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92
악녀는 두 번 산다 191화
아르티제아는 멍하게 눈을 떴다.
이제는 익숙한 에브론 대공저의 침실이었다.
눈에 보이는 광경은 한동안 익숙해져 있던 것과 좀 달랐다.
만삭이 된 뒤로 숙면한 적이 없는 데다가 배를 의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습관처럼 시선을 그쪽으로 향했다.
‘아…….’
홀쭉해져 있었다.
뱃속 깊은 곳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아랫배 거죽에 길게 화끈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유산, 은 아니겠지?’
겨우 아홉 달을 버텼는데.
“마님!”
“아가씨, 아가씨, 괜찮으세요?”
곁에 붙어 있던 앨리스가 화다닥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하녀장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르티제아는 기력없이 앨리스 쪽을 바라보았다.
“아기, 는?”
“무사하세요. 아주 건강한 공녀님이에요. 기억 안 나세요? 수확제에 가셨다가 진통을 시작하셨어요.”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수확제의 제단 앞에서 진통이 시작되었던 것 이후의 일은 기억이 가물거렸다.
바로 곁방에 있던 의사가 뛰어들어 왔다.
“비 전하, 실례하겠습니다.”
의사가 아르티제아의 상세를 순서대로 살폈다. 청진하고, 열을 재고, 동공을 확인하고, 입고 있던 가운을 열어 상처를 보았다.
아르티제아는 그제야 제 배에 꿰맨 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
산모가 죽게 되면 배를 째어 아기를 꺼내는 일은 제법 있었다. 에브론 출신의 의사라 그런지 외상 치료에 능숙하여 짼 자국은 작고 잘 꿰매어져 있었다.
“하루를 꼬박 주무셨습니다. 상처는 순조롭게 회복 중입니다. 아마 통증이 있으실 테지만, 큰 이상은 없으실 겁니다.”
“하루……?”
아르티제아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비록 그녀가 의술에 해박한 것은 아니지만, 이 상처가 고작해야 이틀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는 그녀의 반문에 대답하지 않고 필요한 것부터 이야기했다.
“탈수 증상이 있으니 물과 과즙 같은 걸 조금씩 드십시오. 문제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열이 조금이라도 나면 말씀하셔야 합니다.”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통증이 있으실 겁니다.”
의사가 확실하지 못하는 태도로 망설이며 말했다.
“견디실 수 없을 정도라면 진통제를 처방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반응이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장기들이 제자리를 잘 찾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알겠네.”
앨리스가 따뜻한 물컵을 가져다가 아르티제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한 모금 마시자 조금 살 것 같았다.
“해산에 따르는 다른 불편한 점은 산파가 도와드릴 겁니다.”
철커덕.
그때 문고리가 벌컥 돌아갔다. 그랬다가 밖에서 책망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스가르였다.
“마님께서 놀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으앙!”
그리고 아기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아르티제아는 물컵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째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제아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으니 의사도, 하녀장도, 하녀들도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귀부인들 중에는 해산 후의 모습을 남편에게 보이기 꺼리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산에 너무 큰 고통을 겪은 사람 중에는 아예 아기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앨리스가 움직였다. 아르티제아가 꺼리는 것이 아니라 얼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드릭과 안스가르는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잠이 깨어버린 아기는 세드릭이 달랜답시고 흔드는 바람에 아주 제대로 울고 있었다.
아르티제아에 대한 걱정과 아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과 아기 울음소리가 혹시나 안 좋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뒤섞여 세드릭은 손도 발도 나가지 않는 상태였다.
보다 못한 안스가르가 아기를 빼앗아 안았다.
그러자 귀신처럼 아기가 울음을 뚝 그쳤다.
“한참 더 노력하셔야겠습니다.”
“거참, 신기해. 왜 자네가 안으면 괜찮지?”
안기만 했다 하면 울리기 일쑤인 세드릭이 멋쩍어하며 물었다.
앨리스가 문을 연 것은 이때였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만 보아도 사정이 대강 짐작이 가는 터였다. 앨리스는 윗사람 앞에서 웃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마님께서는 건강하십니다.”
세드릭이 안으로 들어섰다.
하녀들이 아르티제아의 등에 쿠션과 베개를 잔뜩 괴어 상체를 일으키게 해주었다.
세드릭은 아르티제아의 얼굴이 초췌하지만, 정상적인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대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안스가르가 아기를 안고 그 뒤를 따랐다.
“몸은 어떻습니까?”
세드릭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르티제아의 눈동자가 아기를 정시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고생했어요. 미안합니다.”
“뭐가, 요?”
“제 욕심 때문에 당신을 죽일 뻔했습니다.”
“아뇨.”
아르티제아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낳고 싶었던걸요.”
그녀의 시선이 몇 번이나 아기 쪽으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초점을 똑바로 맞추지 못하고 다시 흔들렸다.
세드릭이 안스가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스가르가 조심조심 그에게 아기를 안겨 주었다.
이번에는 용하게 울지 않았다.
“우리 딸입니다.”
세드릭이 아르티제아에게 아기 얼굴을 보여주었다.
“조산이지만, 아주 건강하다고 합니다. 날이 다 차서 태어나는 아기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해요. 오히려 더 늦어졌으면 당신이 위험할 뻔했습니다.”
늦지 않았어도 위험했으므로 말하면서도 세드릭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안아 봐요.”
안겨주려고 세드릭이 아기를 내밀었다. 그렇지만 아르티제아는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티아.”
“전, 괜찮아요.”
그 말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다 깨달은 것은 앨리스뿐이었다.
앨리스가 무례함을 무릅쓰고 세드릭의 건너편, 아르티제아의 옆자리에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아가씨. 아기씨는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그, 그게…….”
“아가씨도 이렇게 어릴 때 일은 기억 못 하시잖아요.”
그 말에 아르티제아의 눈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다.
“안아볼게요.”
세드릭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행여나 서투른 주인이 아기를 또 울릴까 염려한 안스가르가 중간에 끼어들어 도와주었다.
아르티제아는 아직 팔에 힘이 없었다. 안스가르가 팔 밑에 쿠션을 받치고 아기를 편안하게 아르티제아의 가슴에 기대어 주었다.
품 안에 닿는 조그만 무게와 체온에 아르티제아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게 그제만 해도 제 배 안에 있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세드릭 님을 닮았어요.”
“그렇습니까?”
세드릭이 알쏭달쏭한 얼굴로 말했다. 다들 그렇다고는 하는데, 그냥 덕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르티제아가 그런 덕담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닮았어요. 신기하네요.”
아르티제아는 작은 소리로 말하면서 검지로 가볍게 아기의 뺨을 건드려 보았다.
걱정하던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르티제아는 아기의 얼굴이 자신을 닮는 것도 걱정이지만, 혹시나 밀라이라를 닮을까 봐서도 몹시 걱정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드릭을 닮았다니 좋다. 더욱 기뻤다. 성품도, 육체적으로도 그래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이름은 생각해보셨어요?”
“으음…….”
세드릭이 고민 가득한 신음을 흘렸다.
벌써 석 달 전부터 재촉을 당했다. 이름 후보라도 몇 개 마련해 두라고 말이다.
하지만 도무지 마음에 차는 게 없었다. 오래된 가신들은 선조의 이름을 따오기를 바랐고, 몇몇은 선대 대공 부부의 이름을 물려주면 어떠냐고 권했다.
세드릭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아기는 결국 자라면 에브론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후자는 위험하기도 한 일이었다.
“명명식은 한 달 안에 해야 할 텐데요.”
“당신도 같이 생각해 주십시오.”
지친 아르티제아의 팔에서 다시 아기를 안아오며 세드릭이 말했다.
아기가 입을 오물거렸다. 울기 직전의 얼굴이라 세드릭은 당황하며 안스가르를 바라보았다.
안스가르가 아기를 세드릭에게 받아 안으며 말했다.
“젖어미에게 데려가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아.”
아르티제아는 손을 뻗으려다가 말았다.
자신이 젖을 물려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중들고 있던 산파가 말했다.
“아직은 젖이 돌지 않으실 겁니다. 마님의 건강도 중요하시니 지금은 젖어미에게 맡겨두시지요.”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하나 하고 생각한 것뿐이지, 자신의 몸 상태로 수유가 어려우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안스가르가 울기 시작한 아기를 달래며 밖으로 나갔다. 아르티제아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앨리스가 다시 그녀의 손에 설탕물을 쥐여 주며 재촉했다.
아르티제아는 목구멍을 조금씩 적셨다. 세드릭이 조심스럽게 아르티제아의 다른 쪽 손을 잡고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의사에게 물었다.
“진료를 더 봐야 하나?”
“아, 아닙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하지만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비 전하께서는 하루 이상 꼬박 굶으신 데다가 통증도 있으실 테니까요.”
“알았네.”
세드릭이 대답했다.
의사의 뒤를 따라 산파와 하녀장도 물러갔다. 앨리스가 마지막에 문을 닫고 실내를 점검했다.
혹시라도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치유력이 작용했으니 큰 이상은 생기지 않을 테지만요.”
“네. 아프긴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후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진탕되는 듯한 아픔이 습격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견딜 만했다.
그러다가 눈을 크게 떴다.
“치유력이요?”
“기억나지 않습니까? 제단 위에서 진통을 시작했을 때에 당신 몸에 치유력이 작용했습니다.”
아르티제아는 눈을 내리깔고 기억을 되새겼다.
고통이 너무 심해 그 언저리의 기억이 마치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손발에 돌던 온기와 빛이 기억났다.
제단 아래에서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것도.
그것은 분명히 성력이었다. 그리고 중립적인 아르티제아 자신의 성력과 달리 도와주고 싶다, 낫게 해주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이 가득한 축복이었다.
아르티제아는 어지럼증에 휘청거리다가 베개에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아파서 그런다고 생각한 세드릭이 당황하며 얼른 아르티제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괜찮습니까? 의사를 부를까요?”
“아뇨. 아니, 괜찮아요. 그렇군요. 그래서 상처가 이렇게 빨리 아문 거군요.”
수술 자국은 하루 이틀 된 상처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상처 자체의 통증도 확실히 그랬다.
아르티제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리시아 님, 이…….”
“그렇습니다. 리시아의 축복이 이제 발현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기억이 돌아온 거네요?”
아르티제아는 세드릭의 팔을 움켜 잡고 매달리듯이 하면서 물었다.
“죽기 전에 받은 축복은 아니에요. 그 축복은 역모죄를 뒤집어썼을 때에 이미 다 써버렸으니까요.”
그러니까 새로 내려준 축복이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