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82
악녀는 두 번 산다. 181화
리시아가 서부에 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리시아의 말마따나 가을걷이가 시작될 무렵은 중요한 시기였다.
환곡은 곡식을 나누어주는 것만큼이나 창고를 채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제 실질적인 일이 시작될 시기이니 믿을 만한 사람이 지켜보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티제아는 쉽사리 그러라고 말하지 못했다.
로렌스가 수도를 떠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러니 굳이 리시아를 떠나보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세드릭이 리시아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래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지?”
“……네.”
“너는 의미 없는 일을 하는 애가 아니지.”
그렇게 말하고 세드릭이 다시 아르티제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아르티제아로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세드릭의 말마따나 리시아가 괜히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게 리시아가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보내주는 게 마땅했다.
“그렇게 해.”
아르티제아는 조금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필요한 건 뭐든지 이야기하고.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오고.”
“어디 영영 가는 것도 아니라 맡겨주신 일 하러 가는 건데요. 그쪽에 도착하면 바로 상황 파악해서 보고 드릴게요.”
“그래.”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시아가 잠시 망설이다가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세드릭이 손바닥을 가볍게 내밀듯이 내저었다.
그것은 권총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리시아는 그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그녀는 문을 닫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괜찮아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드릭에게 전부 맡기고 바라는 일만 하면서 마음을 좀 휴식시키고 싶었다.
아르티제아는 세드릭의 제스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고 시선을 보냈지만, 세드릭은 다른 말을 꺼냈다.
“리시아는 잘할 겁니다.”
“네.”
“서부 지역의 인심을 유지하는 일이 필요해서 보냈던 거지요?”
“네……. 내년에는 가물어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올해 곡량을 쌓아두고 민심이 흉흉해지기 전에 다독이고 싶어요.”
“리시아가 적임입니다. 스스로 하고 싶어 하던 일이기도 하고요.”
세드릭이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아예 아르티제아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한 맺혀 하던 일이니, 재해를 예비할 기회를 준 당신에게 고마워할 겁니다.”
“…….”
아르티제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제 손가락만 내려다보았다.
세드릭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었다.
그리고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아르티제아가 한 발 먼저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세드릭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보지 못했다.
“전해 드려야 하는데, 아직까지 못 드린 말씀이 있어요.”
“말해 보십시오.”
“리시아 님의 유언이었어요. ……후회 없이 살다 가셨노라고, 전해 달라고…….”
숨이 떨려서 좀처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10년 가까이 지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없어진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날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렸다.
「당신이 지고 있는 짐에서 나만큼의 무게는 빼세요.」
그게 얼마나 큰 무게였는지 안다면, 그녀는 그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이용대상인 성녀였다. 다른 사람과 똑같았다.
껍질을 벗겨내고 나면 그 밑에 있는 것은 추악한 보통 인간과 다를 바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를 알고 나서 날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그녀가 죽고 나서는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큰 짐이 되었다.
자신의 목숨 같은 것이 리시아의 목숨을 갈음할 수 있었을 리 없었다.
애당초 리시아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이 갈림길에 놓였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 죽었어야 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세드릭이 아르티제아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아르티제아는 힘없이 딸려가 그의 팔에 안겼다.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습니까?”
“하지만…….”
“리시아는 살아 있습니다.”
세드릭이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애는 정말로 후회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압니다. 그 애를 잃고 느낀 비탄이나 슬픔과 별개로……, 아무리 힘들었어도, 고통스러웠어도, 설령 바라던 일을 성취하지 못했더라도, 자기 삶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만큼 온몸을 던져 살았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리시아는 실패하지 않았다.
아르티제아가 눈물을 흘렸을 때에 세드릭은 그것을 알았다.
틀림없이 눈을 감을 때에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티제아가 숨을 죽였다.
눈물이 날 정도로 위로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세드릭의 목소리 안에서 묻어나는 따뜻한 애정에 심장이 아프도록 쿵쿵 뛰었다.
세드릭이 아르티제아의 턱에 손을 댔다. 숙이고 있던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들렸다.
세드릭이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굳이 말하는 겁니다만.”
“뭘요……?”
“리시아를 여자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애초에 그러기에는 너무 어릴 때부터 봐왔어요. 리시아도 나를 오빠 이상으로는 생각 안 할 겁니다.”
아르티제아는 얌전히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온몸이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근육이 당겨졌다.
세드릭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왜 놀랍니까? 나 같은 입장에서 정략결혼이 아닌 쪽이 더 희귀한 일 아닙니까? 파장을 불러일으킬 작정으로 연애결혼 흉내를 내자고 계약을 제시했던 당신이 놀랄 일은 아닐 텐데요?”
“하지만 상대가 리시아 님이잖아요.”
“세력 간의 혼인동맹은 아니지만, 마침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결정한 일입니다. 리시아라면 믿을 수 있는 상대였고요.”
그 결혼은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세드릭에게 만약의 일이 생겨도 리시아라면 에브론을 이끌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에브론 대공비라는 이름이라도 있으면 사원에서 리시아를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다.
실질적인 이유가 몇 가지 더 있었다.
리시아는 사원에서 재정 지원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드릭은 중부와 동부에 있는 재산을 리시아에게 양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통째로 준다고 해도 모르텐 남작이라는 이름으로서는 그것을 지켜낼 수 없었다.
인력은 재산으로 해결한다 치더라도, 믿을 만한 무력은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성녀를 필요로 하는 지역은 주로 치안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무력이 모두 필요했다.
그리고 리시아가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서 생기는 위험성도 있었다. 탐내어 달려드는 귀족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세드릭은 리시아를 지지해주기로 마음먹었지만, 적당한 명분 없이 모조리 퍼부어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결혼해 버리는 쪽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무엇을 해주어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이니까.
그리고 세드릭이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리시아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원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에브론 대공비라는 이름은 리시아에게 적절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더불어 세드릭 자신도 결혼에 대한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중하게 결정하긴 했습니다. 그 결혼이 가져올 안정과 이익이 어떤 것인지 당신이라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텐데요?”
세드릭이 말했다.
“하지만 저 개인으로 치자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었습니다.”
리시아라면 서로 기대어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녀가 하는 일에 보탬이 될 수 있고, 또 그녀가 에브론 대공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결혼 생활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다 비슷했을 것이다.
아르티제아는 그 의미를 깨닫고 더듬거렸다.
“하지, 하지만……. 사랑, 하셨잖아요?”
틀림없이 그렇게 보였다. 의심하는 자가 없었다.
로렌스가 미쳐 날뛰었던 것 중에 그 이유가 결코 작은 부분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그때에도 자신을 사랑했다는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기로 마음먹었어도, 사실이라고 여겼던 일이 단숨에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세드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정과 사랑이 동의어는 아니고, 믿음과 헌신이 항상 열정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리시아를 믿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때에는, 리시아에게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줬을 겁니다.”
이제는 조금 달랐다. 그는 여전히 리시아를 신뢰하고 아꼈으나 목숨을 내줄 수는 없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과 아기 아버지의 자리는 오로지 그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에는 그랬다.
“잃은 게 너무 많았으니까요. 또 뭔가를 잃느니 그냥 내가 끝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그 애라면 내 목숨을 발받침으로 삼아 뭔가를 이뤄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요.”
결국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세드릭은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한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리시아에게 짐을 떠넘기고 편해지고 싶은 마음과, 반대로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둘 다 갖고 있었다.
그것은 동지애이고, 가족애이기도 했다. 막중한 책임감과 슬픔을 공유하면서 생겨난 감정들이었다.
그리고 공감이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는 일은 없었다.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 기울어진 마음을 되돌려 다른 사람에게 다시 부을 수 있을 만큼 능숙한 사람이 못 되었다.
아르티제아는 부정어를 내뱉지 못했다. 숨만 죽인 채 몸을 옹송그렸다.
도로 고개를 숙이려고 했지만, 세드릭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눈동자에 씁쓸하고 엷은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충성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믿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세드릭이 입술을 가볍게 아르티제아의 입술 위에 얹었다.
숨결이 아르티제아의 인중을 간질였다. 섬세한 움직임이 아르티제아의 입술을 움찔거리게 했다.
아르티제아는 세드릭의 가슴 위에 놓인 손을 주먹 쥐었다.
그러나 곧 손에서 힘이 풀렸다.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르티제아는 다시 손에 힘을 주어 세드릭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벌어진 입술 안쪽으로 단맛이 감돌았다.
세드릭이 다시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아르티제아가 멍한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세드릭이 다시 그녀의 얼굴을 가슴에 기대게 하고 토닥였다.
“번뇌하게 되니까 이제 그만합시다.”
“뭐, 뭘요?”
세드릭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만 순진하게 굴지 말아줘요.”
아르티제아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알아들은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