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56
악녀는 두 번 산다 255화
“차가운 차를 가져와라.”
황제는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서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아니, 찬물부터.”
시종장이 황급히 물을 떠다 바쳤다. 그 물은 차갑지 않고 미지근했다.
찬물을 들이켜는 게 좋지 않다고 그러긴 했으나 오늘은 답답했다. 황제는 그 물잔을 바닥에 내리치듯 내려놓고 말했다.
“얼음을 가져와!”
시종장이 젊은 시종에게 손짓했다.
젊은 시종이 소리 없이 후다닥 물러갔다. 빙고에서 얼음을 가져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황제는 안락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목을 조이는 옷깃을 손수 풀었다.
시종장이 달려와 직접 그의 구두와 양말을 벗겼다. 감히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어라 어째라 하는 것조차 황제가 참아줄 것 같지 않았다.
대신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태도로 예복에 달린 무거운 금장식과 휘장을 떼어냈다.
“키쇼어를 불러와라.”
시종장이 얼른 손짓했다. 또 다른 시종이 달려나갔다.
황제가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외통수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지금까지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엇다.
설령 후계자로 삼을 만한 황족이 세드릭 하나밖에 없다고 해도 여전히 그러했다.
세드릭은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황제는 원한다면 그를 배척할 수 있었다.
지금 세드릭을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되고 있지만, 그것도 결국 자신이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그러지 않고 사생아인 두 딸이나 그녀의 자식들을 앞세워 후계 구도를 뒤엎을 수도 있었다.
황후가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쓸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폐셔 자작가의 어린아이들과 황후의 옛 친구들을 잡고 협박하면 황후가 어찌하겠는가.
그러지 않고 세드릭에게 계위해 주기로 결정했다.
레티샤가 신의 은총을 받았다거나, 딸들의 미래를 위해서라거나, 그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황제 자신이 평화롭게 치세를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노쇠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밀라이라를 잃은 뒤로는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 나름대로 고독했던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도 그 때문이리라고 황제는 생각하고 있었다.
견고했던 권력에 흠이 갔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의 노쇠를 느꼈다.
결국 세드릭을 택한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황제 자신도 역시 평화를 원했다. 훗날 역사서에 노쇠로 말미암아 권세를 잃고, 차기 권력조차 제대로 선정하지 못했다고 기록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문제가 달라졌다.
‘티아가 성녀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는 아르티제아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득과 승산을 계산하고 움직였다.
강한 자에게 아첨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비굴해지는 것도 굴욕으로 여기지 않았다.
필요한 자와 손을 잡고, 필요 없는 자를 배신한다. 충성과 신의의 가치도 같은 공식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이렇게 신탁을 내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뿐이다.
‘짐이 분노하더라도 뒤집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거겠지.’
자신의 총애보다도 신탁을 업는 편이 유리하다고 여겼으니, 숨긴 것을 드러냈으리라.
실제로, 이제 황제는 후사를 선택할 권리를 잃고 말았다.
설령 이제 마음이 바뀐다고 해도, 황태자 책봉식을 중단할 수는 없다.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든가, 타국의 사절까지 이미 도착해 있다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통성에 관한 문제였다.
성녀가 황후가 되리라는 신탁이 내려왔다.
그렇다면 성녀의 남편이 황제다. 그 상대가 직계 황족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세드릭의 정통성은 이제 황제의 양자라는 데에 있지 않았다.
설령 양자 결연을 파기하고 그를 크라테스가 아닌 에브론으로 돌려보내도, 사원과 백성들은 세드릭을 차기 황제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괘씸한 것.’
지금 시점에서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신탁이 천명된 직후였다. 여기에서 세드릭을 끌어내리려 해봤자 자신이 배교자가 될 따름이다.
제아무리 황제라 해도 신탁을 등에 업은 사원과 맞설 순 없었다.
그러니 신탁이 밝혀지기 전에 세드릭을 양자로 삼아 황태자로 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안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신탁에 밀려서 황태자를 결정한 것은 아니게 되지 않았는가.
신탁이 있다고 해서 그가 세드릭을 후사로 택한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딸들을 위해서, 평화로운 계위를 위해서, 안정된 치세를 위해서,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종이 얼음을 가득 채운 차를 가지고 왔다. 황제는 벌컥벌컥 차를 들이켰다.
머릿속 깊은 곳까지 열이 들끓고 뻐근한 기분이 들었다.
시종이 알렸다.
“키쇼어 경이 입시했습니다.”
“들라 해라.”
키쇼어가 들어와 단정한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황제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는 이미 개인적인 의리나 충성 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덩어리가 가슴에 생겨났다. 그는 그것을 배신감이 아니라 실패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키쇼어를 파악하는 데에도, 그의 충성을 잡아놓는 것에도 실패한 것이다.
“자넨 알고 있었겠지?”
“…….”
“짐은 성녀 올가상의 이적 따위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네. 그보다는 티아가 아마 어디에서 훌륭한 약이라도 구해 왔으리라고 생각했지.”
황제가 내뱉었다.
“성력에 의한 치유였군.”
“믿어주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도 알지 못했습니다.”
키쇼어는 공손하게 말했다.
“에브론 대공비가 제 딸을 구할 때에, 방법을 알고자 하지 말라고 미리 약속을 시켰습니다. 모두 성녀상의 이적인 것으로 해두자고.”
“…….”
“그래서 저는 그 약속대로 무슨 방법을 썼는지 결코 묻지 않고, 성녀상의 이적이라고만 생각하라는 말을 따랐습니다.”
“그래도 뭔가 짐작하는 바는 있었을 테지.”
“마지막 성자가 나타난 것이 백 년도 더 전의 일입니다. 게다가……. 이런 말씀 올리기 난처하나 그리 신실한 분도 아닌지라…….”
키쇼어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비밀로 해달라는 말씀에, 오히려 제국법으로 금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황제는 입을 다물고 키쇼어를 내려다보았다.
화가 가시지는 않았으나 트집 잡을 수 없었다. 황제 자신도 바로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납할 수 없었다.
“짐이 자네를 신뢰한 것은 자네가 누구와도 가깝지 않았기 때문일세.”
“예.”
“이제 짐은 자네를 믿을 수 없게 되었네. 책봉식 때까지만 그 자리에 있도록 하게.”
키쇼어는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실망시켜 드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황제는 그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갑작스럽게 피로가 몰려왔다. 황제는 안락의자에 몸을 깊이 묻은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신탁이라고?”
그런 것이 사실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성력은 진짜였다.
‘콜튼 수사를 무슨 수로 설득했는가 했더니, 그때부터 이 일이 얽혀 있었던 거로군.’
그렇다면 아르티제아가 성녀임을 숨긴 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다.
황제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아킴 주교 때부터 이미 제위를 노리고 움직인 거야. 당한 게 아니라, 그걸 기회 삼아 사원 내에서 계파 하나를 쓸어냈군.’
어쩌면 쓰러진 것도 자작극이었을 것이다.
그 이전의 일들도.
눈 깊숙한 곳이 피곤해서 황제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밀라이라…….”
그 이름을 부른 것이 얼마만의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황제가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아르티제아가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바라는 것이 결국에는 인정과 사랑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권력을 탐하는 야심도 그것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전제가 아예 잘못되었다.
귀여워할 상대라고 여겼던 것이 실은 가장 위협적인 적이었던 것이다.
* * *
아르티제아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지하 감옥에 매달려 있었다.
「지독하군. 아직 살아 있어.」
「황후 폐하의 힘이지.」
「쉿. 그 이야기를 새 황후 폐하께서 들으시면…….」
간수 하나가 동료를 막았다.
「젠장, 들으라고 해. 내 황후 폐하는 오로지 성녀님뿐이야.」
「뭣 때문에 이런 계집에게 축복을 내리신 거지.」
「그것도 다 깊은 이치가 아니겠냐. 훌러덩 금방 죽어서 편해지는 것보단.」
「하긴, 그것도 그렇네.」
당시에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 다시 생각하면, 옳은 말이었다.
인과가 참 지독했다. 리시아가 그녀에게 축복을 내려주었던 것은 용서였을 텐데, 고통스러운 시간을 연장시키고 있었을 뿐이니까.
‘신은 무엇 때문에 신탁 같은 것을 내리는가?’
이제 와 생각하면, 리시아에게 내린 신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리시아는 막대한 성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간을 초월한 존재는 아니었다.
한 사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
구원할 수 있다면 그 한 사람을 바쳐야 하는가?
아르티제아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철학자도, 신자도 아니었다.
아르티제아는 폐허가 된 동부와 멸망한 서부에 관한 꿈을 꾸었다.
「필요한 일인가, 필요하지 않은 일인가.」
세드릭이 말했다.
「그자에게는 제 것을 아끼고 귀중하게 다루어 훌륭하게 만들고 싶다는 의식이 없는 건가?」
리시아가 말했다.
「리시아는 후회 없이 갔노라고 전해주세요.」
그러고 보니 그녀가 받은 진짜 신탁이 무엇이었는지 아르티제아는 몰랐다.
잠에서 깨어나자 몸이 물먹은 솜처럼 피곤했다.
“마님, 괜찮으세요?”
소피가 깜짝 놀라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르티제아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목이 잠겨서 좀처럼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성력은 효율이 너무 나빴다. 생명력을 얼마나 소모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마법 쪽이 그나마 대가를 정확하게 셈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나았다.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카람 혼혈을 치유함으로써 더 큰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