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63
여주인공의 오빠를 지키는 방법 183화
그 말을 듣고 히아킨이 움칫 눈매를 찌푸린 뒤 다독이듯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누가 아그리체를 핍박한다고.”
“그렇지 않아도 참혹한 죽음을 맞은 제 형님이 베르티움의 농간으로 죽어서까지 안식을 얻지지 못하고 저렇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듣고 히아킨은 낮게 침음했다.
제레미는 얼굴에 더욱 짙은 수심을 드리운 채로 말을 이었다.
“심지어 거기에 더해 가여운 제 누이마저 똑같은 변을 당할 뻔한 일로 저희 남매들은 요즘 헤아리기 어려운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에 주변의 분위기가 절로 엄숙해졌다. 아그리체의 다른 이복 형제들도 덩달아 상심한 낯을 해 보였다.
“가뜩이나 제 식솔들은 친목회 동안 휘페리온과 있었던 잦은 마찰로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그래도 자칫 이번 모임의 취지를 퇴색시키기라도 할까, 속으로만 감정을 삭이며 참아 왔던 것인데.”
제레미의 말은 일단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보아 온 모습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항상 먼저 이유 없이 시비를 걸던 것은 휘페리온이었고, 늘 거기에 대응하지 않고 참아 오던 것은 아그리체였다.
일단 겉보기에는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런 당치도 않은 독살 누명까지 쓸 뻔하다니.”
그래서 히아킨도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골치가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더군다나 지금 그의 식솔이 경솔하게 발언한 독살 의혹은 지금까지처럼 젊은이들의 단순 혈기에 의해 일어난 다툼으로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문 간의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한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건 내 식솔이 경솔히 입을 놀린 잘못이군. 실수를 뉘우치도록 충분한 주의를 주겠네.”
히아킨은 뜸 들이지 않고 꼬리를 자르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 이곳에는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여기서 말실수를 했다가는 나중에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고 제레미는 속으로 냉소했다.
“단순 실수로 치부하고 넘어갈 사안은 이미 아닌 것 같습니다, 백의 수장님.”
히아킨이 원하는 것처럼 이번 일을 얼렁뚱땅 그냥 넘길 마음은 없었다.
기껏 마련된 기회였으니 지금까지 자존심을 굽히고 엎드려 있던 만큼 최대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줄 생각이었다.
제레미는 아까의 히아킨이 그랬던 것처럼 유감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것을 보고 히아킨이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자네…….”
바로 그때, 정원의 입구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들린 소리였기 때문에 정원 안에는 순식간에 살얼음 같은 침묵이 낮게 깔렸다.
제레미도 고개를 돌려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주시했다.
정원의 입구는 덩굴의 잎으로 이루어진 아치형 지붕에 덮여 있었다. 그 속은 현재 그림자에 가려져 어두웠다.
끼기긱.
마침내 부식된 철이 긁히는 것 같은 작은 소음이 녹색 그림자를 뚫고 고막을 찔러 들어왔다.
“뒤로 물러나.”
제레미가 팔을 들어 다른 이복 형제들이 앞으로 나서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면서 그 역시도 한 발짝 뒤로 걸음을 물렸다.
물론 아그리체의 사람들은 그의 보호가 필요한 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단련된 육감이 저 앞에 꺼림칙한 것이 있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끼기긱…….
마침내 시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짙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사용인들이 입는 것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진흙탕에서 구르다 온 것처럼 지저분했다.
“바깥에 무슨 일이지? 조금 전의 그 비명은 뭔가?”
히아킨 휘페리온이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기이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정원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차례 훑었을 뿐이었다.
모두가 이상함을 느꼈다.
다시 보니 그녀의 복장은 위그드라실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약간 달랐다.
그때, 여자의 더러운 소매 밑으로 빠져나온 무언가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수장님!”
정원의 입구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이 앞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이…….”
차를 마시고 기절한 듀란을 막 의무실에 데려다주고 온 남자가 급히 정원 안쪽으로 들어서다가 입구 앞에 서 있던 여자의 등에 몸을 부딪쳤다.
유리알 같은 무감정한 눈동자가 휘익 옆으로 돌아갔다.
푸욱!
모두가 상황을 곧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으…….”
여자의 몸에 반쯤 가려진 남자가 동공을 크게 확장시킨 채 잘게 신음했다.
검은 소매가 작게 흔들린 직후, 피에 젖은 날붙이가 남자의 가슴팍에서 빠져나왔다.
후두둑…….
뒤이어 조금 전까지 여자의 손이 틀어박혀 있던 남자의 가슴께에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제레미와 히아킨을 비롯한 사람들은 위그드라실에서 볼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던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눈앞에 두고 경악했다.
끼기긱…… 끼긱.
가슴을 뚫린 남자가 경련하며 잔디 위에 쓰러진 것과 동시에 그의 뒤로 기묘한 쇳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무리 지어 들이닥쳤다.
“……으, 으아악!”
곧 찢어질 듯한 비명이 정원 안에 울려 퍼졌다.
* * *
“밤사이 비가 오더니, 지금도 날이 흐리군.”
록사나는 회랑에 서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귓가로 흘러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바드리사와 류자크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드리사를 보필하듯이 뒤에 서 있던 류자크가 록사나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 보였다.
“오후 늦게는 날이 갤 거라고 하더군요.”
록사나도 두 사람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힐끔 앞쪽을 확인했다.
조금 전, 저 멀리서 카시스가 지나갔다.
록사나는 그래서 회랑을 지나가다 말고 잠깐 걸음을 멈춘 채 그의 모습이 작아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시스는 오늘 새벽 해가 뜨기 전에 방을 빠져나갔다.
아마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어느 한쪽만이 아닐 것이다.
“긴 밤을 지새운 것 같은 얼굴이야.”
바드리사가 잠깐 록사나의 얼굴을 살피더니 말했다.
“청문회 때문인가?”
록사나는 눈길을 잘게 내리깔며 대답했다.
“마음이 소란하여 잠을 잘 이루지 못한 것이 티가 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바드리사는 거기에 동조하는 대신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리 심약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쩐지 뼈가 있게 들리는 말이었다.
록사나는 다시 시선을 들어 마주한 얼굴을 응시했다.
바드리사는 조금 전과 변함없는 담담한 낯을 한 채 그런 그녀를 마주 보았다.
“보이는 것처럼 마냥 상심해 있기만 해서는 어찌 가문의 무게를 지탱하겠는가.”
내포된 의미가 역력히 드러난 말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록사나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바드리사는 록사나가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보였던 것과 달리 실제로는 깊이 상심한 상태가 아니며, 또 실제로 아그리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록사나임을 알고 있다고 지금 그녀의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록사나는 바드리사의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려 보였다.
“존경할 만한 혜안을 가지신 만큼, 저와 제 동생이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바드리사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누이 쪽이 아우보다 확실히 예의가 발랐지만…… 맹랑하기로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그럼 전 들러야 할 곳이 있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록사나는 그렇게 인사한 뒤 먼저 자리에서 발길을 뗐다.
바드리사는 록사나를 붙잡지 않았다.
* * *
“아그리체 양.”
잠시 후 뒤에서 류자크가 록사나를 불렀다.
바드리사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류자크는 어머니를 두고 록사나에게 할 말이 있어 쫓아온 듯했다.
그는 진중한 얼굴로 록사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지난 조언에 감사를 표합니다.”
록사나는 일순간 류자크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번에 ‘혹시 후계자로서 그가 알아 둬야 할 이야기가 오갈지도 모르니 두 가문의 협상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자신이 첨언한 것이 기억났다.
그건 딱히 조언이라고 할 것도 아니었는데, 류자크는 참 견실한 사람이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에요.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그래서 록사나도 그냥 그렇게 말했다.
그러다 문득 류자크의 등 뒤로 지나가는 여인이 눈에 띄었다.
“휘페리온 양.”
록사나는 그녀를 불렀다.
그 이유는 지금 판도라가 급히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그리체 양.”
판도라가 멀리서 뒤돌아보았다.
“정원에 가시는 길인가요?”
록사나가 묻자 판도라의 낯빛에 곤혹감이 어렸다.
“아그리체 양도 소식을 들으셨나 보군요.”
그 말대로, 록사나 역시 정원에서의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기 위해 회랑을 지나던 길이었다.
판도라도 조금 전에 막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
그때 판도라는 점심 식사 이후부터 모습이 통 보이지 않는 오르카를 찾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수장인 히아킨은 오르카와 판도라에게 남은 친목회 동안 각별히 행동을 조심할 것을 명했다.
특히 오르카에게 거듭 얌전히 있을 것을 당부한 데 이어 판도라에게도 몰래 오르카의 감시를 맡겼다.
히아킨이 위그드라실 내에서 오르카를 유독 철저히 주시하도록 판도라에게 명령한 것은 역시 오르카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친목회 전에 페델리안에서 거하게 사고를 친 것도 있고 말이다.
물론 오르카가 판도라에게 주장한 대로 그는 위그드라실에 와서 내내 얌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판도라도 히아킨도 그런 오르카에게 오히려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성격상 이렇게 따분한 단체 생활을 하는 것을 오래 참아낼 리 없었기 때문이다.
히아킨이 판도라에게 오르카의 감시를 맡겼던 이유이기도 했다.
사실 판도라는 이럴 바에는 그냥 오르카를 휘페리온에 두고 올 것이지 싶었으나 그것을 수장의 앞에서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판도라는 사라진 오르카의 행방을 찾다 말고 정원에서의 소동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그리체와 잦은 마찰을 일으켜 히아킨의 골치를 아프게 하던 가문의 철없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이번에는 아그리체를 상대로 독살 의혹을 주장했다고 했다.
“네, 저도 마침 그쪽으로 가던 길이었으니 동행하죠.”
“정원에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옆에 있던 류자크가 의문을 표했다.
“그게…….”
판도라는 대답을 망설였다.
바로 그때, 록사나와 류자크의 시야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판도라의 등 뒤에 있는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들의 온몸은 짙은 갈색으로 얼룩져 있었고, 움직임은 어딘가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끼기긱…….
귀에 묘한 소음이 스몄다.
록사나는 그들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순간, 그녀의 본능이 머릿속에서 경고음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