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57
악녀는 두 번 산다 157화
리시아는 그날 밤 자정 즈음에 문득 눈을 떴다. 지독한 악몽을 꾸었는데,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가슴이 타들어가는 와중에 로렌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리시아는 일어나 앉았다.
꿈에서 로렌스를 본 것은 아마 낮에 아말리에와 아르티제아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리시아는 서부에서도 로렌스를 떠올리지 않는 적이 없었다.
아르티제아가 걱정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모르는 체하려고 애썼지만, 신열을 앓듯 로렌스의 꿈을 꾸고 깨어난 것도 여러 차례였다.
돌아올 때에도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르티제아가 원치 않으니 모르는 척 하려고 했을 뿐이다.
리시아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에브론 대공저는 고요에 물들어 있었다.
리시아는 등불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경비병들은 그녀가 산책을 나간다는 말에 크게 염려하지 않고 내보내 주었다.
리시아가 비록 전장에 나가는 기사는 아니지만, 제 한 몸 지킬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리시아는 말에 올라 사벨린 가로 향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로렌스가 그녀에게 자기 집이 사벨린 가에 있다고 말했을 때에는 찾아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왜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로렌스의 저택 정문이 보이는 곳에서 말을 세웠다.
와 놓고도, 리시아는 고민했다. 들어갈까 말까. 사실 만난다고 해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잘 알 수 없었다.
고민하던 때였다.
하필 그때 외출했다 돌아온 로렌스의 마차가 달려왔다. 리시아는 얼른 길가로 비켜났다.
그리고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마차가 자신을 휙 지나쳐 버린 것이 마치 축객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시아가 속에서 올라오는 쓴물을 삼키기 전에 마차가 멈춰 섰다.
하인이 문을 열어주기 전에 로렌스가 스스로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리시아는 몸을 움찔했다.
로렌스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희었고, 손가락은 다듬어진 것처럼 고왔으며, 손바닥은 부드러웠다. 에브론의 어떤 남자도 그런 손을 갖고 있지 못할 터였다.
리시아는 그 손을 잡는 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신분 높은 남자가 하는 에스코트는 받아들여야 마땅했다.
그러나 과연 이 손을 잡아도 되는 건가. 그것은 배신인가.
예의와 감정이 뒤죽박죽된 채로 리시아는 로렌스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그러자 로렌스가 그녀를 확 끌어당겨 말에서 안아 내렸다.
“왔군.”
로렌스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마치 도자기로 만든 인형에 숨결이 깃든 것 같았다.
“그런, 그런 뜻으로 온 것은 아니에요.”
“그럼?”
리시아는 숨을 몰아쉬었다.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리시아.”
이름을 알려준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로렌스의 손이 리시아의 머리칼을 가볍게 움키듯 쥐었다. 끌어당기는 것과 접근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 숨결이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그것은 리시아에게 몹시 익숙한 느낌이었다. 넋을 잃을 만큼 황홀했으나 등골이 서늘할 만큼 무서웠다.
리시아는 입술이 닿기 전에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기도하는 기분이 되고 만다.
“저하고 같이 서부로 가시지 않겠어요?”
“서부?”
로렌스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이내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네. 서부로……. 아니, 동부나 남부라도 상관없어요.”
리시아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전부 다 버리고 저와 같이 가주세요. 그러면 저도 모든 걸 버리고 평생 함께해 드리겠어요.”
그것은 고작해야 몇 번 마주쳤을 뿐이고, 대화다운 대화는 두 번 나눈 남자에게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리시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찾고 있던 문제에 관한 해답이었다. 무엇에 관한 해답인지 리시아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사실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도 리시아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온당한 방향으로 향할 것이다. 눈이 환히 트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명확했다.
오래전에 신이 가리키는 방향을 직접 보았다는 성인이 바로 이런 느낌을 받았으리라.
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모든 것? 어차피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무슨 소리야?”
“로렌스 경.”
“그러지 말고 내게 와.”
그가 리시아를 휙 끌어당겨 허리를 감아 안았다.
리시아는 로렌스의 흰 뺨 위로 등불이 만드는 그림자가 붉게 드리워지는 것을 보았다. 긴 속눈썹에 빛이 맺혀 금빛으로 보였다.
“에브론 따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부귀와 세상 제일의 쾌락을 다 누리게 해주지.”
“전 그런 것 필요 없어요.”
“그러면 별밤이 들어 있는 관을 씌워줄까?”
그것은 황후의 보관을 이르는 말이었다.
로렌스가 고개를 숙였다. 리시아는 이번에도 얼굴을 돌려 키스를 피했다.
“놔주세요.”
“쓸데없는 생각 마. 그냥 나한테 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최고의 여자로 만들어줄 테니.”
그러면 모든 것을 다 해주겠노라고 속삭이며 그는 리시아를 더 가까이 끌어당겨 깊이 품으려 했다.
그러나 입을 맞추기 전에 리시아의 소매에서 짤막한 화살촉이 나왔다. 로렌스는 깜짝 놀라 그녀를 놓고 물러섰다.
“다치시게 할 생각은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리시아.”
“전 비 전하께 돌아가 봐야겠어요.”
돌아서는 리시아의 뒤에 대고 로렌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네 마음이라는 건 고작 그 정도의 것인가?”
“저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시잖아요.”
리시아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로렌스가 내뱉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뭔가가 달라지는 건가? 네가 말하는 사랑은 빈털터리 가난뱅이가 되어서야 이룰 수 있는 건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면, 에브론 대공을 위해서 그러는 건가?”
리시아는 고통스러운 기분으로 로렌스를 바라보았다.
떠난다고 해서 로렌스가 모든 것을 잃는 것도 아니다.
황제의 아들이라는 것만 버리면 된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작위를 가지고 있고, 부유한 귀족이다.
더 큰 욕심 부리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로렌스는 그 욕심과 불만으로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그가 욕심을 내려놓고 함께 떠나 준다면, 서로를 사랑하려고 애쓰며 소박하고 아기자기하게 살 수 있다.
그러면 누구도 괴롭히지 않고 살 수 있다. 자신도 아마도 온 힘을 다 해 용서해 보려고 애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렌스는 거절했다. 리시아가 달리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리시아는 돌아섰다.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리시아!”
로렌스가 다시 한 번 외쳤다.
그래도 리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로렌스가 알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에게 더 크고 훌륭한 것을 주는 것이다.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뭔가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리시아 쪽이어야 마땅했다. 그녀가 정말로 제게 손을 내밀려 했던 것이라면.
로렌스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 * *
그로부터 한동안 제국은 표면적으로는 몹시 조용했다.
정부가 전에 없이 바쁘게 움직이기는 했다.
린 재상은 세드릭의 약속이 기껏해야 단기적인 대책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만 해도 관리들에게는 보통 아닌 중압이 걸렸다.
로렌스의 남부 정벌을 위한 준비는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심각한 일이었다.
남부의 해적 토벌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주기적으로 주청되어 오던 문제였다.
황제도 그 심각성에 대해서는 늘 염두에 두던 바였다.
단순히 로렌스에게 공적을 세우게 해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왕 중앙에서 군사를 움직일 거라면 한 번에 최대한의 성과를 거두어야만 했다.
반면, 이제까지 방치하다시피 해온 것에도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 가얀을 비롯하여 군관들은 매일 머리를 싸맸다.
그런 일들이 사교계와 살롱, 커피 하우스의 주된 화제가 되었다.
반면, 추문과 음모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아르티제아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릴 것이었다. 아말리에에게도 그렇게 말해두었다.
「뭐,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도, 경의 입장에서는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겠지요.」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도당을 이루어 폐하와 힘 겨루기를 할 생각은 없어요. 그게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비 전하.」
「오히려 폐하의 환심을 사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러니 염려 말고 기다리세요.」
아말리에는 그게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얼굴로 아르티제아를 바라보았다. 로렌스를 밀어내야 하는 입장에서 황제의 총애를 구한다는 게 모순으로 느껴졌던 탓이다.
아르티제아는 황제의 마음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말했고, 아말리에도 그녀의 말이 그럴 듯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동의하고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기에 아르티제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폐하의 뜻을 따르며 기다리다 보면, 경들은 제 말이 옳음을 알고 돌아올 것입니다.」
아르티제아는 지금 당장 그들에게서 충성심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억지로 부담을 주어 이쪽 편으로 만들어봤자 거래적 관계를 고착시킬 뿐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충성심은 이익을 위해 뭉친 도당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세드릭의 치세는 그렇게 시작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일은 상황을 바꾸는 것이다. 그들에게 결단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아말리에는 또다시 송구해했으나 아르티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말리에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가얀도 동의했다. 한숨을 내쉬기는 했다.
마음은 복잡하지만, 황제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아르티제아가 말한 ‘때’가 오지 않는다면 결국 황제의 충신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것대로 심적으로 편치 않군. 에브론 대공 전하께서 차기 황제가 되신다면, 결국 눈치 보며 늦게야 대세에 올라탄 형국이 되지 않겠는가?」
본디 공이란, 어려울 때에 함께한 사람이 으뜸인 법이다. 박쥐처럼 양 쪽을 살피다가 유리해지는 것이 확실해진 다음에야 합류한 자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다.
아말리에도 가얀의 그런 심정을 백번 이해했다. 자신도 그런 불안이 있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말리에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에브론 대공 전하일세. 어차피 어려울 때에 함께한 공신들은 에브론 대공가의 가신들이 으뜸일 터이고, 에브론 대공 전하께서 그런 이유로 사람을 쓰고 안 쓰고를 결정하시지도 않을 테니.」
「그건 그런가.」
「신의는 고난을 함께하는 것이나 마음을 터놓는 데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맡겼을 때에 확실하게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도 나오지 않는가.」
「차라리 그쪽이 마음 편할 것 같아. 요새 같아서는.」
가얀은 지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로렌스를 위해 군대를 꾸려, 남부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