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예를 갖췄다.
“실례했습니다, 전하. 다음번에 반드시 예를 갖추어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길리안이 떠나고 카예나는 차갑게 식었던 손끝에 온기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번번이 경에게 신세를 끼치는군.”
그녀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라파엘로에게 말했다. 다시 차분하게 갈무리한 담백한 태도였다. 그러나 손은 여전히 라파엘로의 팔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그가 카예나의 손을 잡았다.
“……!”
카예나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라파엘로를 붙잡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얼른 그를 놓아주려고 손을 빼려 했을 때였다.
“저희 집안의 가신 때문에 전하께서 놀라신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울 따름입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라파엘로는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제가 마차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깨달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온기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