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20
악녀는 두 번 산다 120화
“어서 오십시오, 아르티제아 님.”
“오랜만이에요, 키쇼어 경.”
아르티제아는 그에게 정중하게 마주 인사했다.
헨리 키쇼어는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근위 기사 중 하나였다.
그는 하급자를 보살피고 상급자에게 복종하는 군인다운 미덕이 있었다. 그리고 근위대의 하급자들만이 아니라 군부인사와 관리들 사이에서도 두루 명망이 있었다.
황제의 신임이 그에게 자연스럽게 권력을 가져다 주었다.
일신에 지닌 바 무력으로 말하자면, 여섯 명의 부장 중에서 으뜸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제국 제일의 무장이었고,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크게 실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아르티제아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은 결혼식 때였다. 그때로부터 아직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족히 15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강건하던 몸에서는 기력이 빠져나가고, 눈 밑에는 짙은 피로감이 쌓여 있었다. 뺨이 홀쭉해진 것이 살도 좀 빠진 듯했다.
“편찮아 보이시는군요. 황제 폐하의 윤허를 얻어 한 달 넘게 쉬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조금 지쳤을 따름입니다.”
키쇼어가 말했다.
“아내가 함께 마중해야 마땅한데, 제가 약을 먹여 억지로 재웠습니다.”
“저런……. 미엘르 양이 정말 안 좋은 모양이지요?”
“예.”
키쇼어가 낮게 말했다.
그가 아르티제아를 안내하여 미엘르의 침실이 있는 남쪽 방으로 향했다.
“헤젤 영애가 말하기를, 겨울까지만 해도 괜찮았다고 하던데요.”
“예. 오히려 상태가 좋았습니다. 겨울 내내 그랬지요.”
키쇼어가 미엘르의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간호사 한 명이 침대 곁에 앉아 있고, 하녀가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있었다. 미엘르의 침대는 레이스로 짠 얇은 장막으로 가려두었다.
혼수상태였다.
“병석에 누운 것은 두 달 전입니다. 그래도 지난주까지만 해도 일어나 앉아서 간간이 웃기도 하고, 사람도 만날 수 있었는데…….”
키쇼어가 탄식했다.
“사흘 전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앨리스가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르티제아는 조심스럽게 미엘르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숨이 붙어 있었는데도 미엘르의 얼굴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의사가 각오하고 있으라고 하더군요. 혹 다시 눈을 뜨는 일이 있더라도, 올해를 넘기기는 어려울 거라고.”
키쇼어가 절망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에게 자식은 미엘르 하나밖에 없었다. 서른이 되어서야 겨우 생긴 자식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스물둘이 되기 전에 결혼하여 바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키쇼어 부부는 꽤 늦게 아이를 얻은 셈이었다.
둘은 아이를 낳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으나 미엘르 하나가 겨우 태어났을 뿐이고, 그 뒤에도 자식은 생기지 않았다.
평민 출신으로 근위 기사가 된 키쇼어는 신흥 귀족으로서 가문을 새로 연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키쇼어 가문을 자리잡게 하려고 애쓰지 않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았다.
부귀를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아내와 딸을 편안하게 해줄 정도라면 족하다고 여겼다.
본래 검박하고 야심 없는 성품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미엘르의 삶이 훨씬 중요했다.
딸을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은 아예 없었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라고 병약한 딸을 닦아세우고 싶지도 않았다.
스스로 야망을 가지고 바삐 나돌아 딸과의 시간을 줄이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렇게 소중하게 키워 온 자식이었다.
“저와 아내 둘이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친척들에게도 알리지도 않았고요. 아르티제아 님께서 문병을 와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본래대로라면 거절했을 겁니다.”
“키쇼어 경.”
“편지에 쓰신, 미엘르를 살릴 방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키쇼어가 충혈된 눈으로 아르티제아에게 물었다.
아르티제아는 가볍게 손짓했다. 앨리스가 그것을 보고 얼른 간호사에게 나가자고 속삭였다.
키쇼어 가의 하녀와 간호사는 당황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끼리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모양이라서 얼른 앨리스를 따라 나갔다.
방 안에 키쇼어와 아르티제아 두 사람만 남았다.
아르티제아는 창백한 미엘르의 이마에 가볍게 손을 얹어 보았다. 보기와 달리 그 피부에는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었다.
키쇼어가 말했다.
“약이든, 명의이든 좋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해보고 싶습니다. 효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감사히 생각하고 잊지 않겠습니다.”
아마도 그는 아르티제아가 어디에서 귀한 약재라도 구했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르티제아가 말했다.
“10년이에요.”
“예?”
“미엘르 영애를 10년 더 살게 해 드리겠어요.”
키쇼어가 눈을 끔벅거렸다. 아르티제아가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르티제아는 반듯한 자세로 키쇼어를 바라보았다.
“건강해지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로, 늘 아프고 이유도 없이 병석에 눕고…….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건 어렵겠죠. 지금처럼요.”
“아르티제아 님…….”
“하지만 10년 더 살 수 있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생각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방법이 무엇인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키쇼어는 즉답했다.
“제 인생 10년을 드리겠습니다. 단 1년이라도 더 살게 해주십시오.”
키쇼어는 권력을 휘두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가장 아끼는 총신은 아니다. 하지만 황제가 가장 안심하고 믿는 사람이다.
키쇼어는 황제가 주는 권력이나 부귀를 위해 충성하지 않았다. 그레고르라고 하는 개인을 향해 충성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황제의 권위에 충성했다.
그의 충성은 옥좌 그 자체를 향한 것이다. 신하는 마땅히 황제에게 충성해야 하므로 그는 충성했다. 그런 사람은 황제의 총신 중에서도 몇 되지 않는다.
키쇼어는 황제의 개인적인 결함을 잘 알고 있었다.
황후를 안쓰럽게 여기기도 하고, 황제가 밀라이라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보수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다소의 부당한 일이 있더라도, 세상을 혼란에 빠뜨려 뒤바꾸는 것보다는 안정된 현실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가 옥좌에 충성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후계 다툼에도 관심이 없었다. 키쇼어에게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언제나 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황제가 된 다음에 충성하면 될 따름이었다.
황제가 키쇼어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가 받는 신뢰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충성심은 결코 자식의 목숨을 버려서까지 유지될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미엘르를 위해서라면 옳지 않다고 믿는 일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옥에 가라고 해도 기꺼이 갈 수 있었다.
아르티제아가 무엇을 요구할지는 몰라도, 대가로 치를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키쇼어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돈도, 권력도, 키쇼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갖고 있었으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아르티제아가 눈을 내리깔고 부드 럽게 말했다.
“제가 로산 저택에 있을 때, 키쇼어 경께서는 그래도 제게 어른 역할을 하려고 한 거의 유일한 분이셨죠.”
“……아르티제아 님.”
“미엘르 영애도,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뵙진 못했지만, 제 또래 중에 그때 저에게 친절하게 해주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아르티제아는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 그것이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키쇼어가 눈시울을 붉혔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실제로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요.”
실제로 일이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둘 다 알고 있었다.
만일에 미엘르가 살아난다면, 키쇼어는 당연히 아르티제아에게 그 은혜를 갚아야 했다.
하지만 다정한 말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다. 이것이 권력 문제가 아니라 미엘르의 상냥한 성품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엘르가 살아야 하는 이유처럼 들리기도 했다.
“다만.”
아르티제아가 낮게 말했다.
“비밀을 지켜주셔야 해요.”
“비밀……이요?”
“네.”
아르티제아가 내리깔았던 눈을 들고 키쇼어에게 말했다.
“제가 미엘르 영애를 살려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해서 키쇼어 경에게 알려드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키쇼어 경은 제가 미엘르 영애에게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으셔야 해요. 비밀 또한 지켜주셔야 해요.”
“아르티제아 님.”
“오늘 저는 미엘르 영애를 문병했지만, 미엘르 영애의 병세가 좋아진 것은 단순히 우연인 거예요. 그러실 수 있겠어요?”
키쇼어의 얼굴에 혼란이 스쳐갔다. 그의 머릿속에 마법 같은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답할 수 있었다.
“저는 비밀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아르티제아 님.”
“부인께도 알리셔서는 안 돼요. 미엘르 영애 자신도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을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는 아예 아는 사람이 적은 쪽이 나으니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제 딸과 제 딸의 은인을 위협할 만한 이야기를 제 입에서 듣지 못할 겁니다.”
“키쇼어 경께서는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이죠. 믿어요.”
키쇼어의 서약은 무거웠다. 맹세의 제단이나 죽음의 강 같은 것을 제물로 걸지 않더라도 그의 서약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다.
아르티제아는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눈을 내리깔았다.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잠시 자리를 비워주시겠어요?”
키쇼어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미 아르티제아를 믿고 비밀을 지키겠다고 서약했다. 방법을 궁금해하거나 불안해한들 달리 더 나아질 것은 없었다.
키쇼어가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앨리스가 들어왔다. 아르티제아는 방을 살피며 앨리스에게 명령했다.
“커튼을 치렴. 밖에 빛 하나 새어 나가지 않게 단단히 단속해야 해.”
“네.”
병자의 방이었기 때문에 깨끗한 포목이 여러 개 있었다. 깨끗한 물이 담긴 대야도 있었다. 온화한 날씨였지만, 벽난로에 불을 붙여 더울 정도로 훈훈했다.
아르티제아는 하얀 면포 하나를 가져다가 테이블에 폈다.
마법을 쓸 작정이었다.
리시아였다면,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미엘르를 건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티제아에게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작은 칼을 꺼내 왼쪽 검지 끝을 찔렀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앨리스가 한 발 늦게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마님,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