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21
악녀는 두 번 산다 121화
“제가 하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게 편해.”
아르티제아는 약간 얼굴을 찡그린 채 말했다.
두어 번 실험을 하느라 손가락에서 피를 낼 때마다 앨리스는 자기가 팔을 베는 게 낫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도 앨리스의 팔을 베어 피를 내는 것보다 자기 손끝을 찌르는 게 나았다.
빈말로라도 그녀는 회복력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쪽이 제일 상처가 작게 끝난다.
다행히 아르티제아는 육체적인 고통을 잘 참는 편이었다. 그녀는 몇 번 상처를 헤집어가며 면포에 마법진을 그렸다.
그다음 아르티제아는 손가락의 상처를 지혈했다. 물에 적신 면포로 상처 주위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지혈제를 뿌렸다.
“에브론 산 지혈제는 효과가 좋은 것 같아. 상품화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약재 수급이 어려울까?”
아르티제아는 그렇게 말하고 벽난로에 면포를 던졌다. 젖은 천은 잠시 불길을 약하게 하는 듯싶더니 검은 연기를 내면서 탔다.
“그런 말씀 하실 때가 아니에요. 아가씨, 손가락 보여주세요.”
앨리스가 속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하지만 자수 취미가 생겼다고 해야겠어.”
“누가 자수 때문에 그렇게까지 손을 많이 다쳐요?”
“이게 제일 효율적이라고 했잖니?”
“제가 훨씬 빨리 나을 텐데.”
“넌 물일도 해야 하고, 손도 많이 쓰잖니? 내가 나아. 난 그냥 계속 장갑 끼고 있어도 되고.”
“마님이 몸에 상처 내시는 거 말도 안 돼요. 주인님이 아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너 나보다 세드릭 님 말 들으려고?”
그 말에 앨리스가 반박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르티제아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번만이야.”
앨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라니까?”
달리 쓰일 만한 곳을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아르티제아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앨리스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아르티제아를 걱정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필요하다고 하는 일에는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항상 아르티제아의 뜻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르티제아는 마법진을 미엘르의 얼굴 위에 덮었다.
미엘르를 마법으로 살린 사실이 사원에 알려진다고 해서 아르티제아가 곧바로 사원의 공격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성녀이기 때문이다. 미엘르도 마찬가지로 안전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아르티제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마법진의 중앙에 손을 댔다.
화아아–!
녹색의 빛이 일어나 마치 불이 번지듯이 마법진의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갔다.
모든 마법은 사람의 생명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보통은 생명력을 따로 뽑아낼 방법이 없다.
기껏해야 피를 흘리는 방법이 전부였다. 하지만 대량의 피를 흘려 넣으면, 피로 그린 마법진이 뭉개져 내용이 불분명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5초 남짓 빛을 발하는 수준의 마법이 아니라면, 피로는 불가능하다. 사실상 사람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자신의 생명력을 잘라내 성력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것을 대가로 삼아 미엘르를 살린다.
이미 몇 건의 실험을 통해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상대를 치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몸으로 대신 대가를 치름으로써 목숨을 연장할 수는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대상의 고통, 혹은 병마를 가져오는 능력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녀의 능력은 대가와 보상이 등가였다. 거기에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해서 쓰이는 약간의 생명력까지 포함하면, 치러야 할 대가가 조금 더 컸다.
어찌 보면, ‘되돌리라’라는 신탁에 참 걸맞은 능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골골 팔십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르티제아는 건강한 몸은 아니었지만, 쇠약해져 죽을 뻔했던 적은 없었다. 마흔 살까지도 멀쩡하게 살았다. 로렌스에게 토사구팽당하지 않았다면,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거기서 10년쯤 잘라낸다고 해도 일할 시간은 넘치도록 남는다.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것으로 키쇼어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것이었다.
계획은 길었으나 실행은 일순간이었다.
천을 걷어내도 미엘르의 안색이 당장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며칠에 걸쳐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아르티제아는 그녀를 치유한 것이 아니라 다만 죽음을 10년간 유예시켰을 뿐이다.
아르티제아는 손가락에 묻은 피를 한 번 더 닦아내고 다시 장갑을 끼었다. 그리고 마법진을 그렸던 천을 품 안에 챙겼다. 집에 가서 태울 작정이었다.
커튼과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문을 열자 키쇼어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미엘르 영애는 괜찮을 거예요. 며칠 안에 툭툭 털고 일어날 거라고 믿어요.”
아르티제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미엘르 영애의 쾌차를 기원하기 위해서, 황후 폐하에게서 선물 받았던 성녀 올가상을 가지고 왔어요. 침대 머리맡에 놓아주세요. 마차에 실어두었으니 하인들이 지금쯤 로비에 가져다두었을 거예요.”
“무엇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키쇼어의 말에 아르티제아가 미소를 띠었다.
“빌려드리는 거니까, 그런 말씀하시면 안 돼요. 미엘르 영애는 꼭 일어날 거예요.
“예, 꼭…….”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부인께서도 너무 염려로 몸과 마음이 상하지 마시라고 전해주세요.”
키쇼어는 아르티제아를 저택 밖까지 배웅하기 위해 뒤따라 나왔다.
그러나 끝까지 배웅하지는 못했다. 아르티제아가 마차에 오르기 전에 하녀가 달려나오며 고함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키쇼어 님! 키쇼어 님! 이쪽으로 와주세요! 아가씨께서 눈을 뜨셨어요!”
키쇼어의 눈이 커졌다. 아르티제아는 낮게 속삭였다.
“가보세요. 성녀 올가상이 기적을 되찾은 모양이군요.”
키쇼어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미엘르의 상태를 지금은 비밀로 하고 있지만, 병석에서 일어나면 의사나 간호사에게서 말이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 혹 소문이 나지 않도록, 그 기적을 성녀 올가의 보살핌이라고 말하라는 뜻이었다.
“새로운 성녀상을 만들어 사원에 봉헌해야겠습니다.”
키쇼어가 빠르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가보겠습니다.”
아르티제아는 그러라고 말했다. 키쇼어는 서둘러 돌아서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열린 창문으로 곧 남자의 통곡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티제아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앨리스가 조금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키쇼어 경은 좋은 분이에요. 저희 아버지는 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그렇게 울지 않으실 텐데.”
“죽었다 살아나면 울지도 모르지.”
아르티제아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빈혈 때문에 어지러웠다. 마차가 흔들리자 멀미도 나서, 이내 곧 눈을 감았다가 앨리스의 무릎 위에 누워 버렸다.
* * *
초여름에, 아르티제아가 데어리 포드에게 렉센 부인이라는 위장 신분을 주었을 때에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가능하면 공작 부인의 신뢰를 얻도록 해. 시녀가 될 수 있다면 더욱 좋고, 그렇지 못해도 최소한 시녀의 친구가 되어야 해.」
그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리아간 공작가의 안에 잠입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 아르티제아가 준비한 것은 결혼 증명서만이 아니었다.
상당한 액수의 활동 자금과 렉센 부인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는 작은 상단이 있었다. 그 상단에는 제법 큰 포목상과 작은 의상실, 그리고 규모 있는 양잠 농장 세 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데어리는 남부에 와서야 아르티제아가 넘겨 준 상단의 가치를 알았다.
남부는 해적 때문에 매우 위협적인 지역인 동시에, 그렇게 해적이 날뛸 만큼 많은 상품이 바닷길을 통해 오가는 지역이기도 했다.
에이멜 왕국과 이언츠 왕국을 제외하고도 작은 왕국 몇 개가 제국 남부 지역에 있었다.
남부는 기후가 좋고 자유로웠다. 동부와는 다른 의미에서 남부는 상업이 발달한 곳이다. 포식자처럼 이를 드러낸 대지주와 대상단이 없다. 보수적인 사원이나 제국 정부의 억압도 없었다.
남부에서는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밤낮 없이 움직였다. 상업과 무역이 남부를 움직였다. 크라테스 제국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시장으로 들어가려는 타국의 상인과 첩자가 숱하게 오갔다. 여행객도 많았다.
데어리는 정보를 다루는 것에 곧 익숙해졌다. 아르티제아가 준 몇 가지 정보와 행동지침은 매우 유효했다.
게다가 이 시기에 양잠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마치 금광을 가진 것과 비슷하게 취급되었다. 이언츠 왕국에서 새로 개발한 옷감 때문에 뒤늦게 품질 좋은 명주실을 구하려는 상인들이 헐레벌떡 뛰어다니던 중이었다.
데어리가 얼마 전에 양잠 농장을 사들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중요한 정보를 어찌 알았느냐고 사람들은 부러워하며 탄식했다.
데어리는 본래부터 포목상을 하고 있었기에 그냥 투자로 샀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처럼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렉센 부인은 젊은 나이에 스스로 돈을 벌어 마침내 작위까지 획득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수도에서라면 대단하다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경원할 테고, 보수적인 동부에서라면 그래봤자 벼락부자라며 사교계에 진입시켜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달랐다.
덕분에 데어리는 수월하게 리아간 공작 부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우리의 7촌 조카에 해당하는 셈이지.」
굳이 황후를 조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 느껴졌다.
리아간 공작 부인은 품위를 지키고, 고위 귀족답게 오만해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기질은 타고나기를 오만하거나 자기중심적인 편이 못 되었다.
자격지심은 부끄러울 정도로 표면에 드러났다. 리아간 공작 부인은 마치 변명하듯이 자기들의 신분에 대해 말하곤 했다.
그리고 주위에 데어리 같은 신분의 애매한 신흥 귀족을 많이 끌어 모았다. 그 안에서는 리아간 공작가의 방계 말석에 불과한 핏줄이라도 오래된 귀족처럼 행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데어리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공작 부인과의 교분은 사업에 보탬이 되었다. 이언츠 왕국의 상단과 포목을 주로 다루는 무역상들이 데어리의 주위에 모였다.
데어리는 이제까지 자기가 사업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르티제아가 마련해준 렉센 부인의 사업도 상당히 보수적으로 현상유지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데어리는 반년 사이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공작 부인의 신뢰를 깊게 했고, 또다시 사업에서 유리해진다는 선순환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는 리아간 공작 부인의 소개장을 들고 에이멜 왕국에 왔다.
“렉센 부인.”
왕비의 시녀가 공손한 목소리로 불렀다.
데어리는 각오를 다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가에는 생글거리는 미소를 건 채였다. 그런 위선적인 미소에도 익숙해졌다.
데어리는 빠르게 렉센 부인으로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졌다.
이곳에 와서 데어리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사람들의 존경도 받았다.
그 두 가지가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꿔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데어리는 처음으로 알았다.
‘현재를 즐기되, 행복해지지는 말자.’
결심이 묻히지 않게.
완전히 렉센 부인이 되어버리면, 제 기능을 다할 수가 없으니까.
줄곧 되새겨 왔는데도 밀랍으로 굳게 봉인된 편지봉투를 받았을 때에, 숨이 막혔었다.
이대로 그냥, 모르는 체하고 렉센 부인으로 살아버리면 어떨까?
자신의 재능을 처음으로 알았으니, 이대로 달아나 어딘가에서 새로 시작하면 어떨까?
하지만 끝없는 밤에,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결의를 잊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내곤 했다.
데어리는 떨림을 숨겼다. 그리고 환히 웃는 얼굴로 에이멜 왕비를 만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