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98
악녀는 두 번 산다 197화
19. 남부
로이가르 대공비 가넷은 슈미즈만 입고 파우더 룸의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하녀들이 페티코트와 드레스를 다림질하느라 부산스러웠다.
리아간 공작가에 도착한 지 이틀 째였다. 여독을 풀기도 전에 만찬이 먼저 열리게 되었다.
가넷도, 가넷의 시녀들도 불평하지 않았다.
에이멜 왕비가 암살당한 지 벌써 반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제국 수도까지 소식이 오가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고, 황제 특사단을 꾸려 남부까지 내려오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에이멜 왕국은 충분히 기다렸다. 리아간 공작령을 장악한 상황에서 말이다.
물론 적지 않은 군량고를 털었고, 제국 남부로 들어오는 배는 보호세를 내야 했다. 리아간 공작가의 사업 일부를 빼앗았고, 침투시킨 영향력은 말할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에이멜 군은 남부를 휩쓸어 약탈하고 물러가는 대신 중앙에서 보낸 남부 정벌군에게 천천히 자리를 내주며 물러났다.
그만 하면 에이멜 왕국은 상당한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처음에 격한 태도로 제국을 비난하고 군을 휘몰아왔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로이가르 대공은 어젯밤에 리아간 공작 부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드리올 왕자가 말이 통하는 자라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군.」
「속으시면 안 됩니다. 해적 같은 자입니다.」
그간 겁박을 당한 리아간 공작은 치를 떨며 대답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남부 사람들은 모두 다 압니다. 그자가 해적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렇다면 더더욱 대단한 게 아닌가? 설령 에이멜 왕국의 자원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고삐 풀린 짐승이나 다름없는 자들을 다룰 수 있다는 뜻이니.」
「총력전이 두려워 피하는 것뿐이겠죠. 제국이 진짜로 정벌하고자 하면, 그자에게는 파멸뿐이니까요.」
리아간 공작 부인도 로이가르 대공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로이가르 대공은 생각이 조금 바뀌어가고 있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에이멜 왕국을 방문하여 국왕과 직접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카드리올 왕자에게 왕비 암살 죄를 덮어씌우는 것에 국왕이 동의한다면, 그가 가진 군사는 제국군이 해체할 것이다.
왕국의 그늘을 벗는다면, 군사란 결국 불법 무장 집단에 불과하다. 해적으로 몰아 모조리 토벌해버리면 된다.
카드리올의 군사가 아무리 정예병이라도 보급 없이 버틸 수는 없다. 그리고 보급을 위해 약탈을 계속한다면, 진짜 해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더하여 이언츠를 공범으로 몰아 이득을 얻을 셈이었다.
하지만 카드리올 왕자가 말이 통하는 자라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었다.
나이 들고 힘없는 국왕보다는 젊고 강한 왕자와의 동맹이 오래갈 수 있을 것이다.
로이가르 대공은 그 동맹이 성립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카드리올 왕자는 해적이다. 함께 이언츠 왕국의 살점을 뜯어먹자는 권유를 거절할 리 없었다.
어쩌면 로이가르 대공이 당도하자마자 리아간 공작가를 방문할 계획을 세운 것은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곧바로 만찬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로이가르 대공이 가넷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은 피곤하면 오늘은 나오지 않아도 되오. 며칠 후에 리아간 공작이 무도회를 열겠다고 하니, 그날 얼굴을 보여줘도 되니까.”
어차피 오늘은 탐색전에 불과했다.
가넷이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괜찮아요. 카드리올 왕자도 참석한다고 했다면서요. 제가 빠지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죠.”
“먼 길을 온 귀부인이 지쳐서 쉰다고 해서 불만을 가질 만큼 무도한 자는 아닐 테지. 여독을 푸는 게 우선이에요.”
“제가 나가지 않는 쪽이 나을까요?”
가넷의 물음에 로이가르 대공은 크게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야 당신이 함께 가주면 좋아요.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평화의 상징 같은 거라고.”
“그렇다면 준비할게요. 그게 제 역할이잖아요.”
“알았어요.”
로이가르 대공이 가넷의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며 고개를 숙여 관자 놀이에 입을 맞췄다.
“준비가 끝나면 데리러 오겠소.”
“네.”
가넷이 대답하자, 로이가르 대공이 밖으로 나갔다.
‘하긴, 내가 여기에서 무얼 할 수 있겠어?’
그 모습을 거울 너머로 바라보며 가넷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거울은 전면 벽 전체를 차지할 만큼 크고 맑았다.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하지 않아도, 이런 크기의 거울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물이라 할 수 있었다.
원래 리아간 공작 부인이 가넷에게 내주려 했던 것은 이 방이 아니었다. 이 집에서 가장 좋은 방, 곧, 공작 부인 자신의 파우더 룸과 투왈렛 룸을 내주려고 했었다.
가넷은 그것을 거절했다. 리아간 공작가에 남는 방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손님이 주인의 방을 차지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공작 부인은 본래 대대로 공작가의 장녀가 쓰던 방을 내주었다.
지금의 리아간 공작 부부에게는 딸이 없다. 그러니 이 방은 황후가 소녀 시절 쓰던 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그렇다 해도 황후가 머물렀던 것은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이 안에 지혜로웠던 리아간 공작 영애의 숨결이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설령 머물러 있다 해도 배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넷은 황후를 알현할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늘 어려워만 했었다.
가넷은 무력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특사단을 따라오기로 했을 때에도 곧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포드 영애의 일은 이미 옛날 일이다. 남편은 결국 자신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된 게 아닌가. 이곳에서 로이가르 대공은 훌륭하게 문제를 처리하여 공적을 세울 것이고, 그 공적은 그녀와 아이들을 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답답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간 피곤하긴 피곤하셨어요. 안색이 창백하시니, 붉은 기도는 옷으로 생기 있어 보이게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위브 자작 부인이 권했다.
가넷은 하녀들이 들고 서 있는 드레스 몇 벌을 찬찬히 살폈다.
“에이멜 왕자와 처음 만나는 자리잖아.”
에이멜 왕비가 암살당한 것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싸우자고 도발하려는 게 아니라면, 붉은 옷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상아색이 좋겠어.”
가넷이 선택하자 하녀들이 바삐 움직였다.
깊이 팬 보디스 위로 드러날 피부에 연분홍색 분을 발라 잡티를 가리고 생기를 주고, 허리는 코르셋으로 꽉 잡아매어 복부를 납작하게 군살 없이 만든다.
그 위에 짧은 페티코트를 입었다. 허리 아래부터 엉덩이까지 부풀리는 것은 스커트를 풍성한 종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흘러 떨어지는 곡선을 우아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동안 스카일라는 보석함을 들고 가넷의 옆에 서 있었다.
“뭐가 좋을까?”
“이게 어울리실 거라고 생각해요.”
스카일라가 보석함의 뚜껑을 열어 작은 페리도트를 두 줄로 엮어 만든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너무 어려 보이지 않을까?”
가넷은 로이가르 대공과 나이 차이가 나 보이는 게 싫었다.
남편이 나이 차이가 있기에 자신을 더 익애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귀여운 어린 신부가 아니라 제 역할을 다하는 부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옷 색깔에 딱인 걸요. 너무 화려해 보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이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
가넷은 목걸이를 채워달라고 스카일라에게 뒷목을 내밀었다.
스카일라는 가넷의 목에 페리도트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정말로 어울려요.”
“비 전하께서는 목이 가늘고 길어서 우아하니까요.”
“점잖고 품위 있으면서도 꽃처럼 청초하시니까요. 오늘 대공 전하께서 바짝 긴장하셔야겠는걸요?”
시녀들이 찬사를 쏟아냈다. 가넷은 조금 얼굴이 밝아졌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 모양이었다.
스카일라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어째서 카멜리아 후작 부인이 가넷을 안쓰럽게 여길 때가 있는지, 혼자 모셔보고 나서야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사실 어른스러워 보이든 아니든, 가넷의 역할에는 변함이 없었다.
평화의 상징이라는 로이가르 대공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가넷은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로이가르 대공이 무력에 의한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가넷의 역할은 매우 희박했다. 설령 그녀가 붉은 실크에 금사로 수놓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나선다 하더라도, 로이가르 대공과 카드리올 왕자 사이에서 싸우고자 하는 뜻이 없다면 전쟁은 재발하지 않을 것이었다.
가넷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었다. 중요하다, 잘해내야 한다고 주위에서 말하는 일들, 그녀가 신경 쓸 수 있는 일들은 진짜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에서 거리가 먼 것이라는 사실을.
중요한 것은 그녀가 로이가르 대공의 아내이며, 후계자의 어머니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런 감상을 모두 눌러 넣고 스카일라는 웃으며 말했다.
“젊고 아름다워 보이는 게 어때서요? 황후 폐하께서는 이모님 연세 때에 이미 황태자비로 제국을 이끄는 위치에 있으셨잖아요.”
“스카일라 영애.”
위브 자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카일라를 불렀다.
황후의 이야기는 그렇게 가볍게 꺼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이 리아간 공작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스카일라는 짐짓 실수했다는 듯이 말했다.
“제 이야기는, 이모님은 어떤 모습이라도 이미 이 제국 제일의 귀부인이라는 뜻이에요.”
“고맙다.”
가넷이 대답했다.
그녀가 투왈렛 룸 쪽으로 나섰다. 시녀들은 이미 치장을 마친 뒤였으므로, 재빨리 서로 흐트러진 곳을 확인해주고 매만졌다.
그리고 가넷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가넷과 로이가르 대공이 만찬장에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이었다.
만찬장은 넓었다. 수행원들을 위해 따로 긴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리아간 공작 부부가 접대해야 할 진짜 손님은 사실상 로이가르 대공 부부와 카드리올밖에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비 전하.”
카드리올 왕자가 가넷의 손등에 키스하며 씩 웃었다.
무뢰배다, 해적이다, 하는 말을 하도 들어서 가넷은 솔직히 좀 겁을 먹고 있었다.
젊고 잘생긴 왕자는 확실히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가넷은 예의 없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오늘은 인사를 나누는 자리이니까, 편안히 식사만 하십시다.”
“앞으로 할 이야기가 많고도 많으니까요. 북풍에 얼어서 앞뒤 꽉 막힌 작자가 특사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카드리올의 말에 로이가르 대공이 너털웃음을 쳤다. 그가 말하는 게 세드릭이라는 걸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북풍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터인데.”
“배를 타고 돌아다니다 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도 듣게 되는 법이지요.”
카드리올이 눈썹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로이가르 대공은 뭔가를 직감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직 속내 이야기를 할 만한 사이는 아니니까 말이다.
높으신 분들이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 수행원들은 각자의 이름표가 붙어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스카일라가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냅킨 사이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
다행히 바닥이 아니라 치맛자락에 걸렸다.
스카일라는 놀란 티를 내지 않고 냅킨을 펴서 무릎에 얹었다. 그리고 정돈하는 척하면서 그것을 주웠다.
작은 열쇠와 쪽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