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6
악녀는 두 번 산다 26화
세드릭이 로산 후작 저택을 방문한 것은 다음날 오전 중의 일이었다.
로산 후작가의 분위기는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나빠졌다기보다는 어수선했다.
후작가의 하인들은 에브론 대공이 아가씨의 손님으로 왔다는 사실에 겁을 먹거나 그를 피하려 들었다.
전날 빌이 금고 열쇠와 장부를 빼앗긴 탓이다.
빌은 아직 쫓겨나지는 않았으나 근신 상태로 자기 방에서 아르티제아가 내준 고서를 베끼고 있었다.
지금 로산 후작 저택의 지위 있는 고용인들은 대부분 빌에게 적극적으로 줄을 댄 사람들이었다.
이런 싸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말단 하인이나 하녀들도 대부분 모자란 급료를 조금씩 쪼개어 연말에 빌에게 술이라도 한 병 사서 뇌물로 바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빌의 편이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대부분 오랫동안 로산 후작가에 종사하며 살던 사람들이다. 쫓겨나면 갈 곳도, 할 일도 없어지기 때문에 빌에게 굽실거렸다.
합당한 후계자가 그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그러니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혔나? 아니면, 밀라이라와 로렌스가 돌아오면 다시 원위치될 일일까? 싸움이 되려나? 이제 아르티제아를 주인으로 모셔야 할까?
도리로 따지자면 아르티제아를 따르는 게 맞았으나 오랜 세월 저택 안에서 아가씨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편견에 찌든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는 임시로 금고 열쇠를 맡은 자콥조차도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에브론 대공이 방문했다. 그가 이 지각변동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고용인들은 대공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 몇 명 안 되는 아르티제아 편의 하녀들이 활발하게 돌아다녔다.
“어서 오세요, 전하. 아가씨께서 투왈렛 룸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소피는 몹시 행복한 기분으로 세드릭을 맞이하여 그렇게 말했다.
“투왈렛 룸?”
“네. 지금 마담 에밀리가 와 있어서요.”
세드릭은 머뭇거렸다.
투왈렛 룸이라니. 가족처럼 내밀한 사이가 아니라면 연인이라거나 서로 유혹을 주고받는 사이에서나 초대할 장소가 아닌가.
소피가 생글생글 웃었다.
세드릭은 자기가 옷을 선물한 당사자이자 청혼을 준비 중인 남자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는 얼굴이 벌게졌다.
아르티제아의 투왈렛 룸에는 옷감과 소품들이 넘치다 못해 복도까지 흘러나와 있었다.
세드릭은 열려 있는 방문 앞에서 한 번 더 주춤했다. 안에서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세상에! 너무 잘 어울리세요!”
“피부가 눈처럼 희시니까 무슨 색을 걸쳐도 어울려요!”
“이 핑크색 어때요? 아가씨는 항상 어두운 색만 입으려고 하시니까요. 가끔은 귀여운 옷도 입어 주셔야죠!”
“어머, 이것도 정말 잘 받으세요. 하긴, 이런 머리색에 눈동자라면, 무엇을 가져다 대어도 다 잘 어울리지요. 좋아요. 이것도 골라둬요. 피크닉용 드레스를 만들기에 딱 좋겠어요.”
“이것도!”
세드릭은 도저히 발을 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안내한 소피는 거침없이 외쳤다.
“에브론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아주 잠깐 동안 투왈렛 룸이 조용해졌다.
에밀리와 그녀의 직원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손히 절을 올렸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브론 대공 전하.”
에밀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반 톤 높았다. 세드릭은 움찔했다.
이것이 기세싸움이라면, 패배한 것은 세드릭 쪽이었다. 당황하는 그를 보고 에밀리는 호호 웃었다.
이렇게 즐거운 일은 흔치 않다. 의상실을 통째로 사서 보낸 남자와 이제부터 예뻐질 소녀, 딱 가장 재미있어질 순간 아닌가.
“그만하게.”
아르티제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세드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른 아침부터 실례했습니다.”
“아침식사를 들고 나서 2시간도 넘었는걸요. 이른 아침이라기에는 늦었지요.”
“일찍 일어나시는군요.”
세드릭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군사령관이자 기사이므로 새벽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귀족, 특히 직책 없는 사람들은 전날 새벽까지 파티를 즐기고 점심도 넘어서야 느지막이 일어나지 않던가.
아르티제아는 미소를 지었다.
“앉으세요. 응접실로 맞이해야 옳지만, 아직 이 집 안에서 확실하게 제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침실 말고는 투왈렛 룸뿐이라서요. 무례하다고 생각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야말로 약속도 없이 아침 일찍 찾아와 죄송합니다.”
세드릭은 어색하게 말하고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아르티제아가 소피를 불렀다.
“소피, 전하에게 따뜻한 민트차를 한 잔 내드리렴. 나도 한 잔 주고.”
“고맙습니다.”
“우선 한숨 돌리세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도록 하죠.”
아르티제아가 손짓하자 에밀리와 종업원들이 여기저기 널브러뜨려 놓았던 장신구 샘플이며 옷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세드릭은 별생각 없이 말했다.
“그런데, 마담 에밀리가 일찍부터 와 있군요.”
“만들어야 할 옷이 무척 많아서요.”
아르티제아는 가진 옷이 정말 얼 마되지 않았다.
우선 파티용 드레스, 아마도 약혼식 드레스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외출용 드레스와 티타임용 드레스와 일상복과 실내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옷을 새로 구비해야 할 형편이었다. 당연히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껏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 것은 그였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옷이 만들어질지는 짐작도 못했지만 말이다.
그가 관심을 보이기 무섭게 에밀리가 정리하고 있던 옷감과 장신구들을 팽개치고 다가왔다. 손에는 군청색 옷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은사로 자잘한 무늬를 끝도 없이 수놓은 그 옷감은 아무것도 모르는 세드릭이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이 옷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하?”
의견을 구해도, 세드릭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에밀리가 옷감을 펼쳐 아르티제아의 어깨에 걸쳤다. 아르티제아의 환한 백금발과 색이 잘 어울리고, 흰 얼굴이 더욱 희어 보였다.
“최고급 이언츠 자수랍니다. 저희 의상실에도 딱 한 롤밖에 안 들어왔어요. 제 생각에는 이 옷감이 에브론 대공가의 예복인 검푸른 색에도 따악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르티제아가 말했다.
“너무 과해. 이언츠 자수만으로 드레스를 만들면 적어도 별장 한 채 값은 나올 텐데. 끝단에만 다는 것으로 충분해.”
“마담의 권유대로 하도록 해요.”
세드릭이 끼어들었다. 그는 드레스나 옷감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돈 문제라면 한 마디 보탤 수 있었다.
“마담이 제일 잘 알지 않겠습니까?”
“비싼 것도 비싼 것이지만, 이런 자수는 작품에 가까운 것이니까요. 이왕이면 어울리는 사람이 입어주는 쪽이 좋지 않겠어요?”
“그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영애에요! 이런 옷감을 이렇게 소화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아르티제아는 그런 칭찬을 흘려 넘겼다. 어차피 상인의 칭찬이다. 팔려고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아르티제아가 무덤덤한 얼굴을 하자 에밀리가 속 타는 얼굴을 했다. 그녀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원단 값만 받겠습니다.”
“흥정하려는 게 아닐세.”
“대신에 영애께서 결혼하실 때에 웨딩드레스와 결혼한 후에 처음으로 입으실 파티용 드레스도 꼭 제게 맡겨 주세요.”
아르티제아는 잠시 생각했다.
솔직히 값을 깎으려고 안 하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 깎아준다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답한 것은 아르티제아가 아니라 세드릭 쪽이었다.
“그렇게 하게.”
“전하.”
“숙녀가 선물을 받으면서 가격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아르티제아는 미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녀 간의 소문을 내기에 가장 간단하면서도 좋은 방법은 돈을 쓰는 것이다. 세드릭이 그런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하긴, 알기 때문에 에밀리를 보내왔겠지만 말이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에밀리가 환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했다.
이 일은 그녀의 경력에 최고의 한 줄을 추가할 것이다.
아직 이 두 사람이 결혼 날짜를 잡은 것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매우 크다.
에브론 대공비의 웨딩드레스를 만들 기회를 얻는다면 상당한 액수의 손해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로이가르 대공비의 드레스를 만들지 못했던 일이 얼마나 원통했던가.
아르티제아는 골격이 우아하고 피부가 희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꾸밈새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아 고운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으나 타고나기를 기품이 있고 숙녀다웠다.
어머니 밀라이라처럼 정열 넘치는 미녀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 또래의 소녀들에게 요구하는 애교 있는 태도와 사랑스러운 웃음이 없고, 달콤한 외모와 발그레한 뺨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이처럼 골격이 아름답고 흐트러짐 없는 자태를 가진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빛을 발한다.
에밀리는 사람의 겉모습을 넘어서서 그 안에 있는 진짜 기질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었다.
큰손님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좋은 소재였다.
훌륭한 모델과 최고의 원단, 그리고 아낌없이 쓰는 물주, 이것이야말로 재봉사의 기쁨이었다.
“제가 너무 오래 방해했네요. 그럼, 이대로 진행하는 줄로 알고 물 러가겠습니다.”
에밀리가 공손히 말하며 절했다. 종업원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절하고, 디자인화며 샘플들을 정리해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산더미 같은 옷감과 레이스, 눈이 어지러운 온갖 물건들 사이에서 단둘이 남았다. 세드릭은 몹시 어색해졌다.
곧 소피가 와서 테이블에 상쾌한 향기가 나는 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알폰스가 밖에서 문을 지켰다.
세드릭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좀 살 것 같군요. 어젯밤에 별로 잠을 자지 못해서요.”
“밤을 새운 것보다 에밀리를 상대하는 게 더 피곤하신 것처럼 보이지만요.”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다.”
세드릭은 정색하고 말했다.
“간밤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영애에게 사과를 하고, 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다음에 만날 때에는 성녀 올가의 심장을 가져오겠노라고 말씀드렸는데, 아무래도 그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청혼 선물로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르티제아는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역시 전부 다 알고 계셨군요.”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