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70
악녀는 두 번 산다 169화
리시아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황야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아니, 그것은 황야가 아니다. 본래는 기름진 밀밭이었을 땅이었다.
하지만 가꿀 사람이 남지 않은 땅은 밀밭이 아니라 황무지로 변했다.
망가진 마을에는 폐가가 가득했고, 한때는 길이 있었던 곳에 부서진 수레와 마을을 표시하는 돌기둥이 무너진 채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한 번도 가꾸지 않은 땅보다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리시아는 한 번도 가꾸지 못한 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온 모반자의 마을이 바로 그런 땅에 있었으니까.
에브론에는 그런 곳이 아주 많았다. 인간이 감히 자연에게 대서지도 못하여 한 번도 갈지 않은 땅. 길도 없고 마을도 없는 땅. 본디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얼어붙은 평야들.
하지만 그 앞에 서서 두려움은 느꼈을지언정 처참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처참했다.
「나는 반대다.」
무거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리시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져 두 손으로 묶어 잡았다.
세드릭이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색이라고 해서 다 똑같이 어두운 것은 아니다. 리시아가 알고 있는 세드릭의 눈동자는 본래 온화한 밤빛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눈동자 안에 서린 것은 얼어붙은 그림자였다. 오래된 고독과 절망감이 깊은 곳에서부터 퇴적되어, 이제는 돌덩이처럼 싸늘한 색을 띠고 있었다.
리시아는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저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서 사원과 전쟁이라도 할까요?」
「그것도 괜찮을지도 모르지.」
「세드 님이 말씀하시니 정말 무섭네요.」
「에브론의 전력에 성녀가 함께하면, 제법 해볼 만할 거야.」
「몇 년은 발버둥 쳐 볼 수 있겠네요. 사원은 끝장낼 수 있을 것 같고, 에브론은 멸망하겠지요. 뒤따라서 카람이 내려올 거고요.」
리시아는 그렇게 대답했다.
「뭐, 세드 님이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신 거 알고 있으니까.」
「…….」
「저는 괜찮아요.」
그러자 세드릭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리시아.」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요.」
「로렌스는 잔인한 놈이다. 여자에게는 더 그렇지.」
「세드 님.」
「다시 생각해라. 그 신탁은 진짜가 아니야. 로산 후작이 조작한 거다.」
「네. 제가 제일 잘 알죠.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저이니까.」
리시아는 세드릭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황야를 바라보았다.
「네 입으로 그게 거짓 신탁이라는 것을 밝혀. 그러면 된다. 아킴 주교 따위가 제아무리 뭐라고 하든, 사원에서 하나로 뭉쳐 무슨 주장을 하든, 네가 성녀야. 네가 살아남아 사람들 앞에서 그것이 거짓이라고 말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야.」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까요? 그렇게 한다고 로산 후작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
「이번 신탁을 없던 것으로 돌리고 사원과 싸워 이기면, 이 지긋지긋한 일이 끝날까요?」
그 말에 세드릭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완전히 거짓말도 아닌 걸요. 결국 저는 황제의 마음을 바꿔야 해요.」
「리시아.」
「지금의 황제가 아니라면, 차기 황제의 마음이라도. 그게 안 된다면, 그 다음 대의 황제의 마음이라도.」
리시아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신탁이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원과 권력자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지 않을 문장을 만든 것이다.
본래 신탁이란 인간의 말로 딱 맞게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리시아가 신에게 들은 말은 그런 한 마디가 아니라 모든 것이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을 구하라는 것, 환란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구하라는 것.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위해 변하지 않고 진심을 믿으며 타인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성력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리시아가 그 성력으로 수만, 수십만의 병자를 고친다 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병자가 다시 생겨날 뿐이다.
치유해야 하는 것은 세상이었다.
그러니 성력은 길고 긴 험로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빛을 밝힐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은 것에 불과했다.
「전 로렌스 경을 바꿔볼 거예요.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지금 제게 달콤하게 구는 건 성녀를 얻기 위해서이고, 본래는 잔학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쯤은.」
「리시아.」
「그래도 그 사람, 저를 사랑하니까요.」
리시아는 처연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성녀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어요. 진심은 통할 거예요. 저는 믿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변할 수만 있다면, 그게 제국을 구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거예요.」
「난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되지 않아도……, 적어도 황실의 후계자를 낳을 수는 있겠지요.」
리시아는 주먹을 쥔 채 말했다. 그리고 세드릭을 다시 돌아보았다.
「실패하더라도, 20년 후, 30년 후가 또 있어요. 저는 성녀예요. 누구도 제 목숨과 지위를 그렇게 간단히 위협할 수 없어요.」
「…….」
「세드 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누군가는 가야 해요. 로렌스 경이든, ……로산 후작이든, 황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봐야 한다고요.」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도 안 되겠니?」
「불쌍한 분.」
리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성력은 예지력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도 리시아는 세드릭의 미래를 알 것 같았다.
이 세상의 어떤 기둥도 영원히 혼자 하늘을 떠받칠 수는 없다.
세드릭에게는 함께해 줄 사람이 없었다. 충성하는 자는 많으나 동등하게 서로 기댈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목숨을 던져 명령을 수행할 자는 많으나 마음을 털어놓고 의논할 자는 없었다.
자신마저 떠나버리면 그는 아주 오랫동안 혼자 남을 것이다.
「아니면 반대로 하실래요?」
리시아는 발랄하게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반대로?」
「전 지금처럼 병자를 고치는 성녀 노릇이나 할게요. 세드 님이 로산 후작을 유혹해서 설득하는 거죠.]
「헛소리를.」
「세드 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세요. 결혼해 버리셔도 괜찮고. 그러면 몹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될 것 같은데요?」
세드릭이 헛웃음을 웃었다.
리시아는 미소 짓고 말했다.
「좋은 날이 올 거예요. 절 믿으세요. 성녀의 축복이에요.」
「리시아.」
「이 모든 일이 그저 넘어서야 할 시련이었다고 생각하실 날이, 반드시 오실 거예요.」
황야는 노을에 물들어 있었고, 바람에서는 먼지 냄새가 났다.
그나마도 저 황야 어디에서도, 이제는 전염병의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리시아는 침상에서 눈을 떠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 *
세드릭은 그날 새벽에는 떠나야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마치 수십 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아닥쳐 온 듯했다.
아르티제아의 곁을 지금 비우는 것도 불안했다.
그러나 주어진 일은 해야만 했다. 황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당위로서가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폐하께서 절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떠나기 전에 당신과 너무 오래 이야기했다는 티를 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닐 겁니다.”
세드릭은 아르티제아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아무 생각 마십시오.”
“…….”
“당신 몸은 당신 혼자 것이 아닙니다. 세상사를 모두 당신 혼자서 통제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하고요.”
“……알겠어요.”
“이것은 당신의 남편으로서 하는 말이기도 하고……, 주군으로서 내리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네.”
세드릭은 그녀의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처음 몇 번 태동하고 나서 한동안 조용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그날 밤따라 몸부림쳤다.
놀란 탓인지, 아니면 혹, 그 사이에는 모친이 자신의 존재를 쾌히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일부러 숨죽이고 있었던 걸까, 싶을 만큼 활발한 움직임이었다.
“나오지 마십시오. 마음만 복잡해집니다.”
몇 번의 재촉을 받은 뒤에야 세드릭은 그렇게 말하고, 혼자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곧 군마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아르티제아는 새벽빛이 창을 물들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까지도 생각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 가슴을 메운 것은 황홀한 절망감이었다.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어.’
밤 내내 아르티제아가 생각한 것은 그것이었다.
돌아온 그날에, 세드릭을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기억이 없을 때에 그에게 결혼 계약 따위를 제안하여 마음을 헤집을 기회조차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밀라이라와 로렌스를 독살하고 끝내는 것이 좋았으리라.
그날 세드릭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원래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로이가르 대공이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되지 않았는가.
에브론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고, 세드릭은 저항할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찾아가지 말고 바로 실행했어야 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 전에. 그 마음에 괴로움과 갈등이 생겨나기 전에.
그냥 모든 것을 끝냈더라면 좋았으리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세드릭에게도, 자신에게도.
세드릭의 말이 옳다. 그건 결코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도, 결코 없던 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마음이 복잡하여 입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아침이 되자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다.
하녀들이 소세 준비를 해왔다. 아르티제아는 얼굴을 씻고 아침식사를 했다.
아침이 되자마자 헤일리가 퀭한 눈으로 그녀를 보러왔다. 한잠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대공 전하와 후사 문제에 대해서 합의를 이미 보신 게 아닌 거죠?”
“그래.”
헤일리가 휴우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것부터 결정하시는 게 순서 아닐까요? 저 같은 게 먼저 뭐라 답변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게 헤일리가 밤새 고민해서 낸 결론이었다. 사실 그냥 대답을 뒤로 늦추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
헤일리의 고민과 긴장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아르티제아는 선뜻 대답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리시아는?”
보통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나 문안을 오는 게 리시아였다.
사실 리시아는 아르티제아가 일어나기 몇 시간도 전에 해 뜰 녘에 일어나 가벼운 운동과 수련을 마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문안하러 오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다고 하던걸요.”
헤일리가 대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