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90
악녀는 두 번 산다 189화
누런 옷을 입은 나이 든 사제와 수사들이 성가를 불렀다. 대사원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합창이 순식간에 앞뜰까지 가득 채웠다.
기곡제에서는 어린 복사들이 부르지만, 수확제에서는 반대로 나이 든 이가 노래한다.
결실을 거둔 것에 감사를 올리고,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는 제례였다. 사람 또한 결실을 맺은 이가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게 옳은 법이다.
황제는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대사원의 정원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귀족들이 무릎을 꿇고 몸을 구부렸다. 옷차림이 하나같이 화려하여, 햇빛을 받자 빛을 반사하는 물결보다 화려했다.
황제는 후 하고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내쉬었다.
그리고 행렬의 선두에 선 주교가 번쩍 치켜들고 있는 성물을 향해 성호를 그었다.
주교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평소라면 인사를 올려야 마땅했지만, 성물을 들고 있을 때에는 예외였다.
인간인 사제가 아니라 신성을 모시는 그릇인 탓이다. 그의 뒤에 있는 행렬과 노래하는 사제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행렬은 황제를 맞이한 다음 다시 뒤돌아서서 제단 쪽으로 향했다. 황제는 맨 뒤에서 느릿한 걸음으로 걸었다.
세드릭이 그 뒤를 따랐다. 세드릭의 뒤로 린 재상과 고위 귀족, 관료들이 줄지어 따랐다.
행차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르티제아의 주위에 있던 숙녀들도 무릎이 땅에 닿도록 꿇었다. 치맛자락이 꽃봉오리처럼 펼쳐졌다.
아르티제아는 무릎을 꿇을 수 없는 몸 상태였으므로 성물이 모두 지나간 다음에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균형을 잡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버둥거리며 팔걸이를 잡자 호위기사 하나가 황제의 앞인 것도 무릅쓰고 황급히 움직였다.
그전에 세드릭이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아르티제아를 잡았다.
아르티제아는 그의 팔에 의지해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성가에 놀랐는지, 아까부터 유난히 아기가 뱃속에서 요동을 쳤다. 식은땀이 났다.
“제국의 태양께서 가장 높은 곳에 뜨셨는데도 무릎 꿇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에브론의 아르티제아가 인사를 올립니다.”
“편안히 있으려무나. 짐이 설마 만삭의 임부에게 무릎 꿇으라 할까?”
“황공합니다.”
아르티제아가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로구나. 그간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만, 이처럼 무탈한 모습을 보니 안심하겠다.”
황제가 그녀의 모습을 한 번 훑어 보고 헛헛한 웃음을 웃었다.
아르티제아가 정략에 밝고, 신중함과 결단력을 함께 갖추었다고 평가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라는 인상이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아르티제아가 대여섯 살 때에 더러워진 치맛자락을 구겨 쥐고 로렌스의 뒤를 따라다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티제아는 이미 로산 후작이었고, 에브론 대공비로도 자리를 잡았으며, 내년이면 스무 살이 된다.
서부 지역에서 환곡을 위해 창고를 채우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황제는 각자 서로 다른 세 가지 경로로 들었다.
비밀수사관들은 로산 후작가의 가산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상당한 액수를 쓰고 있는데도 그랬다.
에브론 대공령에서 데려온 시녀가 하나는 명석하고 하나는 선하여, 신분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평판이 좋았다.
처음에는 지방 귀족, 더군다나 북부 촌구석에서 왔다고 비웃는 자가 많았으나 지금은 교유하고자 하는 자가 더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후사를 낳는다. 태어날 아이는 건강하기만 하다면 정통한 후계자이다.
결실을 축복하는 성가가 넓은 대사원을 가득 메우고도 넘쳐흘러 황제의 가슴 속까지 들어찼다. 그래서 도리어 위가 빈 듯 속이 쓰렸다.
그래서 그는 아르티제아가 간략히 답하는 소리를 흘려들었다.
“모두 폐하의 은총 덕입니다.”
“결실을 축복하는 제단에 서니, 아기도 축복을 받을 게다.”
“황공합니다.”
황제는 덕담을 하고 몸을 돌렸다. 수확제 날이다. 제례일에 임부를 상대로 좋은 말을 해서 나쁠 게 없었다.
제단 앞에 서 있던 대주교가 황제를 맞이했다.
세드릭도 아르티제아의 팔짱을 끼고 뒤따라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비로소 제단 위에 놓인 것들이 보였다.
각 지역에서 보내진 농산물이 조금씩 놓여 있었다. 세드릭의 시선이 제물을 훑는 것을 알고 아르티제아가 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
세드릭은 시선에서 뜻을 없애기 위해 애썼다.
「리시아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올해 수확제의 제물로 멜번이라는 새로운 작물이 선택되었다고 해요.」
아르티제아가 그 이야기를 전달한 것은 2주 전의 일이었다.
「멜번?」
「서부의 농업독려관이 한겨울에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을 발견하여 그 이름을 붙였다고 하더군요.」
한겨울이라는 말만 듣고도 세드릭은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감격의 말을 입에 담기 전에 아르티제아가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어 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것은 들통 나면 일방적으로 공격당할 빌미이고, 북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지간한 정치적 문제보다 더 조심해서 다루어야 했다.
이 이상 의논하거나 뭔가를 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그 뜻을 세드릭도 알아들었다. 그리고 저간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새로운 작물이 제단에 오르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닐 텐데요.」
「서부 곡물상 연합에서 뇌물을 상당히 썼다고 하더군요. 밀은 서부에서는 화폐 이상으로 거래의 기반이 되는 작물이니까요. 농부들이 밀을 소비하는 대신 팔아치울 수 있다면 곡물상은 큰 이득을 거둘 수 있지요.」
「당신도?」
아르티제아는 웃었다. 이제 덩치가 커진 서부 곡물상 연합은 그녀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가입되어 있는 곡물상 중 7개가 아르티제아의 것이었다.
뇌물로 쓴 돈을 생각해도 이삼 년 정도 밀 가격과 거래량에서 모두 이득을 볼 수 있다면 그럭저럭 수익이 난다고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작물에 이름을 붙인 관리가 무척 나이가 많고 성실하다고 해요. 권세는 없지만, 여기저기에 아는 사람이 꽤 있었다고 하더군요. 성실해서 신뢰하는 사람도 많고.」
아르티제아는 포브를 자료로밖에 알지 못했다.
과거에 로렌스가 즉위한 후 아르티제아는 서부를 재건하기 위해 유능한 사람을 여럿 조사하여 찾았다. 그때에 포브도 목록에 올라 있었다.
실제로 쓰진 못했다. 로렌스는 서부의 산업을 재건하기보다는 군벌을 짓밟는 것에 더 집중했으니까.
리시아가 애정을 가진 곳이라서 더 가혹한 정사를 폈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실의에 잠긴 포브는 아무리 불러도 출사하지 않았다.
후일에 가난으로 병이 나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전한 자가 유서도 가져왔었다.
황제가 하늘이니 황제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하늘 아래 무엇이 바뀌겠느냐고 비탄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그 유서를 손수 태워 없앴다. 포브의 가족은 아마도 아아주기라도 바라는 마음으로 유서를 전령에게 넘겨주었을 터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역모죄로 일가친척이 모조리 몰살할 수 있는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리시아가 잘 활용할 수 있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틀리지 않은 듯하여 기뻤다.
「그 관리의 정성이 갸륵해서 대신 사원에 청을 넣어준 지방관도 제법 있다고 하더군요.」
「이름이 무엇입니까?」
「포브라고 해요. 지금은 굳이 기억하실 필요 없을 거예요.」
지금은.
세드릭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차피 당신이 기억해줄 테니, 나는 궁금해지면 당신에게 물어보면 되겠군요.」
「세드릭 님.」
「물어봐야 한다는 사실을 까먹어도 당신이 일러줄 테고.」
아르티제아가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세드릭은 그것이 아르티제아 나름대로의 가벼운 대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미리 들은 이야기였지만, 역시 제단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자 마음이 격동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멜번은 북부에서 키웠을 때와 달리 굵고 껍질이 얇았다. 하지만 세드릭은 같은 작물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르티제아가 다시 그의 팔을 조금 당겼다.
세드릭은 표정을 없애고 알았다는 뜻으로 아르티제아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번에 당긴 것은 세드릭에게 표정 관리를 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아르티제아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세드릭은 그녀를 곁눈질했다.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세드릭과 팔짱을 끼고 있는 왼팔 말고 오른손으로 배를 지탱하듯 힘을 주고 있었다.
“아픕니까?”
제단 위에는 황제와 그들 둘밖에 없었다. 사람의 시선이 쏠린 것을 알면서도 세드릭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티제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소곤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괜찮, 아요. 가진통이, 있을 수 있는, 시기라고.”
“티아.”
“진짜 진통이라고, 해도, 어차피 몇 시간은 이럴 테니까요.”
아르티제아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세드릭은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그전에 아르티제아가 다시 팔을 당겼다. 이번에는 안색이 좀 돌아와 있었다.
“곧 끝나니까요. 견딜 만해요.”
“티아…….”
“쉿.”
제례 중에 떠드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리 없었다. 아르티제아는 세드릭의 팔을 다시 잡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주교는 축원문을 읊으며 제례를 진행시켜 나갔다. 긴 기도문이 성가의 음률에 노래처럼 부드럽게 섞였다.
세드릭은 초조해졌다. 표정에 드러내지 않기가 쉽지 않았다.
“폐하, 술을.”
대주교가 제단 앞에서 조금 비껴나며 말했다.
세드릭은 어금니를 물었다. 어쨌든 제례는 치러야 했고, 이 자리에서 그는 황제를 보좌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아르티제아가 그의 팔을 놓았다.
세드릭은 황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황제가 제단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기에, 그는 두 무릎을 다 꿇고 대주교가 건네준 술병의 술을 황제가 든 나무잔에 따랐다.
황제가 잔의 술을 제물에 골고루 뿌렸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제물이 화르르 타올랐다. 세드릭은 그 불길을 숨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작물 따위에 시선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당초 이 제단을 지켜보는 사람들 중 그런 작물이 전에는 없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아마 제물을 준비하고 차린 사제와 뇌물을 받은 자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황제가 마지막으로 그 불길에서 긴 초로 불을 옮겨 붙였다. 대주교가 그 초를 받아 황금과 유리로 만들어진 초롱에 모셨다.
이 불은 내년 기곡제까지 꺼뜨리지 않고 유지될 것이었다.
대주교에게서 초롱을 넘겨받은 주교가 이번에는 행렬의 맨 앞에 섰다. 그 뒤를 따라 제례에 사용된 성물을 든 주교들이 뒤따랐다.
황제는 그 행렬을 바라보았다. 제례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모두 끝났다.
대주교가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사의를 표했다.
“올해에도 실수 하나 없으셨습니다.”
“이깟 일에 실수가 있어서야 되나. 일이 년 한 것도 아닌데.”
다만 작년에 로렌스에게 시켰던 일을 세드릭이 한 것만이 마음에 껄끄러웠다.
이제 축제를 할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오, 오오!”
대주교가 황제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진 채 입을 벌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황제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세드릭이 쓰러진 아르티제아를 안아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의사! 산파!”
아르티제아 몸 주변에 녹색의 빛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