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45
악녀는 두 번 산다 244화
스카일라는 부두 앞에 서 있었다.
서른 개가 넘는 돛이 달린 배가 천천히 기항했다. 마스트는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선체를 둘러 붉은색과 황금색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광경은 거의 장엄했다.
“에이멜 왕실의 배가 무척 훌륭하군요.”
“국왕이 바다에 나설 때에만 타는 배입니다.”
외무부 관리가 대답했다.
아직 카드리올 왕자는 즉위식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배를 출항시켰다는 것이 지금 에이멜 왕국에서 그의 위치를 보여주었다.
어차피 즉위할 수가 없어서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선대 국왕은 이미 폐위되었다.
다만 왕비가 죽고 국왕이 폐위되는 비극적인 일이 두 번이나 반복되었으니 시간을 두고 슬픔을 가라앉힌 후에 즉위식을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카드리올 왕자가 이미 국정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정말 대담한 일이지.”
스카일라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배가 폭풍이라도 만나 침몰한다면 왕과 그 측근들이 몰살할 텐데.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일까. 하긴, 그는 소년 시절부터 원해를 항해했을 것이다.
“들어가서 기다리시지요, 카멜리아 후작 부인. 왕자님께서 하선하시려면 꽤 오래 걸릴 겁니다.”
“아니. 예의를 갖추는 편이 좋아.”
스카일라는 그렇게 말하고 바람을 맞으며 기다렸다. 추운 날씨가 아니라서 눈이 마르는 것 말고는 견딜 만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선 준비가 되자마자 제일 먼저 카드리올이 호위 몇 사람을 거느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왕의 행차는커녕 왕자의 행차로도 보이지 않았다.
외무부 관리들이 허둥거렸다. 다행히 스카일라가 제 자리에 서 있었던 탓에, 자세를 무너뜨린 자가 하나도 없었다.
스카일라는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데리고 온 화동들이 꽃을 주었다.
카드리올이 그것을 손수 받아드는 대신 한 송이를 뽑아 자신의 단춧구 멍에 꽂았다. 부관들이 대신 꽃다발을 받았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주시는 후의와 환대, 아주 잘 받았네.”
“그리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합니다.”
카드리올이 씩 웃으며 스카일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난번에 남부에서 봤을 때와 많이 다른 처지가 되었군, 카멜리아 후작 영애. 영광은 황금색 꿀만큼 달콤하겠지?”
스카일라는 보이지 않게 아랫입술 안쪽을 한 번 꽉 물었다. 동요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카드리올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후작 부인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전하.”
“…….”
카드리올이 잠시 묘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사이에 결혼하여 다른 가문의 안주인이 되었나. 그랬다면 스카일라는 당연히 그 가문의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카일라는 그러지 않았다. 카드리올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카멜리아 후작 부인이니까 굳이 가문의 이름까지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안 카멜리아의 문제는 카드리올도 알고 있었다. 아르티제아가 꾸민 술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제국 귀족답게 행동했군.”
스카일라는 수치심을 느꼈다.
카드리올은 그녀의 능력을 높이 샀었다. 제국처럼 정쟁으로 사람을 갈아버리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자신은 정쟁에 갈려버린 처지인가?
스카일라는 잘 알 수 없었다.
황제에게 총애 받고 있다. 황제는 그녀에게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주고, 자주 불러들여 차 시중을 들게 했다.
사람들은 이제 황제가 스카일라를 사교계 제일의 귀부인으로 만들려 한다고 수군거렸다.
이번에도 타국의 두 왕자를 접대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일라는 계속해서 허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얻지 않은 것도 자신의 영광인가.
가족을 풍비박산 내고 지킨 것도 가문인가.
자신의 능력은 아직 유의미한가? 인간으로서 타고난 자질을 펼치고 있는가?
스카일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드리올의 말마따나 그녀는 제국 귀족이었다. 그래서 부드러운 미소를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제국 귀족이니까요.”
“내 제안은 아직 유효해.”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남이 들을까 봐 두렵습니다.”
“내 부관 말이, 유부녀 납치는 안 되지만 불륜은 괜찮다는군.”
그 말씨는 한없이 가벼워서 조금도 농담 이외의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스카일라는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웃었다.
“반역보다 불륜이 낫긴 하죠. 하지만 여자를 꼬시려면 치장을 좀 더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마중까지 보내주셨을 줄은 몰랐으니까. 우선 배에서 내려서 옷차림을 단장하고 수도로 출발하려고 했지.”
“그러면 지금이라도 갈아입으실 곳을 마련해드릴까요?”
“이미 의전까지 다 받았는데, 수도로 가서 갈아입는 게 낫겠군.”
스카일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시지요. 영빈관에 자리를 마련해두었으니, 여독을 푸신 후에 수도로 가시지요.”
“호의를 고맙게 받겠네.”
카드리올은 기꺼이 스카일라가 안내하는 마차에 올랐다.
* * *
넓은 실내에는 환하게 햇빛이 들어왔다. 지루하지 말라고 연주하는 실내악이 느릿한 공기를 만들어냈다.
세드릭은 황태자의 예장을 전부 갖춰 입고 한쪽 무릎에는 레티샤를 안고 앉아 있었다.
책봉식이 끝나면, 황실의 계보를 보여주는 갤러리에 걸리게 될 기록화였다.
세드릭이 답답한 듯이 몸을 움직였다. 벌써 한 시간째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궁정화가가 말했다.
“움직이시면 공녀님이 깨십니다.”
세드릭이 다시 몸을 경직시켰다. 울기 시작하면 큰일이었다.
아르티제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냥 혼자 그리시는 편이 나을 거라니까요.”
“가만히 있겠습니다.”
세드릭이 반성하는 태도로 말했다.
“공녀님의 초상화는 따로 그렸다고 이미 말씀 올렸는데도.”
궁정화가가 말했다. 아르티제아도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전례 없는 일은 아니지만, 꼭 그러셔야 하나 싶긴 하네요.”
“하지만 요즘에 너무 바빠서 이럴 때라도 시간을 내지 않으면, 레티샤의 얼굴을 볼 시간도 없으니까요. 이러다 제 얼굴을 잊어버릴까 봐 걱정됩니다.”
세드릭이 정색하고 말했다.
비록 북부로 가지는 않았지만, 겨울에 그가 긴장을 풀 수 있을 리 없었다.
앞으로는 오랫동안 에브론 대공령에 가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에도 서부군 문제라거나, 또 다른 이유로 북부에 가지 못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일시적인 부재였다.
이제는 좀 달랐다. 세드릭은 자신이 없어도 에브론 대공령이 온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아예 체제를 새로 잡아야 했다.
황제는 황제대로, 가신들은 가신들대로 그가 상대에게 기울어 있지 않을까 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세드릭 같은 사람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아르티제아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결국 치러내야 할 일입니다. 신뢰 문제도, 제가 북부에 계속 체류할 수 없다는 것도요.」
그것 외에도 일은 산더미가 되어 세드릭에게 쏟아졌다.
황제는 그에게 내정 일부를 이양했다.
이로서 세드릭은 기존에 이미 맡고 있었던 수도 인근의 치안과 복지 문제에 더하여 교육과 재판부를 책임지게 되었다.
황태자 책봉식의 의전을 조정하면서 외교 문제에도 관여해야 했다.
게다가 측근을 구성하는 일까지 하고 있었다.
요즘에는 한밤중에 돌아와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다가 새벽에 소리 없이 나가곤 했다.
아르티제아는 예전 일을 떠올렸다.
그때에도 바빴던가.
별로 그렇지 않았다. 로렌스는 궁정 예법이나 의전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사실 어지간히 실수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 번 사르르 웃어주면 전혀 예의에 어긋난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측근을 구성하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점이 없었다.
고려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리할 것인가 아닌가 이 한 가지뿐이라면 확인할 것은 충성심 하나뿐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황제가 직접 도와주었다.
‘설령 폐하께서 세드릭 님에 대한 의심을 거두더라도, 시험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르티제아는 화가의 뒤에서 세드릭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특별히 배신이나 반역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세드릭이 어떤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지 끊임없이 시험하리라.
손에 쥔 이 다이아몬드가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망치로 두드리는 사람처럼.
아르티제아는 피로함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로렌스가 사라진 일은 또 어떻게 될까?
그에게 황제의 눈까지 피해서 사라질 능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게 되었다면, 그가 ‘돌아온 자’라는 뜻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자리를 얻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
로렌스는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황태자와 황제로 살았다.
돌아오기 전의 그에게는 승리의 경험이 있었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에도 익숙했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잔혹한 방식일지라도 말이다.
‘이것으로 모든 ‘돌아온 자’가 긍정적으로 움직였던 것은 운이었다는 셈이로군.’
위험 요소를 더 늘려서 생각해야겠다고 상념에 잠겨 있는데, 보드랍고 축축한 것이 아르티제아의 얼굴을 척 짚었다.
“아.”
아르티제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레티샤가 “우-, 우-.”하고 소리를 내다가 아르티제아에게 가겠다고 팔을 휘저었다.
세드릭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아무래도 제 얼굴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아르티제아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초상화는요?”
“잠시 휴식이라고요.”
세드릭이 살 것 같다는 얼굴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 놓아달라고 바둥바둥거리는 레티샤를 끌어안은 채였다.
“적당히 얼굴만 그린 다음 나머지는 대충 멋지게 채워줘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러면 안 되죠.”
“안 됩니까?”
“중요한 그림인걸요. 실재 그대로를 옮긴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으니까요.”
세드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요?”
“저요? 뭘요?”
“초상화는 다 그렸습니까?”
“저는 책봉식 후에 시간 날 때에 그려도 돼요. 책봉식 전에 꼭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니니까.”
“후, 쿠우우.”
레티샤가 칭얼거렸다. 세드릭이 다시 레티샤를 붙들어 자기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안 된다, 아빠 얼굴 잊어버리면.”
“잊어버린 건 아닐 거예요. 요즘 가만히 안겨 있으려고 안 해요. 어찌나 활발한지.”
“미안합니다.”
“뭐가요?”
“제가 키울 거라고 해놓고…….”
세드릭이 말을 어물거렸다. 아르티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돌도 안 된 아기를 데리고 국정을 볼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는 마커스에게 하세요.”
“그래도요.”
“이제 걷고 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데리고 다니세요. 전 감당도 못 할 것 같으니.”
세드릭이 웃었다.
아르티제아는 그 웃음을 바라보았다. 그가 웃는 것을 보면, 무엇이든 괜찮을 것이고,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세드릭의 입술이 그녀의 눈가에 떨어졌다가 입술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