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11
악녀는 두 번 산다 111화
“짐의 동생을 짓밟아서라도 말이냐?”
황제가 물었다.
헤일리는 어이가 없었다. 결국 로이가르 대공과 동부 귀족들에게서 물자를 징발하는 것은 황제이다.
요컨대 아르티제아는 황제에게 그럴 만한 기회를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황제가 원하지 않는다면, 짓밟을 필요는 없다. 정상적으로, 납득 가능한 선에서 모든 부담을 공평하게 모든 귀족과 부자들에게 지우거나 황실 재정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물론 황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티아야.”
황제가 유니스 백작 부인이나 피오나를 부르듯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짐은 늙었고, 너는 똑똑한 아이가 아니냐. 정치적인 대화는 그만두자꾸나.”
“폐하.”
“넌 짐이 이것을 이용해서 짐의 막내아우에게서 여러 가지를 빼앗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겠지. 아주 기꺼이 말이다.”
황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짐짓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굴었다.
아르티제아가 그 모든 상황을 만들어놨기에 하는 수 없이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솔직하게 말하는 듯이 보이지만 위선이고, 위악처럼 보이지만 진실이다.
아마 모든 것을 빼앗고 나서 어쩔 수 없었다며 한탄하는 마음도 진심일 것이다.
앞으로 로이가르 대공에게서 강탈할 것이 미안한 것도 사실이리라. 세드릭에게 미안해하는 감정도 그러했다.
다만 황제에게는 그 모든 것보다도 자신의 권좌, 자신의 의지가 중요할 따름이다.
황제가 정치적인 대화를 그만두자고 했다고 해서 아르티제아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황제의 내심을 엿보고 그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화하면, 그만큼의 대가를 더 지불해야 한다.
“어찌 누군가를 짓밟는다거나, 그런 두려운 말씀을 하십니까? 폐하께서 제국의 주인이십니다. 제국을 이끌어 가심에 있어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마땅히 바쳐야지요.”
아르티제아는 공손히 말했다.
“사적인 감정을 억제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원망을 받더라도 모두 폐하의 책임으로 안고 가시는 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겁이 많아 한 일이 폐하께 심려가 된 듯하여 황공합니다.”
“…….”
황제가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책임이라니. 이 얼마 만에 듣는 단어이던가.
“네가 짐까지 협박하려 하는구나.”
“감히 그럴 리가요.”
“카람은 두렵고 짐은 두렵지 않더냐?”
“폐하께서 제가 준비한 선물을 받으실 작정이신데 왜 두렵겠습니까?”
결국 황제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랬다. 자신의 손을 하나도 쓰지 않고 이만큼의 명분을 얻은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그것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오랜만에 몰이사냥을 하는 듯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티제아는 훌륭한 몰이꾼이었다.
황제는 유능한 자를 총애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송곳처럼 어릴 때부터 알던 아이가 갑작스럽게 재능을 드러내는데 기껍지 않을 리가 없었다.
길들이는 것은 로렌스의 몫이 될 테지만 말이다.
“땅은 안 된다.”
황제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걱정이 되겠지. 계승전이니 뭐니, 앞일이 위태롭고……. 짐이야 세드릭을 조카로 여긴다지만, 짐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앞으로 몇 년이나 되겠느냐?”
“그런 두려운 말씀 마십시오. 만수무강하실 것입니다.”
“어느 놈이 황제가 되어도 그 녀석을 부담스러워 하겠지.”
황제가 말했다.
“그래도 땅은 안 돼. 대신 북부로 보낼 물자를 대폭 늘리고, 거기에 짐이 2할 이상을 더 보태주마.”
“…….”
“앞으로 7년간 그리 하겠다고 약속하겠다. 그렇게 해서 몇 년 모으면, 한동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지.”
“어차피 땅을 사들였다고 해도 기껏해야 작은 지주 노릇밖에 하지 못할 만큼의 면적입니다.”
“에브론이 가진다면 문제가 달라지지.”
“반역을 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시잖아요?”
“티아.”
“전 그냥 만약의 경우에 물러날 수 있는 안전한 곳을 원할 따름이에요.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요.”
황제가 가만히 아르티제아를 바라보았다.
눈을 내리깔고 있었기에 눈빛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마치 아르티제아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르티제아는 말했다.
“그래서 모두 로산 후작가의 이름으로 사들였습니다. 에브론 대공의 작위는 첫째에게, 로산 후작가는 다른 아이에게 나누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에브론 대공가가 서부와 북부를 모두 차지하고 황실과 맞서는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혼전 계약서 따위는 언제든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에는 설득력이 넘쳤다. 황제가 바로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먼 미래까지 내다보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네가 바로 앞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땅을 사는 게 아니라 짐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을 테니.”
아르티제아가 잠시 침묵한 후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제가 이미 사들인 땅을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황제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르티제아가 이렇게 물으니 난처한 일이 되었다.
어린 조카며느리에게서 땅을 강탈할 수는 없다. 아르티제아는 너무 공개적으로 땅을 사들였다.
그 땅을 자신이 받으면,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손에 서부의 농지를 놓아둘 수는 없다.
돈을 주고 사고판다는 것도 이 시점에서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면 에브론 대공령을 위해 징발한다는 명분이 희석되고 만다.
“어찌하고 싶으냐?”
황제가 물었다.
아르티제아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폐하께서 처분을 일러주시면 그대로 따르고, 아니면 사원에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호오?”
“본래도 거기에서 곡물 사업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선 사업을 하면서 그 땅에 대해 알아가려던 것뿐이었으니까요. 그러면 사원에서도 제가 하려는 자선 사업을 도와주지 않을까요?”
황제가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그럴 속셈이었구나.”
아르티제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흥정할 때에는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큰 제안부터 해야 하는 법이지. 땅은 돈과는 바꿀 수 없는 법이니 명예와 바꾸는 게 제일 낫다.”
“황공합니다.”
“2할이나 얹어주겠다고 한 건 공연한 일이었구나.”
아르티제아가 공손히 말했다.
“그 말씀에 선뜻 결심한 것입니다. 돈을 생각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라고 해도, 투자한 것이 제게 적은 액수는 아니었으니까요.”
“이왕 그리되었으니, 서부의 환곡 사업도 네가 맡아 하려무나. 곡창의 열쇠를 주마.”
황제가 말했다. 아르티제아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감당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황후의 시녀이니 자격은 충분하지. 짐의 호의를 여러 차례 거절하지 마라.”
아르티제아는 약간 얼굴을 경직시켰다.
호의라니. 터무니없다.
그러나 곡창의 열쇠를 주겠다는 말은 어쨌든 황제의 신뢰를 뜻하는 말이다. 황제의 말처럼 여러 번 거절하는 것도 불충이었다.
그녀는 공손히 인사하여 그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표시했다.
“과분한 영광입니다.”
“짐을 실망시키지 말려무나.”
황제가 대답했다.
* * *
“왜 두 분 다 안색이 어두우신가요?”
테라스에서 물러 나오면서 리시아가 의아하게 물었다.
헤일리가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곡창의 열쇠를 맡길 테니 서부의 환곡 사업을 맡아 하라고 하셨어.”
“영광된 일 아닌가요?”
“형식상으로는 그래.”
헤일리가 대답했다.
제국 본토의 2할 가까이를 담당하는 막대한 복지 사업이다. 명예도, 실권도 따라왔다.
곡물 가격을 조절하고 식량을 비축하는 과정에서 곡물상을 상대로 상당한 영향력과 실질적인 이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대신, 잘못하면, 그 죄가 한량없이 커질 거야. 지금 서부의 환곡 사업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야. 자칫하면 사재만 털어 넣고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어.”
이보다 죄를 뒤집어씌우기 쉬운 자리는 없었다.
이권을 받으면 그만큼 황제에게 종속된다.
적당히 해먹으며 황제에게 충성하면 지속적으로 큰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눈 밖에 나는 순간 바로 숙청당할 명분을 주게 된다. 어느 쪽이든 황제는 손해 볼 것이다.
헤일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비 전하께서 황후 폐하의 시녀가 되셨다 해도, 아직은 연치 어리신 나이인 걸요. 회유책으로는 지나치지 않나요? 황제 폐하께서 비 전하의 잘못을 핑계 삼아 황후 폐하를 치려고 그러시는 걸까요?”
“그건 아니다.”
아르티제아가 확고하게 대답했다.
“지금 황제 폐하는 황후 폐하를 완전히 제압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혈연 문제도 있지.”
“비 전하를 끌어들여 숙청하면, 로렌스 경에게까지 문제가 생긴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그리고 에브론을 그런 문제로 또다시 숙청할 수는 없지. 오히려 이건 세드릭 님의 명성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그러시는 거야.”
환곡 사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것이다. 지금의 서부처럼 완전히 체제가 무너져 있는 상황에서는 더 그랬다.
거기에서 당장 쓸 수 있는 인원을 채우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믿을 만한 사람은 더 구하기 어렵다.
혜택 받지 못한 자는 원망하고, 조금의 흠이라도 생기면 세드릭이 생각하던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실망할 것이다.
손해를 보지 않고 황제가 원하는 적당히 선에서 움직이면 타락했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지 않고 운영하려면 에브론 대공가의 사재라도 끌어다가 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북부에 한계가 있는 것처럼 서부에도 한계는 있다. 어지간한 왕국보다도 넓은 땅에서 짧은 시간 안에 가난을 구제하는 것은 신도 하지 못할 일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했어도 리시아가 혼자서 세상을 구해 보겠다고 다녔던 것 쪽이 낫겠지.’
역시나 황제는 만만하게 생각할 상대가 아니었다.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적어도 서부 곡물상 조합에 대해서는 들키지 않은 게 확실했다.
카람 작물을 기르는 것도 문제없다. 아예 서부에서 먼저 퍼뜨린 후에 가지고 올라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어차피 언젠가는 대대적으로 정비해야 해.’
아르티제아는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걸었다.
당장 성과를 내어 높은 평판을 얻겠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미래에 세드릭이 제위에 올랐을 때까지 멀리 보고 지금부터 정돈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실력 있는 보좌관을 붙여서 리시아에게 맡기면 사람들의 반발을 많이 사지 않을 테고 말이다. 아르티제아는 리시아의 진심이 통하리라는 것을 믿었다.
헤일리가 물었다.
“비 전하, 혹시 사원에 땅을 바치겠다는 건 처음부터 결정하셨던 일인가요?”
“으음? 아, 그래. 어차피 뇌물을 쓸 작정이었으니까. 이렇게 하면 당당하게 재산을 넘길 수 있지.”
아르티제아는 대답했다.
자신이 성녀이니, 사원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도울 수밖에 없을 테고.
그 생각을 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비 전하, 피곤하세요?”
리시아가 염려스럽게 물었을 때였다.
알폰스가 걸음을 멈췄다. 헤일리도 그랬다.
아르티제아는 무슨 일인가 하고 눈을 들었다. 복도 저쪽에 밀라이라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