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71
악녀는 두 번 산다 270화
리시아의 그런 시선을 로렌스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만찬을 준비해두었어. 썩 훌륭한 요리는 못 되겠지만.”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그냥 밥 한 끼 먹는 거야. 네가 싫어하는 사제도, 귀족도, 관리도 없고, 딱히 목적도 없어.”
로렌스가 매끄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리시아에게 다가왔다.
“네가 좋아하던 거잖아. 운치 있는 곳에서 나와 둘이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그런 것.”
“…….”
리시아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
아직 그를 바꿀 수 있었다고 믿었던 때에. 사랑이라는 이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을 줄 알았던 때에.
그 이름으로 그가 자신만은 다르게 대할 줄 알았을 때에. 자신을 위해서라면 짐을 나누어지고 책임을 함께해 줄 줄 알았을 때에.
그때에는 달콤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었다.
황궁 생활이 힘들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잔인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그래도 세상을 지탱하는 힘든 일조차도 수월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베냐가 뒤에서 겁에 질린 채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리시아는 그래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가 있어, 베냐.”
“아, 아가씨…….”
베냐가 겁을 집어먹은 채 속삭였다.
로렌스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베냐는 섬뜩함밖에 느끼지 못했다.
리시아가 한 번 그녀의 손을 잡아 주고 말했다.
“나가 있어.”
베냐는 소스라쳤다. 리시아의 소매 안에서 작고 묵직한 뭔가가 베냐의 손바닥으로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것은 손 안에 꼭 쥐었다.
그리고 겁에 질린 모습 그대로 주춤주춤 리시아의 옆으로 나왔다. 그리고 달아나듯이 방에서 나왔다.
손 안에 있는 것은 총알이었다. 베냐는 떨리는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얼른 치맛자락에 숨겼다.
로렌스는 베냐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입술을 비틀었다.
“여전히 상냥하군. 궁금하진 않나?”
“뭐가요?”
“네가 죽은 뒤에 베냐가 배신을 했을지 어떨지?”
리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궁금하지 않아요. 설령 베냐가 제 묘비를 흙발로 밟았더라도, 그게 베냐의 탓은 아니었겠죠.”
“저 하녀가 그렇게 믿을 만한가?”
“베냐는 충절과 신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에요. 만일에 그녀가 날 배신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당신이 몰아간 거겠죠.”
“아니면 티아가.”
“…….”
리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넌 역시 내게만 냉정하군 그래.”
“…….”
리시아는 침묵했다. 해야 할 말이 없었고,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로렌스가 리시아에게 다가섰다.
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지만 방이 그렇게 넓진 않았다.
곧 벽이 등에 닿았다.
리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로렌스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한 움큼 잡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쥐어 올린 리시아의 머리칼에 입술을 댔다. 보석처럼 선명한 눈동자가 리시아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윽.”
리시아는 몸을 굳혔다. 고통보다도 치욕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항할 수는 없었다. 맨몸으로 로렌스와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자기 몸을 해치는 결과가 된다.
설령 무기가 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총이 장전된 채라서 쏠 수 있다면, 그 뒤는 어쩔 것인가? 마적이 몰려와 살해당하면?
베냐는? 역병은?
그전에 자신은 로렌스를 죽일 수는 있는 건가?
사랑은 바닥까지 고갈되어 말라붙었고, 연민은 품을 주제도 못 되었다.
하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가슴 밑바닥이 들끓었다.
리시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로렌스가 으르렁거렸다.
“왜? 동정이라도 하나, 성녀님?”
“…….”
“동정하려면 제대로 해. 항상 나한테만 말하지. 참아라, 양보해라, 이해해라. 그 반대여야 하는 게 아닌가?”
“목적이 대체 뭐예요?”
리시아는 처참한 얼굴로 물었다.
“난 이제 성녀가 아니에요. 신탁은 티아에게 내려졌고, 황태자 책봉식은 끝났어요. 나한테 이런다고 해서 당신이 황제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딴 건 관심 없어.”
로렌스가 피식 웃고 리시아를 침대 위에 내던졌다. 리시아는 괴롭게 신음하며 나뒹굴었다.
로렌스가 그 위로 덮치듯이 올라탔다. 리시아는 이번에도 벽에 등이 부딪칠 때까지 도망갔다.
달아날 공간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거부감을 이기지 못한 탓이었다.
로렌스가 고개를 숙였다. 리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로렌스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리시아의 입술을 덮었다.
리시아는 목구멍으로 비명을 질렀다.
로렌스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리시아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결국 그 저항을 다 짓누르지 못하고 로렌스가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이에 로렌스의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는 리시아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이런, 리시아.”
그가 손끝에 걸린 권총을 뽑았다.
“헉.”
“총이 있었으면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바로 쏴버렸어야지.”
로렌스의 웃음이 비단처럼 매끄럽게 리시아의 뺨 위로 스치고 지나갔다. 흰 뺨에 핏자국이 남았다.
“아니면? 또 그건가? 그랬다가 죽으면, 세드릭 놈이 무너질까 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버티겠다?”
그가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리고 리시아를 깔고 앉은 채 철컥 실린더를 열어 보았다.
실린더는 비어 있었다.
“아하. 하긴, 갑자기 끌려왔으니 장전할 시간도 없었겠군.”
마치 자기가 한 일이 아닌 것처럼 로렌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리시아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다시 말했다.
“황제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라면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내가 내 여자를 되찾겠다는데, 뭐가 이상해?”
“나는 당신 아내가 아니에요.”
리시아는 쥐어 짜내듯이 말했다.
“이미 다 없어진 일이에요.”
“하지만 날 사랑하잖아?”
로렌스가 말했다.
리시아는 숨을 헐떡거렸다. 제 날숨이 너무 뜨거워서 불이 가슴속에 붙은 것 같았다.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긴,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웃기지.”
로렌스가 정말로 웃긴다는 듯이 키들거렸다.
“아무려면 어때? 네가 날 사랑하든, 그러지 않든 상관없어. 그런다고 해서 네가 내 여자라는 게 바뀌는 것도 아니니까.”
리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르티제아에게 유언했던 대로다. 결국 그것은 모두 리시아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로렌스가 신탁의 대상이라고 믿었던 것 또한 리시아 자신의 결정이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낭만적인 감정이 개입되어 있었다.
사랑했고, 계속 사랑하려고 애썼다.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를 위하며 살고 싶었다.
평생 동안 용서하려고 애썼다. 내민 손을 로렌스가 잡았더라면, 앞으로도 더 노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렌스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그때에 리시아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로렌스가 다정하게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정말로 다 내려놨어? 나에 대한 미움도? 우리 아이도?”
그 순간 리시아가 발광한 듯이 날뛰었다.
로렌스는 낄낄 웃으며 그녀의 팔다리를 잡아 내리눌렀다.
정말이지 로렌스는 황제가 되는 일에 흥미가 없었다.
기억을 되찾을 때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즐거움 쪽이었다.
아르티제아에게 복수심 같은 것을 품지도 않았다. 세드릭에게 넘어간 게 어쨌단 말인가.
로렌스는 밀라이라와 달랐다. 아르티제아를 제거하기로 결정했을 때에 모든 인연이 끊겼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복수하겠다고 덤비는 게 당연했다. 로렌스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애당초 아르티제아는 로렌스에게 정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자신보다도 중신들이 더 의지하는 듯하여, 그것이 짜증나긴 했었다.
하지만 이겼다는 희열은 한순간이었다. 그나마도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꺼져버렸었다.
그냥 내버려두었어도 시들어 죽어 버렸을 동생이었다.
‘결국 무얼 해도 의미가 없었지.’
세상을 모두 가져보았다. 모래성을 쌓고 부수고, 블록으로 만든 장난감 집을 걷어차듯이 불쾌한 것을 모조리 때려 부숴 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바라는 대로 해본 결과 얻은 것은 권태였다.
그는 부황이 놀라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라면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에 진즉 질려버렸을 테니까.
한 번의 인생에서, 의미가 있었던 것은 리시아뿐이었다.
“네 인생에 하나뿐인 존재가 되고 싶어.”
“아악!”
리시아가 분을 참지 못해 울부짖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딴 건 사랑이 아니라고!”
리시아의 눈이 활활 불타는 듯했다.
로렌스는 황홀한 기분으로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나는 온전히 너를 가지기만 하면 돼.”
그것을 위해서, 그녀가 소중히 여기고 유대감을 느끼는 자들을 때려 부술 작정이었다.
그녀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 빌어먹을 개자식부터.
“널 절망시키고 미치게 만들어서 나만 보게 해도 가능한 일이잖아? 안 그래?”
“당신은 쓰레기예요.”
로렌스가 칭찬을 들은 사람처럼 달콤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