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83
악녀는 두 번 산다. 182화
황제가 편찮다는 말을 세드릭은 믿지 않고 있었다.
황제가 그런 식으로 알현을 거절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때로는 사람을 대기실에 앉혀놓고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기도 했다.
그것은 굴욕감을 주기 위해서일 때도 있고, 상대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일 때도 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런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틀 후 알현한 황제의 모습은 확실히 초췌해 보였다.
세드릭은 그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이전의 삶을 생각하면, 황제는 앞으로 10년 가까이 더 건강하게 살아야 할 것이었다.
사인은 갑작스러운 발작이었다. 심장병을 앓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쓰러지기 전까지는 건강관리도 잘했다. 늘 활달하고 자신감에 넘쳤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안색은 침침하고, 분위기 탓인지 피부도 쪼그라져 보였다. 한 달 사이에 몇 년은 더 늙은 듯했다.
“남부 정벌군은 어떻더냐?”
황제가 먼저 물었다.
세드릭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가얀 경이 진영을 떠난 뒤에 약간의 동요가 있었으나 군기가 잘 세워져 있어 탈영이 발생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둔이 장기화될 것을 예상하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보이든 장군은 병사들에게 신망 있는 사람이라 인계 후에도 동요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남부 사정에 대해서 군진에 소문이 났느냐?”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세한 사정을 궁금해 하는 것보다는 에이멜 왕국에서 침공해 왔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유도하기도 했다.
이유가 어쨌든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에서 같은 방식의 공작이 있었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황제는 느릿하게 말했다.
“그렇구나. 보이든 경이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보이든 장군은 진중하니 폐하의 기대에 능히 부응할 것입니다.”
“실은 중신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었다. 보이든 경이 남해 출신이라고는 하나, 해군으로 복무한 적은 한 번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군략에 다재다능한 것도 아니니까.”
“제가 남부의 사정과 지리에 밝지 않으니 상승의 묘책을 진언할 수는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패배하지 않는 법은 압니다. 보급을 넉넉히 확보하고, 첩보를 게을리하지 않고, 무모하게 전선을 늘리지 않고,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세드릭은 침착하게 말했다.
“보이든 장군은 그 원칙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훌륭한 인선이라고 사료됩니다.”
황제는 톡톡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네 위치가 단순히 무관은 아니라지만 계속해서 군의 일을 맡아 했는데, 어찌 승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지지 않을 생각만 하는 것이냐?”
“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요.”
세드릭은 대답했다.
“폐하께서 바라시는 바는 협상이 끝날 때까지 남부가 이 이상 어지러워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아닙니까?”
“음.”
“해적 토벌을 명분으로 내세웠을 때라면 남해 왕국들에게 지원을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이멜 왕국과의 전쟁이라면 오히려 그들이 동맹을 맺고 제국에 맞설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해야 하니까요.”
전쟁이 되면 전선은 제국 영토 안에 생길 것이다. 이겨도, 져도 피해가 생긴다. 그렇다면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력을 기울여 에이멜 왕국을 정복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에이멜 왕국에는 그럴 만큼 가치 있는 자원이 없었다.
“카드리올 왕자는 무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과감한 지략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로이가르 숙부나 에이멜 국왕의 의사와 별개로, 제국을 갈라 놓기 위해서 수작을 부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것에 찬동하는 왕국은 적지 않을 것이다. 내부에서 호응할 세력도 상당했다.
황제가 주름 잡힌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이로구나.”
“위험요소는 있습니다. 남부는 가장 늦게 복속된 지역이니까요.”
교통이 편리한 탓에 문화적 동질성은 빨리 퍼졌으나 제국의 일부라는 일체감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지금 남부가 조각조각 갈라지면, 남해 인근 전체가 전화에 휩쓸릴 것이다.
제국의 통치가 엉망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상태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전쟁은 없으니까.
세드릭은 문득 이제 없어진 로렌스의 치세를 생각했다.
가장 먼저 멸망한 것은 북부가 아니라 남부였다. 남부에는 에브론 대공가 같은 확고한 통치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래도 해적들이 숨어 움직였다. 정체 모를 해적왕의 규칙도 있었다.
엄중한 형벌은 해적의 발생을 억제했다. 큰 도시와 비교적 내륙에 있는 마을들은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단은 해군이 확보한 항로를 따라 움직임으로써 안전을 도모했다.
그러나 그때가 되어서는 더 이상 국가와 상단, 해적이 서로 구별되지 않았다. 교역과 약탈도 구분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간인에 대한 보호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교역이 무력화되자 경제도 곤두박질쳤다.
그레고르 황제가 건재한 지금 당장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를 기억하는 이상 세드릭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력한 무력을 보이는 것은 에이멜 왕국을 위협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남부 지역 전체에 제국의 존재감을 주지시키고자 결정하신 일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이든 장군은 그에 적절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수성에 재능이 있을뿐더러 섣불리 정치 같은 것에 손대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남부의 분열에 대해 우려하여 결정한 일이기도 했다. 확률은 희박하더라도, 만전을 기해야 했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은 세드릭이 그 점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속이 깊구나. 짐은 로이가르에게 힘을 실어준 일로 네가 서운해 하거나 걱정할 줄 알았다.”
“적임이라 생각하여 맡기셨을 줄로 압니다.”
남부의 여러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협상해야 하는 일이다. 게다가 리아간 공작가가 얽혔다.
카드리올 왕자를 넘어서서 에이멜 국왕과 직접 만나야 했다. 그러니 황제 특사라는 권위만으로는 부족했다.
“여러 일이 있었으니 말이다.”
“지나간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 해도 국사입니다. 숙부가 적임인데, 제 사감이 중요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드릭은 한 차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복잡한 심경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로렌스가 이만큼만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못난 놈.’
마음속으로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정체가 불분명한 패배감과 좌절감이 마음 밑바닥에서 스멀거리고 번졌다.
죽은 레오프릭이 무덤 안에서 웃고 있을 것 같았다.
황제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바꾸었다. 그리고 물었다.
“네 처도 같은 생각이냐?”
“출산하고 몸조리가 끝날 때까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저와 약속했습니다.”
“헛, 허허.”
황제가 헛웃음을 웃었다.
“꽉 잡혀 사는구나.”
“약속을 시킨 건 제 쪽입니다만…….”
“그러라 한다고 티아가 네 말을 듣겠느냐?”
“생각이 복잡한 것까지 어찌할 도리는 없겠지만, 저와의 약속을 가볍게 생각할 사람도 아닙니다. 몸조심해야 할 시기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걸로 되었다.”
황제는 이미 카멜리아 후작가의 상속소송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안 카멜리아의 배후는 교묘하게 가려져 있다. 그러나 황제의 눈에는 아르티제아가 뒷배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보였다.
굳이 근거를 찾을 필요성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킴 주교를 이용한 모살 시도에 대한 보복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추정되었다.
설마 세드릭이 그런 일에 끼었을까 하는 의혹을 품었었는데, 아무래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좋다. 세드릭의 성품으로 미루어 보건대 원한을 오래 간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는 다시 헛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네 처를 아끼려무나.”
새삼스러운 충고에 세드릭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고지식하긴 해도 어리석지는 않으니, 네 성미가 이 수도 생활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네 처와 자식을 지키려면 군에 틀어박혀 있는 게 능사가 아닌 줄도 이제는 알 테고.”
“통감하고 있습니다.”
세드릭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티아는 영특한 애다.”
황제가 말했다.
“몸은 허약하고, 심약한 부분도 분명히 있지. 하지만 그 애에게는 결단력과 대범함이 있어. 네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거다.”
“예.”
세드릭의 대답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세드릭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황제는 결국 말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이만 물려가려무나. 짐은 피곤하여 다시 누워야겠다.”
“황공합니다.”
세드릭이 물러 나오려 할 때였다.
“……네게 아직도 짐을 외백부라고 불렀을 때의 결심이 남아 있느냐?”
황제가 물었다.
세드릭은 긍정의 대답 대신 돌아 서서 황제를 향해 정중하게 한 번 절을 올렸다.
물러가라고 황제가 다시 손짓했다. 세드릭은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제는 다시 팔걸이를 톡톡 쳤다. 그리고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유니스 백작 부인에게 세드릭이 보위에 앉으면 어떨까 하고 묻긴 했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에 세드릭이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은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어차피 로이가르 대공을 견제해야 했다. 세드릭을 키우는 것은 나쁜 선택이 아니다.
세드릭 하나만이라면 망설여졌을 것이다. 키우려고 해도 제대로 될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세력이 커져봤자 통제 불가능한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곁에는 아르티제아가 있다. 아르티제아는 말귀를 잘 알아 들었다. 황제의 마음에 꼭 맞는 일을 짚어내는 것도 잘했다.
오래된 신하들 중에서도 이 정도로 눈치 빠르고 마음에 차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세드릭은 사랑하는 아내의 혈육을 박대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아르티제아라면 상황에 따라 정을 뗄 것이다. 하지만 세드릭은 설령 상대를 싫어하더라도 도리는 다할 사람이었다.
‘조금만 손써 줘도 되겠지.’
에브론 대공가의 힘은 로이가르 대공이 잠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자신이 조금만 도와주어도 금세 세력은 커질 것이다.
그러나 그 기반은 북부에 있으니 통제가 가능하다.
만약의 경우 로이가르 대공과 세드릭, 둘을 충돌시키기도 쉬웠다. 이미 한 차례 원한이 생겼기 때문이다.
황제의 손에는 아킴 주교의 거처에서 찾아낸 증거도 있었다. 살인교사에 대한 확고한 물증은 아니지만, 다시 한 번 에브론의 분노를 불붙이기에는 충분했다.
‘우선은 그것부터.’
인생의 성패는 죽을 때가 되어봐야 아는 법이다.
그리고 그는 늙었지만, 아직 죽음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었다.
세드릭이 서재 밖으로 나오자 시총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약과 꿀물을 얹은 금쟁반을 손수 들고 혼자 서 있었다.
세드릭은 그에게 목례하고 지나쳐 가려 했다.
그때 시종장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로렌스 경의 저택에서 움직임이 있습니다. 정보를 넣고 있는 것은 벨론 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