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76
악녀는 두 번 산다. 175화
보어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황후 폐하께서는 일절 정치에 관여치 않으실 거라고 마르타 백작 부인이 말하더군요.”
“흐음.”
로이가르 대공은 짐짓 침음성을 흘렸다.
마르타 백작 부인이 말했다면 틀림없었다.
대강 짐작은 하던 바였다.
이제까지 리아간 공작가의 일에도 침묵을 지키고, 로렌스 일에도 조용했으니 말이다.
결국 황후가 에브론 대공비를 시녀로 삼아 결혼식에 참석한 것은 밀라이라와 로렌스를 갈라놓기 위해서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로렌스의 처지가 증명하고 있다.
‘하긴. 황후 폐하께서 당신의 혈육 아닌 자를 제국의 후사로 인정하실 것 같지 않았지.’
로이가르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로렌스만 헛된 꾐에 빠진 셈이었다.
새로운 정보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확인할 수 있게 된 것도 좋은 정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에브론 대공비로군. 에브론 대공비도 황후에게 속은 건가. 아니면, 적절한 선에서 중재시키고자 했던 건가.’
그것도 아니면, 속내에 또 달리 품은 것이 있거나.
최근에 로이가르 대공은 점점 세드릭에게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세드릭이 답례라며 주고 간 결투용 권총은 로이가르 대공의 서재 책상 서랍에 들어 있었다.
그 뒤로 세드릭이 특별히 위협을 가해오거나 한 일은 없다.
황제는 세드릭에게 명예와 난제를 동시에 주어 견제하고 있었다. 지금으로서 세드릭은 중앙 정계에서 적응하고, 맡은 임무를 다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로이가르 대공과 마주쳐도 전과 다름없이 평온한 얼굴로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하지만 로이가르 대공의 마음 한 쪽은 언제나 불안했다.
그것은 로렌스와 싸울 때나 황제로부터 트집을 잡힐까 봐 불안할 때 같은 그런 종류의 위기감은 아니었다.
싸우면 이길 수 없다. 마치 주먹다짐을 앞둔 사내애 같은 불안감이었다.
그는 후우 마음속 깊은 곳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보어츠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에브론 대공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어째서 황제 폐하를 먼저 알현하지 않았는가? 리아간 공작가의 소식이라면, 황궁에서도 무척 기다리고 있을 텐데.”
“사실 리아간 공작님께서도 폐하께 간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어츠가 한숨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폐하께서 저 따위가 호소한다고 해서 리아간 공작가를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그럴 거였다면, 공작님의 탄원서가 올라갔을 때에 결정하셨겠지요.”
“그건 그렇지.”
“그러니 로이가르 대공 전하께 청하러 온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황후 폐하께서도 하시지 않겠다 하는 일을 나인들 어찌 하겠는가?”
그러자 보어츠가 가져온 상자를 열어 보여주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뇌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리아간 공작의 인장과 위임장이었다.
“우선, 리아간 공작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제가 드리는 약속은 공작님께서 하시는 것과 완전히 같은 효력이 되리라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이 일은 단순히 리아간 공작가가 어려운 일에 휘말려 들어간 게 아닐세. 중요한 정사이고, 하물며 국제적인 분쟁이라네. 리아간 공작가는 심지어 에이멜 왕비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지.”
“억울하다는 것을 대공 전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누명을 벗는 일에 힘을 보태어 달라 탄원하는 것뿐입니다.”
보어츠가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수도의 대귀족을 상대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껄끄럽긴 했다.
만일에 실익보다 체면을 크게 따지는 귀족이라면 날 뭘로 보는 거냐고 호통을 칠 법했기 때문이었다.
“리아간 공작가는 단순히 에이멜 왕국의 핍박만이 아니라 또 다른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황제 폐하께서 리아간 공작가에 맡기신 막중한 임무에 차질이 생깁니다.”
“흠.”
“리아간 공작님은 그것을 두려워 하십니다. 이번 일을 어찌어찌 무사히 끝낸다 한들, 내년에 물가가 치솟고 제국민의 건강을 해치게 된다면, 이어질 책임 추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로이가르 대공의 눈이 빛났다. 지금 보어츠가 말한 것이 남해 소금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리아간 공작가는 남해 소금의 전매권을 가지고 있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것은 황제의 것이다. 리아간 공작가를 숙청하며 빼앗은 것을 겉으로 강탈했다는 말을 듣지 않고자 지금의 리아간 공작을 세워 맡겨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남해 소금은 제국 중부, 동부, 남부 모두에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나오는 이윤은 어마어마했다. 그레고르 황제의 막강한 국고에서 남해 소금이 과연 몇 할의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논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그것이 황제가 자식들의 죽음에 애도의 시간을 갖지도 않고 리아간 공작가를 쳤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로이가르 대공을 지지하는 거상과 대지주들이 지갑 끈을 단단히 움켜쥐고 아무리 애써 봐도 황제를 조금도 흔들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것이 리아간 공작의 위임장을 가진 자의 입에서 나왔다.
로이가르 대공으로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어츠가 말했다.
“지금부터 대책이 나온다 해도 내년 소금 유통에 차질이 빚어집니다. 대공 전하께서 이 탄원을 들어주신다면, 동부 지역의 유통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 역시 소개해주실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것은 동부 지역의 합법적 유통을 로이가르 대공의 입김이 닿는 상단에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는 여러 곳의 상단에 골고루 배분했으며, 가격도 통제했다. 소금을 전매한다고 해도 소매까지 일일이 모두 나라에서 관리하지는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만두고 로이가르 대공에게 전면적으로 맡겨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유통 과정을 하나 더 끼는 것이다.
로이가르 대공은 거기에서 올 이익을 대략 가늠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이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동부 지역에서 지금까지 소금을 유통해왔던 상단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로이가르 대공은 그것만으로 위험한 다리를 건널 생각은 없었다.
“폐하께서 내리신 지침이 있을 터인데, 함부로 그것을 어기겠다는 뜻인가?”
“중앙에서 내리신 지침이 항상 실정에 맞는 것은 아니니까요. 폐하께서도 모든 소금 제작과 유통을 다 알고 계시는 것은 아니십니다.”
보어츠가 말했다.
“그것을 대공 전하께 맡기고 싶습니다.”
황제가 알지 못하는 소금, 곧 밀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이가르 대공도 알아들었다.
리아간 공작은 남해 소금의 경영을 맡은 지 18년이 되었다. 그런 그가 직접 만든 밀염과 그 유통이다.
탐나지 않을 수 없었다.
* * *
“정말로 이것으로 충분한가요?”
마르타 백작 부인이 물었다.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용케 저자가 황후궁을 찾아오게 했군요. 페르난도의 조카 따위가 감히.”
마르타 백작 부인은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아르티제아에게 부탁을 받았고, 종국적으로는 황후의 바람으로 이어질 테니 참고 만나주긴 했다.
이 입으로 조언 같은 단어도 입에 담았다.
그러나 배신자가 리아간 공작가를 훔쳐 축적한 재물 따위를 뇌물로 받은 게 몹시도 불쾌하여 참을 수 없었다.
마차에 실려 있던 재물 쪽은 아르티제아가 곧바로 가져가 처분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보석은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들고 있는 것도 싫었던 것이다.
“페르난도 리아간과 그 아내는, 자기들이 선대 공작님과 공작 부인의 사고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있었으니까요. 특히나 남부에서는요.”
물론 권력에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비밀도 아닌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것이 18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그동안 리아간 공작 부부는 남부에서 그 사실을 철저하게 입막음했다.
18년 전에 고작해야 9살이었을 보어츠가 진상을 들었을 리 없었다.
그는 삼촌 부부가 선대 공작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 배신을 사고사 이후로 황제에게 붙어 리아간 공작가의 중요한 권리들을 넘긴 대가로 작위를 받았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10년도 더 지나, 제법 관록 있는 관료가 되고 나서 수도에 불려 올라왔다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한동안 술독에 빠져 지냈던 것이다.
그러니 황후궁을 찾아오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먼저 수도에 있는 리아간 공작저의 집사를 매수하여 황후에 관한 소식을 듣게 했다. 그 외에도 몇몇 루트를 통해 황후가 요사이에 리아간 공작가를 그리워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불어넣었다.
보어츠는 제 나름대로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함정에 빠진 셈이었다.
만일에 그가 리아간 공작의 밀명대로 황제부터 알현하거나 재상부를 찾아갔더라면, 일은 다소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증오를 짓씹던 마르타 백작 부인이 마음을 가다듬고 아르티제아를 바라보았다.
“로이가르 대공을 남부 일에 끼어들게 해서 어떻게 할 셈인 건가요?”
오히려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주는 쪽이 좋지 않은가.
로렌스가 남부 정벌군을 망쳐버린 상황이다. 로이가르 대공이 남부에서 타국과의 분쟁을 현명하게 해결하는 큰 공이라도 세우면, 황제의 후계자로서 자리를 굳히게 될 것이다.
세드릭을 제위에 올리겠다는 아르티제아의 목적을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반대로 로이가르 대공이 큰 실책을 저질러도 곤란했다.
로이가르 대공만 죽여 버리면 세드릭이 다음 계승 순위라고 마음 편히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황제의 의심과 견제가 세드릭 한 사람에 몰리게 된다. 그러기에는 아직 준비가 충분하지 않을 것이었다.
“염려 마세요. 로이가르 대공은 협상에 능한 사람이니까요.”
“황제 폐하께서는 로렌스 경의 일로 한참 예민해져 있는 데다가 의심병이 돋워진 상태입니다. 함부로 끼어들면 좋지 않다는 것을 로이가르 대공도 알고 있을 텐데요.”
“그러니 리아간 공작가에서 청하게 한 것입니다. 남해 소금 정도가 아니라면 그를 움직일 수 없겠지요.”
남해 소금이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로이가르 대공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포드 영애라는 이름이 관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로이가르 대공에게는 신발 속에 들어간 돌멩이처럼 조금 껄끄러운 문제에 불과할 테니까.
“에이멜 문제가 아니라 밀염으로 엮을 생각인가요? 그게 간단히 되겠습니까?”
“그건 쉽지 않겠죠. 페르난도 리아간이 딴 주머니를 차는 것 정도야 황제 폐하께서 알면서도 노신의 살림에 보탠다 생각하고 넘어가셨겠지만.”
무엇보다도 황제는 로이가르 대공이 탐욕을 부릴 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르티제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로이가르 대공은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직접 남부로 내려가고 싶겠지요.”
로이가르 대공이 남부로 내려가기만 하면, 아르티제아의 목적은 그것으로 달성된다.
밀염의 거래는 오히려 들통나지 않기를 바랐다. 황제의 재정에 손을 대는 것은 대죄이나, 결국 로이가르 대공 한 명의 개인적인 죄로 끝나고 만다.
그럴 수는 없었다.
로이가르 대공의 세력은 뿌리가 깊다. 부유하고 강대한 대귀족과 정치에 발을 들인 거상 세력은 훗날의 치세를 위해서라도 통째로 들어내야 했다.
‘그러려면 필요한 것은 그만큼의 명분이지.’
아르티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