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is a Marionette RAW novel - 2m악녀는 마리오네트_chapter_9
악녀는 마리오네트 8장. 황녀궁의 시녀들(9/33)
8장. 황녀궁의 시녀들
수도 엘퀴엠에서 가장 훌륭한 저택을 꼽으라면 단연 키드레이 별장을 1순위로 꼽을 수 있다. 막강한 자금력을 동원해 지은 아름다운 건물은 키드레이 공작가가 군사 가문이라는 특유의 칙칙한 이미지를 벗겨 낼만큼 세련되었다.
그 안을 채운 예술품도 수도 엘퀴엠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인의 걸작이 즐비했다. 특히 최근 유행하는 전원풍으로 꾸민 정원과 거대한 연못은 키드레이 별장의 특별한 볼거리였다. 하지만 그 저택이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밤이 오지 않는 저택. 어마어마한 재력을 갖추고 있으니 항상 초를 아낌없이 태워 키드레이 저택은 거대한 램프처럼 보였다.
긴밀한 밤, 그 화려한 불빛이 들지 않는 은밀한 통로로 손님이 찾아왔다.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모습을 감춘 여인이었다. 입구에 설치된 줄을 당기니 문이 열리고 하인이 나왔다.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녀궁 급보입니다.”
하인은 여인의 눈을 가린 채 어디론가 데려갔다. 마침내 여인의 눈을 가린 천이 벗겨졌다. 한가운데에 넓게 차양을 친 방안이었다.
“모자를 벗어라.”
그곳에서 대기 중인 기사가 명했다. 여인이 후드를 끌어 내렸다. 황녀궁의 하녀인 애니였다.
“라파엘로 경께서 오시는 중이니 잠시 기다려라.”
애니는 마른침을 삼켰다.
급보라고 하면 보통 라파엘로의 오른팔인 제레미가 이 방으로 찾아온다. 그런데 오늘은 라파엘로 본인이 오겠다니?
곧 방의 문이 열리고 반투명한 차양 너머로 말쑥한 실루엣이 비쳤다.
그녀는 곧바로 예를 갖췄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앉아라.”
상대는 의자에 앉으며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원래 황녀궁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대체로 쓸모없는 것이었다. 황녀궁에 간자를 심어 둔 것도 만전을 기하기 위함이지, 양질의 정보가 나올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황녀궁에서 급보가 자주 나왔다. 심지어 심어 둔 세작이 유능함을 인정받아 카예나의 측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덕분에 라파엘로는 수도의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라파엘로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애니는 오늘 황궁에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밝혔다.
올리비아 그레이스가 공지한 날짜보다 하루 일찍 입궁한 것. 중앙성 주방, 힐리에 부인, 황제의 반응 등 모든 이야기를 소상히 전달했다.
기사 쪽에 심어 둔 첩자도 애니가 말한 것과 비슷한 소식을 공작가에 먼저 전했었다. 황녀가 내린 황명으로 힐리에 가문에 압수 수색을 들어간다고 말이다. 지금은 수도에서도 아는 이가 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반역자 가문의 문양 이야기도 나왔다.
카예나처럼 젊은 아가씨는 더더욱 알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황녀는 이상한 정보를 다수 갖고 있었다. 조금 신경 쓰고 살피면 알 수 있을 법한 일들이기는 했다.
다만 카예나의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걸 라파엘로는 잘 알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오늘 예전에 카예나가 일러주었던 대로 리타 브루킨이 광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심지어 그것이 유전병일지도 모른단 소견도 있었다.
거기다 올리비아 그레이스는 오늘 황녀궁에 입궁했다. 라파엘로는 손대지 않고 세 가문의 여식과 선 하나 보지 않게 되었다. 완벽주의자인 모친의 계획이 이토록 완벽하게 틀어진 적이 있었던가? 그가 알기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밖에 특이한 동향은 없는가?”
그의 질문에 애니는 최근 카예나를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각 지방의 여행기를 읽는 것 말고는 딱히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여행기?”
그러고 보니 황립 도서관에서 마주쳤다.
‘여행기를 읽는 이유가 뭐지?’
애니는 자신이 엿들었던 이야기를 전달했다.
“여름 휴양지도 한번 살필 겸 해서 읽으신다고 했습니다.”
카예나는 여름마다 남부의 바닷가로 한 달 정도 휴양을 떠났다. 그나마도 잘 지내던 황족 하나와 사이가 틀어져 휴양을 끊은 지 2년이 넘었다고 들었다.
“전에 유모 이야기를 했었지? 엘리반 남작 부인이었던가.”
“그렇습니다. 아직 회신이 없습니다만, 연락이 도착하는 대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라파엘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태를 보니 엘리반 남작 부인이 환궁하게 된다면 하녀장 직책을 맡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쪽에도 사람을 붙여 동향을 살펴야겠군.’
애니는 또 다른 중요한 소식을 하나 더 꺼냈다.
“그리고 지난밤에 황자가 황녀 전하의 침소를 다녀갔습니다.”
“연금 중인 그가?”
“예, 황녀의 침실에 비밀 통로가 있는 듯합니다.”
성의 침실마다 비밀 통로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에서 큰 소리가 좀 났었습니다.”
그 말에 라파엘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다지 유쾌한 일이 있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레제프가 앙심을 품고 카예나를 찾아간 것이 확실하리라.
‘그런데 특별한 소문 하나 없었지. 황자궁은 오히려 조용하고.’
그는 카예나가 레제프를 설득해 냈으리라고 추측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게 정치적 이권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알아봐야 할 것이 더 늘었군.’
카예나가 한 번 움직이면 갈대밭에 바람이라도 분 듯 소란해졌다. 이제 황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적어도 라파엘로가 보기에는 그랬다.
라파엘로는 평소 전혀 한 적 없는 질문을 던졌다.
“네가 보기에 요즘 황녀 전하가 어떠한 것 같지?”
상당히 포괄적인 질문에 애니는 잠깐 당혹했다. 그러나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그녀는 금방 적절한 답을 찾아냈다.
“공명정대하고 지혜로우십니다.”
공명정대하고 지혜로운 황녀라. 말이 되질 않는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묘하게 설득되었다.
“아, 그리고…….”
“……?”
라파엘로가 의아하게 고개를 들어 애니를 보았다.
애니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공자님께서 그레이스 영애와 진심으로 잘되길 바란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또 그레이스 영애.’
저번부터 그녀가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게 바로 올리비아 그레이스였다. 그녀에게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 건가?
라파엘로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레미에게 돈주머니를 넘겼다.
제레미는 차양 너머로 건너가서 애니에게 그것을 건넸다. 그녀는 보수를 감사히 받고 다시 하인을 따라 방에서 나갔다.
카예나에 대한 퍼즐은 모아도 모아도 그것이 대체 어떤 그림인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온갖 다른 그림의 퍼즐이 섞여 버린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레제프 황자를 지지하는 행보라고 보기도 석연찮고. 스스로 권력을 가지려 한다고 판단하기에도 이상해.’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자신이었다. 자꾸만 카예나의 행보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궁금증이 일었다. 손가락에 작은 가시라도 박힌 것처럼 그녀가 신경 쓰였다. 원할 때 자유롭게 약속을 잡고 만날 수 없는 상대라 답답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자신은 작위를 계승하지 않은 후계자일 뿐이었다.
그는 일부러 공작위를 계승하지 않고 어느 정도 고립되는 것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녀와 자주 독대할 만한 권한이 있으면 좋을 텐데…….’
라파엘로는 별채를 나와 화려하게 꾸민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는 걷는 내내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곁에 있던 제레미에게 물었다.
“황녀 전하와 자연스럽게 만날 방법이 없겠나?”
정답을 찾으려면, 문제를 만나야 한다.
* * *
카예나는 다음 날이 밝자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감찰하길 멈췄다. 그러나 궁정인들은 자신들이 중앙성 주방이나 힐리에 부인 꼴이 될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먹었다.
그들은 잔뜩 움츠려 있었고 동시에 최근 몇 년 중 가장 바쁘게 움직였다. 뇌옥에 갇힌 사람 수만큼 그 일을 서로 나눠 대체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인사이동이 활발했기에 오늘 황녀궁에 도착할 시녀들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지게 되었다.
줄리아 에반스와 수잔 레폴은 하인이 부랴부랴 그들의 도착 소식을 알리러 황녀궁으로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환대를 기대했던 줄리아는 맥이 빠졌다.
“뭔가 좀 어수선한 것 같네요…….”
줄리아는 잔뜩 들뜬 마음으로 엘퀴엠에 왔다.
수도! 그것이 주는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활기찬 아가씨인 줄리아의 기준에 동부의 남자들은 지루했다. 그리고 못생겼다. 또 세련되질 못했다. 그것은 줄리아에게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황녀궁 시녀로 발탁되었을 때 그녀는 너무 기뻐서 비명을 내질렀다. 드디어 고리타분한 지방을 벗어나 수도로 간다는 사실에 가슴 설렜다.
‘티파티! 무도회! 드레스!’
그녀는 우아한 멋쟁이로 가득한 풍경을 기대하며 황성 문턱을 밟았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황궁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에반스의 금지옥엽이자 미인인 줄리아가 대번에 찬밥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곁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수잔 레폴을 힐끗 보았다.
‘인상이 너무 매서워.’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어두운 자줏빛 눈동자, 도도한 인상은 마치 날렵한 재규어처럼 보였다.
줄리아가 방긋 웃으며 말을 걸어도 단답으로 끊어서 대답할 뿐이었다.
‘음, 꽤 미인이긴 하지만.’
줄리아는 자신의 곱슬거리는 금발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우쭐한 마음을 감췄다. 자신의 미모가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동부 최고의 미녀로 종종 꼽혔다.
‘수도에서도 나보다 예쁜 사람은 본 적 없어.’
제국 최고의 미녀라 불리는 카예나 황녀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때 하인이 상급 시녀와 같이 돌아왔다.
“수잔 레폴 양, 줄리아 에반스 양?”
그들은 이름을 부르자 곧바로 궁중식 예를 갖췄다. 베라도 가볍게 인사했다.
“베라 렉턴입니다. 따라오세요.”
무뚝뚝한 인상에 미소 하나 없는 베라는 어딘가 위압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그들도 베라에 대한 이야기는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황녀궁에서 유일하게 유능함을 인정받아 살아남은 시녀라고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수잔 양은 이쪽, 줄리아 양은 이쪽 방을 쓰세요. 저기는 올리비아 그레이스 양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올리비아가 먼저 도착해 있다는 말에 의아해했다.
“올리비아 양은 어제 입궁했습니다.”
베라가 설명을 덧붙였다.
‘가문에 힘이 없으니 그런 식으로라도 잘 보이려고 한 건가?’
줄리아는 같이 시녀로 발탁된 이들을 뒷조사해 보다가 그레이스 자작가라는 이름을 처음 보았다. 수도 귀족이지만 가난하고 힘도 없다고 했다. 그런 주제에 키드레이 공작가와 혼담이 오간다고도 들었다.
‘라파엘로 키드레이 경이 엄청난 미남이라고 했지.’
“황녀 전하께 인사 올리는 것은 두 분만 하게 될 테니 준비가 되는 대로 하인을 보내세요.”
베라는 올리비아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을 돌봐 줄 여력이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한바탕 뒤집힌 황궁을 수습하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준비가 너무 길지 않았으면 합니다. 황녀 전하께서 내명부 일로 바쁘시니까요.”
“알겠습니다.”
수잔은 금방 다시 예를 갖추고 방으로 홀연히 들어가 버렸다.
줄리아는 가문에서 데려온 제 시녀에게 툴툴거렸다.
“황녀궁 시녀가 고작 넷이니 융숭한 대접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그래도 방은 참 좋네요. 볕도 잘 들고요, 아가씨.”
시녀는 능숙하게 줄리아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렸다.
“정말 근사하지 않아? 우리 성도 물론 크고 화려하긴 하지만 어머니 취향이라 내 맘에는 안 들어.”
방을 한 번 둘러본 줄리아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다시 점검했다.
“동부에서야 내가 제일 아름다웠다지만, 설마 수도에서도 그럴 줄은 몰랐지 뭐야.”
줄리아는 진한 금빛의 머리카락과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을 꼼꼼히 보았다.
“이제 옷을 갈아입으셔요, 아가씨.”
줄리아의 수다는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황궁엔 대단한 미녀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어. 어쩌다 황궁 시녀가 유능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표본 같은 이미지가 된 거지?”
“우아한 궁중식 예법과 세련된 옷차림, 가진 재능과 교양도 상당한 수준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니까요.”
“뭐, 어쨌든 나한테 꽤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들어.”
그녀는 발랄하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머리에 쓴 꽃이 달린 작은 모자를 확인했다. 화려한 오렌지색 드레스는 그녀의 상큼한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이만하면 준비가 끝난 것 같으니 하인을 보내렴.”
하녀는 이제 준비가 끝났단 말에 약간 한숨을 내쉬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벌써 한 시간이나 흘렀기 때문이다.
‘어제 오신 시녀님은 준비할 것도 없다며 바로 가셨는데.’
수잔 레폴도 외출용 모자에서 실내용 머리 장식으로만 바꾸고 금방 준비를 끝냈다.
베라가 그렇게 바쁘다는 티를 낸 상황에서 한 시간이나 지체한 것은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 그녀의 시녀가 노련하게 구슬리며 일찍 준비를 시킨 것이 이 정도였다.
“줄리아 님. 응접실로 이동하겠습니다.”
방에서 나오자 수잔이 보였다. 줄리아가 나오길 기다린 모습이었다. 단 한 번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던 수잔이 도도한 눈으로 줄리아를 보았다.
“준비가 꽤 빠르네요?”
그것이 비꼬는 것임을 줄리아가 모를 수 없었다. 그녀는 금방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수잔에게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다가오는 베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베라는 잠깐 줄리아의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무도회에 갈 법해 보였고 한 사람은 집 안에서 독서나 할 법한 차림이었다. 완전 극과 극의 모습이었다. 어쩐지 앞으로 이들을 데리고 일하기가 험난할 듯했다.
“따라오세요.”
베라는 그들을 데리고 카예나가 기다리는 중인 응접실로 갔다.
아침부터 바쁜 건 궁정인만이 아니었다. 카예나가 내명부 수장이기에 모든 인사 발령에 대한 최종 승인을 내려야 했다.
‘그런 업무에 익숙하신 분처럼 처리가 워낙 깔끔해서 다행이지.’
카예나는 이상하게도 보고서를 파악하고 업무를 지시하는 일에 능숙했다.
베라는 그녀의 일 처리가 완벽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의아했다. 황족은 그런 능력도 타고나는 걸까?
베라는 응접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에다 알리시게.”
문지기가 문고리를 두들기고 문을 열었다. 살짝 열린 문 안에서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라고 하렴.”
드디어 소문 자자한 황녀와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줄리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응접실 안을 힐끔 보았다. 수잔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커다란 아치형 창으로 비가 잠깐 그치고 햇살이 비쳤다. 그 햇살 아래에서 편지 상자를 겸하는 테이블에 종이를 대고 펜을 든 여인이 보였다. 그 수수한 차림의 여자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줄리아는 제 미모에 기고만장했던 게 무색하리만큼 충격받고 말았다.
‘저분이 바로 황녀구나…….’
줄리아는 촌스러운 시골뜨기가 된 듯한 패배감을 느꼈다.
그때 뒤에서 베라가 말했다.
“황녀 전하께 예를 갖추세요.”
줄리아와 수잔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카예나는 펜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조아린 채 절하는 중인 줄리아와 수잔을 보았다.
첫 번째 삶에서 수잔은 카예나에게 배짱 좋게 맞섰던 적이 여러 번이라 인상이 깊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에 어딘가 감회가 새로울 정도였다.
“만나게 되어 반갑네.”
그녀는 줄리아와 수잔을 일으키고 넓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동부가 가장 바쁠 시기인데 이렇게 황녀궁 시녀로 발탁한 일이 후작가에 누가 되진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가장 큰 곡창 지대를 소유한 에반스 후작가는 봄과 가을에 일이 가장 많았다. 그게 줄리아와는 전혀 관련 없는 바쁨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묻는 것이 일반적인 예의였다.
“저는 오래전부터 황궁을 동경해 왔어요.”
줄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카예나를 살며시 훔쳐보았다. 문득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은 미모였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카예나는 시선을 돌려 수잔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에 어린 호기심과 약간의 반항기를 금방 읽어 낼 수 있었다.
“레폴 변경백은 정정하신가?”
수잔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너무 건강하셔서 탈입니다.”
“참으로 호탕하고 좋은 분이셨지. 이번 내 성년식에 와 주신다면 기쁠 거야.”
“편지는 해 보겠습니다.”
그 심드렁한 대꾸에 베라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수잔을 보았다. 줄리아의 격의 없는 가벼운 말투도 문제였으나 수잔의 공격적인 말투도 큰 문제였다.
‘올리비아 양이 확실히 남다르구나.’
처음부터 시녀를 염두에 두고 기르는 여식은 어린 시절부터 궁중식 말투나 예법을 배웠다. 특히 수도 출신이라면 황궁에서 열리는 숱한 무도회 참석 때문에 알음알음 익혀 놓는 것이 궁중 예법이다. 한데 애석하게도 새로 뽑은 시녀 중 오직 올리비아만이 수도 출신이었다.
“황궁이 좀 어수선하지 않았니?”
그녀의 물음에 먼저 대답한 것은 줄리아였다.
“조금…….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내명부를 개편하느라 좀 바빠서. 금방 안정될 것이니 그때부터 좀 더 차분하게 업무를 배울 수 있을 거야.”
줄리아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황녀궁 시녀는 거의 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그저 뒤에서 양산이나 외투를 들고 졸졸 따라다니는 게 다라고 들었다. 그런데 말하는 투를 보니 뭔가 업무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내명부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아는 게 있니?”
에반스 후작가에서는 줄리아에게 내명부 업무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혹시 황후가 될지도 모르니 미리 준비시킨 것이다.
다만 줄리아가 그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연상 취향이었는데 레제프가 자신보다 한 살 어리다는 이야길 듣고 관심을 꺼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분명 들었던 것 같은데 하나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수잔도 평생 황실과 관련이 없던 사람이었으므로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베라가 입을 열었다.
“내명부에서는 황제 폐하를 비롯하여 황실을 보필합니다. 직급과 부처에 따라 맡는 업무가 달라지지요. 수잔 양과 줄리아 양은 황녀 전하의 전속으로, 황녀궁 소속 상급 시녀입니다.”
“베라가 잘 설명해 주었구나.”
카예나가 기특하다며 칭찬하니 베라가 고개를 조아렸다.
“베라, 바쁘겠지만 네가 신입 시녀들의 교육을 계속 감독해 줘야겠어.”
“당치 않습니다, 전하.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카예나는 시녀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만 쉬도록 해라.”
베라는 둘을 데리고 일어나서 예를 올린 뒤 응접실에서 나갔다.
응접실 문이 닫히자 줄리아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이만 쉬면서 황궁에 적응하도록 하세요. 각각 어떤 업무를 맡게 될지는 하급 시녀에게서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벽에 나란히 서 있던 하급 시녀들이 다가왔다. 그들 중 시중 하녀에서 진급한 애니와 도나도 섞여 있었다.
“그럼 내일 뵙지요.”
“아, 네. 내일 뵈어요.”
줄리아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베라를 보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실례.”
수잔은 짤막하게 한마디 하고 제 시녀들을 데리고 먼저 휙 가 버렸다.
줄리아는 멋진 황궁 생활을 꿈꿨다가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황녀의 양산을 들어 주며 여러 파티에 참석하는 일을 꿈꿨는데…….
그녀는 제게 배정된 도나라는 하급 시녀와 숙소로 걸어갔다.
“줄리아 님은 앞으로 황녀 전하의 식사 및 다과, 약 처방을 전반적으로 관리하시게 될 겁니다.”
“뭐?!”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나는 요리도 할 줄 모르고 의학 지식도 없는걸!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해?”
얼핏 들어도 업무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다른 시녀들은 무슨 일을 하는데?”
도나는 네 명의 시녀가 각각 어떤 일을 맡는지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은 줄리아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직무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올리비아의 직무였다.
‘손님 접대와 파티 관리라니! 수도 사교계의 중심에 바로 설 역할이잖아?’
그녀는 꼭 그 업무를 맡고 싶었다. 그런 접객하는 대외용 업무는 자신처럼 외모가 빼어난 사람이 하는 게 아무래도 보기 좋지 않겠는가?
“혹시 업무를 바꿀 수는 없어?”
그레이스 자작가면 힘도 없으니 제 가문에다 말해서 금방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도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하께서 직접 임명하신 직무여서 임의로 바꿀 수 없습니다. 업무 변경은 황녀 전하께 직접 건의하셔야 하고요.”
“하…….”
줄리아는 속상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들여 차차 배우게 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도나의 위로는 줄리아에게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 업무보다 그 수잔이란 여자의 업무가 더 낫잖아. 드레스나 보석을 관리하니까. 가구를 비롯한 물품을 관리하는 건 별로지만.’
카예나가 일부러 자신에게 가장 어렵고 하찮은 일을 맡긴 것 같았다. 그 업무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객관적인 진실은 그녀에게 필요 없었다. 그저 보기 좋고 남에게 뽐낼 수 있을 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럼 필요하실 때 불러 주십시오.”
도나의 말에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줄리아가 가문에서 데려온 시녀, 밀렌은 오히려 그녀가 과분하게 막중한 업무를 맡았음을 알았다.
‘에반스 가문의 여식이라고 너무 중책을 맡긴 것 같은데…….’
“약 처방이나 식사를 도맡는 일이면 상당히 까다로운 중책이에요, 아가씨.”
“요리나 하는 게 무슨 중책이야! 정말 속상해. 여기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 멋진 연애를 할 줄 알았는데.”
자신은 집안과 미모를 갖춘 데다가 황녀의 시녀이기까지 하다. 완벽한 신붓감으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한 달 뒤면 황녀의 성년식일 테니 그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특히 그녀는 라파엘로와의 만남을 가장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황자 전하가 지척에 계시잖아요. 대단한 미남이라고 하던데요?”
“난 연하는 관심 없단 말이야.”
“한 살 차이가 무슨 연하예요?”
줄리아는 지금 근신 중인 황자에겐 관심도 없었다.
‘카예나 황녀와 남매면…… 외모는 확실히 뛰어나겠네.’
그녀는 울적하게 황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미모로 져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카예나는 그녀와 동갑내기였다. 그 점이 좀 더 자존심 상했다.
‘나랑 나이도 같은데 뭐가 그렇게 다른 걸까? 황족이라서 그런가?’
카예나에게는 눈을 뗄 수 없는 우아한 기품과 깊은 분위기가 있었다.
줄리아는 자신의 친구 중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자신이 수도에 오면 카예나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며 사교계가 발칵 뒤집힐 것을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오늘 카예나를 보니 절대 그럴 일은 없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줄리아는 우울해졌다.
* * *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카예나는 한 번 전면에 나선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이래서야, 지난 삶에서 팀 프로젝트 때문에 매일 야근하던 때랑 비슷하잖아.’
그땐 일개 회사원이었으나 지금은 일국의 황녀인데 지나치게 노동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약간 억울해졌다.
차라리 귀족 영애였다면 상황은 더 나았을 텐데.
황족이 짊어진 무게를 외면하기에는 자신이 그만큼 모질지가 않았다. 그래서 딱, 정상적인 시스템을 구축할 정도로만 나설 생각이었다.
‘밥값이라고 생각하자.’
이곳에서 먹고 자고 누리는 모든 것에 비용을 치른다고 생각하니 노동에 대한 약간의 억하심정이 누그러졌다.
“……넌 일하는 게 좋니?”
카예나는 자신보다 더 높은 강도로 일하고 있으면서도 눈이 반짝반짝한 베라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보았다.
베라는 배시시 웃었다.
“저를 인정해주시는 분이 있으니까요.”
베라는 살면서 지금처럼 갈증이 해소된 적이 없었다.
카예나는 상과 벌이 확실하다. 그렇기에 자신만 잘하면 언제든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카예나는 베라를 보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나?’
유능함을 인정받고 승진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카예나에겐 좋은 상사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좋은 상사인가?’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좋은 평가는 듣고 있는 듯했다. 비리를 저지르는 자가 있으면 자연히 거기서 도태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 사건으로 바보 천치라고 손가락질받던 청렴한 자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카예나는 단번에 그들을 중용했다. 궁내에서는 그녀를 칭송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레제프가 연금당한 지 닷새 만에 그녀는 내명부를 장악했다.
‘레제프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네.’
그녀는 레제프가 또 궁을 벗어나 그녀를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제 권위에 도전하는 걸 몹시 싫어했다. 그걸 알지만, 어느 정도의 출혈은 감수할 생각이었다. 원한다면 그에게 다른 이득을 또 안겨 줄 수도 있다. 제게는 여전히 쓸 만한 정보가 여럿 남아 있었으니까. 여차하면 그에게 방해되는 누군가를 위기에 빠뜨려 줄 수도 있었고.
레제프는 고요했다. 제논과 좀 다툰 것 같다는 보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마치 나쁜 짓을 할 때 조용히 기척을 줄인 아이처럼, 카예나에게는 영 찜찜한 고요함이었다.
‘황자궁에 제대로 된 세작이 없다는 게 제일 문제야.’
제논을 도발해서 정보를 캐 볼까?
‘여기서 더 나서면 너무 눈에 띄어. 한동안은 잠잠하게 살림하는 척이나 해야지.’
“다들 적응은 잘해 가는 것 같니?”
베라는 그 질문이 새로운 시녀들을 향한 것임을 알았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는 어딘가 불만이 어려 있었다.
“특히 줄리아는 전하께서 내린 임무에 몹시 불만을 표하고 있다고 합니다.”
도나는 전날, 줄리아가 표시한 온갖 불만을 그대로 베라에게 전달했다. 가뜩이나 상당히 민감한 사안을 줄리아에게 맡기게 되어 불안했는데 그녀가 불충한 태도를 보이자 몹시 언짢아졌다.
“그거 다행이구나.”
줄리아가 적성에 꼭 맞아 일을 잘해 내면 그게 곤란하다. 에반스 가문을 레제프에게서 떨어뜨리는 게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카예나의 말에 베라는 조금 얼빠진 얼굴을 했다. 또 무슨 계획이 있으신 건가?
그때 카예나가 다시 물었다.
“올리비아는?”
“그렇지 않아도 당장 직무 교육을 시작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잘 적응할 수 있게 신경 써 주렴.”
베라는 중앙성 주방 비리를 캐내려 같이 행동해 준 올리비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내빼지 않고 베라와 같이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그녀와 마음이 잘 맞으리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예, 전하.”
베라는 카예나 앞으로 온 편지를 정리하다가 손을 멈칫했다. 그녀는 그것을 은쟁반의 가장 위에 올려 카예나에게 다가갔다.
“전하.”
카예나는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은쟁반에 놓인 편지를 들었다. 그러다 가장 위에 올라온 편지를 보고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황립 아카데미?”
그녀와 인연이 없는 곳으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황립 아카데미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카예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지를 펼치니 선명하게 찍힌 직인까지 보였다.
카예나는 이게 누구를 통해서 도착한 초대장인지 알아차렸다.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황녀 전하의 성년을 기념하여 황립 아카데미에 새로운 건물을 짓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습니다. 이에 그 건물의 목적과 부가적인 사안을 황녀 전하께서 충분히 논의 후 정해 주시면…….⌟
카예나는 황녀의 체면도 잊고 무심결에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미쳤네.”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자신과 만날 핑계로 건물을 지어 버리다니?
‘무슨 생각이야, 이 남자?’
라파엘로가 이상했다.
* * *
이른 아침, 올리비아의 앞으로 서신이 도착했다. 가문에서 보낸 것이었다. 올리비아는 서신을 단 한 줄로 축약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라파엘로 키드레이 경과의 혼담은 무산되었다.⌟
그건 황녀궁 시녀로 발탁되었을 때부터 이미 예견한 일이었다.
부친은 그녀가 상심할 것을 우려하며 이런저런 위로를 덧붙였지만, 올리비아는 그다지 상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혼담은 관심 없었어. 그런 것보단 지금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이 훨씬 흥미롭지.’
카예나가 총주방장과 하녀장을 굴복시킨 것은 일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일이었다. 그녀의 위엄에 지켜보던 올리비아조차도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올리비아 님, 베라 님께서 뵙길 청하십니다.”
그녀에게 배속된 시중 하녀가 공손히 아뢰었다.
“들어오시라고 해.”
그녀는 편지를 접어 안 보이는 곳에 치워 버렸다.
곧 베라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베라는 황궁에 온 첫날보다 피로해 보였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생생했다. 자신이 마음을 쏟을 가치를 찾아낸 사람의 눈동자는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올리비아는 거친 세상에 마모되어가기만 할 뿐, 베라처럼 자신을 발견해 주는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다.
‘어쩌면.’
카예나 황녀가 자신을 발견해 주는 첫 번째 사람이지 않을까?
베라가 입을 열었다.
“상급 시녀들끼리 자리를 마련해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일이 좀 생겼어요.”
“무슨 일인가요?”
“곧 황궁으로 황녀 전하의 손님이 방문할 거예요. 그래서 올리비아 양의 교육을 시급하게 진행하기로 했어요.”
뭔가 이상했다. 굳이 교육되지 않은 올리비아를 붙잡고 가르칠 이유가 없다. 이건 꼭 올리비아가 그 손님을 맞이하길 바란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황립 아카데미 기부 건으로 라파엘로 키드레이 경이 황궁에 방문할 예정입니다. 올리비아 양이 잘 접객해 주세요.”
당황스러웠다. 방금 가문에서 그와의 혼담이 무산됐단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그런 껄끄러움을 떠나서 카예나가 제게 그런 지시를 내린 게 가장 뜻밖이었다.
“명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황녀 전하를 먼저 뵈어야겠습니다.”
이런 뒤탈이 날 수 있는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베라는 그녀가 조심하려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다.
“지금 기사단장이 죄인 심문 결과를 보고 중이라 좀 기다려야 할 겁니다.”
“괜찮습니다.”
그들은 황녀의 응접실 바깥에서 안쪽의 용무가 끝나길 기다렸다.
응접실에서 하녀가 나왔다.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베라는 따라 들어가지 않고 고갯짓했다. 밖에 있겠다는 뜻이었다.
“그럼 조사단을 꾸려 오늘 당장 그 납품 업체로 가거라. 평민을 마구잡이로 폭행한다는 그 폭력배들은 반드시 소탕해야 한다.”
“명을 받듭니다.”
올리비아는 카예나에게서 계속해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파티에서 남의 드레스에 포도주를 뿌리던 과거가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 모습들이었다.
‘확실히 예전과 달라.’
기사가 나가고 카예나가 올리비아를 향해 말했다.
“오자마자 황궁이 소란스러워 놀랐겠어.”
“당치 않으십니다.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으시려는 전하의 뜻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올리비아는 입궁 첫날에 어쩌다 보니 카예나가 모든 부처를 각개격파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녀의 행동은 틀린 점 하나 없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마운데.”
카예나는 소파에 앉으며 올리비아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나를 찾아온 것을 보니 베라에게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지?”
사실 라파엘로에 관한 건 좀 껄끄러운 주제였다. 이대로 어영부영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긴 했으나 먼저 말 꺼내기가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꼭 치정 싸움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의 미욱한 응대로 키드레이 경을 접객하는 일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녀는 에둘러서 다른 적임자로 바꿔 달라고 말했다.
“그럴 리가. 영리한 자네가 고작 접객에 애먹을 리 없지.”
올리비아는 조금 용기 내어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저와 키드레이 경 사이에 오갔던 혼담이 무산되었습니다.”
카예나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내 시녀가 된 이상 정해진 수순이었지. 그리고 난 자네가 그것에 아쉬워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데?”
“…….”
올리비아는 허를 찔린 것처럼 놀랐다.
카예나가 이어서 말했다.
“뭘 염려하는지 잘 알아. 내가 공자를 연모했고 질투심에 눈멀어 자네를 공격했지.”
카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올리비아에게 허리를 숙였다.
“전하!”
올리비아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작 내 무례를 이렇게 사과했어야 했는데.”
그것만이 아니다. 회귀 전, 아무리 올리비아가 마법으로 되살아났다고는 해도 자신이 그녀를 독살했었던 그 끔찍한 짓을 사과해야 했다.
“미안해.”
올리비아는 그녀의 진심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사과는 너무 과분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렇게 미안해할 만큼 잘못하진 않았다. 기껏해야 드레스 하나를 버렸고 인사를 무시당한 정도였다.
“아닙니다, 전하.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카예나는 피식 웃었다.
“……그럴 테지.”
독살당한 직후 마법의 힘으로 다시 살아난 올리비아는 카예나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제프에게 이용당해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단 사실을 알고 안타깝게 여겨 주었다.
‘그래서 올리비아가 주인공인 모양이야.’
카예나는 가벼운 어조로 덧붙였다.
“그리고 난 더 괜찮은 남자랑 결혼할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키드레이 경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으면 해.”
올리비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남자와 결혼이라니…….’
그녀는 카예나가 안심시키기 위해 그냥 하는 소리라고 여기며 표정을 풀었다.
“이제 안심하고 내 손님을 접객할 수 있겠니?”
올리비아는 공손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전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모시겠습니다.”
* * *
올리비아는 단 하루 만에 자신의 역할을 숙지해 냈다.
카예나의 말대로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맞이할 손님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었다.
올리비아는 단 하나의 지시 사항만 잘 기억해 뒀다.
‘키드레이 경이 진하게 우린 홍차를 좋아한다고 했지.’
곧 황궁에 키드레이 가문의 마차가 도착했다.
‘저 남자로구나.’
따로 찾아볼 것도 없이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의 미남이 가장 먼저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올리비아 그레이스입니다.”
라파엘로는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밀빛 머리와 녹색 눈동자. 판화에서 보았던 외형과 일치했다. 그녀가 자신을 접객하러 나온 것이 누구의 뜻인지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황녀였다.
라파엘로는 어쩐지 기분이 저조해졌다.
‘내게 했던 말이 진심이었나?’
대체 황녀가 무슨 생각으로 뚜쟁이를 자처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자신을 마중 나온 황녀의 시녀이니 정중하게 인사했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라파엘로 키드레이입니다.”
올리비아는 지금 상황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에서야 처음 인사를 나누게 된 남자는 자신의 가문을 후원하는 집안의 후계자다. 그 때문에 자신은 지금껏 황녀의 미움을 받았다.
그래, 거기까지는 사교계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종류의 일이었다. 그런데 후원자의 아들과 혼담이 오가는 건 어느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신분 상승 로맨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일이지.’
결혼이 아니라 황녀궁 시녀가 되는 것으로 신분 상승을 이룰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난 애초에 신분 상승을 꿈꾼 적은 없는데…….’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저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서로가 서로의 이해가 되어 줄 대화가 통하는 단 한 사람이었다.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최근 내명부 일 때문에 오전 시간을 바쁘게 보내십니다. 죄인 심문을 비롯해 이것저것 직접 처리하고 계셔서요.”
“그렇습니까.”
“우선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올리비아는 대단히 사무적인 태도로 라파엘로를 대했다.
보좌관 제레미를 대신해서 따라온 바스턴이 그에게 귓속말했다.
“주인님, 혼담이 오갔던 그 영애가 바로 저분 아닙니까?”
“그래.”
바스턴은 오오, 하고 작게 감탄했다.
“굉장한 미인인데요?”
라파엘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황녀 전하에 비하면……”
“바스턴.”
이름을 불린 바스턴은 자신이 또 입을 나불거리다가 정도를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 네게 그런 평가를 할 자격을 줬는가?”
역시나 라파엘로 특유의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서늘한 질책이 돌아왔다.
바스턴은 욕하고 발로 차는 상사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며 제 입을 때렸다.
“아닙죠. 주인님. 저는 기사도도 모르는 멍청한 놈입니다. 요 입이 그냥!”
라파엘로는 차라리 제레미를 데려올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황녀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 바스턴이 너무나 열광하며 수행원을 자처했던 터라 허락한 게 실수였다.
“근데 주인님, 저 영애도 참 보통이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안색 하나 변하지 않네요.”
라파엘로도 혼담을 물렀다는 모친의 일방적인 통보를 전날 받았다.
보통 귀족 영애라면 몹시 자존심 상하거나 상심할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좀 이상했다. 카예나가 그렇게 배려가 없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라파엘로는 방금 자신이 한 생각에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카예나가 남을 배려하지 않을 리 없다고 옹호한 것인가.
* * *
“이쪽입니다.”
올리비아는 응접실을 열고 라파엘로를 안내했다.
그녀는 직접 차를 준비했다. 루비 손잡이가 인상적인 은으로 된 통에 담긴 홍차였다. 카예나가 그것으로 진하게 우린 차를 대접하라고 지시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황녀의 시녀가 직접 차를 우린다는 것은 손님을 그만큼 귀하게 대접한다는 의미였다.
라파엘로는 차를 대접받았다. 찻잔에 담긴 홍차는 색부터 꽤 어두웠다. 향은 진했으나 거슬리지 않았다. 그는 지난번 자신이 선물했던 차임을 눈치챘다.
‘진하게 우려낸 홍차.’
오늘 처음 본 올리비아가 그의 취향을 알 리 없다. 이건 카예나 황녀가 알려 준 것일 게 분명하다.
라파엘로는 점점 카예나를 종잡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관심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표정이 미묘한 빛을 띠자 올리비아가 물었다.
“혹시 다른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라파엘로의 시선이 잠깐 차에서 떨어졌다. 그는 올리비아를 힐끗 보고는 담담히 말했다.
“아뇨. 이게 좋습니다.”
바스턴은 아까의 실례를 무마하려는 듯이 힘차게 대답했다.
“차 맛이 그야말로 일품입니다!”
그 지나치게 활기찬 대답에 올리비아가 웃었다.
“다행이군요.”
올리비아는 카예나가 오기 전까지 그와 나눌 만한 적당한 대화 주제를 골랐다.
“황립 아카데미에 건물을 기부하신다고 들었어요. 그곳은 제게도 의미가 남다른 곳이에요.”
학생이었던 시절, 그녀의 두각에 키드레이 공작가에서 후원을 결정했다.
바스턴이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황립 아카데미를 다니셨나 보군요?”
“아주 잠깐이요. 그때 공작가의 후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하! 오래전부터 이어진 인연이로군요? 참 놀랍지 않습니까, 주인님?”
“그렇군.”
라파엘로는 조금도 놀라움을 느끼지 않는 투로 대답했다.
올리비아는 냉랭해 보이는 라파엘로를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 이 남자의 어떤 면이 신사답다고 소문난 걸까?
‘여성에게 치근대지 않는 걸 보고 신사라고 칭한다면 일리 있는 말이겠지만.’
그렇다면 신사의 기준이 너무 형편없질 않은가?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황실 안을 좀 둘러보신다거나.”
라파엘로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올리비아는 그가 혹시 약혼할 뻔했던 여자와 한자리에 있는 게 불편한 건가 싶었다.
“혹시 제가 불편하시다면 다른 시녀를 부르겠습니다.”
라파엘로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실례했군요.”
올리비아는 상대가 제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다. 태도가 특별히 오만하지는 않았으나 유쾌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전하께서는 언제 오시지?’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카예나를 떠올리며 어서 그녀가 오기를 바라게 되었다.
달칵. 그때 문이 열리고 하인이 들어왔다.
“황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하인의 알림에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응접실로 카예나가 들어오자 안을 채우고 있던 불편하고 어색한 공기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졌다.
올리비아는 안도의 한숨처럼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고생했구나. 내가 좀 늦었지?”
카예나는 그제야 응접실 내부를 한 번 둘러보고 흡족하게 올리비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역시 잘하잖아.”
올리비아는 조금 당황했다.
제게 호의적이었던 아카데미 교수에게서도 이런 시시한 수준의 일을 해내었다고 칭찬받아본 적은 없었다. 집에서도 그녀가 뭔가를 잘 해내는 건 지극히 당연하게 취급되었다. 그래서 칭찬받을 줄 몰랐다. 그게 기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올리비아는 귀가 붉게 달아오른 채 얼른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때 라파엘로가 그들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라파엘로 키드레이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손등에 키스하겠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할 법한 지나친 예의로 올리비아에게 쏠린 시선 카예나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당겼다.
카예나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그에게 손을 내밀어 키스할 것을 허락했다.
“……반가워요, 키드레이 경.”
라파엘로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조심스럽게 쥐고 손등에 정중히 입을 맞췄다.
곁에서 지켜보던 바스턴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헉, 우리 주인님이 손등에 키스를……!’
바스턴은 주인이 자처해서 레이디의 손등에 입을 맞추어 경의를 표하는 건 처음 보았다.
바스턴은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그 광경을 연신 힐끔거렸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카예나는 조금도 착각하지 않았다.
‘…지난번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갑자기 왜 이러지?’
라파엘로가 제게 뭔 약점이라도 저당 잡힌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라파엘로에게 해코지라도 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불리한 권모술수를 부린 기억은 없었다.
올리비아는 눈치껏 자리를 피하려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하.”
“응? 꼭 그럴 필요는……”
그러나 카예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라파엘로가 올리비아를 배웅했다.
“다음에 뵙죠, 그레이스 양.”
그러자 올리비아도 기다렸다는 듯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네.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카예나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어차피 이어질 인연인 그들을 그냥 붙여 놓기만 해도 알아서 잘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생각보다 그다지 유쾌한 시간을 보낸 것 같지 않았다.
“전하.”
카예나는 올리비아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라파엘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소파로 안내했다.
카예나는 문득 자신을 향하는 낯선 시선을 느꼈다. 바스턴이 음흉하게 접힌 눈초리로 자꾸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었다.
“오늘은 제레미 보좌관이 아니라 다른 이를 데려왔네? 낯은 익은 듯한데.”
“바스턴 데보라입니다, 전하!”
‘이 사람이 바스턴이구나. 소설에서 꽤 재미있는 사람으로 나왔었지.’
그녀는 글에서만 보았던 바스턴을 대면하게 되자 어딘지 흥미로움을 느꼈다.
“만나서 반갑네.”
“저야말로 가문의 영광입니다!”
바스턴은 그렇게 외치며 가까이 앉은 선남선녀를 보았다.
‘이렇게 보니 명화가 따로 없네.’
카예나는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쇄골이 드러나는 크림색 드레스를 입었다. 치마가 크게 부풀지 않은 차분한 모양이라 한층 더 우아해 보였다.
라파엘로도 마침 평소보다 밝은색의 예복을 입은 상태였다. 꼭 둘이 미리 이야기한 것처럼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바스턴은 그에게 크림색 셔츠를 강력히 추천하길 잘했다며 자화자찬했다.
‘주인님은 자꾸 아닌 척하시지만, 이게 관심이 아니면 뭐겠어?’
그는 둘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있다고 확신했다.
라파엘로가 서론을 띄웠다.
“바쁘신 분께 제가 괜한 일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카예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경은 내게 누구보다도 중요한 손님인걸.”
자신이 황궁을 안전히 벗어나는 일에 누구보다도 큰 공헌을 해 줄 사람이었으니 당연했다.
바스턴의 귀에는 그렇게 건조한 이유의 발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입을 합 다물며 콧김을 내뿜었다.
뭐야, 이거 핑크빛 기류 아냐?
그가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댈 때 라파엘로는 담담했다. 카예나가 달콤한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던 탓이다. 하지만, 듣기는 좋았다. 특히 ‘누구보다’라는 대목이.
카예나는 테이블에 놓인 것들을 확인하더니 물었다.
“다과가 좀 부족한 것 같은데, 시장하지는 않고?”
전부터 느꼈지만, 카예나는 간혹, 아니 종종 상대를 자신보다 훨씬 어린 사람 챙기듯 말했다. 사실 그녀보다 연하인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도.
“저는 괜찮습니다.”
“내 시녀가 접객을 부족하게 한 건 아니겠지? 부디 사이좋게 지냈으면 해. 앞으로 나를 대신할 얼굴이 될 테니까.”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개인적으로도 올리비아를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어째서? 라파엘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녀를 아끼시는군요.”
카예나는 미묘하게 웃었다.
‘내가 올리비아를 아낀다? 글쎄……. 사실 이 모든 게 그냥 내 마음 편하려고 하는 행동일 뿐이지.’
이러면 과거의 죄를 조금은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마음이 불편했다. 이제 슬슬 오늘 만남에 대해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 차례였다.
“갑자기 아카데미에 내 이름으로 새로운 건물을 짓겠다고 해서 놀랐어.”
카예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체면도 잊고 육성으로 상스러운 소릴 낼 정도였다.
라파엘로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운 이유로 그녀와 만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제레미는 생일 선물을 미리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건 상당히 괜찮은 조언이었다.
“성년 선물은 어떤 게 좋은지 몰라서 제 선택이 미흡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전하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카예나에게 드레스, 보석 같은 게 아닌 명예를 선물로 준 남자는 라파엘로가 처음이었다. 그녀가 만약 전과 같은 악녀였다면 그런 명예로운 선물은 없었을 것이다.
라파엘로가 준 선물은 카예나가 지금 잘하고 있다고 인정해주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뜻밖의 선물이라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정말로 고마워.”
그 말과 미소에 진심이 느껴졌다.
라파엘로는 이제는 완전히 인정할 수 있었다.
카예나의 미소가 보기 좋았다. 정확하게는, 자신을 향한 미소가 보기 좋았다. 올리비아에게 향한 미소는 그다지…….
그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하나 더 지을까요?”
“……응?”
“전하의 이름으로 된 극장이나 아니면 백화점……”
“아니!”
카예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얼른 말을 끊었다.
“건물은 이제 괜찮아.”
라파엘로는 느긋하게 새로운 것을 떠올려 보았다. 그럼 성물이면 괜찮을까?
“그럼 건물 말고 다른 걸 원하십니까? 고대 왕국의 성물이나…….”
그의 고민이 무색하게 카예나는 질렸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정말 괜찮아. 이렇게 내게 마음 써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게 기쁘니까.”
“그렇습니까?”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말이 마음에 들어 무심결에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그의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에 카예나는 낮게 탄식했다.
‘아무리 남자 주인공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잘생길 필요가 있나?’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려낸 미소는 그를 한층 더 성숙한 남자처럼 보이게 했다. 그래서인지 위압적인 체구임에도 거북한 느낌이 들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설레는 것이다. 지나치게 매력적인 남자라 그냥 천재지변에 휘말리듯이, 단지 그런 이유였다.
‘근데 라파엘로가 왜 이렇게 가까이 앉아 있지?’
정신 차리고 보니 그와 상당히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옛 버릇이 나온 건가 고민했다. 이걸 좀 떨어져서 앉아야 하나, 그냥 있어야 하나……?
그녀가 더 고민할 새도 없이 라파엘로가 말했다.
“새로 지을 건물의 용도는 전하께서 정해 주시면 됩니다.”
카예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갑자기 좀 정신이 없어서 정작 본론을 깜빡하고 있었다.
“아 참, 그래서 왜 나를 찾았지?”
라파엘로는 솔직하게 말했다.
“전하를 뵙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 격렬한 반응이 다른 곳에서 터졌다.
“쿨럭, 컥, 컥!”
차를 홀짝 마시던 바스턴이 사레가 들린 모양인지 한바탕 기침을 쏟았다.
“저런, 괜찮은가?”
“예, 예. 괜찮습니다.”
바스턴은 직구를 던지다 못해 아예 황소처럼 들이박아 버리는 제 주인을 당혹스럽게 보았다.
‘아니, 감정을 공유하는 것도 단계가 있는데…….’
그러나 카예나는 바스턴과 달리 그의 뜻을 조금도 곡해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지?”
카예나는 그가 보고 싶어서 찾아뵙길 원했다는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말했다.
지나칠 정도로 담백한 행동에 라파엘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그녀가 자신과의 사이에서 어떤 가능성도 점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 혼담이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라파엘로는 우선 그녀의 장단에 맞추기로 했다. 카예나는 담백하게 반응했다.
“축하하네.”
“그래서 다음 계획을 들으러 왔습니다.”
그러자 카예나는 응접실 안의 하인들에게 말했다.
“다들 나가 있도록.”
마찬가지로 바스턴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그대도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나?”
“물론입니다, 전하.”
바스턴은 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하인들과 응접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카예나가 말했다.
“이 응접실은 외부에서 말을 엿들을 수 없는 곳이야.”
응접실 중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카예나는 아무렇지 않게 비밀을 누설했다.
“황궁에는 세작이 너무 많아.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하루 만에 소문날 정도니까.”
“그렇군요.”
마찬가지로 황궁에 세작을 여럿 심어둔 라파엘로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목적은 간단해.”
카예나는 여상스럽게 말했다.
“내 남편을 만들어 줬으면 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편을 만든다니? 아이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잘못 말한 건가? 아니, 황녀가 그런 외설스러운 말을 입에 담을 리 없지. 남편이 되어 달라는 말도 아니고 누구를 소개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남편을 만들어 달라니.
라파엘로는 이런 이상하고 황당한 부탁은 평생을 통틀어 처음 들어 보았다.
“……남편을 만든다고요?”
“응. 실체가 없는 가상의 남편. 사람만 허상일 뿐 권리와 재산은 실존해야 하지.”
어쨌든 핵심은 다른 이와의 결혼이었다.
당혹감을 느낀 라파엘로의 입에서 정제하지 않은 진심이 튀어나왔다.
“전하께서는 제게 마음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
이번엔 카예나가 몹시 당혹스러웠다.
물론 그랬다. 그는 카예나의 오랜 짝사랑이자 첫사랑이었다. 그러니까, 몇십 년 전의 이야기였다.
‘남편을 만들어 달라 했더니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질문한 라파엘로에게는 조금의 장난스러운 기색도 없었다. 일부러 카예나를 곤란하게 하려고 물은 것도 아닌 듯했다.
또 침묵이 흘렀다.
카예나는 이 상황에서 꺼낼 만한 적절한 말을 차분히 되짚으려 했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카예나의 반응에 자신이 실수했다고 느꼈다. 마음이 이상하게 조급하여 머리가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았다.
“무례한 질문이었습니까?”
당연히 무례하다. 그런데 무례하다고 말하기가 이상했다. 그를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녔던 건 자신이다. 무례를 논하려면 우선 카예나의 행적부터 돌이켜야 했다.
카예나는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며 말했다.
“조금 당혹스러운 질문이긴 했어.”
카예나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단호히 말했다.
“난 경에 대한 감정은 깨끗하게 정리했어. 다시는 추근대지 않겠다고 한 맹세도 진심이었고.”
그러자 라파엘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분명 그 말을 듣기는 했다. 다만 무례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했던 한 맹세가 다시는 좋아하지 않겠다는 뜻인 줄은 몰랐다.
‘그런 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아니다. 원래는 그러길 바랐다. 접촉은 불쾌했고 항상 끈적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기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카예나와 같이 있어도 괜찮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춰도 괜찮았다. 그녀를 에스코트해도 멀쩡했고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땐…….
아주 달콤한 향이 났지.
그건 지금도 그랬다. 카예나는 아주 옅은 색소로 이뤄진 사람 같았다. 그게 시린 듯하면서도 달아 보였다. 가까이 있으면 기분이 안정되었다. 그건 꽤 중독적인 기분이었다. 그래. 그렇게 계속 중독되어있고 싶었다.
이성적인 생각 따위 집어치우고 계속…….
라파엘로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며 방금의 생각을 지워냈다.
“아닙니다. 그런 맹세는 하지 않으셔도 전하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카예나는 라파엘로의 표정이 좋지 않자 그의 말을 쉽사리 믿기 어려웠다.
‘역시 맹세로는 약했던 걸까?’
지금까지 그를 실컷 괴롭혀 왔으면서 말 한마디로 퉁 치려 했던 자신이 뻔뻔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을 도와줄 가장 알맞은 사람은 라파엘로밖에 없었다. 남자 주인공과 상부상조한다면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하인리히 대공자와 결탁하는 건 위험한 짓이고.’
되도록 그 정신 나간 자와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이제 불쾌한 과거는 잊고 친구가 된다면 좋을 텐데.’
그게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였다.
“…그럼 내가 너무 뻔뻔스러운 요구를 한 건가?”
라파엘로는 카예나가 진심으로 제 기분을 걱정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그 사실이 그녀의 미소만큼 기분 좋게 느껴지는 걸까.
“남편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은 처음 들어서 그랬습니다.”
라파엘로가 물었다.
“그런데 왜 가상의 인물과 결혼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카예나는 즉각적으로 이유를 떠올렸다.
‘그게 가장 안전하고 완벽하게 수도를 떠날 수 있는 이유니까.’
또 어떤 미치광이와 엮이게 될 줄 알고 아무하고 결혼하겠는가? 카예나는 더는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보다 남편이 먼저 살해당할지도 모르지.’
레제프가 어느 역사에 나왔던 가장 아름다웠던 여자의 비극처럼 자신의 남편들을 계속 죽이며 원래 그랬듯 또다시 인형으로 사용할지도 몰랐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실제로 나를 하인리히에게 보내서 그렇게 이용할 작정이었으니까.’
이럴 땐 제 죽음의 과정까지 모든 비화를 알게 해 준 소설이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레제프의 힘이 약해지면 하인리히는 반드시 카예나를 제 손에 넣을 게 자명하다. 그는 부족한 정통성을 카예나와의 혼인으로 채우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도 이곳의 서브 남주 중 하나이니 올리비아에게 반할 테고 그럼 나란 존재가 거슬리겠지.’
황위를 차지하게 되면 그녀를 죽이고 올리비아를 탐하려 할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하지?
카예나는 제 처지를 되짚으며 약간 피로감을 느꼈다.
‘황족으로 태어나 무지했던 것이 내 죄겠지.’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실존하지 않는 인물은 독살당하지 못하거든.”
그것은 카예나의 처지를 단번에 짚어 내는 말이기도 했다.
라파엘로는 유력한 귀족 사이에서 떠도는 카예나의 은밀한 별명을 떠올렸다.
‘황자의 마리오네트.’
카예나는 제게 매달린 운명의 실을 끊어 내기 위해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래서 변한 건가?’
누구보다 알기 쉬웠던 사람이 지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안개 같았다.
라파엘로는 그녀가 여행기를 읽고 있다는 이야기가 불쑥 떠올랐다. 어쩌면 카예나는 그저 안전한 곳에서 쉬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일단 이 모든 건 공자가 가문을 물려받아야 가능한 일이야.”
그가 공작위를 계승받는 건 시간문제다. 곧 키드레이 공작 부부가 이혼 소송을 마치게 되고 데릴사위였던 공작은 제 친가에 몸을 의탁한다. 그간 쌓은 인맥과 경제력이 있으니 여생은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불륜으로 제 가정을 파탄 낸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온건한 마무리였다.
‘라파엘로가 어렸을 때 바람을 피웠다고 들었는데.’
소설에서도 그 불륜에 관한 건 거의 다루지 않았다. 아무래도 소설의 특성상 포커스가 올리비아를 중점으로 맞춰져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남의 가정사를 이용하는 게 영 마음 걸리긴 하지만.’
“왜 그러십니까?”
그녀의 시선을 느낀 라파엘로가 물었다.
카예나는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둘러댔다.
“언제나 근사했지만, 오늘 공자의 모습이 평소랑 좀 달라 보여서.”
적당히 입에 발린 말이었다. 아니, 입에 발린 말이라기엔 사실이고 진심이기도 했다.
라파엘로는 제 옷을 힐끗 보았다. 바스턴이 강력하게 추천했던 밝은 크림색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카예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직접적인 대답은 슬쩍 피했다.
“음, 경에게는 뭐든 다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는 카예나가 에둘러 말하는 걸 알고 피식 웃었다.
“전하께서도 그렇습니다.”
라파엘로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던가? 글쎄,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지 모르겠다. 원래 카예나에게는 저렇게 부드럽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지. 사람 착각하게 하는 저 화법에 걸려들어서는 안 돼.’
카예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괜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했다. 오늘 만남은 여기서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내가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지. 아카데미에 방문해서 서류를 공증받는 일은 다시 일정을 잡는 게 좋겠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파엘로도 따라서 일어났다.
카예나는 마음을 진정하려 앞장서서 걸었다. 뒤에서 라파엘로가 따라붙으며 말했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전하.”
카예나는 에스코트를 거절하기 위해 뒤를 돌았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그러다 제 코앞까지 다가온 라파엘로를 발견하고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아……!”
그녀가 살짝 휘청이며 손을 뻗었다.
라파엘로는 그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워 줄 만큼 힘이 세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카예나의 팔에 충격이 갈 수 있다. 그는 그것을 핑계 삼아 카예나의 등을 단단히 받치며 품으로 당겨 안았다. 놀란 카예나가 그의 가슴팍을 콱 붙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무뚝뚝한 듯 다정한 음성이 귓가로 들렸다.
카예나는 데자뷔를 느꼈다.
‘황립 도서관에서도 그에게 안겼지.’
그때와 마찬가지로 완벽히 보호를 받는 듯한 안정감이었다.
라파엘로는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 주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예나는 얼른 그에게서 몸을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몹시 당혹스러웠다.
“키드레이 경.”
라파엘로는 몸을 뻣뻣하게 굳힌 카예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역시 이상한 게 맞았다. 카예나는 그와의 접촉을 지나치게 꺼렸다. 흡사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제가 불쾌하십니까?”
“아니, 그럴 리가.”
불쾌하다니,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
“그런데 왜 자꾸 저를 피하시는 겁니까?”
“그건…….”
순간 말문이 막혔다.
조심한다고 했던 게 너무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게 그에게도 더 편하지 않나?
카예나는 이러는 걸 라파엘로도 당연히 반기리라고 생각했다. 남과의 접촉에 구역질까지 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지금 라파엘로의 안색은 상당히 멀쩡해 보였다. 낯빛이 창백해지거나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카예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약간 자신감을 잃어버린 투로 말했다.
“난 경이 불편할까 봐…….”
‘분명 맞을 텐데, 이상하네.’
그가 접촉을 기피한다는 정황이 분명 있었다.
라파엘로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려 곤혹스러워하는 카예나를 보니 마음이 술렁거렸다. 이러한데 어찌 불편할 수 있을까? 그도 지금 자신이 완벽히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라파엘로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카예나에게는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를 피하시는 게 더 불편합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카예나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미간만 살짝 찡그렸다.
라파엘로는 그 표정을 보고 옅게 웃다가 입매를 끌어 내렸다.
……어쩐지 쑥스러웠다.
“그럼 가실까요?”
그는 카예나를 품에서 놓아주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청하는 손길이었다.
카예나는 그 손을 잠깐 바라보다가 살며시 맞잡았다.
‘본인이 괜찮다니까…….’
어쩐지 실내가 좀 더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