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25
악녀는 두 번 산다 125화
황후 탄신연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루미너스 홀은 새벽부터 열렸다. 몇십 수레나 되는 봄꽃이 들어갔다.
루미너스 홀은 백년도 넘은 건물이라 아무리 닦고 꾸며도 좀처럼 화사한 분위기를 낼 수가 없다.
제국 전성기에 대리석으로 지어진 호화로운 본궁과 달리 초창기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짙은 회색의 석재는 좀처럼 낡지도, 닳아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지은 건물 자체는 아무래도 오래된 느낌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연회를 준비하는 숙녀들은 홀 전체를 꽃으로 묻어버리기로 했다. 마침 때는 봄꽃이 피는 무렵이었다.
오후부터 손님들이 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온 것은 휴게실 자리를 차지하기도 쉽지 않을 하급 귀족과 어디에서 초대장을 얻어 온 평민들이었다.
평민이라고 해도 완전히 신분이 낮은 것은 아니다. 귀족 가문의 일원이되 작위를 상속받지 못한 지 2대 이상 지나 더 이상 귀족 연감에 실리지 못하게 된 자와 자수성가한 부를 바탕으로 사교계에 새로 진입한 자가 대부분이다.
이런 이들은 사람이 밀려드는 시간에는 초대장이 있어도 제 시간에 들어오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일찍 온 것이었다.
두 번째로 도착한 것은 나름대로 지위를 가진 귀족들이다.
여기에는 두 부류가 있다. 우선 가문은 오래되었으나 그 자신의 명성은 가문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대다수의 귀족이 이 부류였다. 정치적인 영향력은 잃었어도 사교계는 여전히 이들의 것이었다.
반대로 개인의 명성은 드높았으나 아직 가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신흥 귀족도 있었다.
주로 정부 관료 출신이거나 전공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이들이었다.
아르티제아는 헤젤을 통해 선정한 지식인들을 이 그룹에 묶었다. 신흥 귀족들과는 이미 면식과 교분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쉽게 섞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 번째는 공후작가를 비롯한 대귀족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제국 정계를 좌우하는 진짜 권력자들이다. 로이가르 대공 부부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초대장을 받은 사람은 대귀족이 아니었다. 황후의 시녀와 그 가족들, 18년 동안 칩거하고 있었음에도 변함없이 친구로 남아준 이들이었다.
그중에는 작위와 자산을 대부분 잃고 몰락해가던 이들도 있었다.
특히 황후가 남부 리아간 공작가에 있던 시절의 친구나 지인들은 더 그랬다.
새로운 리아간 공작 부부가 주도하는 사교계에 들어가는 것을 완전히 거부해버린 이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정말로 허울만 남은 귀족이 된 경우도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남부에서 그들을 찾아 올라오게 했다.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을 찾아서 수도까지 불러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어제 도착하여 여독조차 풀지 못하고 연회에 나온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황후는 시녀들과 함께 투왈렛에서 도착한 손님들의 소식을 들었다.
손님은 하나도 맞이하지 않았다. 아르티제아는 시녀라도 그 자리에 불려가지 못했다.
“티아가 신경을 많이 썼더구나.”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아서 황후는 그렇게 말했다.
황후는 어떤 손님들이 초대되었는지 오늘 비로소 알았다.
정치적인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 싫어서 아르티제아에게 맡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감독은 마르타 백작 부인에게 시켰다. 그 뒤로는 별문제 없다는 보고만 들었다.
마르타 백작 부인이 황공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니야. 날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그런 것을 알고 있네.”
황후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깜짝 파티라니, 결혼한 이래 처음이구나.”
“예.”
시녀들도 모두 미소를 지었다.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볼 생각을 하자 황후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오늘은 대연회이니 일일이 만나보고 회포를 풀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이제는 18년 전과 달랐다. 황후는 이미 정치에서 손을 뗀 지 오래였고, 친구와 지인들도 힘을 잃었다.
여론과 로렌스까지 방패로 쓸 수 있다. 황제가 새삼스럽게 더 견제하거나 짓누르려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황후는 처음에는 이렇게 큰 연회를 내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티제아에게 하루 이틀쯤은 더 장단 맞춰 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곱게 해주렴. 안색 좋아 보이게.”
황후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막 분을 바르려던 시녀가 깜짝 놀랐다.
황후는 그동안 옷도 상복을 입었지만, 화장을 한 일도 없었다. 탄신연에 상복을 벗기로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황후가 말했다.
“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냈노라고 보여주고 싶구나.”
그 상대는 황제도 아니고, 옛날의 정적들도 아니다.
너희가 아무리 고통스럽게 했어도 난 괜찮았다, 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옛 친구들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킨 가신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나는 잘 지냈다고, 그러니 앞으로 함께 더 나아지자고 말이다.
황제가 방문한 것은 황후가 몸차림을 거의 마친 뒤의 일이었다.
시종이 방문객의 신분을 알리자 시녀들이 송구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황후는 마르타 백작 부인에게 시녀들을 데리고 물러가라고 명했다.
황제가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들어왔다. 황후는 돌아보지 않고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향해 앉아 있었다.
18년 만에 치장하고 화장을 했다. 그 사이에 그녀는 퍽 늙어버렸다.
이제 와서 누군가에게 어여뻐 보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새삼스럽게 이러고서 거울을 보니 세월의 흐름이 느껴져서 헛헛했다.
황제도 비슷한 감상을 느낀 듯했다.
“당신이 그렇게 꾸미고 앉아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세요. 옛일을 추억처럼 말할 수 있는 건 승자뿐이죠. 나는 패자이고요.”
황후는 건조하게 말하며 거울 너머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아르티제아와 세드릭의 결혼식 이래 첫 대면이었다. 조용한 자리에서 단둘이 만나는 것은 18년 만이었다.
황제의 사생아이자 황후의 양자였던 제1황자와 리아간 공작가의 외동딸 사이에서 연심은 늘 부차적인 문제였다.
젊은 시절에 그들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동맹으로 여겼다. 정열은 필요하지 않았다.
황후도 알고 있었다. 이인삼각이 언제나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문이 황제와 대립할 수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마찰할 가능성도 있었다. 자녀 문제로 분쟁을 일으킬 여지가 있으리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같이 할 수 있는 배우자로서 믿어도 될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이 자기 혼자뿐이었다는 것을 황후는 이제 알고 있었다.
황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냉정하군, 카트린.”
“당신과 화해를 하자고 나온 건 아니에요.”
“알고 있소. 티아가 뭐 계획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겠지. 당신은 그냥 장단을 맞춰 주는 것에 불과할 테고.”
황제가 말했다.
“당신이 우리 아이 말고 다른 아이를 황태자 자리에 앉히는 걸 납득할 리 없잖소?”
콰드득.
황후가 집어 들던 진주 팔찌를 힘껏 움켜쥐었다. 진주가 중간에 끼어 있는 오팔에 긁히면서 망가졌다.
황제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황후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는 멈추어 서서 몇 번 서성거렸다.
“당신은 내가 했던 일이라고 오해했던 것 같지만, 그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요.”
“그레고르.”
“우리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한탄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오.”
황제가 말했다. 결코,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는 진실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황후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것에 어떤 감상적인 기분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황제의 진심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과거의 한때에 상대의 진심을 믿었고, 또 자신의 진심을 드러냈던 적이 있는 만큼 황후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후는 싸늘하게 말했다.
“내 아이를 그 입에 담지 말아요. 그리고 로렌스가 잘되든 못되든 관심 없어요. 이제 와 밀라이라 따위에게 신경 쓸 생각도 없고.”
“카트린.”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그 계집을 그냥 죽였을 거예요.”
“그러면 티아 때문이오?”
황제가 물었다.
“세드릭을 이용해서 뭘 어쩔 셈이오?”
“세드릭을 이용하려는 건 당신 쪽이겠죠.”
황후가 대꾸했다.
“이제 와서 그런 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는 않겠지만, 당신은 에브론 대공가를 싫어했잖아요. 불쌍한 세드릭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그 아버지도 말이에요. 곧은 사람을 옆에 두면 자신이 벌레 먹은 고목이라는 게 잘 보이는 법이니까.”
“…….”
“로렌스는 다를 것 같던가요?”
황제가 쓰게 웃었다.
“이상한 일이지. 완전히 밟아두는 게 낫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말이오.”
“하지만 불안한 거군요.”
“아무튼 이 나이가 되지 않았소? 요즘에 아침에 눈을 뜨면 손발이 저릿저릿해서 침대에서 일어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오. 그래서 간혹 이런 생각이 든다오.”
“……그레고르.”
“긴급한 일로 밤에 보고가 들어오면, 일어나서 그 보고를 받으러 나가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걸리겠구나, 하고, 옳은 판단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리겠지.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일어나지 못하게 될 테고.”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없으니까요.”
“그렇소. 그걸 외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오.”
황제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황후에게 다가왔다.
“이 나이가 되니까 그래. 애정도, 충성도, 혈통도 모두 부질없어. 결국 마지막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올바른 관계와 좋은 됨됨이를 가진 사람뿐이오. 그래서 당신이 여생을 세드릭과 그의 처에게 의탁하고 싶다는 것도 이해되고.”
“제국을 믿을 수 있는 신하에게 맡기고, 또 권력은 권력대로 쥐고, 상속은 원하는 사람에게 하고? 로렌스가 세드릭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일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로군요.”
황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황후의 말대로였다. 로렌스는 그런 그릇이 아니었다.
마음을 넓게 가지고 에브론을 포용하면, 국경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신하의 가치도, 목이 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충언할 수 있는 신하의 가치도 말로 다 할 수 없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그레고르 황제 자신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혈연과 혼맥으로 묶였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그것 역시도, 황제가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황제 자신이 바로 누명을 씌워 이복누이와 그 남편인 에브론 대공을 숙청한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황후가 그를 돌아보고 피식 웃었다.
“당신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된 것은 자업자득이에요.”
“…….”
“나는 당신을 용서하려고 황후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내 증오에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도, 죽을 때까지 증오할 거예요.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하나둘도 아니겠지요.”
“카트린.”
“모든 게 부질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원한을 산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원한에 사무친 사람이 아니라.”
황제가 입을 벌렸지만, 쉽게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황제가 잠시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들어와.”라고 말했다.
아르티제아였다. 그 뒤에 로렌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