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87
악녀는 두 번 산다 186화
18. 가을
『그리운 비 전하께.
날이 쌀쌀해지는데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지난번 편지에 강녕하시다고 쓰셨지만, 비 전하께서는 늘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분이라 염려가 됩니다.
대공 전하께서 곁에 계시니 별일은 없으시겠지만요.
이곳에서는 벌써 밀이 수확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큰 풍작은 아니고, 평년보다는 조금 더 좋은 정도라고 하는데도 밀밭이 끝이 없어 장관입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한 달 정도 후부터 시작하는 곳도 있다고 해요.
농업 독려관인 포브 경이 일부러 심을 때에 시간차를 두어, 수확을 끊이지 않고 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재작년의 몬스터 웨이브에 피해를 입은 지역이 적은 덕분이라고 합니다.
만일에 몬스터 웨이브로 피해를 입은 지역이 넓었다면, 첫 수확 때에 세금을 내기 위해 일제히 밀을 거둬들였어야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올해에는 여유를 가지고 이렇게 수확함으로써 서부 주민들이 쉬지 않고 식량을 소비하는 게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작은 곡물상들이 모여 세운 연합이 있는데, 매우 협조적입니다.
집집마다 조금씩 저장하는 것이 있고, 폐하께서 내리신 물자도, 말미도 있으니 겨울에 구휼을 하고도 창고를 비우지 않을 수 있을 듯합니다.
포브 경의 기록을 궁금해 하실 것 같아 보고문으로 작성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리하실 수 없도록, 비 전하 대신 안스가르 님 앞으로 따로 보냅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헤일리 언니가 우는 소리를 편지로 써서 보내기를 연달아 하여, 지난번에는 네 통을 한꺼번에 받았답니다.
제 생각에도 적임일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아기씨께서 태어나시고 나면 뵈러 가겠습니다. 몸조리 잘하고, 건강하시기를 멀리에서나마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리시아.』
리시아는 다 쓴 편지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이미 세 번이나 연습장에 써서 확인한 다음 옮겼을 뿐이라 문제가 될 만한 문장은 없었다.
그녀는 편지를 압지로 눌러 남은 잉크를 닦아냈다.
그리고 압지와 연습장에 모두 불을 붙였다. 그러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글을 쓸 때에 불부터 붙이고 시작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의 일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편지봉투를 닫아 밀랍으로 봉인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모르텐 소남작님.”
비서 라니에였다.
전에 왔을 때에는 자신에게 무슨 비서까지 필요하겠는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입장이 조금 달랐다.
리시아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멋모르고 무작정 물자를 풀고 환자를 고치면 되는 줄 알았던 옛날과 달랐다. 그녀도 이제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은 알았다.
라니에가 말했다.
“포브 경께서 오셨습니다.”
“알았어.”
리시아는 편지를 쟁반에 얹어놓고 밖으로 나섰다.
응접실에서 포브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에 벙글거리는 웃음이 가득했다.
“안녕하셨어요? 또 원행을 나가셨다고 들었는데, 언제 돌아오셨어요?”
“오늘 아침에 돌아왔습니다. 모르텐 소남작님께서도 알고 싶어 하실 만한 소식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리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포브는 하급 관리였다. 농업 독려관이라고 하면 듣기에는 좋으나 본래 업무는 각지의 수확량을 예측하여 윗선에 보고하는 게 전부였다.
이는 세금을 계산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었다. 지역별로 흉작과 풍작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하는 일이었다.
풍작된 원인이 새로운 농법에 있다면 연구하여 널리 퍼뜨렸다. 흉작이 된 지역에는 교육과 지원을 했다.
원칙적으로 그랬다. 실질적으로는 중앙에서 후속조치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제국법에 관직이 있으니 뽑아서 놔두었을 뿐이다.
그러나 포브는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몬스터 웨이브가 있든 없든, 군벌이 위세를 떨치고 있든 아니든, 그는 서부의 농토에서 벌어지는 일을 조사하고 연구하고 통계를 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노력이 보답 받았다.
몬스터 웨이브를 한 차례 막아낸 덕분으로 서부 지역에 숨통이 트였다.
환곡 사업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포브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환곡이 중도에 망가지리라고 생각했다.
중앙에서 책임자를 새로 임명해서 내려 보낼 때마다 그랬다.
처음에는 창고를 수리하고 수확기에 곡식을 거두어 채운다. 그러나 그 곡식이 2년 이상 굶주린 농민들에게 배분되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은 그대로 돈으로 바뀌어 책임자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지푸라기가 섞인 잡곡을 나누어주고 도정된 밀로 거두어들이는데도 창고는 도로 차오르지 않았다.
때로는 책임자가 잘해보려고 애쓸 때도 있었다. 그러면 창고에서 나온 곡식은 중간 관리들의 집과 사원으로 숨어들었다.
차라리 군벌이 통째로 실어다 자기 성의 창고에 넣는 게 낫겠다고 포브는 생각하곤 했다.
그러면 적어도 굶주린 군대가 몬스터 웨이브와 맞서는 일은 없을 게 아닌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부군이 먼저 정비된 덕분이었다.
서부군의 어느 장수도 군사 물자 핑계를 대고 창고를 털어가려 하지 않았다.
관리도,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에브론 대공비가 책임진 환곡 창고에 손을 대면 서부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실제로 봄에 지방관 하나가 환곡 창고에서 곡식을 꺼내어 유용하려다가 인근을 지키던 서부군 기사들에게 걸려 성벽에 매달리기도 했다.
책임자가 어린 여자라고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단숨에 사라졌다.
포브가 불려간 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
리시아와도 그때 처음 만났다.
「비 전하께서 농업 독려관을 만나보라고 하셨어요. 다음번의 몬스터 웨이브를 한 번 더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지금 상황 그대로라면 서부가 넉넉해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요.」
「그, 렇습니다.」
포브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비록 지방의 남작이라 해도 작위가 있는 가문이었다. 포브보다 신분이 높았다. 하물며 에브론 대공비의 명령을 직접 받아 온 시녀임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농업 독려관 중에 유능하고, 서부의 작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본 사람이 있다면, 지원해 주라고 하셨어요.」
리시아가 생긋 웃었다.
「그리고 제가 여기 와서 알아보니까 모두 입을 모아서 포브 경을 추천하더라고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환곡 사업에 투입된 인력과 자금 중 상당 부분이 포브를 지원했다. 그가 에브론 대공비의 지원을 받는다고 알려지자 지방관들도 그를 돕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서부 곡물상 연합과 서부군도 손을 보탰다.
그 결과, 불과 반년 만에 제법 그럴 듯한 상황이 되었다.
밀의 수확량이 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담당 구역의 작황을 모조리 꿰고 있는 포브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데 무작정 착취할 수 있는 탐관오리는 없었다.
그 뒤에는 에브론 대공가와 서부군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수작을 부리기에 수도와 황궁은 너무 멀었다.
잉여 식량이 생기면서 밀의 거래량이 폭증했다.
고작해야 십여 개의 상회가 모여 만들었던 서부 곡물상 연합의 회원이 지금은 싶을 넘어가고 있었다.
포브는 이런 사태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응할 수 있었다.
그는 서부의 각 지역에서 잘 자라는 작물에 대해서는 모조리 꿰고 있었다. 구황작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돈이 필요한 가난한 농민들은 다른 것으로 연명하고, 대신 밀을 내다팔 수 있게 되었다.
환곡 창고는 빠르게 채워졌다. 수확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좋은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몇 년은 계속 그럴 것 같았다.
포브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날 이유가 없었다.
리시아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 좋은 소식이 무엇일까요?”
“사원에서 이제 곧 수확제를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멜번을 제단에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교님께서 확답을 주셨다고 합니다.”
포브가 말했다. 서 있었다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었을 기세였다.
리시아도 환하게 웃었다.
“잘되었네요.”
“예! 아무래도 몬스터 랜드에서 온 작물이니까요. 제대로 퍼뜨리려면 사원에서 인정해주는 쪽이 좋습니다.”
포브가 신이 나서 말했다.
멜번이라는 것은 밀 열 자루로 백만 명을 먹여 살려냈다는 성인의 이름이었다.
포브는 카람 작물을 발견하고서 거기에 성인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새로운 식물이라고 하여 사원에서 무조건 적대시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척박하고 추운 지역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이었다. 서부에서는 그냥 뿌려 놓기만 해도 가을이 되자 쑥쑥 자라났다.
포브는 그것이 먹을 만한 식물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겨울에도 키울 수 있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이 대단한 장점이었다. 그냥 심어두기만 하면 알아서 자라니 노동력도 그다지 필요 없었고, 지력을 크게 소모하지도 않았다.
그게 북쪽에서 내려왔으리라는 것은 생육 환경을 생각해볼 때에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포브는 그것이 아마도 몬스터가 우글대는 지역에서 우연히 몬스터의 몸에 묻어오거나 짐승의 배변을 통해 전파된 것이리라고 여겼다.
이것을 널리 퍼뜨릴 수만 있다면, 이제 겨울의 구황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었다.
리시아는 그것이 퍼진 경로를 알고 있었다. 서부군 병사들 중 일부가 자기 집 담 밑에 심거나 몰래 들에 심어둔 것을 포브가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체 짐짓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요. 비 전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서부 곡물상 연합회장도 칭찬해 주십시오. 그 친구가 힘을 많이 썼습니다.”
“그럼요. 편지를 고쳐 써야겠어요. 두 분 다 치하해 주실 거예요.”
포브 같은 사람이 있어서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아르티제아는 농업 독려관을 찾아 보라고 말했을 때에, 이 일까지 쉽게 해결될 줄을 알았을까?
그때에 리시아는 아직 아르티제아의 뜻을 잘 알지 못했다. 명하는 일이니 좇았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아르티제아는 포브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부 곡물상 연합도 그랬다. 아르티제아가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리시아는 생각했다.
산업 발달 자체가 함께 따라와 주지 않으면, 환곡 체계를 아무리 잘 정비해도 서부는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농업을 발달시켜 잉여 식량이 생기고 관리들을 잘 관리하더라도 상업이 자생하지 못하면 중부와 동부의 거상들에게 침탈당할 것이다.
수탈과 굶주림에서 벗어나야 백성은 제 땅에 머무를 수 있다. 그래야만 땅을 방어할 수 있다.
모든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변화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러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가 환곡 사업을 아르티제아의 손에서 회수하거나 서부군에서 세드릭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간부를 갈아치우지 않는 이상, 더 좋아질 것이다.
잘하면 다음 몬스터 웨이브는 세드릭이 나서지 않고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수해와 전염병도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서부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녀가 물었을 때에 아르티제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에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믿어줘.」
리시아는 이제는 그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겨내기 위해서는 믿음과 용기 말고도 다른 것이 필요했다.
아르티제아가 보는 것들을 그때에 그녀도 볼 수 있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