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07
악녀는 두 번 산다. 206화
헤젤은 하녀를 부르지 않고 손수 뜨거운 물을 가져다가 차를 준비했다.
대공저의 사람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안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보안을 잘 지키고 있다고 말이다.
이안은 초췌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옷은 고급스러운 것이었지만, 고초를 겪은 것이 분명했다.
“어째서 이곳에 오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것은 에브론 대공비께서 질문하시는 내용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까?”
“아뇨. 죄송합니다.”
헤젤은 자신의 입방정을 탓하며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녀에게 그 호기심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중요한 자리에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헤젤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안은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몹시 지쳐서 주판을 튕길 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죄송하다고 생각하시면, 대신 제가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루덴 후작이 죽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헤젤은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루덴 후작이 위독하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깊은 내막까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안도 그걸 물어보는 걸 보면, 아는 사람 중 하나일 터였다.
“아직 돌아가시지는 않았다고 들었어요. 그렇지만 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군요.”
“의식도 전혀 없어요. 지금 루덴 후작가는 일촉즉발의 상태일 거예요. 루덴 후작님은 독재적이라서 장남에게도 권력을 거의 나누지 않고 있었거든요. 이 기회에 독립하려고 하거나 루덴 후작가 안에서 조금이라도 많은 지분을 차지하려는 방계들이 요동치고 있죠.”
소후작은 소극적인 성격이다. 지금 차지한 것이 적어도 수십 년, 지금의 루덴 소후작이 죽을 때까지는 유지되리라고 믿는 자가 많았다.
‘루덴 후작가가 망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루덴 후작가의 역사는 제국보다도 오래되었다.
땅의 생산력이 소실된 적도 없고, 격심한 경쟁도 없었던 동부의 대귀족 중에는 이런 가문이 몇이나 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자기들끼리의 권력다툼만이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제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도.’
그 세상이 바뀐 증거 중의 하나인 헤젤은 그 믿음을 우습다고 생각했다.
이안은 헤젤이 덧붙여준 말이 꽤 가치 있는 정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도 솔직히 말해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면, 에브론 대공비 전하를 찾아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스카일라가 한 충고였다.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잔인하고 거침없는 사람이에요. 만일에 할아버지에게 붙잡힌다면, 무조건 요구하는 걸 다 들어주세요.」
「무조건, 말입니까?」
「그래요. 살아남는 게 훨씬 중요하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 스카일라는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르티제아가 미리 이런 경고를 해주지 않았나 싶었다. 그러나 빤히 보이는 가능성이 있는데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당신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일정 부분 두 가문에 타격을 입히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조건 살아남는 것을 우선으로 하세요. 요구를 받아들이면 살해당한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반대로 해야겠죠.」
「요구를 들어주면 제가 가진 권리를 다 빼앗기지 않겠습니까? 당신도 나를 이용하려는 생각이라면 그래서는 안 될 텐데요.」
「로이가르 대공 전하가 실각하면 뒤엎을 수 있어요.」
「실각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네.」
스카일라는 단언했다.
이안은 그때에는 스카일라가 확신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부인인 그녀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루덴 후작이 요구하는 서류에 모두 서명했다. 메이덜린 루덴과의 약혼서에도 서명했다.
그다음 감시자가 딸린 채로 놓여 났다. 이안은 곧바로 스카일라가 알려준 루트를 통해 행방을 감추었다.
스카일라는 어머니도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교통편을 몇 개 가지고 있었다. 안가도 최근에 준비했다.
이안 스스로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루덴 후작은 그를 추적해내지 못했다.
카멜리아 후작 부인도 설마 스카일라가 관여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안은 안가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돈은 가지고 있었지만, 흔적을 흘리는 것이 두려워 잔돈푼으로 최소한의 생필품만 사들이면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루덴 후작이 화재에 휩쓸렸다는 소문을 듣고 비로소 나와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안이 차를 두 잔 더 마셨을 때에야 아르티제아가 응접실로 나왔다.
이안은 벌떡 일어섰다.
“두문불출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오는 사람까지 마다하기는 어렵지요.”
아르티제아가 짧게 말하고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이안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이안은 머뭇거렸다. 그는 스카일라의 조언으로 찾아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카일라와 아르티제아 사이에 무언가 사전 협의 같은 게 있었던 걸까?
불현듯 의심이 치솟았다.
이안은 그것을 내리눌렀다. 그는 이제 전보다 조금 더 크라테스의 귀족 사회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제 이야기가 제법 유명하니, 비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줄로 압니다.”
이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제게 무슨 도움을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아르티제아는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차를 따랐다.
이안은 이미 그 효용을 다했다. 본래는 존재하던 분열을 가시화시키는 수준까지만 가더라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것이, 레티샤의 일로 분열이 가속화되는 바람에 루덴 후작이 죽는다는 엄청난 사태가 생겼다.
충분했다. 이 이상 이안을 확보하고 있어도 쓸 일이 없었다.
그가 자기 힘으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카멜리아 후작가가 몰락한 후에 작위를 계승시킬 생각이긴 했다.
그런다고 해서 이안이 어떤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작위와 가문에 부와 권력이 딸린 이상, 상속을 둘러싼 물밑싸움은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대귀족 가문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없애버리는 것은 좋지 않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변화는 귀족들을 하나로 똘똘 뭉쳐 저항하게 할 것이었다.
이합집산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저희들끼리 싸우지만, 외부의 압력에는 늘 한마음으로 대적하니까.
‘스카일라는 내가 이안을 버리는 카드로 쓴 것을 알고 보낸 건가, 아니면 몰라서 보낸 건가.’
어느 쪽이든 친구의 소개이니 외면할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이안은 에브론 대공저의 대문을 통해 들어왔다. 덕분에 이 일에 공개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은 셈이었다.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루덴 후작가는 현상 유지도 어렵게 되었다. 카멜리아 후작가는 루덴 후작가를 방어하는 데에 힘을 보태야 한다.
부수적인 수입을 거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안이 고개를 숙였다.
“신변 보호를 원합니다.”
“소송을 계속할 생각인가요? 지금이라도 합의하겠다면, 제가 중재해 드리죠.”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안이 아르티제아를 바라보았다. 살이 빠져 깊어진 눈매 안에 광채가 돌았다.
“그러고 싶지 않다고요?”
“카멜리아 후작가를 상속하는 것은 저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것을 강탈한 자와 타협할 마음은 없습니다.”
아르티제아는 무심결에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사람은 없어요, 이안 경.”
“루덴 후작의 강요에 의해서 쓴 문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이안은 미리 적어온 목록을 내밀었다. 그것은 카멜리아 후작가의 재산 중에 중요한 것 몇 가지였다.
루덴 후작은 그것을 결혼할 때에 아내에게 예물로 주겠다는 계약서를 쓰게 했다.
“그 목록의 것을 모두 대공비 전하께 드리겠습니다.”
“강탈자에게는 주지 못해도, 스스로 남에게 내주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건가요?”
“비합리적으로 보이시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면 남은 것은 제 것이니까요.”
이것은 거래다. 거래는 완료되면, 주고받을 것이 사라진다.
협박으로 강요당하거나 호의라는 이름으로 빚을 쓰는 것보다 나았다.
“하긴, 경의 힘으로는 어차피 되찾기 어렵겠죠.”
이안의 말에 아르티제아가 생각에 잠긴 채 혼잣말을 했다.
이안은 그 순간 갑자기 깨달았다. 에브론 대공비가 베일을 쓴 그 여자였다는 것을.
“아.”
그는 무심결에 신음했다.
헤젤이 이채를 띠고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질문을 꾹 눌러 삼켰다.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조차도 권력자의 특권이다.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아르티제아가 미소를 지었다.
“수도에 오신 지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아는데, 그 사이에 퍽 세상 경험을 많이 하신 듯하군요.”
“……예.”
“계약서를 쓰지요. 루덴 후작이 갖고 있는 문서가 세상에 나오더라도,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어차피 종이 조각에 불과하니까.”
“예.”
“이안 경의 신병은 소송이 끝날 때까지 확실하게 보호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부수입을 올려서 나쁠 것도 없었다.
카멜리아 후작가를 유지시킨다고 해도 전처럼 부귀한 상태로 남겨둘 필요는 없고 말이다.
‘명예와 전통, 적당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가산이면 충분하지.’
아르티제아는 목록에서 절반 정도를 체크해서 이안에게 돌려주었다.
“이것은 훗날 경이 작위를 잇는다면, 나라에 바치도록 하세요. 경 자신을 위해서. 다른 가문들에게 좋은 본보기도 되겠지요.”
이안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이 일은 감히 자신이 관여할 만한 일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헤젤.”
“네, 비 전하.”
“이안 경을 별채의 객실에 모시도록 하렴. 알폰스 경,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이안 경의 호위로 붙여주세요.”
“알겠습니다.”
아르티제아는 이번에는 이안을 바라보고 말했다.
“귀가 어둡지는 않은 듯하니 요즘 대공저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는 알고 계시겠지요.”
“예.”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금지입니다. 외출은 호위 기사와 협의될 때만 하도록 하세요. 그래도 가능한 한 외출하지 않는 쪽이 안전하겠죠.”
“예.”
“독살의 위험이 있으니 대공저의 주방에서 나온 것 이외에는 입에 대지 말고, 물건 역시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필요한 게 있다면 집사나 여기 헤젤을 통해 구해달라고 말씀하시고요.”
“예.”
이안은 크게 심호흡했다. 한 고비를 넘긴 기분이었다.
아르티제아가 팔걸이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다가 물었다.
“스카일라를 신뢰하나요?”
이안은 애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녀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배를 탔다는 것은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
아르티제아의 침묵은 이안을 불안하게 했다.
“스카일라는 현명하지만, 아직 비열하다는 게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죠. 이안 경과 마찬가지로.”
“저는 이제 그것을 배웠습니다.”
“더 많이 배우셔야 할 거예요.”
아르티제아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