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67
악녀는 두 번 산다 266화
세드릭이 부탁한 것은 고작해야 두 가지뿐이었다.
다치지 말 것.
그리고 의논할 것.
함께 책임지자고 말했었다. 같이 올바른 길을 찾자고 말했었다.
그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결혼 서약은 더불어 한평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고, 주종 계약은 충성과 보호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둘 중 한 가지도 지킬 마음이 없는 듯했다.
이럴 때에 세드릭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긴 하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도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가 싶은 자괴감에도 사로잡혔다.
이제 마음이 통했다고 믿었었기에 좌절감은 더욱 컸다.
‘당신을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한 건가.’
주인을 바꾸는 것 말고, 아르티제아 자신이 변할 수는 없는 건가.
이기적이어도 좋다. 제멋대로 굴어도 좋다. 차라리 패악을 떨고 뻔뻔하게 나왔다면 좋을 것이다.
똑같은 마음을 돌려주는 것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도구와 도구를 손에 쥔 주인이 아니라.
제 마음에서 흘러가는 것이 아르티제아의 마음 바닥에 닿기를 바랐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주기를 바랐다.
이래서야 돌아오기 전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항상 내게 잔인하지. 내게, 유난히도.’
과거에, 세드릭은 아르티제아가 그를 이해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황제가 그의 밑바닥을 보고 싶어 쉬지 않고 시험했다면, 아르티제아는 그가 견뎌낼 수 있는 한계선을 알기에 악독하게 굴었다.
그 지독한 짓들에는 때때로 굳건한 신뢰마저 느껴졌다.
아마도 그가 선인이며, 군주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이 세상에서 가장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아르티제아일 것이다.
그것이 그를 오히려 더 강하게 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세드릭은 그녀를 붙잡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나는 그저 인간에 불과하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위로와 지지가 필요하고, 사랑과 소통도 필요했다. 남보다 조금 잘 버텨낼 수 있다고 해서 다치는 게 아프지 않은 게 아니었다.
사랑한다면 대체 왜 이렇게 하는 건가. 헌신하는 방법이 대체 왜 이런 식인 건가.
아르티제아가 정말로 자신의 죄를 갚고자 한다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희생하려 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를 신뢰하고 있다면, 주군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를 사랑하고 있다면, 남편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를 위해서라도 자신을 소중히 해야 했다.
오히려 도구화되고 있는 것은 자기 쪽이 아닌가.
아르티제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동반자도, 동지도 아니라 그냥 자신이 얻어낸 황제의 관을 올려놓을 상징물인 것 같았다.
새삼스러운 고통이 뼈를 씹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괴물 같은 적의 책사로만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도구로 남고 싶다면, 어째서 인간적인 얼굴을 내비쳤던가.
세드릭은 다시 한번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린 재상이 염려스럽게 말했다.
“지치신 것 같은데, 오늘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회의는 끝마쳐야지. 폐하께서 참석하시는 회의에 내가 빠질 수는 없으니까. 그러고 나면 가서 쉬겠네.”
잠들면 악몽을 꿀 것 같았지만, 휴식조차도 의무였다.
세드릭은 억지로 얼굴을 문지르고 고개를 들었다. 피로 때문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오래지 않아 황제가 당도했다.
좌중이 일제히 일어서서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가 앉으라고 대충 손을 내저었다.
그도 지친 얼굴이었다. 비록 다급한 실무가 세드릭 선에서 처리되었다고는 하지만, 수도에서 편안히 자고 있었을 리 만무했다.
황제는 착좌하자마자 물었다.
“항구의 사정은 어떠하냐?”
“일단 잔불까지 모두 진화되었습니다. 중요한 재산 피해는 보고드린 것에서 더 늘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세드릭이 말했다.
“인명피해도 이틀 전에 올린 보고서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숙소를 잃은 자들은 임시로 제 저택과 로산 후작가의 별장에 나누어 수용했습니다.”
“흠.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
“불탄 지역이 대부분 국용 부두와 군수품 창고 쪽이라서 숙소를 잃은 자들 다수가 군인입니다. 제 저택에는 본래부터 군인들이 많이 오가는 터라 별문제 없을 겁니다. 새로운 숙소를 배정할 때까지 임시일 뿐이고요.”
“민간인 피해자는?”
“항구에 따로 저택을 가진 이들 중 몇을 설득하여 별채나 하인들의 숙소를 열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직 현황을 파악하는 중이지만, 수가 많지 않으니 몇 달 정도라면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아무리 쓰지 않는 것이라 해도 귀족이 저택을 대피소로 제공하는 것은 좀처럼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세드릭은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에브론에서 전란이나 재해로 집을 잃은 피란민은 당연하게 대공가의 그늘에 들어왔다. 본성의 복도에 줄지어 이불을 까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황태자가 저택을 개방하는데 귀족들이 가만히 있기도 어려웠다.
특히 신심 깊은 이들 중에는 자발적으로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
세드릭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급하게 옮겨두어야 할 물건은 유니스 백작이 맡아주기로 했습니다. 항구 외곽에 사용하지 않던 창고가 있다고 합니다.”
“……잘했구나.”
칭찬이 선뜻 나온 것은 아니었다.
예민한 자들은 황제가 잘했다고 말할 때까지의 미묘한 간격을 모두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트집 잡을 것 없는 처리였다.
그다음은 재상부 관리가 황제가 당도하기 전에 오간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하여 보고를 올렸다.
황제가 움푹 들어간 눈가를 손으로 눌렀다.
“멜번이라.”
세드릭은 잠시 동안 피로를 잊을 만큼 긴장한 채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황제는 멜번이 고발당한 카람 작물임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의 비밀수사관들이 에브론 출신의 상인들까지 사찰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환곡을 허락도 없이 밀이 아니라 멜번으로 돌려받았다는 것은 충분히 책망할 만한 문제였다.
나라의 재산을 마음대로 돈이 되지 않는 것으로 받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는 구차하게 트집 잡지 않았다.
북부 보급 문제는 그에게도 늘 골치 아픈 일이었다.
세드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북부 방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세드릭이 카람과 내통했다는 고발이 있었지만, 황제는 아직 북부가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역모로 규정한 동부조차 토벌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북부에까지 손댈 여력은 없었다.
결국 세드릭을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했다. 3년 전만 해도 그는 세드릭을 북부에서 끌어내어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혹시 일이 드러났다가 처리하지 못하는 사태가 생길까 봐 조심스럽게 굴고 있었다.
황제는 한 차례 눈두덩을 더 눌렀다. 그리고 눈을 깜박거려 시야가 맑아지게끔 하고 말했다.
“황태자비에게 선견지명이 있으니 짐의 어깨에서 부담이 한층 가벼워지는구나. 그렇다면 내무부에서 군부에 협력하여 환곡 창고에서 물자를 꺼내도록 하라.”
“예, 폐하.”
황제가 물을 한 컵 들이켰다.
“화재의 원인은 밝혀냈느냐?”
“진화하는 것에 필사적이라 아직 밝히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군부의 대표로 나와 있던 후버 장군이 툭 내뱉었다.
“그냥 갑자기 불이 났을 리가 있겠습니까? 동부의 반역자놈들이 저지른 짓입니다, 분명히.”
“생각 없이 말하지 마시오, 후버 장군.”
“국용 부두 인근의 순찰 시간은 간격이 매우 짧습니다. 거의 쉬지 않고 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군량고는 특히나 더 신경을 써서, 작은 불씨라도 튀지 않도록 하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여기저기에 큰 물통도 놓아두었습니다.”
설령 건조해서 화재가 났더라도, 창고와 거리가 있는 부두에까지 그렇게 쉽게 불이 번질 리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틀림없이 방화라고 후버 장군이 강조했다.
“아마 놈들은 북부 보급을 위해 임시로 중앙군의 군량을 꺼내 쓰는 것을 기대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남부 정벌군이 돌아오는 것부터 늦췄어야 했을 겁니다. 보급 계획에 차질이 이만저만이 아니니까요.”
그러면 동부 토벌은 요원한 일이 된다.
후버 장군이 기염을 토하며 말했다.
“설마 황태자비께서 서부 환곡을 운용해서 식량을 넉넉히 마련해두셨을 줄 상상도 못 했겠지요.”
“하긴……. 아까 어느 분이 동부에 군을 보내어 재정을 얻는 것도 말씀하셨지만, 약탈을 하는 것이라면 모르되, 제대로 진압하려면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납득하는 자가 제법 있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합니다. 이런 일을 벌일 만한 대담성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제게도 몇 떠오르는군요.”
“흐음.”
황제가 작게 신음했다.
세드릭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후버 장군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방화라는 말을 쉽게 뱉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이 일을 로렌스가 저지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위병이 경계를 서고 있는 창고와 부두를 불태웠다.
동시에 불이 붙은 장소의 개수와 중요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에, 고위직에 있는 내통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자가 이 회의실 안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폐하는 진짜 모르고 계시는가…….’
황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제국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정치적으로 외면하거나 방기하는 일은 있어도, 국토를 포기하는 일은 없다.
그것이 그와 로렌스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설령 북부를 포기하고 말려 죽이기로 했어도, 항구와 보급물자를 불태워 없앤다는 미친 짓을 할 리 없었다.
그러나 황제가 로렌스가 유배지에서 떠나 사라졌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로렌스가 설령 자신을 호위 겸 감시하고 있던 자들을 모두 포섭했다고 해도, 연락망까지 모조리 손에 넣었을 리는 없었다.
세드릭은 황제의 표정을 읽을 능력이 없었다.
‘측근 누군가가 폐하의 눈을 가리고 있을 확률이 높겠지.’
그 부분은 아르티제아도 손대지 못했다.
황제가 손수 다루는 정보 조직에 접근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렌스는 입장이 달랐다. 설령 그러다가 들킨다 하더라도 황제는 그의 목숨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황제의 심복 중에는 로렌스에게 오랫동안 충성을 바쳐온 자가 많았다.
그들 중 한두 명만 기억이 돌아왔어도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었다.
린 재상이 말했다.
“그 일은 일단 뒤로 미뤄두도록 하시지요. 이 회의에서 이야기할 일이 아닌 듯합니다.”
“가장 급한 것은 부두 재건입니다.”
벨론이 앞에 놓인 서류를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예산이죠. 올해 재정은 이미 적자입니다. 작년에는 염세를 제대로 거두지 못했고, 올해도 위태롭습니다. 이제야 겨우 궤도에 올랐으니까요.”
“우는소리를 한다고 미룰 수 있는 일도 아니잖나.”
“저도 압니다.”
그때였다.
“폐하!”
누군가가 소리쳤다. 황제의 좌우에 앉아 있었던 세드릭과 린도 거의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폐하!”
황제는 테이블에 엎드리듯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