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6
악녀는 마리오네트 6장. 새로운 양상(6/33)
6장. 새로운 양상
카예나의 안색은 여전히 희게 질려 있었다. 손은 이제야 온기가 점점 돌기 시작했다. 몸의 떨림도 점차 잦아들었다.
‘헨버튼 길리안을 이토록 두려워할 이유가 따로 있는 건가?’
그녀는 안쓰러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라파엘로는 접촉이 불쾌하지 않았고 그녀를 마차까지 데려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예나는 자신이 홀로 멀쩡하게 걸을 수 없단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괜한 고집을 부리는 대신 그의 호의를 고맙게 받았다.
“그럼 부탁하겠네.”
베라와 호위 기사들은 뒤에 떨어져서 그들을 따랐다.
카예나는 점차 이성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마음도 꽤 안정되었고 길리안의 번들거리던 눈빛을 떠올려도 꺼림칙할지언정 두렵지는 않게 되었다. 그녀는 라파엘로와 맞잡은 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라파엘로 때문인 것 같았다.
‘아까 라파엘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왜 그렇게 안심되었는지 모르겠네.’
지금도 그랬다. 아까와 달라진 것이라고는 라파엘로의 존재 유무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완벽하게 안전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카예나를 보러 황립 도서관으로 물밀듯 몰려들었던 귀족들이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선명한 실망감이 떠올랐다.
‘라파엘로에게서 마음이 떴다더니 아니잖아!’
자신이 카예나의 부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혹은 그 비슷한 어떤 콩고물이라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왔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라파엘로와 다정하게 같이 있는 모습이라니. 암만 날고 기는 귀족이라도 라파엘로 키드레이 앞에서는 아무런 경쟁력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라파엘로가 여긴 어쩐 일이지?’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라파엘로를 의아하게 보았다.
“그런데 키드레이 경은 여기에 어쩐 일이지?”
호칭이 또 바뀌었다. 그는 이제 카예나의 이성이 돌아온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황립 아카데미에 일이 있었습니다.”
아카데미가 도서관 바로 옆이니 그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홀로 올 일이 있던가?
“전하께서 이곳에 계신단 이야기를 듣고 뵈러 왔습니다.”
“…….”
설명이 부족하여 오해를 부르는 직설적인 화법은 여전했다.
카예나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오해 없게끔 설명을 덧붙였다.
“확실히 요즘 내게 이것저것 궁금할 만한 일이 많았지. 뭐 궁금한 거라도 있는가?”
라파엘로는 이제 혈색이 꽤 돌아온 카예나의 뺨을 곁눈질했다.
“오늘은 때가 아닌 듯합니다.”
설마 그가 제 상태를 염려할 줄은 몰랐기에 카예나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담아 미소 지었다. 흐린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시선이 좀처럼 떨어지지 못했다. 라파엘로는 문득 한숨이 쉬고 싶어졌다.
그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문득 수행원을 하나도 데려오지 않은 라파엘로를 보았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경은 어찌 돌아갈 생각이지? 마차를 가져왔는가?”
“아뇨. 거리가 가까워 걸어왔습니다.”
비야 좀 맞아도 상관없으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카예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봄엔 감기에 들기 쉬우니 조심해야 하네.”
그녀는 하인을 불렀다.
“도서관에서 우산을 빌려 오너라.”
“예, 전하.”
카예나의 마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하인이 우산을 빌리러 간 동안 먼저 자리를 뜰 수 없으니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이제는 손을 놓아도 될 것 같은데…….’
카예나는 여전히 맞잡은 손을 곤란하다는 듯이 보았다.
라파엘로는 신사답게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편히 걸을 수 있도록 단단히 손을 붙잡아 주었다. 도움을 준 것도 고마운데 더는 그를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늘 경의 도움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에스코트를 받던 손을 거두었다.
라파엘로는 또 카예나가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을 느꼈다. 도무지 그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접촉하는 게 불편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꼭 자신과 같은 증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이상했다. 아니, 그녀가 접촉을 불편해하는 건 아니었다. 레제프의 에스코트는 멀쩡히 받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까 경황이 없을 땐 먼저 그를 붙잡고 있기도 했다.
‘나를 배려하는 것 같아.’
그가 누군가와 접촉하는 걸 무척 싫어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같았다.
‘……지나친 생각이지.’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을 오래 보아 온 보좌관이라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결함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부모도 모르는 사실을 그녀가 알 수 있을 리가.
그때 하인이 우산을 들고 도착했다. 카예나는 안도하는 얼굴로 라파엘로에게서 더욱 물러났다.
“그럼 다음에 또 보지.”
라파엘로는 마법이 풀리기 전에 도망치는 어느 이야기처럼 마차에 올라타는 카예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라파엘로는 양손을 들어 올린 채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뭔가 심오한 문제에 직면한 학자처럼 고뇌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진하게 우려낸 차가 식는 줄도 모르고 제 손을 관찰했다. 옆에서 제레미가 이상하게 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집중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오늘 일생일대의 사건을 겪고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접촉이 불쾌하지 않았다.’
라파엘로에게 그 감상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그런 감정을 느낀 일이 최초이며, 심지어 그렇게 느낀 상대가 카예나 황녀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괜찮아진 건가?’
더는 누군가와의 접촉이 불쾌하지 않게 된 건 아닐까?
그는 당장 실험해 보았다.
“제레미.”
라파엘로의 뜬금없는 행동을 미심쩍은 눈으로 곁눈질하던 제레미가 화들짝 놀랐다.
“예, 예! 말씀하십시오.”
그는 제레미를 향해 손을 불쑥 내밀었다.
제레미는 잠시 그 손의 의미를 해석해 보려고 했다.
음, 전혀 모르겠는데.
그는 해석을 포기하고 물었다.
“……뭘 드릴까요?”
“내 손을 잡아 봐.”
제레미는 당혹스러웠다.
단둘이 있는 서재, 주인의 이상한 행동, 뭔가 야릇한 요구.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둘은 손을 마주 잡았다. 누가 보아도 이상한 그림이었다.
“…….”
라파엘로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못 잡을 걸 잡은 것처럼 손을 탁 떼었다. 갑자기 소박맞게 된 제레미는 떨떠름하게 손을 거뒀다. 라파엘로가 손을 잡자고 요청하는 건 그를 보좌하게 된 이후 처음이었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주인이 엉뚱한 행동을 할 때는 종종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남다른 구석이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황녀 전하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들리는 이야기로는 라파엘로가 카예나 황녀를 에스코트했다던데.
제레미는 혹시 모를 핑크빛 기류를 찾아내기 위해 눈을 부릅떴으나 주인은 평소처럼 건조했다. 막 풋사랑에 빠진 소년 같은 달콤한 설렘은 조금도 없었다.
새카만 머리칼과 붉은 눈, 완벽하게 다듬어진 것 같은 현실성 없는 얼굴. 미소 하나 없는 입. 지극히 평소와 같이 메마른 사막처럼 보였다. 바스턴은 그와 카예나 사이에 뭔가 있다며 자꾸만 열애설을 주장했다.
제레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사랑에 빠진 라파엘로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제레미.”
그때 라파엘로가 그를 불렀다.
“예, 주인님.”
이번엔 껴안아 보자거나 그러시진 않겠지?
그는 라파엘로의 다음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헨버튼 길리안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가?”
‘헨버튼 길리안?’
모를 수 없었다. 공작가 가신의 아들이며 길리안 자작가의 다음 후계자이기 때문이었다.
“예, 길리안 자작가의 장남입니다. 요즘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혼인가?”
“예. 약혼자가 있었는데 두 달 전쯤 파혼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게 카예나 황녀 전하와 연회장에서 춤을 춘 이후라고…….”
제레미는 그렇게 말하다가 표정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길리안 영식이 황녀 전하께 실례를 저질렀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는 원래도 길리안 자작가를 그다지 곱게 보지 않았다. 자작부터가 정부만 다섯이 넘는다고 알려진 파렴치한이었다. 그 아들인 헨버튼은 어울려 다니는 친구가 모두 질이 나빴다.
“그 영식에 대해 좀 알아보아라.”
뜻밖의 말이었으나 그는 곧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명을 받듭니다.”
공작가의 가신이며 다음 후계자인 헨버튼 길리안에 대해 알아 두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라파엘로가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를 뒷조사해 보라고 명한 적은 없었다.
‘헨버튼 길리안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라파엘로는 오늘 카예나가 지었던 두려워하는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발견하고 지었던 안도하는 표정도 뒤따라 생각났다.
“…….”
몸 안쪽 어딘가가 간지러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카예나는 오랜만의 외출을 마치고 나니 무척 피로했다. 비까지 내려 몸이 더욱 축 처졌다.
“목욕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베라는 그녀의 피곤함을 알아보고 직접 목욕물과 입욕제를 준비하러 나갔다.
카예나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이마를 짚었다. 길리안에 관련된 날카로운 기억이 비집고 올라왔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나쁜 기억은 잊는 게 낫다.
어차피 이번 생에서는 그와 결코 엮일 생각 따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과 결혼할 것이며 이 세계의 주요 악역 자리를 박차고 떠날 생각이었다.
길리안 자작의 집안은 군마를 생산하기에 제국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컸다. 라파엘로의 협력을 기대하려면 길리안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꼭 해야 한다면 무너뜨릴 수도 있겠지.’
카예나가 길리안 자작 부인으로 살았던 아주 짧은 시간에 길리안 자작가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발견했었다.
‘굳이 그런 일까지 해서 황성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고 싶진 않지만.’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답고 일출과 일몰이 가장 소란스러운 때인 한적한 시골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간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아무도 없는 침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 너머를 바라보던 카예나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인제 그만 나오는 게 어떻겠니, 레제프?”
* * *
카예나가 견과류 쿠키를 먹고 쓰러진 후, 레제프는 무기한 근신을 명 받고 침실에 갇혔다. 응접실과 복도에까지 기사들이 포진해 그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를 한심하게 여기던 부황의 눈빛이 떠올랐다.
“내가 언젠가 기필코 다 죽여 버릴 것이다!”
“전하! 큰일 날 말씀을……!”
레제프는 분을 이겨 내지 못하고 소리치고 방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아악!”
그가 집어 던진 물건에 맞고 쓰러지는 하인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레제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용인은 소모품이다. 타고난 피가 고귀한 자만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부황이 그를 천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 전하! 고정하십시오!”
부상의 경도가 다를 뿐, 레제프의 침실에서 다친 하인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고 황자의 방을 아무런 사용인도 없이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새로운 사용인이 밀어 넣어졌다. 주변에서는 그들에게 혹시 모르니 유서를 남겨 두라고 말하기도 했다.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상황은 더 악화하기만 할 뿐입니다.”
제논은 황자가 이 정도로 미쳐 날뛰는 걸 처음 보았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지지하는 황자가 황제의 손에 폐위 당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건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닥쳐!”
레제프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그를 말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황자 같으니…….’
제논은 귀족을 소집하러 밖에 나가 버렸다.
그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후에야 간신히 진정했다. 숨죽이고 있던 하인들이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무리해서라도 에스테반 황제를 진작 죽였어야 했나?
부친에 대한 정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냉혈하고 잔혹하게 생각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무기한 근신이 열흘로 줄어들었다.
“황녀 전하께서 지금 중앙성에서 무릎을 꿇고 주청 중이시라 합니다.”
침실 출입이 자유로운 제논이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내명부 권한이 카예나에게 임시 이임되었다고 했다. 마치 정해진 일인 것처럼 무엇 하나 막힘없이 순서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그의 자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황제……!”
자신이 쌓은 세력은 허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황제는 레제프를 아무런 힘이 없었던 때처럼 취급했다. 자신이 정녕 그의 아들이라면 이럴 수 없었다. 부정의 산물이라고 이렇게 천대하는 것이라면 황제는 그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아니던가!
황제의 눈은 항상 서늘했다. 자신을 경멸했다. 어린 시절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기다릴 필요도 없어. 황좌는 스스로 차지하는 것이다.’
방에 갇힌 채 하루가 흘렀다.
밖에서 누이가 찾아왔단 소식이 들렸다.
‘그래, 당연하지.’
카예나는 내가 없으면 안 돼. 이제 내명부 권한이 너무 과분하다고 하겠지.
그녀는 자신을 태워 레제프를 밝힐 촛불이어야 했다.
그러나 카예나는 내명부 권한을 놓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녀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한참 자리를 비웠던 제논이 침실로 돌아왔다. 잘 아는 향이 코끝에 걸렸다. 카예나의 침실 향로에 피우는 향이었다. 그 향이 제논에게서 느껴졌다.
“…누님을 만나고 왔나 보군.”
‘……어떻게 알았지?’
현재 레제프에게 밖의 상황을 전달할 하인은 없었다. 바깥의 기사들도 침실 안까지는 함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레제프가 어떻게 그가 카예나와 함께 있었단 사실을 바로 알았단 말인가.
제논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는 카예나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그래도 당장은 마음을 저울질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에게 이권을 양보할 마음도 없었다. 당연히 레제프 황자와의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일에 도움을 줄 생각은 없다.
그런데 대답 여하에 따라 당장에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황녀 전하께서 전하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레제프에게서 카예나의 입지가 더욱 유리해질 수 있는 일을 해주어야만 했다.
“전하의 근황을 비롯해 건강을 염려하시며 찾으셨습니다. 기사들이 막고 있어 돌아가셨지만 말입니다.”
우습게도 자신이 그저 여인이라 무시했던 황녀가 있지도 않은 이 자리에서 그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래?”
레제프는 참을성이 없고 난폭하지만 아둔하지 않다.
그는 제논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카예나와 무슨 일이 있었나?
그는 문득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던 뭔가가 모래알처럼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요하면 부를 것이니 나가 보아라.”
“물러나 보겠습니다.”
제논이 방에서 나가고 한참 뒤에 레제프는 다른 보좌관을 방으로 불렀다.
“제논 에반스를 감시해라.”
“명을 받듭니다.”
그는 습관처럼 물었다.
“누님은 뭘 하고 계시느냐?”
“황녀 전하께서는 외출하셨습니다.”
“그럼 어디로 외출하셨는지도 나에게 말해야 하지 않겠느냐?”
“죄송합니다.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레제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옆의 촛대를 집어 던졌다.
보좌관은 황동으로 만든 촛대에 머리를 얻어맞았으나 미동도 하지 않고 머리를 숙인 자세 그대로 있었다.
그가 흐트러짐 하나 없는 무감한 투로 말했다.
“누님의 행적을 파악하라.”
“명을 받듭니다.”
“부황의 찻물에는 꾸준히 독을 섞고 있겠지?”
“예.”
황제는 약을 마신 후에 항상 달콤한 차로 입안의 쓴맛을 없앤다.
레제프는 이미 은스푼에 수작을 부려 놓았다. 그 스푼은 찻물에 닿아도 검게 변하지 않았다. 그게 황제의 건강이 조금도 돌아오지 않는 이유였다.
“양을 늘려라.”
보좌관은 피가 흐르는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의 명을 수행하러 보좌관이 나가고 레제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직은 견딜 만했다. 참을 만했다. 카예나는 제 것이 틀림없다고 여전히 믿었다.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안온한 행복과 충만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그 상대가 얼마나 숨을 붙이고 살지는 모르겠지만.
카예나는 제 것이다. 언제나 그의 영향력 아래에서 지금처럼 있으면 되었다.
“황립 도서관에서 라파엘로를 만났다고…….”
카예나의 행적을 뒤쫓던 보좌관이 목격한 사실을 알렸다.
라파엘로 키드레이.
그 남자는 레제프가 황제가 된다고 해도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카예나가 그의 아내가 된다면 제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처음부터 자신을 방심하게 한 후에 뒤통수를 칠 작정이었나? 라파엘로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건 찬성이다. 아주 훌륭한 계획이다. 하지만 제 것을 빼앗기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광기와 같은 집착에 물들었다.
황자궁에서 외부로 나가는 비밀 통로의 입구를 열었다. 당장 카예나의 의중을 확인해야 했다.
그는 비밀 통로를 통해 황녀궁 침실에 도착했다. 태피스트리 하나만이 둘 사이를 막고 있었다. 그때 기척을 느낀 카예나가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인제 그만 나오는 게 어떻겠니, 레제프?”
그녀는 레제프가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보았다.
레제프는 순순히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를 빠져나와 잠시 비를 맞았더니 머리칼이 완전히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에 구비해 놓은 마른 수건을 찾아 그에게 가져갔다.
레제프는 젖은 머리칼 사이로 냉랭하게 카예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카예나는 할 수 없이 레제프의 머리에 수건을 덮어 말려 주려고 했다.
탁!
레제프가 그녀의 손을 쳐 냈고 수건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카예나는 한숨처럼 말했다.
“감기 걸려.”
그러자 레제프가 하, 하고 비소했다.
“아니면 따뜻한 차라도 좀 마실래?”
말해 봐야 거절할 것이 뻔했지만 일단 물었다.
역시나 레제프는 차가운 목소리로 비난하듯 말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옵니까?”
카예나는 피로했다.
오랜만의 외출에 저를 살해한 전남편을 만났다. 자신이 얼마나 애통하게 살려 달라고 용서를 구했는지 낱낱이 떠올랐다. 레제프에게 보냈던 수많은 편지와 한 번도 오지 않는 답장에 좌절했던 나날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없는 과거이기에 잊으려 애썼다. 악녀다운 벌을 받은 것이라고 치부하고 불덩이를 삼켰다. 그때의 우리는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가 너무나 많았고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없었다며, 그렇게 스스로 다독였다.
지금 눈앞의 동생은 아직 어리다. 충분히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믿어야 했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어. 악역 남매가 아니라 조금 성질이 나쁜 남매 정도면 괜찮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예나는 최대한 자상하게 목소릴 냈다.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녀는 새로운 수건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레제프는 그녀가 자리를 이탈하지 못하게 팔을 콱 붙잡았다.
카예나가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원하는 게 진짜 결혼입니까? 그래서 오늘 라파엘로를 잘 만나고 오셨습니까?”
“우연이었어.”
“당연히 우연이었겠지요, 누님.”
조금도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카예나는 레제프가 분노와 불신으로 완전히 돌아 버렸단 것을 알아보았다.
“왜 더 말하지 않습니까? 이것도 다 계획이라고 하시면 될 텐데요. 이 궁의 사람들을 모조리 쓸어 낸 것처럼.”
나를 포함해서. 그는 굳이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레제프가 그녀의 팔을 더 세게 쥐었다. 카예나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아파, 레제프.”
그는 비소를 터뜨리며 팔을 놓아주었다. 대신 카예나의 목을 쥐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아름다우신 누님. 저는 뭔가가 제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카예나도 잘 알았다.
“제게 위협이 될 것 같은 건 근처에 남겨 두지도 않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카예나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점점 더 촘촘하게 옭아매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가 원하면 사라질 목숨이지요. 차기 황제는 그 누구도 아닌 나니까.”
카예나는 목을 졸린 채로 말했다.
“그래. 그럼 죽여.”
레제프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뭐?”
“날 죽여도 괜찮아. 네 말대로 나는 네가 원할 때 언제든 죽을 수 있지. 나도 잘 안단다.”
카예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아예 그의 양손을 감싸 쥐고 힘을 주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에 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미쳤어?”
레제프가 소릴 내지르며 그녀의 손을 탁 쳐 냈다.
목에는 벌써 붉은 자국이 나 있었다.
카예나는 기침을 몇 차례 내뱉더니 동생을 훈계하듯 말했다.
“네가 여기로 도망쳐 나왔다는 걸 들키면 어쩌려고 큰 소릴 내니?”
그 담담한 모습이 소름 끼쳤다.
레제프는 카예나가 상당히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했었다. 침착하고 다정하고 자상하게 변했다고 느꼈었다.
“지금 제정신이야?”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물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었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광기와 분노가 차갑게 식었다.
카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서 목을 조르라는 듯 레제프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힘에 밀린 카예나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만 좀 해!”
그녀는 차분히 일어나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겼다.
드러난 눈동자는 섬뜩하리만큼 건조했다.
“너야말로 어서 내 목을 조르지 않고 뭘 하는 거니?”
“…….”
레제프는 입술을 짓이겼다.
두 사람은 마주 선 채로 대치했다. 그것은 사뭇 이상한 긴장감이었다.
레제프는 누이를 상대로 자신이 긴장한다는 사실이 황당했고 어이가 없었다. 그는 카예나의 기백에 확실히 눌렸다. 그녀는 평온했다. 조롱하는 기색도 없었다.
‘왜 목을 조르지 않느냐고?’
그는 분노가 끓어오르면 검을 뽑아 들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카예나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대단히 자존심 상했다. 또 혼란스럽기도 했다.
‘레제프가 안에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네.’
그녀의 유능한 사용인들은 아무래도 안의 상황을 짐작하는 게 분명했다.
레제프가 큰소리도 몇 번 냈는데 아무도 방에 들어와 보지 않았다. 거기다 목욕물을 준비하러 간다던 베라가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었다. 알아서 잘들 바깥 상황을 처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예나는 이런 영양가 없는 대치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카예나는 긴장감을 탁 풀어 내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이야기할 마음이 좀 생겼니?”
레제프는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이러는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내명부 권한을 포기하지 않고 황녀궁의 독립성을 확보한 것, 오늘 라파엘로 키드레이와 마주친 것 때문이리라.
“앉으렴.”
카예나는 그렇게 말하고 향로 쪽으로 갔다. 그리고 향로 뚜껑을 열고 조금 뒤적이며 불씨를 살리니 은은한 향이 진하게 피어났다.
원래 카예나는 존재감이 선명하고 화려한 향을 즐겨 썼다. 거기에 특별한 향수를 몸에 뿌리면 살아 있는 꽃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그것도 이젠 다 과거의 이야기였다.
지금 그녀가 바꾼 향은 오직 신경 안정을 위한 배합이었다. 차분하고 은은한 향은 지금의 카예나와 잘 어울렸다. 이는 레제프 때문에 선택한 배합이기도 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수건 대신 새로운 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멀뚱히 선 레제프를 의자에 앉혔다. 젖은 머리칼에 수건을 덮고 살살 말려 주기 시작했다. 얌전히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이제 대화할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잡힌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대체 내 행동의 어느 부분에서 네가 배신을 느꼈는지 모르겠구나.”
카예나가 직접 언급한 배신이란 말에 레제프가 움찔했다. 그녀는 이번 사건으로 레제프가 눈이 뒤집혀 난리 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 난리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도 진작에 생각해 두었다.
“사실 내명부는 황자가 가질 만한 종류의 권한은 아니지.”
에스테반 황제는 그에게 제대로 된 실권 대신 내명부를 쥐여 주었다.
카예나가 황녀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탓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권한이 눈속임이라는 것을 너도 알지 않니?”
황제는 레제프에게 실권을 거의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내명부를 맡긴 것이다.
카예나의 말대로 눈속임이었다.
“네게서 내명부를 관리할 권한이 사라지고 공백이 생기면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지.”
언제까지 내명부를 쥐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카예나의 지적은 타당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기회이니 알아서 잡아 보라는 말입니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지, 레제프.”
그의 비꼼에 카예나가 긍정했다.
“내가 말했잖아. 난 너를 황제로 만들 생각이라고.”
카예나는 수건을 뒤집어 다시 머리칼의 물기를 닦았다.
“너는 지금 부황께 네가 달라졌단 사실을 극적으로 보일 계기를 손에 넣은 거야.”
레제프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머리카락을 말리는 것을 멈추게 했다. 우악스럽게 잡아챈 아까와는 달리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무슨 말입니까?”
“근신이 풀리면 부황께 가서 용서를 구하고 이렇게 말씀드리렴. 레이디 카트린 린드버그를 하멜 백작가에 입적하는 게 좋겠다고 말이야.”
카예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궁의 문턱을 넘을 수 없었던 황제의 정부를 거론했다.
그는 이름을 듣자마자 미간을 와락 구겼다. 황제의 정부는 그도 잘 알았다.
황제는 병석에 눕기 전, 마지막으로 나갔던 사냥터에서 카트린 린드버그를 만났다.
카트린 린드버그는 황제를 한눈에 사로잡을 만큼 미인이었다.
“제 손으로 황위 계승권자를 하나 더 늘리란 말씀이십니까?”
그녀에게는 에스테반 황제 사이에서 본 열세 살 된 아들이 있다. 덕분에 온갖 세력의 주목과 견제를 받았다.
“카트린 린드버그가 황후라도 된다면 곤란하긴 하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
하인리히 대공자는 에이반 가문을 빚으로 몰락시켜 제 아래로 복속시킨 것처럼 린드버그 가문을 삼켰다. 카트린의 부친을 사고사로 위장해 죽이고 가문의 대가 끊기게 만들어 제 사람을 가주로 앉혔다. 전대 린드버그 가주가 사고사로 죽었단 걸 확신하는 이유는 원작에 비사로 다뤄진 걸 보았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대공자는 그대로 카트린 린드버그를 평민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걸 황제가 하인리히 대공의 모친을 선황후로 등극시키고 그의 양아들까지 황위 계승권자로 인정하며 막았다.
레제프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어찌 확신하십니까?”
“하인리히 대공자가 설마 진짜로 카트린 린드버그에게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겠니?”
오히려 적법한 후계자의 탄생은 레제프보다 하인리히가 더 꺼릴 일이었다.
“애초에 선황후 폐하의 외가인 하멜 백작가가 그걸 승낙할 것 같습니까?”
하멜 백작가는 황실의 유일한 레이디인 카예나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걸 원치 않을 게 분명했다.
“물론이란다. 암시장을 잃는 것보단 황제의 정부를 딸로 받아 주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카예나는 레제프에게 암시장을 다시 상기시켰다.
“……제 지지 세력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거야말로 걱정할 이유가 없지. 지금 네게서 실권을 앗아 가려는 부황의 행보를 보렴. 당연히 너를 지지하는 귀족들도 너와 마찬가지로 위협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카예나가 이번에 시녀로 발탁한 수잔 레폴이 그들에게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비칠 것이다.
“레이디 카트린을 하멜 백작의 수양딸로 입적해 봐야 그 아들이 뭘 할 수 있겠니? 이미 세력은 완벽히 양분화해 있잖니.”
“…….”
그녀의 말에는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레제프는 감정적인 거부감을 억누르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황제가 가장 귀애하는 자식은 카예나도 레제프도 아니다. 린드버그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하인리히의 황위 계승권까지 인정해주며 린드버그 가문에 손대지 못하도록 거래했다.
하지만 그런 조치에도 정부를 황궁의 문턱을 넘을 수 있게는 하지 못했다. 세력의 견제가 너무 심했으며 카트린도 몸을 사리느라 저택에 숨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들이 지금은 황립 아카데미 학생이겠구나.’
“너는 단번에 인정과 동시에 훌륭한 인질도 손에 넣는 거란다.”
“암시장으로 협박해서 린드버그를 하멜 백작가에 입적시키는 것까진 가능할지라도 제 인질이 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이왕 제 수중에 들어온 카트린을 하멜 백작이 이용하지 않을 리 없다.
카예나는 비소하며 말했다.
“하멜 백작가가 내 외가인데 뭐가 문제니?”
카예나는 바로 직전에 살다 온 삶의 영향을 거세게 받고 있었다.
침착하지만 어딘가 어둡고 주도면밀한 특징은 두 번째 삶을 산 여자의 성향이다. 그렇다고 제 안에 있는 악녀다운 기질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녀는 충분히 성질이 나빴다. 패악을 부리고 힘을 과시하고 그것을 꺼내 보이길 주저하지 않는 건 레제프보다 더 잘한다고 자신할 수도 있다. 하멜 백작가 정도는 얼마든지 손아귀에서 굴릴 수 있었다.
‘이게 미리 계산해 둔 게 아니라고? 이게 임기응변으로 낸 계책일 수가 있나?’
그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정녕 카예나의 머리에서 나온 일인가?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녀에게 변변한 소식통 하나 없을 것이 분명한데.’
그는 카예나가 생각보다 훨씬 쓸 만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달았다.
카예나는 그의 머리에서 수건을 치우고 허리를 깊이 숙여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이제 우리 다 싸운 거지?”
“……하.”
레제프는 아무런 반응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카예나는 그의 웃음을 보고 마주 웃었다.
“……손이 찹니다.”
그는 누이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여전히 싸늘했다.
“젊은 게 좋구나. 너는 비를 맞아도 이렇게 몸에 열이 많으니.”
“고작 한 살 차이입니다. 그리고 운동을 하셔야죠.”
당장 다 죽여 버리고 싶었던 미칠 듯한 분노가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질 수가 있나? 그토록 화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지금 그는 평소처럼 마음이 안정되었다. 여전히 카예나는 자신의 누이고 자상했다. 그의 안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민함은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구나.’
레제프는 누이를 철저히 통제할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 * *
조금 있으니 베라가 침실로 들어왔다.
“목욕물이 아직 따뜻합니다, 전하.”
“고맙구나.”
그녀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욕실로 건너가 대리석 욕조에 몸을 담그고 오일 마사지를 받았다. 계속 아무 말 없이 시중을 받던 카예나는 마지막에 가운을 입고 나서 하녀들을 물리고 베라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쓰실 만한 최상품의 은스푼을 구해 다오. 장식을 많이 사용하여 화려하게 만들수록 좋다.”
황제는 매일 약을 먹는다. 그리고 약을 먹은 후에 달콤한 찻물을 은스푼으로 몇 모금 마신다. 그것에 사용하는 은스푼을 직접 준비할 생각이었다.
‘레제프가 부황을 독살하기 전에 준비해야지.’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모양이 화려하면 다른 스푼과 바꿔치기할 수 없다.
지금 황제가 쓰는 은스푼은 진짜 은이 아니다. 레제프가 언제든 원할 때 부황을 독살할 수 있게끔 수작이 부려져 있었다. 황제는 절대로 레제프가 원하는 때에 죽어서는 안 된다.
“이른 시일 내로 준비하겠습니다.”
카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레이스 자작가로 황제의 칙서가 내려왔다. 가족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며 슬퍼했다.
그레이스 자작이 울적한 얼굴로 딸에게 말했다.
“폐하의 칙서라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구나.”
‘편지대로야.’
그녀는 혹시 그렇지 않을까 하고 짐작했던 것이 맞아떨어지자 입술을 잘근 물었다.
‘이건 카예나 황녀의 뜻이 확실하구나.’
황녀궁에 있던 기존 시녀들이 모조리 쫓겨났단 소식도 들었다. 대대적인 물갈이였다.
그녀는 그나마 주변에서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친구, 마리아에게 상담했다.
“황녀 전하께서 날 싫어하는 건 너무 명명백백하잖니. 그런데 나를 시녀로 발탁한 게 이상하지 않아?”
올리비아는 나무 그네에 앉아 땅을 발로 찼다. 생각이 너무나 복잡했다.
“그러게. 그분께서 널 시녀로 발탁한 건 정말 뜻밖의 일이긴 하구나.”
“내가 그분께 필요한 이유가 뭘까?”
마리아는 카예나 황녀를 두고 깊이 골몰하는 제 친구를 나무라듯 웃었다.
“뭐 그렇게 깊은 뜻이야 있으려고? 내가 보기엔 곁에 두고 감시하려는 것 같은데.”
카예나 황녀에게 특별한 의중이 존재할 리 없다고 확신하는 말투였다. 그녀가 올리비아를 질시하고 경계한다는 건 온 사교계가 다 알았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이 일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사람이었으면 진즉 했을 거야.”
황녀궁의 시녀를 모조리 내보냈다면 새로운 사람으로 다 채울 텐데. 과연 어떤 인물들이 황녀궁으로 모이게 될까? 그녀로서는 알아볼 방법이 없으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입궁해서 먼저 상황을 파악하자.’
올리비아는 결심과 동시에 행동했다. 짐을 꾸릴 것은 별로 없었다. 하녀를 한 명 데리고 가고 싶지만 그러면 집안의 출혈이 너무 크겠지. 그녀는 장녀답게 원하는 것을 참아 냈다.
“굳이 일찍 입궁할 건 없잖니. 그냥 내일 가는 게 어때?”
이미 삯마차는 불러 두었다.
올리비아는 가방을 옮기고는 가족에게 인사했다.
“저는 잘해 낼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칙서를 들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간단한 절차를 밟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위압적이야…….’
황궁은 입구부터 압도적이었다. 규모나 화려함을 떠나서 안에서 감도는 분위기가 숨 막혔다.
‘이곳이 앞으로 내가 지낼 곳이지. 얼른 적응해야 해.’
그녀는 궁정인의 도움을 받아 황녀궁으로 향했다.
“미리 전달받았습니다, 그레이스 양.”
황녀궁 입구에서 단정한 옷차림의 시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올리비아 그레이스입니다.”
“베라 렉턴입니다. 그냥 베라라고 불러 주세요.”
그녀는 상급 시녀가 분명했다. 분명 기존 시녀는 다 내쳤다고 했는데, 그중 살아남은 사람인가?
‘그렇다면 카예나 황녀의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베라는 숙소부터 안내했다. 숙소는 개인실이었고 그레이스 저택에서 가장 좋은 부모님 침실보다도 훨씬 훌륭했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고 감탄하며 방을 둘러보았다.
‘시녀의 방에 전신 거울이라니.’
베라는 업무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전하를 직접 보필할 시녀는 저와 올리비아 양을 포함해서 총 넷입니다. 그만큼 보장받는 권리도 많겠지만 주어지는 임무도 막중할 거예요.”
시녀의 수가 고작 넷일 거라는 말에 올리비아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베라는 자신이 황녀궁의 시녀들을 총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올리비아 양은 앞으로 황녀 전하의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주로 맡게 될 겁니다. 그 밖에도 파티 스케줄이나 전반적인 의례나 절차를 관리하게 될 거예요.”
그것은 필시 이곳에 모일 사람 중 가장 가문이 한미할 것이 분명한 올리비아에게 주기엔 너무 좋은 포지션이었다. 사교계의 영향력은 물론이고 황궁 내에서 베라 다음으로, 아니 어쩌면 가장 입지가 높을 자리였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녀는 이쯤 되니 황녀가 수수께끼의 인물처럼 느껴졌다.
“이제 전하께 인사를 올리러 갈 것이니 준비하세요.”
좋은 옷으로 갈아입을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라는 뜻일 것이다.
올리비아는 이미 자신이 가진 것 중 연회복을 제외하고 가장 좋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옷차림은 준비할 것이 없으니 다른 걸 준비하려 했다.
“제가 조심할 건 없겠습니까?”
올리비아의 물음에 베라가 미소 지었다.
“영애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스스로 깨닫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군요.”
그녀는 베라의 말이 꽤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다.
인사를 하러 가기 전, 올리비아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베라를 따라갔다.
황녀의 침실은 문부터 남달랐다. 거대한 문은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황금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마도 신화의 한 장면을 표현해 낸 것 같았다.
그 예술품 같은 문이 열리자 화려한 무늬가 돋보이는 붉은 카펫이 눈에 들어왔다. 푹신한 바닥을 밟으며 들어가니 곧 침실이었다.
‘드디어.’
마침내 침실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방에서 나는 향이 상당히 좋다는 것이었다. 아주 은은하고 차분한 향이 긴장감을 누그러뜨려 주는 것 같았다.
방은 황녀의 침소답게 하나의 작품 같았다. 그 안에서도 가장 작품 같은 황녀가 소파에 앉은 채 책을 읽다가 고개를 돌렸다.
‘와…….’
올리비아는 잠깐 멍해지고 말았다.
백금발에 가까운 옅은 레몬색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늘어뜨린,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카예나가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채 빙긋 웃었다.
‘아차.’
올리비아는 얼른 정신 차리고 늦지 않게 인사를 올릴 수 있었다.
“올리비아 그레이스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확실히 내가 보아왔던 것과 좀 달라진 것 같긴 한데.’
카예나를 썩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올리비아는 그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입궁은 내일인 줄 알았는데.”
“전하를 보필할 시녀가 없다는 말에 하루 일찍 입궁하였습니다.”
올리비아는 과하지 않게 적절히 처세했다.
카예나는 그 영리함이 마음에 들었다.
카예나는 올리비아의 윤기가 흐르는 밀빛 머리카락과 생기로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를 보며 어딘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카예나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특유의 차분하고 이지적인 분위기가 시선을 끌었다.
“반갑네, 올리비아 그레이스 영애.”
“이제 전하의 사람이니 편히 불러 주십시오.”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시종일관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였다.
카예나는 그녀의 태도에 웃음을 베어 물었다.
“저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전하를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카예나는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올리비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앞으로 나와 잘 지냈으면 좋겠어.”
카예나는 짐짓 의뭉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들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황녀궁 시녀로 발탁되었을 때 꽤 놀랐겠네.”
카예나는 그녀가 조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듯한 눈으로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동안 서운하게 했던 것은 부디 잊어 줬으면 좋겠어.”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리 말해 주니 마음이 편하네. 참, 그대가 이제 스물이었던가?”
“그렇습니다.”
“그럼 벌써 성년식을 치렀겠군?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네.”
올리비아는 가난한 집안에 열등감은 없었으므로 솔직하게 말했다.
“제겐 동생이 많고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아서 따로 성년식을 치르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황녀 전하께서 듣지 못하셨을 겁니다.”
주변에서 오히려 올리비아의 말에 헛기침하거나 놀란 숨을 들이켰다.
카예나는 빙긋 웃었다.
“그럼 내 성년식을 같이 보내면 되겠어.”
카예나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아예 드레스 룸을 열어 버렸다. 그러고는 올리비아가 성년식에서 입을 드레스를 골라 주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나와 체형이 비슷해서 내 드레스를 입으면 될 거야.”
올리비아는 깜짝 놀라 당장 한쪽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내 사람을 이 정도도 챙기지 못해서야 어찌 황실의 일원으로 떳떳할 수 있겠어? 자네 주인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거절하지 말아 줘.”
곁에 있던 베라도 한마디 거들었다.
“전하의 호의를 감사히 받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간 사교계에서 몇 번 마주쳤던 카예나와 지금 이렇게 대면하게 된 카예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행동에 고귀한 기품이 어려 있었으며 말에는 자연스러운 권위가 스며 있었다. 그야말로 제국의 황녀다운 모습이었다. 껍데기만 카예나고 알맹이는 완전히 바뀐 것 같은 변화였다.
카예나는 침실 앞에 멈춰 서서 올리비아를 보았다.
“오늘은 이쯤하고 쉬도록 하지.”
탐색전에서 너무 큰 힘을 빼는 건 낭비이니까.
카예나는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 올리비아를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