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7
악녀는 두 번 산다 17화
로산가의 옛 집사, 마커스 한슨이 살고 있는 곳은 레비 가의 구석에 있는 추저분한 술집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낮에는 잔일을 하고 밤에는 접객을 하면서 술집에 딸려 있는 골방에서 살았다.
마커스에게는 자식과 손주가 여럿 있었지만, 일가가 모두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되었다.
아르티제아는 돌아오기 전에 마커스 한슨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의 손녀인 리제 한슨이 복수를 하겠다며 이름을 숨기고 아르티제아의 하녀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리제 한슨은 자기가 완벽하게 신분을 숨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무렵의 아르티제아는 이미 적이 많았다. 하녀를 들이는 일 하나도 신중해야 하는 시기였다.
아르티제아는 리제의 뒷조사를 마치고, 그녀의 야심과 기질이 자신이 하는 일에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마커스 한슨의 위치를 확보해 두었다. 할아버지를 인질로 잡힌 리제는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충성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커스의 주변에 로산 후작가의 냄새를 풍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직접 만난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술집에 들어가자 한눈에 누가 마커스인지 알 수 있었다.
마커스는 78살의 노인이었으나 꼿꼿했다. 입고 있는 예스러운 정장은 낡았지만 깔끔했고, 소맷부리도 희었다
그는 같이 일하는 다른 자들이 세드릭의 검과 휘황한 옷에 허둥거릴 때에도 칼날 같은 단정함을 잃지 않고 물었다.
“귀하신 분들께서, 이런 곳에 무슨 용건이십니까?”
“잠시 시간을 내주겠어요, 한슨 씨?”
“…….”
마커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렇지만 곧 다른 직원에게 말했다.
“잠시 다녀오겠네.”
“괘, 괜찮수, 영감?”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아르티제아는 세드릭과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마커스가 안내한 곳은 잡동사니를 내놓는 술집 뒤의 공터였다.
“좋은 장소는 아니지만, 이런 가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라 깔끔한 장소로 안내하기가 어렵군요. 에브론 대공께서 어쩐 일로 이런 자를 찾아오셨습니까?”
그는 세드릭을 알아보고 그렇게 물었다.
마커스가 로산 후작가에서 쫓겨나 달아난 18년 전에 세드릭은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부친인 선대 에브론 대공을 닮아 있었다.
한때 후작가의 총집사로서 마커스는 모든 고위 귀족의 얼굴과 성품, 약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쫓겨난 몸이지만, 로산 후작 가는 한슨 가가 대를 이어 모시던 주인입니다. 알려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드릭이 찾아온 이유를 마커스는 로산 후작가의 약점을 캐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단순한 호위일세.”
세드릭이 아르티제아를 가리켜 보였다.
아르티제아는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백금발이 차르륵 어깨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쓰레기장 같은 공터에도 볕은 잘 들어, 아르티제아의 머리칼이 환하게 반짝였다.
“…….”
“안녕하세요, 마커스 한슨 씨. 로산의 아르티제아입니다.”
아르티제아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커스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한과 울분, 그리움과 설움이 북받쳐 올라와 이제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파도치게 했다.
마커스는 첫 마디로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밀라이라의 딸년?
일가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로산 후작가를 몰살시킨 원인?
그렇지만 그는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미카엘 님을 꼭 닮으셨군요. 소후작님.”
18년의 세월은 그의 안에서 원한을 깎았다. 노쇠는 울분을 터뜨리지 못할 만큼 몸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리움은 설움을 불렀다. 마커스에게 가장 크게 남은 감정은 설움이었다.
그리고 설움은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감정이다. 이해하고, 알아주고, 안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커스는 아직도 로산 후작가가 그리웠다.
한슨 일가는 대대로 로산 후작가를 모시며 집사로 종사해온 가문이었다. 귀족은 아니지만, 평민과도 다르다고 자부했다.
마커스는 로산 후작 저택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는 후작가 아이들의 놀이 상대가 되었다.
철이 들 무렵부터 미카엘 로산의 시종으로 일을 배웠다. 조금 경험이 쌓인 뒤에 총집사인 할아버지 밑에서 집사 일을 시작했다.
그의 자식들도 로산 후작 저택에서 태어났고, 손자손녀도 그랬다.
아들들은 그의 뒤를 이어 집사 수업을 받았고, 딸들은 주인마님과 아가씨들의 측근하녀가 되었다.
그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족이 생각나는 만큼, 좋았던 옛 시절이 생각나는 만큼, 로산 후작가도 그리웠다.
이 괴로움, 설움을 받아줄 사람을 원했다.
아르티제아는 일렁이는 마커스의 얼굴과 눈에서 그것을 읽어냈다.
그것은 옛날, 그녀를 죽이겠다고 찾아왔던 리제 한슨에게도 있었던 감정이었다.
“절 소후작이라고 불러주시는 분은 한슨 씨가 처음이에요.”
아르티제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마커스는 딱딱하게 말했다.
“소후작님께서 여기에 오신 것을…… 그년은 압니까?”
“몰라요. 안다면 오지 못하게 했겠지요.”
아르티제아는 그렇게 말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깊이 구부리며 정중하게 절했다.
마치 사제에게 하기라도 하는 듯 한 공손한 절이었다.
“한슨 씨에게 할 이야기가 여러 가지 있지만, 먼저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소후작님의 어머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네. 어머니는 로산 후작가의 직계를 모두 독살하고 그 죄를 한슨 일가에 덮어씌우려 했지요. 저를 로산 후작가의 상속자로 만들기 위해서요.”
그 독살 사건은 미카엘 로산의 상중에 벌어졌다. 아르티제아가 생후 6개월이었을 때의 일이다.
밀라이라가 낳은 딸이 미카엘의 얼굴을 빼다 박은 듯이 닮았을 때에 로산 후작가는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아르티제아가 죽어가던 미카엘의 자식일 리는 없었다. 아마도 미카엘의 젊은 손자들 중 하나가 밀라이라와 불장난을 저질렀으리라.
미카엘의 뒤를 이어 로산 후작이 된 장녀는, 제 아들이 조모를 임신시켰다는 말을 듣느니 그냥 아르티제아를 여동생으로 인정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하여 아르티제아는 로산 후작과 후작 부인 사이에 태어난 적녀가 되었다.
그러나 아르티제아를 임신한 일로 인해 황제의 총애를 잃은 밀라이라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보다 확실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그녀는 장례식을 기회로 삼았다. 직계 자손이 모두 모인 저녁 식탁에 독을 풀었다.
밀라이라가 그리했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마커스는 밀라이라를 고발하려고 했다.
로산 후작가의 방계 혈족들과 인척들이 도와줄 것이다. 증거와 증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특했던 딸이 벌벌 떨며 그를 잡았다.
「싸워서는 안 돼요, 아버지. 우리가 죽어요.」
「증거가 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바로 하루 이틀 사이에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밀라이라의 죄가 증명되더라도 그 사이에 분명히 우리가 죽을 거예요. 그 여자는 그러고도 남을 여자예요.」
딸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누가 우릴 지켜줘요? 로산 후작가의 친인척들이요? 그럴 리가 없어요. 자기가 가져갈 수 있는 상속분이 없나 하는 것에만 눈이 벌건 자들인 걸요.」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라는 말이냐?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뻔히 아는데!」
「어차피 상속은 살아남은 아르티제아 아가씨 몫이에요. 아버지가 진실을 밝히는 데 성공하면, 아가씨가 아버지한테 감사할 것 같아요? 생모의 원수가 되는 거라고요!」
딸의 말이 옳았다.
「아버지, 제발 포기해요. 우리 집안하고 로산 후작가는 이미 끝장났어요.」
만일에 로산 후작가에 살아남은 다른 상속자가 있었다면 그는 끝까지 충성하여 싸웠으리라.
하지만 남아 있는 로산 후작가의 직계는 아르티제아뿐이었다.
어차피 로산 후작가를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밀라이라는 한슨 일가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결국 마커스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먼저 자식들을 도주시켰다.
이름을 숨기고 로산 후작가도, 한슨 가문도 잊어버리고 살라고 말했다. 자식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됐다고 마커스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차마 자신은 그 이름을 버리지 못했다.
그가 나름대로 명예롭게 여겼던 한슨 가문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는 아직 마커스 한슨이었다.
‘어차피 늙은 몸이다. 언젠가 밀라이라가 날 발견해서 죽인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됐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밀라이라의 음모는 흉악했으나 서투르고 거칠었다. 쓸 만한 조언자도, 믿을 만한 고용인도 없었다.
마커스는 몸을 숨기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딸의 예상보다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황제가 개입한 것이다.
황제는 밀라이라가 부정을 저지른 일로 크게 노했었다. 하지만 결국 밀라이라가 처형당하도록 내버려두지는 못했다.
막대한 뇌물과 권력이 진실을 뒤덮었다.
황제는 밀라이라에게 다시 침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밀라이라는 새처럼 황제의 품으로 날아가 안겼다.
독살범을 찾는 일은 유야무야 되었다.
마커스는 다시 세상에 고개를 내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레비 가의 술집에 의탁해서 질긴 목숨을 부지해온 것이다.
“어머니가 한 짓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죄는 어머니 대신 드리는 게 아닙니다.”
마커스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르티제아는 허리를 펴고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로산 후작가의 마지막 자손으로서, 가신을 지키지 못한 것을 사과하는 겁니다.”
“소후작님…….”
“죄송합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마커스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그가 기어이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흰 소매로 눈가를 눌렀다.
아르티제아가 다가가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마커스는 그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세드릭은 한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가족 이상으로 그를 소중하게 여겨 준 가신들이 있고, 또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일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틀림없이 로산 후작가 안에서 고립되어 있었을 아르티제아를 처음으로 보살펴줄 사람이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때에 로산 후작가의 집사 빌은 밀라이라에게 세드릭이 왔다간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쨍그랑!
밀라이라가 벌떡 일어서며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예술품에 가까운 유리 화병이 가차 없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표범 가죽이 그대로 살아 있는 러그 위에 색유리가 퍼져 반짝거렸다.
빌은 바지에 유리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얼른 밀라이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공손히 슬리퍼를 내밀었다.
속옷 위에 얇은 가운 한 장만 입고 맨발이었던 밀라이라는 그 슬리퍼에 발을 꿰며 다시 털썩 소파에 앉았다.
“다시 말해 봐.”
“에브론 대공 전하께서 어째서 저더러 아르티제아 아가씨가 아니라 마님에게 충성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세드릭이 한 말을 빌은 제 좋을 대로 적당히 해석해서 말했다. 밀라이라가 불처럼 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