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8
악녀는 마리오네트 7장. 악녀의 살림살이(2)(8/33)
7장. 악녀의 살림살이(2)
베라는 하녀 하나만 대동하여 황녀의 식사를 점검하러 중앙성 주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황족들의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라 모든 주방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그만큼 철두철미하게 관리되기는 하지만, 베라는 항시 중앙성 주방에 들락거렸다. 카예나에게 있는 알레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비린 걸 잘 못 먹기도 해서 해산물을 올리려면 각별하게 신경 써야 했다.
‘전하께서는 아닌 척하시지만, 어제부터 너무 기운도 없으시고 걱정이야. 기운이 날 만한 보양식도 준비하라 해야겠어.’
하지만 그녀가 주방을 들러서 간섭할 때마다 중앙성의 총주방장은 항상 못마땅한 태도였다. 대놓고 베라를 배척하며 상당히 비협조적으로 행동하고 얼른 내쫓으려 들었다. 꼭 뭔가 숨기려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외부인 출입을 꺼리던데. 행실이 떳떳하면 그럴 리 없지.’
베라는 코웃음을 치며 생각했다. 어딘가 수상쩍은 일을 발견한다면 바로 고할 것이다.
그러나 베라의 발걸음은 황녀궁 입구에서 막혔다. 궁정인들이 황녀궁 앞에 포진해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낯익은 여자가 보였다. 황궁의 모든 여성 사용인을 다스리는 총괄 하녀장, 힐리에 부인의 오른팔인 소피닌 부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레제프쪽 세력의 사람으로 카예나를 적대하는 세력이기도 했다.
베라는 그녀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소피닌 부인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자 소피닌 부인이 코웃음 쳤다.
“황궁 내부를 단속 중일세.”
“황궁 내부를 단속이라는 말씀은…….”
“지금 어딜 가는 중이지?”
“중앙성 주방으로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드실 식사를 확인해야 해서요.”
그녀의 말에 소피닌 부인이 표독스럽게 치뜬 눈으로 베라를 노려보았다. 어떻게든 베라를 찍어 누르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정이었다.
“그곳은 모든 부처 중에서도 가장 엄격히 관리되는 곳일세. 그런데 비전문가인 자네가 가서 무얼 한다는 거지?”
베라는 그녀가 어떻게든 생트집을 잡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는 자신보다 지위가 높으니 이 기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은 적었다. 그래도 입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베라의 태도가 곧 카예나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저는 황녀궁에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상급 시녀입니다. 제가 그것을 관리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소피닌 부인 곁으로 상급 시녀 다섯이 주르르 섰다.
“그렇지 않아도 하녀장님께서 황녀궁에 시녀의 수가 부족하니 새로운 상급 시녀를 선별하여 보내라고 하셨다네.”
그 말을 들은 베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이미 황녀궁에 소속될 상급 시녀를 모두 발탁하셨습니다.”
“답답한 소리!”
그녀는 베라의 말을 바로 헛소리 취급했다.
“황녀궁의 시녀는 신중히 고르고 골라야지. 그렇게 교육되지 않은 시녀들만 데리고 어찌 전하를 모실 수 있단 말인가!”
소피닌 부인의 말엔 틀린 것이 없었다. 그러나 틀린 말이 아니라 해서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니었다. 저들의 목적은 카예나를 감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자네의 태도도 참으로 문제가 많아. 그런 식으로 중앙성 주방을 들락거리며 월권하는 행위가 해당 부처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모른단 말인가?”
베라의 눈썹이 불쾌감으로 꿈틀거렸다. 그녀의 표정도 점차 예의를 잃고 싸늘하게 식어 갔다.
“월권이라니요?”
“총주방장의 고유 권한을 자네가 계속 간섭하고 있질 않은가! 중앙성 주방 쪽에서 하녀장님께 몇 번이나 항의를 넣었네!”
짜증이 왈칵 치솟았다.
월권이라니?
베라는 음식에 황녀가 먹지 못하는 것이 있는지, 평소 즐기지 않는 식재료가 사용되지 않는지 점검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시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지금까지 황녀궁을 채우고 있었던 시녀들이 대충 일했던 것일 뿐, 베라의 행동엔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단순히 이걸 빌미 삼아 기 싸움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녀장의 대처도 수상해.’
베라의 눈빛이 소피닌 부인을 비롯한 주변의 궁정인을 면밀하게 훑었다. 내명부 권한이 카예나에게 넘어온 것을 마뜩잖게 여기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렇게 재빠르게 카예나를 압박하려 들 줄은 몰랐다.
베라는 언짢음을 감추고 최대한 차분하게 대꾸했다.
“황녀 전하께서는 얼마 전 견과류 알레르기로 인해 크게 앓으셨습니다. 당분간은 제가 전하께 올라가는 음식들을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소피닌 부인은 옳거니, 하고 말꼬리를 잡았다.
“그 사실을 총주방장은 모르고 음식을 준비한다는 뜻인가? 이렇게 함부로 능력을 의심하고 상대를 비난해도 되느냐는 말일세!”
베라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상대에게 말리고 말았다. 그녀는 속이 끓었으나 순순히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소피닌 부인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황녀 전하의 식사는 이 아이들이 가져올 것이니 자네는 돌아가 보게.”
베라는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레제프 황자가 연금된 것이 그들 세력을 제대로 건드린 것 같았다.
‘이제야 간신히 권한 하나 손에 넣었을 뿐인데…….’
황녀가 고작 임시로 내명부를 쥐게 되었을 뿐인데 황자측 세력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런 작은 일조차 계속 패배하게 된다면 지금껏 종이 황녀라며 업신여겨지던 것과 달라질 게 없었다. 너무나 분하고 원통했다. 베라는 바로 황녀의 침실에 돌아가지 못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매번 침착하실 수가 있지?’
자신은 고작 이런 억압에도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고 비참해지는데. 그 작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그리도 강인할 수 있지?
소피닌 부인은 자신을 힘으로 눌렀고, 그녀는 속절없이 당했다. 직위도, 가문도 그들에 비해 약하니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런 자신이 대체 카예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베라는 자신이 절대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제 착각이었다. 레제프의 힘이 거둬지자마자 베라는 그저 힘없고 평범한 상급 시녀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더 똑똑하고 당차게 행동하지 않으면 저들에게 계속 얕보일 거야.’
쓸모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베라가 황성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항상 지녀 온 강박이었다. 베라는 카예나가 유일한 희망이자 구원이었다. 그녀의 곁이 더 유능하고 쓸 만한 이들로 채워진다면 가문이 한미한 베라는 버려질지도 모른다.
자신은 더 쓸모 있어져야 한다.
베라는 시녀가 사용하는 휴게실에서 홀로 분을 삭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중앙성 주방…….”
총주방장이 지나치게 외부인을 경계하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곳에 뭔가가 있다. 그곳을 뒤집으면 뭔가 나올 게 분명하다.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해.”
베라가 손톱을 잘근 물었을 때였다.
달칵.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머, 누가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어요.”
“……올리비아 양?”
다름 아닌 올리비아 그레이스였다.
“올리비아 양. 초면에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베라는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다지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중앙성 주방 쪽에서 뭔가 수상한 기색이 있어 알아보려고 해요. 올리비아 양이 실무 교육을 받는 척, 주방에 시선을 끌어주실 수 있나요?”
“어렵지 않은 일이네요.”
올리비아는 베라가 잡역 하녀처럼 입은 모습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잡역 하녀는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니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다행스럽게도 눈동자나 머리 색이 흔한 편이라서요.”
올리비아는 낮은 탄식을 흘렸다. 권모술수가 난무한다는 황궁의 단면을 입궁 첫날부터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중앙성 주방의 창고 쪽에 항상 감시가 붙어 있더라고요.”
창고는 외부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밖에서 들어오는 재료들이 모두 이곳에 보관된다.
베라가 주방 내부를 둘러볼 때 감시들이 유난히 창고로 나가는 문을 삼엄하게 지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워낙 고가의 식재료가 많으니 감시하는 건가 보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뭔가 이상했다. 그곳에 감시가 많다는 것은 무언가 뒤가 구린 일이 창고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황궁에서 구른 지 오래된 베라는 어떤 종류의 비리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을지 대략 예측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총주방장은 착복 중인 게 틀림없다.
베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가죠.”
* * *
그 시각, 카예나는 여행기를 보고 있었다.
‘남서쪽의 밀헨이 좋겠어. 적당히 가난하고 알맞게 고립되어 있으니.’
그녀는 막 그녀와 결혼할 가상의 남편과 살 곳을 결정한 참이었다.
‘키드레이 공작가와 조금 가깝다는 게 걸리지만.’
오히려 키드레이 공작가가 근처에 있기에 레제프를 비롯한 여타 세력이 함부로 들쑤시지 못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애니였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전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카예나가 책을 내려놓으며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러니?”
“처음 보는 시녀들이 전하의 식사를 준비해 왔습니다. 어찌할까요?”
“베라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베라가 아닌 다른 시녀들?
베라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다른 사람을 보냈을 리 없다.
카예나의 눈이 일순간 예리한 빛을 띠었다가 다시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들라 하렴.”
곧 낯선 상급 시녀들이 들어왔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들은 상급 시녀 중에서도 특히 직위가 높은 이들이었다.
카예나는 테이블에 식사를 올리라 명했다.
“그런데 너희는 내 궁에서 못 보던 이들이구나. 어찌 내 식사를 챙겨 왔니?”
“황녀궁에 상급 시녀의 수가 현저히 부족하여 이곳으로 배속되었습니다. 앞으로 저희가 전하의 시중을 도맡을 것입니다.”
“아, 그래?”
카예나는 그들의 뻔한 속내를 바로 알아챘다.
‘그냥 내버려 둘까?’
황녀궁에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체계를 잡은 것뿐인데 벌써부터 견제가 들어오다니. 게다가 자신을 무시하고 멋대로 상급 시녀를 들이민 것은 어이가 없었다. 그들의 뒷배인 레제프, 아니, 에반스 가문의 힘을 그만큼 믿고 있단 방증이었다.
‘괜히 반목하게 되면 앞으로 사사건건 시비를 걸겠지. 그렇다고 놔두자니 전과 다를 바 없어질 것 같은데…….’
아직은 그녀가 발탁한 시녀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다.
내일 수잔과 줄리아가 황녀궁에 도착하면 그들 가문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이들을 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집안만큼은 그들이 더 좋거든.’
“오늘은 중앙성 주방에 싱싱한 생선이 들어와서 구이를 했다 합니다.”
황성이 위치한 수도, 엘퀴엠은 내륙 지방이기는 해도 바로 옆이 항구도시라 생선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카예나의 식사에 자주 오르지는 않았다. 그녀가 비린 것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베라가 식단을 확인하지 않은 건 확실하네.’
베라가 제 일을 내버려 두고 사라질 사람이 아니기에 의아함이 더욱 커졌다.
카예나는 나이프를 들었다가 곁에 일렬로 서서 그녀를 감시하듯 지켜보는 시녀들에게 말했다.
“나가지 않고 뭣들 하느냐?”
“소인들은 전하를 보필하란 명을 받았…….”
챙강!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시녀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카예나는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그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나가 보라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최근 얌전해졌단 소문이 나긴 했어도 그간 카예나가 행한 패악은 여전히 그들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수틀리면 지금 집어 던지듯 놓은 나이프를 그들에게 휘두를지도 몰랐다. 그들은 흠칫거리며 물러났다.
“……필요하실 때 불러 주십시오, 전하.”
시녀들이 나가고 카예나는 곧장 애니를 불렀다.
“베라를 찾아라.”
애니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카예나는 수프를 뒤적이다가 혹시 모르니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때 애니가 한 하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베라 님과 같이 중앙성 주방으로 가려 했던 하녀라 합니다.”
‘가려고 했던?’
하녀가 카예나에게 아까 있었던 대치 상황을 소상히 전달했다.
카예나는 궁정인들이 베라를 길들이려 기 싸움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저를 돌려보내시고 시녀 휴게실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녀의 말에 애니가 덧붙였다.
“하지만 시녀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지기에게 물으니 오늘 입궁한 새로운 시녀와 같이 나갔다고 합니다.”
“올리비아와 같이 나갔다고?”
“예. 그리고 올리비아 님은 오늘 바로 실무 교육을 받는다며 황성 안내를 부탁했다고 했습니다.”
“그래?”
카예나는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거동이 수상했다. 둘이 오늘 초면일 게 분명한데 바로 실무 교육이니 뭐니 말을 맞출 일이 뭘까?
‘그러고 보니 책에서 베라는 스스로 모략을 세워 꽤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는 말은 지금 베라의 촉에 뭔가 걸려들었단 뜻이다.
그녀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조용히 있다가 가짜 결혼으로 이곳에서 홀연히 떠날 생각이었는데. 내명부 권한이라고 해도 임시일 뿐이고 괜히 레제프의 심기를 건드릴 이유도 없었다.
어찌하나 고민했을 때였다. 도나가 침실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황녀 전하! 베라 님이 지금 중앙성 주방에서 대치 중이라고 합니다!”
카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로 가자꾸나.”
* * *
선황후가 알레르기로 타계한 이후 황궁은 제대로 된 영향력을 가진 여자 주인을 모신 지 오래되었다. 여자 황족들은 대부분 결혼 후 성을 떠났기 때문에 레제프가 대신 내명부 권한을 받아 운영한 지 오래였다.
그는 그 권한으로 궁에 제 사람들을 채웠다. 레제프에게 줄을 댄 자들은 권력을 믿고 폭력과 억압으로 하인들을 다스렸는데, 그중 하나가 힐리에 부인이었다.
“궁정 살림을 돌보는 일은 결코 허투루 볼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힐리에 부인의 표정에서는 사뭇 비장함까지 엿볼 수 있었다.
“황태자비 시절부터 하나하나 익히고 다스리며 황후라는 지고한 위치에 올랐을 때 비로소 안정적으로 돌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내명부란 말입니다.”
하녀장보다 직위가 낮은 궁정인, 소피닌 부인이 거들었다.
“옳으신 말씀이에요, 하녀장님.”
“카예나 황녀 전하께서 새파랗게 어린 것들만 시녀로 뽑으셨다는 소식, 다들 들으셨나요? 심지어 권한도 고작 넷에게 쪼개서 나눠 주셨답니다.”
그 말에 다들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들 중 콜린이라는 궁정인은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황녀궁이야 모실 황녀가 한 분밖에 없으니 그런 식의 운영도 괜찮지 않나요?”
콜린의 발언에 소피닌 부인이 날을 세우며 눈을 뾰족하게 떴다.
“답답한 소리!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질 않습니까. 그리고 이 커다란 황궁을 그런 식으로 운영할 수 있을 리도 없어요!”
힐리에 부인은 대신 화내 준 소피닌 부인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며 진정시켰다.
“흥분은 가라앉히시게. 어쨌든 우리는 지금 사태를 해결하고자 이 자리에 모인 거니까.”
소피닌 부인은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황녀궁을 감시하다가 그곳 상급 시녀에게 본때를 보여 주었답니다.”
황녀가 내명부의 임시 수장이 되었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다. 황궁에는 레제프와 유기적으로 관련된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에반스 가문이 나눠 주는 떡고물을 받아먹지 않은 이가 없다.
“각 부처에 황녀 전하의 지시에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하세요. 황자 전하께서 복권하시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일이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녀장님.”
그때 하인이 시녀들 전용 휴게실로 부리나케 들어왔다.
“지금 황녀 전하께서 중앙성 주방을 한바탕 뒤집으셨다고 합니다! 총주방장이 체포되었습니다!”
“뭐? 중앙성 주방을?”
“갑자기 총주방장을 체포하다니!”
황녀가 들이닥쳐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은 것인가?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중앙성 주방으로 갑시다!”
그러자 소식을 알렸던 하인이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중앙성 주방에 안 계십니다.”
“그럼 어디에 계신단 말이더냐!”
힐리에 부인이 왈칵 짜증 냈다. 항상 고상한 척하길 좋아하는 그녀가 이렇게 대놓고 짜증을 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지금 황녀의 행보가 기습적이란 뜻이었다.
“지금은 폐쇄된 별궁을 모두 확인해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인이 말했다. 그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 * *
중앙성 주방의 부주방장 알렉스는 황족의 식사가 모두 준비되어 나가는 걸 확인한 후,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곧 오후 식자재가 들어오면 그걸 손질해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고작 세 사람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지만 그 셋이 다 황족이기에 준비할 음식 가짓수가 상당했다.
그는 하역장 근처에서 담배를 태웠다. 중앙성 주방 말고도 사용인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곳은 완전히 전쟁 통이었다.
“사람은 출세하고 볼 일이지.”
알렉스는 총주방장의 측근이었다. 줄을 잘 잡은 덕에 주방 중에서도 노동 강도가 가장 약하지만, 권한은 가장 높은 중앙성 주방의 부주방장이 되었다.
단순히 그것 말고도 좋은 점은 또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발생하는 뒷돈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총주방장이 착복하는 검은돈 중 일부를 지급받았다.
“어라.”
그때 알렉스의 눈에 묘한 인물 하나가 들어왔다.
‘잡역 하녀인가?’
잡역 하녀치고는 태가 고왔다. 머리카락도 윤이 흐르고 드러난 피부도 좋았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는 있었으나 예쁘장한 얼굴임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젊다. 보통 잡역 하녀는 나이가 많이 어리거나 혹은 아주 많았다. 한창때의 아가씨들은 잡역 하녀보단 정식 하녀로 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중앙성 주방의 부주방장인 그에게 잡역 하녀 정도는 금방 구슬릴 능력이 있었다. 음심이 솟았다. 마침 잡역 하녀는 어리숙하게도 중앙성 주방 하역장으로 물건을 나르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 하녀가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뒤를 밟았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네?”
“……!”
하녀가 멈칫하더니 뒤를 돌았다.
“여긴 중앙성 주방이야. 황제 폐하께서 드시는 음식을 만들어 진공하는 곳. 나는 여기 부주방장이지.”
그는 천천히 하녀에게 다가갔다.
“일이 고되진 않아?”
하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알렉스는 하녀의 목소리도 마음에 들었다. 말투도 고상하여 마치 귀족 영애처럼 느껴졌다. 볼수록 탐났다.
“내게 잘 보이면 너 하나쯤은 중앙성 주방에서 일하게 할 수 있어. 황족을 바로 곁에서 모실 수 있다고.”
“괜찮아요.”
휴식 시간이 끝나면 곧 오후 식자재가 들어온다. 바빠지기 전에 그는 하녀를 구슬릴 생각이었다.
그때 하인이 그를 찾았다.
“알렉스 님!”
“뭐야?”
“황녀궁 상급 시녀가 실무 교육을 받는 중이라 이곳을 안내받고 싶다는데요?”
“또 황녀궁이야? 알았으니까 먼저 가서 상대하고 있어 봐. 따라갈 테니까.”
“예.”
그는 신경질적으로 알겠다고 말하고 하인을 보냈다. 마음이 급했다.
“이봐, 고민할 것 없어. 지금 기회 놓치면 중앙성 주방 하인 자리는 놓치는 거라고.”
“필요 없습니다!”
“그만 튕겨!”
알렉스는 뒷걸음질 치는 하녀를 거칠게 붙들었다.
“꺅! 놔요!”
가까이서 보니 하녀는 확실히 미인이었다. 그는 문득 마스크가 거슬려 벗기다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당신!”
최근 중앙성 주방을 매일 찾아와 귀찮게 하는 황녀궁 시녀였다.
“인사 권한도 없는 자가 사사롭게 권력을 휘두르고 힘없는 하녀를 겁탈하려 하다니!”
베라가 알렉스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란 알렉스는 베라가 잡역 하녀 차림인 것을 보고 여유를 되찾았다.
“하, 잡역 하녀 차림으로 몰래 숨어든 주제에……. 그리고 증거 있습니까? 나는 그냥 수상한 자를 잡은 것뿐인데요?”
그녀는 기가 막혔다. 방금 추행을 당한 당사자 앞에서 증거가 없다고 말하는 뻔뻔스러움이라니! 그녀는 수치심과 두려움을 꾹 참고 대항하다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알렉스는 비열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잡역 하녀로 위장해서 하역장에 숨어든 당신이 이상하지요.”
“감히……!”
그 순간, 하역장에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알렉스! 대체 오지 않고 뭘 하는 건가!”
총주방장의 목소리였다. 그는 성큼성큼 하역장으로 들어오다가 멈칫했다.
“총주방장님!”
알렉스는 총주방장에게 얼른 뛰어가 고발했다.
“저길 보십시오. 황녀궁 시녀님이 잡역 하녀로 위장하여 저희 뒤를 캐러 왔습니다!”
총주방장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베라를 보았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베라는 입술을 꽉 물었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좀 나눠 봐야겠지?”
그는 베라를 주방 안으로 불렀다. 주방에서 교육을 핑계로 주의를 끌던 올리비아가 낭패한 눈빛을 했다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 작당하고 중앙성 주방을 핍박하러 오셨나?”
“핍박이라니, 당치 않소.”
“그럼 그 꼴은 뭐지? 앞에서 시선 끌고 뒤를 살금살금 밟아 무슨 수작질이라도 하려고?”
그는 시녀들을 향해 성큼성큼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감히 내 주방에서 이따위로 난장을 피우다니.”
베라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자신의 실책 때문에 올리비아까지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면 어디 해 보시지? 어?”
상황은 그들이 너무나 불리했다. 일이 계획대로 돌아갔더라면 지금쯤 벌벌 떨어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총주방장이었을 텐데.
“내 이번 일은 절대 못 넘어가! 황녀궁 소속이라고 열심히 일하는 우리를 이렇게 핍박할 수는 없지!”
“이것이 어찌 핍박이오! 그리고 저 부주방장도 인사 권한을 놓고 힘없는 여인에게 수작질이나 부렸거늘!”
“거짓입니다!”
부주방장이 얼른 외쳤다.
“행색이 수상한 하녀라고 여겨 뒤를 밟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정황을 보십시오. 제가 하마터면 궁중 암투에 말릴 뻔한 것을 잡아내지 않았습니까?”
“궁중 암투라니…….”
베라는 기가 막혔다.
총주방장은 그들을 주방 밖으로 내몰다시피 하며 살벌하게 쏘아붙였다.
“어떻게든 중앙성 주방을 해코지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당장 하녀장님에게 가자고. 지금까지 봐준 줄도 모르고 도를 넘어?”
그때였다.
“총주방장이 나를 봐준 줄도 모르고 내가 도를 넘었구나.”
카예나가 호위 기사들을 대동하여 중앙성 주방에 나타났다. 총주방장은 황녀가 나타난 것을 보고 표정을 살짝 구겼다가 절을 올렸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는 총주방장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는 방금 총주방장이 베라와 올리비아에게 위협적으로 군 것을 정면으로 목격했다.
“그 시녀는 내 명을 받아 내명부 관할 부처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네가 상당히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구나.”
총주방장은 카예나가 시녀를 감싸려고 거짓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녀장에게 고발하려면 해도 좋다.”
카예나는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며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당연히 중앙성 주방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그리 떳떳하게 말한 것이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모든 부처 중 가장 엄격하게 관리되는 곳이 바로 여기, 중앙성 주방입니다. 저는 그 자부심 하나로 평생 지내 왔습니다.”
총주방장은 공손하지만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남들이 보면 정말 떳떳한 사람이라고 생각 드는 모습이었다.
카예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확인해 보지.”
“……예?”
“그리 떳떳하다는데 내 직접 모든 부처의 귀감이 되는 중앙성 주방의 관리 상태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대들의 노고를 확인하여 상을 내릴 것이다.”
총주방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황녀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막으면 뭔가 켕기는 게 있다고 보일 수 있었다.
‘황녀가 봐 봤자 뭘 알겠어?’
이제 막 내명부 실권을 잡은 그녀가 대체 뭘 알아보겠는가?
총주방장은 순순히 주방으로 카예나를 안내했다.
베라는 중앙성 주방에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이렇게 상황이 커지자 초조해졌다.
카예나는 몹시 태연했다. 그녀는 이미 황궁 살림이 엉망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았다.
“장부를 가져와라.”
주방 하인들은 눈치를 살살 보다가 어쩔 수 없이 장부를 들고 왔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관리 상태를 점검하겠다고 하여 조금 긴장하긴 했으나 내심 안일하게 여겼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황녀를 얕본 것도 있었다.
“흐음, 과연 그리 당당할 만큼 기록을 잘 해 두고 있구나.”
“알아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총주방장은 내심 안심하며 마음을 놓으려고 했을 때였다.
“그런데 식자재 폐기율이 8할이 넘는구나.”
폐기가 3할이 넘으면 예산에 무리가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3할도 5할도 아닌 8할이다. 들이는 식자재 대부분을 폐기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총주방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말만 잘하면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현재 위중하시니 엄선한 자재 중에서도 특히나 더 엄격히……”
카예나는 장부를 바닥에 휙 던졌다.
“중앙성 주방의 관리 감독이 몹시 엄격한 편이라 하여 기대를 안고 감찰하였다. 그런데 국고가 이렇게나 새고 있었단 말이냐?”
“황녀 전하.”
“폐기가 4할 이상 나오면 책임자를 황법으로 다스린단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구나.”
황법이란 말에 그제야 총주방장은 황녀가 만만히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중앙성 주방의 폐기율이 높은 건 고가의 식자재를 빼돌리기 때문이었다. 이미 오랜 시간을 이런 식으로 착복해 왔기에 황법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황자 전하도 모르신 것을 황녀가 알 리가 없지.’
총주방장은 입매를 늘어뜨리며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물론 황법은 그렇습니다, 전하. 그러나 황법이라는 것이 현장 상황과 차이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지요. 특히 황제 폐하와 두 분 전하께 진공할 음식을 관리하는 중앙성 주방에서는 말입니다.”
황족이 먹을 음식은 당연히 최상품이어야 한다. 그것엔 조금의 흠도 없어야 마땅했다. 그런 식의 논리를 들면 보통 돈을 아끼는 법이 없는 귀족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어린 아가씨 정도는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카예나의 얼굴은 생각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무감했다.
그러나 곧 기분 탓이라고 여기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선 항상 최상품만 사용해야 하며 그것의 유통 관리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바로 폐기됩니다.”
“그렇군.”
카예나는 시큰둥하게 흘려들었다.
“그런데 말일세.”
총주방장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폐기품은 어디 있지?”
“…예?”
“폐기했으면 폐기한 물건이 있어야 할 게 아니더냐? 오늘도 벌써 오전 중으로 폐기했다고 장부에 기록되어 있던데.”
설마 폐기물이 어딨느냐고 물을 줄은 몰랐던 그는 재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다 다시 미소 지었다.
“이미 버렸습니다, 전하.”
“그럼 찾아오너라.”
“예?”
“장부와 대조해 볼 것이니 찾아오라고 하였다.”
당장 움직이지 않고 무얼 하느냐는 듯한 매끄러운 태도였다.
찾아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이미 식자재를 납품하는 업체와 말을 맞춰 폐기했다고 장부에만 기록하고 값을 치렀다. 실물 없이 이뤄진 일이었다.
‘애초에 폐기에 관심 가지는 황족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그는 이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주방장은 당장 주변 아무나 붙잡고 화를 쏟아 내고 싶었다. 그러나 카예나의 무감한 눈동자가 사슬처럼 그를 묶었다. 그는 입안으로 욕설을 삼켰다.
“폐기는 누가 담당하지?”
담당자 또한 있을 리 없다. 적당한 이를 내세워 꼬리를 잘라야 했다. 그는 힘없는 하인을 하나 잡아당겼다.
“이 녀석입니다, 전하. 로쉬, 어서 폐기품을 어찌했는지 사실대로 고해라.”
로쉬라고 불린 막내 하인은 자신이 찍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여기서 죄를 뒤집어쓰게 되면 큰 벌을 면치 못할 게 뻔했다. 그렇다고 사실을 고하면 어떻게 될까?
‘총주방장을 비롯해 모두 내 가족이 어디에 사는지 다 알아.’
식료품을 납품하는 업체는 단순한 장사치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폭력배도 거느리고 있었다. 사람을 패서 죽이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고 했다. 실제로 총주방장에게 대든 녀석은 다음 날 출근하지 못했다.
“제, 제가 담당자입니다, 전하.”
카예나 황녀는 황족이다. 평민을 벌레 보듯 하는 귀족이나 황족이 그를 보호해 줄 리 없다.
“그래, 네가 그 담당자니?”
카예나의 말투는 꽤 부드러웠다.
로쉬는 손을 달달 떨다가 그 차분한 음성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오늘 폐기품은 어떻게 했지?”
로쉬가 머뭇거리자 총주방장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로쉬. 사실대로 말씀드려라.”
“그러니까…….”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죽을죄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제가, 제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감히 그것을 빼돌려…….”
총주방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가 금방 굳혔다.
“이 무엄한 놈! 감히 신성한 황실에서 도둑질하다니!”
그가 당장 로쉬의 멱살을 쥐었을 때였다.
카예나가 손을 들었다.
“그만.”
그녀는 벌벌 떠는 로쉬에게 다시 다정하게 물었다.
“로쉬라고 했니? 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제 가족을 목숨처럼 아끼는 자만큼 믿을 만한 이는 없지.”
카예나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로쉬는 황녀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상함을 느낀 총주방장이 호소했다.
“전하, 감히 황실 재산에 손댄 이 녀석을 벌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벌하는 게 좋겠는가?”
“그건, 황법에 나온 대로…….”
“황법대로 재산과 직위를 몰수하고 일가족 모두에게 태형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더냐?”
총주방장은 입을 다물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침착하자. 증거가 없잖아. 내게 절대로 태형을 내리지 못해!’
팽팽한 긴장감이 맴도는 사이 하인이 바깥에서 들어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후 식자재 납품 업자가 왔다는데 돌려보낼까요?”
총주방장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전하께서 계시는데 그런 천한 장사치가 어찌 황궁 문턱을 밟게 하였느냐! 어서 내보내라!”
카예나가 납품 업자와 마주치게 해서는 안 된다. 영수증엔 여느 때와 같이 실존하지 않는 품목이 대거 쓰여 있을 것이다.
“그럴 것 없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식료품을 납품하느라 고생했을 행상인을 독려할 겸 같이 가 보자꾸나.”
총주방장의 안색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 * *
행상인 퍼슨은 중앙성 주방의 물류 창고가 평소와 달리 휑하여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창고 안쪽으로 부주방장을 불렀다.
“어이, 알렉……!”
나타난 사람은 부주방장만이 아니었다. 죽을상을 한 총주방장을 비롯해 낯선 인물이 잔뜩 보였다. 그들 중 단연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이 있었다.
‘세상에.’
퍼슨은 태어나서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을 처음 보았다. 혼자서 온몸에 빛이라도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색이 옅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어두운 창고에서부터 볕 아래로 걸어 나왔다.
곁에 선 시녀가 말했다.
“황녀 전하께 예를 갖춰라.”
행상인은 그제야 눈앞의 여인이 소문 자자한 카예나 황녀란 사실을 깨달았다. 미모에 온 정신을 빼앗겼던 퍼슨은 그제야 부랴부랴 바닥에 엎드렸다.
“감히 이 미천한 자가 존귀하신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납작 엎드린 머리 위로 깊은 울림을 지닌 고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일어나라.”
그는 몸이 잔뜩 언 채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황녀 전하가 왜 이곳에 오셨지……?’
“폐하와 우리 남매가 먹을 것을 준비해 주는 이의 얼굴도 몰랐으니 내가 얼마나 무심했던지. 내 직접 아랫사람들의 노고를 살펴보러 왔네.”
그는 더욱 얼떨떨했다.
‘진짜인가?’
대체 지금 무슨 상황인지 빠르게 파악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당장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럼 식자재를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말에 퍼슨은 고개를 들다가 무심결에 총주방장을 보았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영수증을 들켜서는 안 되겠구나.’
그는 영수증을 꺼내지도 않고 물건만 날랐다. 눈치만 살살 살피며 물건의 품질과 수량만 점검했다.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는 듯했다.
“물건 납품을 영수증 없이 처리하는 모양이로구나?”
카예나의 말에 퍼슨이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예? 아, 소, 소인이 오늘 영수증을 끊어 온다는 걸 깜빡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총주방장이 나섰다.
“무지한 장사치가 하는 일이라는 게 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래도 오랫동안 거래해 온 곳이고 그간 쌓은 신뢰가 적지 않으니 간이 영수증으로 대체하고는 합니다.”
“예, 예. 그렇습니다.”
카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청량한 웃음소리에 심각한 분위기도 잊고 다들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직전에 살다 온 삶의 영향으로 상당히 점잖아졌다. 주도면밀하다 보니 이성적이게 되었고 행동하기 전까지 잠자코 있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러나 카예나는 본디 악녀다.
“그간 내가 너무 너그러웠던 모양이구나.”
“……예?”
그들은 뭔가 이상하단 사실을 직감했다.
“행상인을 포박하고 마차를 수색해라.”
사색이 된 총주방장이 대경실색했다.
“전하! 명분도 없이 이렇게 신하를 핍박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꿇어라.”
“전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총주방장과 행상인을 포박한 다음 짐마차를 수색했다.
“전하, 영수증을 찾았습니다!”
척 보아도 영수증엔 실제로 보지 못했던 물품 기록이 숱하게 쓰여 있었다. 행상인과 총주방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카예나가 베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베라가 냉큼 반지와 비단 장갑을 벗겨 주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총주방장에게 다가갔다.
“저, 전하! 오해이십니다. 저는 무고……!”
짜악-!
총주방장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전하!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직접 기용하신 저를 이렇게……!”
그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레제프를 들먹거렸다.
짜악!
카예나는 한 번 더 뺨을 쳤다. 그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국고에 손을 댄 것도 모자라 제 식구를 팔아 사지로 내몰다니. 그 비정함에 내 마음이 다 서늘하구나.”
기사들은 처음에 카예나의 행보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놀라운 실태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더니 불같이 화냈다.
“감히 황녀 전하를 기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장 목을 베어도 시원찮을 작자입니다, 전하!”
황족 기만은 그 무엇보다 중죄다.
“내 눈앞에서 로쉬라는 하인을 협박했었지. 그런 무서운 광경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카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장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는 중앙성 주방이 이 모양인데 다른 곳은 대체 어떻단 말이더냐?”
그 말에 하인 하나가 부리나케 자리를 이탈해 뛰어나갔다.
카예나는 굳이 그걸 막지 않았다. 황궁을 한바탕 뒤흔들 생각으로 시작한 감찰이다.
“이들을 뇌옥에 가두고 심문하라.”
“명을 받듭니다!”
* * *
황실이 발칵 뒤집혔다. 중앙성 주방의 총주방장을 비롯한 모두가 기사들의 통솔하에 뇌옥으로 끌려갔다. 그 모습을 많은 이가 목격했다. 그 혼란 속에서 카예나만 홀로 고고하게 황성을 가로질렀다.
베라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카예나는 걸음을 잠깐 멈추고 베라와 올리비아를 보았다. 그녀는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베라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올리비아는 약간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베라, 너의 눈썰미와 통찰력은 아주 뛰어나지만…, 오늘은 무모했구나.”
베라는 당장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어리석음으로 전하께 누가 되고 올리비아 양까지 위험에 몰아넣었습니다.”
올리비아도 곧바로 곁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는 자의로 일에 가담하였습니다. 저 역시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카예나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들을 손수 일으켜 주었다.
“무도한 자를 정면으로 상대하다간 큰일이 날 수 있다. 난 너희에게 어떤 변이 생기길 원치 않아.”
베라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너희가 결국 옳지 않았니? 그들은 죄인이다. 그것도 감히 황실의 국고에 손을 댄 중죄를 저질렀어. 잘했다.”
“죄송합니다…….”
카예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베라를 토닥여 주었다.
올리비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다른 곳도 감찰하실 생각이십니까?”
베라도 겨우 진정하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귀족들의 경계심이 더 높아지진 않을까요?”
레제프가 근신을 명 받은 지 고작 사흘째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는 칼을 뽑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중앙성 주방을 날려 버렸다. 레제프를 지지하는 귀족 세력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칼을 뽑았으니 어중간하게 도로 집어넣으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명부를 정리하여 기강을 바로 세우는 편이 나았다. 카예나는 그들을 안심시키려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명부 일이라는 것은 결국 살림이지. 결혼을 앞두고 살림살이를 연습해 본 거라 여길 것이다.”
“그렇군요…….”
‘차라리 제대로 처리해서 이것을 빌미로 이득을 취하는 게 나아.’
그녀가 새어 나가는 국고를 정비하여 황실 재산을 지켜 낸다면 그것은 마땅히 큰 상을 내려야 할 일이다.
카예나는 이번 일을 끝마친 후 확보된 예산만큼의 보상을 얻어 낼 작정이었다.
그때 별궁으로 가던 카예나를 누군가가 비명처럼 불렀다.
“황녀 전하!”
한데 모여서 작당 모의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 궁정인들이 무리 지어 카예나를 찾았다. 그들의 안색이 하나같이 좋지 못했다.
카예나는 그들을 무심히 돌아보았다. 시리게 파란 눈동자에는 전에 없는 엄격한 위엄이 있었다.
“마침 잘 왔구나.”
그녀는 빙긋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 너희를 찾으려 했는데 이렇게 때를 맞춰 다 같이 왔구나.”
힐리에 부인은 냉엄한 표정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앞으로 나섰다.
“전하, 이렇게 사전 고지 없이 감찰하시다니요? 자칫 황성에 충성하는 신하들을 불신하는 것처럼 비추어질까 우려됩니다.”
힐리에 부인이 깊이 고개 숙였다.
“일리 있는 말이로구나.”
카예나는 가볍게 긍정했다.
‘황녀가 이만큼 뒤집은 것도 용하지.’
힐리에 부인은 속으로 그녀를 가소롭게 여겼다. 뜻밖에 중앙성 주방을 뒤집어 놨다지만, 그 총관리자는 내심 힐리에 부인에게도 골칫거리였다. 그가 어울려 다니는 무뢰배들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폭력배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상은 안 되지.’
그녀는 늘 그렇듯 궁정의 살아 있는 모범 답안처럼 고고하게 허리를 세웠다. 그것이 카예나에게는 더없이 우스워 보였다.
카예나는 이미 하녀장이 직접 국고에 손만 대지 않을 뿐, 인사권으로 장사하는 것도 잘 알았다. 그렇게 받아 챙긴 뇌물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역시 궁정인의 귀감이 되는 하녀장이라 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 주는구나.”
“뜻을 헤아려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안목도 참으로 대단하고 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예나는 아예 힐리에 부인과 마주 보며 섰다. 그녀의 시선이 힐리에 부인이 한 귀걸이에 닿았다.
“내가 알던 것보다 황궁에서 지급되는 녹봉이 제법 넉넉한 모양이구나. 몰락한 왕실의 보물이 한낱 하녀장 귀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힐리에 부인은 흠칫 놀라며 손을 오므렸다. 독특한 빛의 고풍스러운 진주 귀걸이는 마드레나 왕실의 보물 중 하나였다.
카예나는 이번엔 반지를 가리켰다.
“그것은 폴린 가문의 초대 가주가 결혼식에서 사용한 루비 반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엔 힐리에 부인의 손에 닿았다. 붉은빛이 유독 피처럼 진하고 아름다운 루비가 박혀있었다.
“……이것은 남편에게 선물 받은 패물일 뿐입니다.”
어리석은 자 같으니라고.
카예나는 뇌물의 출처도 모르고 남편을 들먹이는 힐리에 부인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힐리에 백작이 암시장을 자주 이용하는 모양이지?”
“…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암시장 거래는 불법이란 사실을 그대처럼 황법에 능통한 하녀장이 모를 리 없을 텐데.”
힐리에 부인은 시선들이 제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 다리가 덜덜 떨렸으나 표정은 노회한 귀부인답게 차분했다.
“전하, 오해이십니다. 엄연히 보증서가 있는 물건인데 암시장이라니요.”
“보증서에 찍힌 인장이 혹시 기억나느냐?”
힐리에 부인은 필사적으로 보증서를 떠올렸다.
무슨 가문의 문장이었지? 검과 사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검 한 자루와 사자 두 마리가 있는 문양은 아니었나? 그리고 월계수가 그것을 감싼.”
“……그렇습니다.”
정확했다. 그래서 더 불길했다. 그걸 황녀가 어떻게 알았지? 그것은 힐리에 부인도 모르는 문양이었다. 힐리에 부인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황성에 반군의 첩자가 있었구나.”
“……예? 첩자라니요?”
카예나는 기사에게 명했다.
“반역자를 체포하라.”
“제가 반역자라니요, 전하! 아닙니다. 저는 그저 소피닌 가에서 선물 받았을 뿐입니다! 이 물건들에 문제가 있다면, 그들이 반역자입니다!”
그러자 소피닌 부인의 안색이 돌변했다.
“무, 무슨 소리이십니까! 그 패물은 저희 가문에서 드린 게 아니에요!”
힐리에 부인은 평소와 달리 악귀처럼 변한 얼굴로 표독스럽게 말했다.
“닥쳐라, 이 배은망덕한 것!”
“꺄악!”
그녀는 손에 낀 반지를 당장 빼서 소피닌 부인에게 집어 던졌다. 그것이 소피닌 부인의 이마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근본 없는 천한 가문의 것을 받아 주는 게 아니었는데! 전하, 이들이 사특한 마음을 품고 접근한 것입니다. 저는 이들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래, 힐리에. 그대가 그간 황궁의 살림을 위해 애써 온 것을 잘 안다. 그러니 충정을 의심받으면 억울할 거야.”
카예나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서 곁에 선 기사에게 주었다.
황녀임을 증명하는 음각이 새겨진 인장 반지였다. 그것의 의미는 명확했다. 명을 받드는 자의 뒤에 누가 있는지 드러내고 감히 반발할 수 없도록 권력으로 찍어누르려는 것이다.
“힐리에 가문과 그 친정까지 압수 수색해라. 반역 가문의 인장이 찍힌 물건을 모두 찾아내거라.”
힐리에 부인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예나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이것은 황명이다.”
* * *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군요.”
종일 카예나를 따라다니며 황궁의 실태를 확인한 베라가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황궁 내부에서 일하는 각 부처를 감찰하며 상과 벌을 내렸다.
물론 벌을 내린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미 사람들에게 카예나가 그 사실들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중요치 않았다. ‘얼마나 더 알고 있느냐’가 훨씬 중요했다. 오히려 카예나는 웃음기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일인걸.”
그녀는 오히려 베라와 올리비아를 다독였다.
“올리비아는 입궁 첫날부터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게 되었네.”
“아닙니다.”
“내일은 푹 쉬려무나. 그래도 오늘 내 곁을 따라다니며 얼굴을 좀 알려 두었으니 다들 네게 경거망동하지 못할 거야.”
올리비아는 약식으로 예를 올렸다.
“보살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만 가서 쉬렴.”
카예나의 말에 올리비아는 침실에서 나갔다.
“폐하는 어때 보이셨니?”
그녀는 베라에게 물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카예나는 다른 주방의 하인들을 중앙성 주방으로 이동시켜 황제와 레제프의 저녁 식사를 챙겼다.
베라가 그 일을 직접 도맡아 황제의 침소에 배달했었다.
“이미 모든 소식을 듣고 계셨습니다. 바쁠 테니 전하께 어서 가 보라고 하셨지요.”
그것은 카예나의 행보를 완전히 지지하겠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명이었다.
“무슨 상을 빌지 생각해 두어야겠구나.”
카예나가 중얼거렸다.
‘레제프의 반응에 대처할 것도 생각해 두어야 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황자의 침소는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레제프는 그사이 조금 작은 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가 더는 뭔가를 박살 내거나 누굴 죽이겠다며 화를 내지 않는 건 다행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재고해 주십시오, 전하.”
레제프는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테이블에도 몇 권의 책이 있었는데 모두 여행기였다. 카예나가 빌린 책의 사본이었다. 태평한 모습에 욕설이 치밀었으나 간신히 인내했다.
제논이 물었다.
“어찌 카트린 린드버그를 끌어들이려 하십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자 레제프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책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뭐가 문제더냐? 어차피 하멜 백작가의 수양딸로 입적시키기만 할 텐데.”
“새로운 경쟁자를 만들어 낼 뿐입니다. 세력이라는 것은 유동적이니까요.”
그러자 레제프가 읽던 책을 내리며 제논을 보았다.
“내가 이룬 세력이 반드시 린드버그의 아들에게 이탈할 것처럼 말하는구나.”
덩치가 불어난 세력은 아무래도 마구잡이로 세를 불려 나가던 때와는 달리 몸을 사리게 된다.
특히 레제프를 지지하는 귀족 대부분은 보수파이기에 그런 성향이 더욱 강했다.
“카트린 린드버그가 황후가 된다면 그의 아들은 지금 누구보다도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의 위험성을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레제프를 지지하는 귀족 중 대다수가 보수파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황제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정통성, 정통성!”
쨍그랑-!
레제프는 찻잔을 집어 던졌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린드버그가 아무리 설쳐 봤자!”
그는 서슬 퍼런 눈으로 제논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황위에 오르는 게 더 빠를 거다.”
지금의 레제프는 도저히 설득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제논은 한 걸음 물러서서 고개 숙였다.
“실언을 용서해 주십시오.”
뭔가가 어그러지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나가.”
레제프는 대꾸도 하지 않고 책장만 넘겼다. 그렇게 제논이 나가고 나서 바깥이 살짝 소란스럽다가 다시금 조용해졌다.
탁. 그는 책을 덮고서 비밀 통로를 향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자밀.”
그러자 비밀 통로 안에 있던 수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카만 무복에 얼굴을 가린 모습의 비밀 수행원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국 전역에 카예나 황녀의 초상화를 뿌려라.”
레제프는 자신의 유능한 비밀 수행원을 선하게 웃는 낯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육로와 항구에 주둔하는 예술가를 모조리 섭외해 황녀의 초상화를 곳곳에 전시토록 만들어라. 시골 뜨내기조차도 황녀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게.”
“명을 받듭니다.”
자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비밀 통로로 사라졌다.
레제프는 손에 쥐고 있던 책을 테이블로 휙 던졌다. 더 볼 것도 없었다.
“내게서 도망치는 건 허락한 적 없는데.”
그는 기지개를 쭉 켜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재미없는 책을 읽었더니 졸음이 쏟아졌다.
레제프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남은 건 결혼인가…….”
그때 침실로 하인이 조심스럽게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
“지금 황녀 전하께서 내명부 부처를 모두 벌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잠이 확 달아났다.
“……뭐라고?”
하인은 이미 하녀장을 비롯한 상당수의 궁정인이 카예나의 손에 썰려 나갔음을 알렸다.
레제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지금 누님께서 내 영향력을 줄이겠다, 이건가……?”
카예나의 조치에 하녀장 자리가 공석이 되고 말았다. 레제프는 그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큰 사람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엘리반을 불러들였다고 했지.’
그와 카예나가 어울리지 못하도록 사사건건 방해했던 여자였다. 그래서 누명을 씌워 유배 보내 버렸다. 애써 치워 버린 여자가 다시 황궁에 들어오게 둘 수는 없다.
“클로렌스 엘리반이 수도에 오지 못하게 처리해라.”
하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명을 받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