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37
악녀는 두 번 산다. 137화
찻잔이 산산조각 났다. 아르티제아의 거실인지라 바닥에는 아직도 하얀 러그가 깔려 있었는데, 거기에 붉은 얼룩이 크게 번졌다.
사람들이 당황하여 세드릭을 황급히 살폈다.
“다치시지 않으셨습니까, 전하?”
“아니, 식은 차였다. 아무렇지도 않아.”
세드릭은 반쯤 정신이 없는 채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혼란한 얼굴로 의사를 다시 바라보았다.
“티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인가?”
“예, 회임하셨습니다.”
의사가 약간 곤혹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세드릭이 전혀 몰랐던 듯 했기 때문이었다.
안스가르를 비롯하여 비밀을 지키며 눈치만 보고 있던 몇몇 가신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 몇몇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가 비 전하를 계속 진찰한 것이 아니라 확답을 드리려면 다시 제대로 봐야 합니다만, 12주에서 14주 사이일 겁니다.”
의사의 말에 세드릭은 망연하게 물었다.
“왜 이런 중요한 일을 아무도 내게 알리지 않았나?”
생각지도 못했다.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가지 일이 정리되고, 아르티제아도 몸이 좀 건강해진, 막연한 ‘나중’의 일이었다.
가족을 꾸리겠다고 마음먹고 나서도 그는 아직 아이가 뛰어다니는 제 집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대뜸 아이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기회가 적지 않았는가.
안스가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 전하께서 말씀하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저희도 모두 모르는 척하고 있었습니다.”
“신중한 숙녀분들은 안심할 수 있는 시기가 되기 전에는 일부러 말씀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정에서 데려온 의사에게만 진료를 보시기도 하고요.”
의사도 말했다.
“지금이야 그런 경우가 아니지만, 상속 문제로 분쟁이 생겨서 태아가 위협당하는 경우도 많이 있으니까요. 후계자라고 떠들썩하게 기뻐하다가 만약의 경우에 집안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을 걱정하시기도 하고요.”
“그렇군.”
세드릭은 괴로운 기분으로 대답했다. 안스가르와 의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르티제아가 그런 이유로 숨겼을 것 같지 않았다.
아르티제아는 그에게는 소식을 전했어야 했다. 걱정이 있다면 오히려 더.
그녀가 만일에 임신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다면, 그것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라 자신에게서 숨기려고 했을 것이다.
“티아는, 괜찮은 건가?”
나온 말이라고는 고작해야 그런 것이었다.
의사는 조금 안심한 기색이었다. 그것은 그가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비 전하께서 허약하신 체질이긴 합니다만, 너무 염려 마십시오. 아기씨께서도 잘 자리 잡고 계시고, 비 전하께서도 정양하면서 체력을 붙이시면 됩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절대 안정하셔야 합니다.”
“그런가.”
세드릭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눈치 없는 기사 하나가 앞장서서 외쳤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쉿, 조용히 해.”
“비 전하의 침실 바로 옆이다.”
양옆에서 곧바로 태클이 들어와 그 기사를 침묵시켰다.
축하의 말은 나직나직한 소리로만 건네어졌다. 아르티제아가 사원의 핍박을 받아 쓰러진 시점이었다. 의사가 별문제 없으리라고는 했지만, 큰소리로 축하를 나눌 상황은 아니었다.
시급한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분노해야 할 때였다.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에브론 대공가의 사람들은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까지 나이 든 가신과 기사들은 짐작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도 의사의 확답에 비로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후계자가 생겨야 비로소 한 가문의 주인으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에브론 대공가에는 직계 혈족이라고는 세드릭 한 사람밖에 없었다.
결혼을 했다고는 하지만, 역시 후사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위태로웠던 에브론 대공가도 드디어 반석 위에 올라설 것이다.
결혼에 이어 때맞추어 이렇게 좋은 소식까지 들려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공비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삼 년 이상 천천히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드릭이 아르티제아의 침실로 향하자 들뜬 가신과 기사들이 우르르 뒤를 따랐다.
안스가르가 그들을 막아섰다. 알폰스마저도 안스가르에게 가로막힌 채 기웃거렸다.
헤일리만 세드릭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푹신한 침대에 푹 파묻혀 있었다. 겉옷은 모두 벗기고 편안하게 해준 상태였다. 헝클어진 머리칼은 베개 위로 흩어져 있었다.
마커스가 발을 주물러주고 있다가 세드릭을 보고 일어섰다. 미열이 있는 이마를 서늘한 물로 식히고 머리칼을 정리하던 앨리스도 일어섰다. 눈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소피는 아예 구석진 곳에 가서 훌쩍훌쩍 울고 있다가 얼른 일어서서 앞치마로 얼굴을 감추었다.
아르티제아가 회임했다는 기쁨보다는 험한 꼴을 당하고 혼절한 것에 대한 설움이 더 컸다. 결혼을 하고 로산 저택에서 나왔으니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회임했다고 모두가 기뻐하고 있는 마당에 불측하게 눈물을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루 이틀 푹 주무시면 깨어나실 겁니다.”
의사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세드릭은 앨리스를 바라보고 물었다.
“티아가 따로 만나는 의사는 없나?”
“없습니다.”
앨리스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세드릭이 사람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물러가라.”
“전하.”
헤일리가 입을 열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도를 지나친 물음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리시아가 없는 지금, 자신이 아니라면 아무도 아르티제아를 대신해서 그 말을 물어봐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쁘지. 기쁘지 않을 리가 있나.”
세드릭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이가 눈을 감고 있는데, 어떻게 기쁘다고 말하겠느냐?”
“흐흑.”
소피가 참지 못하고 흐느낌 소리를 냈다.
앨리스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보듬었다. 그리고 발소리 없이 물러갔다.
세드릭의 마음을 헤아린 마커스와 헤일리도 그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자 둘만 남았다.
세드릭은 아르티제아의 곁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기울어졌지만, 아르티제아는 눈을 뜰 줄 몰랐다.
그는 이불 밑에서 아르티제아의 손을 꺼냈다. 힘없는 손가락이 세드릭의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흘러나갔다.
“당신을 믿기로 한 게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게 되는군요.”
그는 그 손을 제 손등 위에 얹어 보았다. 원래부터 이만큼 희었는지, 혈색이 없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당신이 자신을 아끼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여러 가지를 숨기는 것도 문제입니다. 지킬 마음이 없으면서 태연하게 약속하는 것도 문제이고…….”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고 그 손등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손을 도로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몸을 던졌을까?
그럴 수도 있었다. 아이가 없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어쩌면, 다시 했던 청혼을 받아주고 진짜 부부가 되었으니, 조금은 스스로를 아껴줄 줄 알았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희망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떤 밤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느끼고 새벽이 될 때까지 행복한 기분에 잠겼다. 그러나 어떤 밤에는 꿈에서까지 가슴을 쥐어뜯어야만 했다.
“내가 당신을 바꿀 수 있을까?”
그는 속삭이듯이 물어 보았다.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드릭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결정한 마음은 그리 간단히 바꾸지 못한다.
「세드 님은 돌 같은 분이에요.」
리시아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깨질지는 몰라도 물성이 변하는 일은 없죠.」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데.」
「칭찬 아니에요. 결국 언젠가는 깨지고 말 테니까.」
「…….」
「사람은 신념만 지키면서 살 수 없어요. 자신을 용서하세요. 신은 당신과, 당신의 마음을 이미 용서하셨으니까.」
리시아는 옳았기도 하고, 또 틀렸기도 하다.
세드릭은 스스로를 용서했다. 적어도 그러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용서를 받으려면 반성하고 변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변하지 못했다.
아르티제아에게 두 번에 걸쳐 청혼의 말을 했을 때에 그는 변하는 대신 깨졌다.
첫 번째에는 삶의 방식이 깨졌고, 두 번째에는 마음의 일부가 부서졌다.
그래도 그녀를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세드릭은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뺨에 자신의 뺨을 대어 보았다. 아르티제아가 색색거리고 내쉬는 고른 숨결이 세드릭의 귓가에 닿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세드릭이 침실에서 나왔을 때에는 이미 사위가 조용했다. 안스가르가 눈치 빠르게 가신들을 물리고, 근처에서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었다.
거실에는 네 사람이 있었다.
마커스와 앨리스는 세드릭에게 목례만 하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밤새 옆을 지킬 것이었다.
나머지 둘은 헤일리와 프레일이었다.
세드릭은 먼저 프레일을 불러 물었다.
“납치미수범으로 붙잡아 온 자들은?”
“별채에 가둬 두었습니다. 직접 심문하시겠습니까?”
“흠 잡히지 않을 정도로 대접해라. 심문은 기다려. 폐하부터 알현하겠다.”
“예.”
그것은 누구의 의혹도 없이 심문하기 위해서였다. 황제의 신하를 증인으로 세우고, 사원에서 변명이나 꼬리자르기를 할 여력도 없이 붙잡아 쳐낼 것이다.
세드릭은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당장 화를 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마음도 가라앉히고 나왔다.
그런데도 참을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세드릭은 그다음에 헤일리를 바라보았다. 헤일리는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에브론 본성에서는 하급 관리에 불과했다. 조르딘 가문의 딸로서 세드릭과 어린 시절을 함께 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주 대면했다.
그러나 주군과 신하로서 직접 명령을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아르티제아의 시녀가 된 직후에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헤일리는 세드릭을 인간적으로 좋아했다. 하지만 주군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가 지나치게 무르고 정에 약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헤일리가 에브론에 실망하게 되는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의 세드릭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눈동자는 어두운 빛깔로 물들어 있었고,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예기와 위엄이 드러나 있었다.
거기 서 있는 것은 갈 길을 결정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이십 대 청년이 아니라 비바람을 모두 맞고 깎이며 버틴 바위 같은 남자였다.
“헤일리.”
“예.”
“티아가 쓰러지기 전에 네게 따로 지시한 게 있겠지?”
헤일리는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