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72
악녀는 두 번 산다 271화
헤일리가 겨우 완성한 보고서를 들고 서재에서 나왔을 때였다.
문 바로 앞에 중년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헤일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시장의 비서를 홀라당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고 계시잖아요. 비 전하께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계세요.”
“무리한 정식 알현을 부탁드리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저 잠깐 웰로 군을 축복해주시기만 해도…….”
비서가 애가 타게 말했다. 웰로라는 것은 시장이 늦게 얻은 아들로 이제 겨우 세 살이었다.
비록 이 인근까지는 퍼지지 않았지만, 역병이 돌고 있는 시기다. 황태자비에게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어린 아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헤일리도 마음 같아서는 다리를 놓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예외를 만들 수는 없었다.
세 살을 허락한다면, 다섯 살은 어떤가? 일곱 살은?
병들기 쉬운 노인은 어떤가? 이미 병든 자는 또 어떤가?
한 번 허용하기 시작하면, 면회 요청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보안을 지키고 있지만, 에브론 기사단이 움직이는 이상 행정 관료나 성주들이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이곳에 성녀가 있다는 소문이라도 난다면, 순례자와 병자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 것이다.
역병이 도는데 그런 식으로 사람이 이동하면, 전염은 가속화되게 마련이다.
「나에겐 치유력이 없어. 보안을 지키고 지금처럼 방역을 유지하는 수밖에.」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헤일리에게 아르티제아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수확제에서의 기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헤일리로서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때의 일은 그때 한 번으로 끝난 거야. 운 좋게 기적을 얻었다고 생각해도 돼.」
본인이 그렇다고 하는데, 헤일리가 달리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아르티제아를 대신해서 대외적 활동을 하자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미안해요. 비 전하께서는 정말로 편찮으세요.”
헤일리는 그렇게만 말했다. 비서가 어찌하겠는가. 황태자비가 여독으로 쓰러져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는데.
헤일리는 비서를 그 자리에 남겨 두고 떠났다.
그리고 아르티제아의 방문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들어가겠습니다, 비 전하.”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헤일리는 문을 열었다. 아르티제아가 대답하지 않게 된 것은 며칠이나 된 일이었다. 그녀는 이제 익숙해져 있었다.
나무로 된 덧문이 모두 닫혀 있어 대낮인데도 캄캄했다. 촛불 냄새가 매캐했다.
아르티제아는 지도가 붙어 있는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침과 검은 펜으로 여기저기 메모가 되어 있었다. 헤일리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메모들이었다.
“왔니?”
돌아보는 아르티제아의 안색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 눈동자만이 인광처럼 빛났다.
“또 밤을 새우셨군요.”
“잠이 오지 않아.”
“그렇다면 침대에 누워 눈이라도 감고 계셔야 해요.”
헤일리는 말했다.
본래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신탁을 천명하며 쓰러지고 난 뒤로는 더 심했다.
헤일리는 아르티제아가 아예 서부로 와서도 안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르티제아는 아마 알폰스와 기사들의 시신이 온 뒤로 하루도 제대로 자지 않았을 것이다.
헤일리는 죽음에 익숙한 에브론인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망가지는 사람에게도 익숙했다.
‘처음 서부에 올 때에 걱정했던 것처럼 미끼 노릇을 하려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기사들의 죽음이 괴로운 일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아르티제아가 이렇게까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리시아에 대한 걱정도 그랬다. 아르티제아가 리시아를 각별하게 여기고, 또 유일한 친구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일리도 리시아를 걱정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척이었다. 자매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아르티제아는 정상이 아니었다.
차라리 약 같은 것을 써서 재울까. 푹 자고 일어나면, 그녀도 스스로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지도 몰랐다.
아르티제아가 중얼거렸다.
“생각의 흐름이 끊기는 것을 원치 않아서.”
“환기 정도는 하셨어야죠. 앨리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 봐요.”
헤일리는 일부러 앨리스를 들먹였다. 그쪽이 아르티제아의 반응을 더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다. 아르티제아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날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집중이 잘되어서 그냥 두라고 했어.”
“그러면 지금은 열어도 될까요?”
아르티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리는 여러 개의 촛불을 끄고, 창문 쪽으로 다가가 덧문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아르티제아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고 쿠션에 기대어 앉았다.
“기다리시던 소식이 왔어요.”
“요약해 주렴. 머리가 아프구나.”
헤일리는 각지에서 도착한 전서 원본을 붙인 보고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비 전하의 말씀대로였어요. 신원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숫자의 증감을 생각해볼 때, 이 지역에서 사라진 마적 대부분이 아바 강 유역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헤일리는 놀랍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본래 서부에서 가장 마적이 심하게 날뛰는 지역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이 당도했을 무렵에는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다.
주기적으로 마적을 토벌하는 성주들이 역병 때문에 토벌군을 내보내지 못하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마적이 역병을 신경 쓰면서 움직일 리 없으니, 전체적으로 이동이 발생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도적은 돈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으니까.”
아르티제아는 대꾸했다.
부유한 자가 무력을 얻고자 해도 군사를 기르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리는 법이다.
하지만 로렌스에게는 그런 인내심이 없었다. 게다가 통치와 지배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심력을 낭비하느니 돈으로 마적을 포섭하는 게 가장 간편한 방법이었으리라.
“가져온 정보들을 붉은 펜으로 지도에 적어다오.”
“네. 제가 할 테니까 그동안 비 전하께서는 잠시라도 눈을 붙이세요. 무얼 좀 드시는 것도 좋고요. 앨리스가 수프를 계속 따뜻하게 유지하라고 주방장을 닦달하다가 싸울 뻔했어요.”
“그래.”
아르티제아는 대답했지만, 일어서지는 않았다. 현기증을 일으키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걱정해주는 사람이 여럿 있다는 것은 이상하고 불편한 기분이었다. 전처럼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이 아니라,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버텨야 한다는 것도.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데.
아르티제아는 소파에 기대어 누워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쪽이 건조해서 따끔거렸다.
사각사각 헤일리가 메모하는 소리가 몸을 더 무겁게 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잠들면 끔찍한 꿈을 꿀 것 같은데.’
정작 필요한 순간에 쓰러지지 않으려면, 체력을 온존해야 했다. 아르티제아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헤일리가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리시아는 강한 애에요. 그 애를 납치해간 게 정치적인 목적에서이든, 리시아를 성녀로 알고 치유력을 노린 것이든, 결국 기다리면 나타날 거예요. 죽이진 않을 거예요.”
“그러면 안 돼. 그랬다간 늦어버려.”
상대는 로렌스였다. 치유력을 노린 것도, 정치적인 목적도 아니다.
일단 아르티제아 자신이 신탁을 받았다고 공언해버린 이상, 정치적으로 리시아의 쓸모는 없었다.
그리고 로렌스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치유와 은혜를 베풀며 인덕으로 세력을 모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니 로렌스의 목표는 리시아 자체라고 생각해야 맞을 것이다.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행동은 목적에서 나온다. 목적은 욕망에서 나온다.
로렌스의 심리 기저에는 자기가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박탈당했다는 억울함과 분노가 있었다.
과거에 그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은 상속권이었으며, 제국이었다.
그리고 로렌스는 한 번 제국을 가져보았다.
하지만 사람의 욕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삶의 경험 전반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은 달성되었으나 욕망은 남았다. 그러니 대상이 바뀌었으리라.
가능성은 충분했다. 로렌스는 결국 그녀의 마음을 굴복시키지 못했었다.
‘리시아 님을 그 ‘당연히 가져야 할 것’으로 여긴다면, 지금까지 한 일을 일관된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게 되지.’
서부에 역병을 퍼뜨리고 분탕질을 쳤다. 리시아가 서부 역병을 막으려고 했으니까.
세드릭을 모함하고, 수도 사람들에게 북부에 대한 차별 의식을 자각시켰다. 리시아가 세드릭을 소중하게 여기니까.
항구를 불태웠다. 세드릭에게 정치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북부를 말려 죽이기 위해서.
동시에 북부에 내재해 있던 갈등 요소를 심화시켰다. 리시아가 에브론을 소중하게 여기니까.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서도 굳이 알폰스와 호위 기사들을 죽였다. 리시아를 괴롭히기 위해서.
행동 논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앞으로의 행할 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리시아가 아끼는 모든 것을 부술 것이다. 돌아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지난 몇 주 동안 미친 것처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자신이 세드릭을 압박하기 위해서 무엇을 계획했었는지.
무엇을 실행하고, 무엇을 하지 않았었는지. 또 무엇을 로렌스에게 의논하고, 논리를 구성시켜 허락을 구했었는지.
그래서 결국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아르티제아는 손등을 눈가에 얹었다.
‘돌아오자마자 죽였어야 했는데.’
이 이상으로 자기 탓을 할 일이 생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 제국을 멸망시켰었다. 돌아와서는 세드릭의 원칙을 부분적으로 지켰으나 어디까지나 부분적이었다.
희생의 총량을 줄인다는 명분은 정의롭지 않았다. 그것이 실제로 휩쓸린 무고한 희생자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사후 세계가 있어 보복이 이루어진다면, 불사의 몸을 가지고서도 그 죄를 다 갚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세드릭은 자기가 먼저 선택한 일이라고 말했다. 책임은 자신의 것이며, 과거는 이미 없던 일이 되었노라고.
그러나 결국 명분을 받들고 음모를 꾸며 세드릭을 황제의 자리에 올리고자 한 것은, 아르티제아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과거에 저지른 짓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역병으로 죽은 자의 피 역시 아르티제아의 손에 묻어 있다.
그것은 모두 알고서 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아르티제아는 처음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후회했다.
‘그냥 그날, 오라버니와 어머니를 죽였어야 했어.’
그랬다면, 이 모든 일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 뒤에는 세상이 순리대로 흘러갔으리라.
그것이 신의 뜻이 아니었겠는가.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되돌리라는.
‘지금은……, 지금은 안 돼.’
아르티제아는 며칠 동안 반복했던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지금이라도 로렌스를 죽일 방법은 있었다. 밀라이라에게 알려주었던 것처럼 어설픈 것이 아니라 진짜 죽음을 불러올 수 있는 저주가.
하지만 그러면 리시아는 어떻게 되겠는가?
로렌스 휘하에 있는 것은 마적들이다. 로렌스가 죽어버리고, 그자들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면?
리시아는 능숙한 궁사였고 사격에도 능했다. 하지만 혼자 몸이었다.
마적이 젊은 여자를 놓아 보낼 리 없었다. 탈출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설령 탈출해도, 그 앞에는 마적이 우글대는 평원이 기다리고 있다.
“헤일리.”
“네.”
“난 아바로 갈 거야.”
로렌스가 서부 멸망을 리시아의 눈앞에 들이대기로 결정했다면, 다음은 행동은 수해다.
일부 지역을 휩쓸어 직접적으로 역병을 퍼뜨리고, 동시에 행정력을 마비시켜 방역선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로렌스는 어디를 터뜨려야 아바 강을 범람시킬 수 있을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