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87
악녀는 두 번 산다 286화
세드릭은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만한 심적 여유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황후가 앉은 자리까지 길을 열어주고,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세드릭은 황후에게 다가가 말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세드릭.”
황후가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제가 없는 사이에 레티샤를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랬다가 자신이 더러운 장갑을 아직도 끼고 있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벗었다.
마르타 백작 부인이 공손히 그 장갑을 받았다.
황후가 몸을 조금 일으켜 세드릭의 팔에 레티샤를 안겨주었다.
지쳐서 잠들어 있던 레티샤가 그 바람에 깼다.
“후웅……, 으애앵…….”
칭얼거리며 울먹이는 아기를 세드릭은 조심스럽게 보듬어 안았다. 레티샤가 훌쩍거리다가 저를 안은 것이 아빠라는 것을 알고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레티샤가 편안해 하는 방향으로 안아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하고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얼굴만 내비쳐서 죄송합니다. 연회를 계속하십시오. 저는 아기를 재우러 가겠습니다.”
어제였다면,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냥 인사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미 달랐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악사들이 연주를 다시 시작했다. 눈치 빠른 시종들이 촛불을 몇 개 더 가져와 살롱 안을 환하게 만들었다.
멈추었던 대화들이 다시 시작되었다.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달리 있겠지만, 지금은 일단 무엇이라도 대화를 이어야 했다.
제국의 새 권력자가 이만 관심을 끊으라는 뜻을 표시했으니까 말이다.
세드릭은 황후에게 인사를 올리고 레티샤를 안고 돌아섰다. 레티샤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게 처음이라 속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살롱 밖으로 나오자 가얀이 아직도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나중에.”
세드릭은 이번에도 그렇게 말했다.
오는 길에 황자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미 들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나중 할 일이었다.
지금은 목숨을 걸고 레티샤를 구한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 때였다.
장갑을 들고 따라나온 마르타 백작 부인이 세드릭을 안내했다.
제일 먼저 세드릭이 향한 곳은 미엘르와 헤젤, 나탈리아가 쉬고 있는 방이었다.
밖에서 이미 아기 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나탈리아와 베르나트, 헤젤과 벨몬드 부부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단정하게 몸차림을 가다듬고 있었다.
미엘르는 기절한 듯 잠들어 있었다. 키쇼어가 그녀를 깨우려고 했다.
세드릭은 키쇼어에게 편하게 있으라고 눈짓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탈리아에게 인사했다.
“왕세자비 전하께서 제 딸에게 나누어 주신 자애로움에 감사드립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저쪽에서도 레티샤를 죽이지 않고 보호하긴 했을 것이다. 인질로서도 유용하지만, 옹립할 황족이 없으면 저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세드릭으로서는 가슴 서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구해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레티샤는 이제 제국의 후계자가 될 몸이었다.
제국 황제가 타국에 구명지은을 입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세드릭은 마음속으로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말로 하면 훗날 레티샤의 빚이 되어 남을 테니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보답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었다.
나탈리아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걸요. 황손님께 별일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세드릭은 다시 말했다.
베르나트가 미소를 지었다.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지만, 이로써 이언츠 왕국은 톡톡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황손님은 괜찮으십니까?”
레티샤는 버둥대는 것도 지쳤는지 얌전히 안겨 있었다. 히끅대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좀 진정된 모양새였다.
의사와 보모 시녀에게 맡기는 게 좋을 테지만, 세드릭은 그러지 않았다.
그다음에 그는 미엘르 쪽으로 다가갔다. 미엘르 대신 키쇼어가 세드릭에게 고개를 숙였다.
괴로운 얼굴이었다.
헤젤의 연락을 받자마자 황궁으로 왔지만, 그는 이제 근위 기사가 아니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서문을 지키던 자는 키쇼어의 후배였다. 딸만 데리고 가겠노라고 호소해도 소용없었다.
그때 에브론 기사단이 밖으로 뛰쳐나가며 단숨에 서문 경비대를 짓밟았다.
키쇼어와 벨몬드 편집장은 기겁하여 어지러운 황자궁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정원 한쪽 수풀, 비밀 통로로 쓰이는 길 입구에서 헤젤이 쓰러진 미엘르를 보살피고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나탈리아가 당도했다. 그리고 다른 근위대원들의 도움으로 황후궁으로 와서 지금까지 쉬고 있었다.
“미엘르 양과 헤젤 양에게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세드릭은 헤젤에게 고개를 숙였다. 헤젤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 곁에서 키쇼어와 벨몬드 편집장도 그렇게 했다.
“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마땅히 총집사장과 호위대장의 말에 따라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는데도 용서해주셔서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믿지 못한 이유가 있었겠지. 오히려 그 믿음을 주지 못한 내가 미안하네.”
세드릭은 그렇게 말했다.
군인이었다면 설령 의심이 든다 하더라도 명령을 따라야 마땅하다. 그러나 헤젤과 미엘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판단력과 결단 덕분으로 레티샤가 안전하게 이곳에 있으니,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앞으로도 레티샤를 잘 부탁하네.”
“황공합니다.”
헤젤이 몸둘 바를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세드릭은 키쇼어에게도 사과했다.
“자네의 마음고생을 알고도 남음이 있네. 미안하네.”
“아닙니다. 제 딸이 이제 성인인데……, 아비라고 헛된 걱정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키쇼어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엘르를 책망할 마음은 없었다. 미엘르처럼 약한 아이에게 무리한 일을 시켰다고 서운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만일에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은혜를 갚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을 것이다.
그런데 미엘르가 스스로 그 값을 치르려는 듯이 보여서 몹시 괴롭고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그게 미엘르의 운명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엘르가 원래 아이를 좋아하고, 건강했다면 제 아이를 갖고 싶어 했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세드릭은 벨몬드 편집장에게도 몇 마디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그 방을 떴다.
가얀이 또다시 따라왔다. 세드릭은 아기 요람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레티샤를 요람에 내려놓자 대기하고 있던 의사가 달려왔다. 열이 있는 걸 안고만 있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세드릭은 젖은 거즈 수건을 받아 레티샤의 퉁퉁 부은 얼굴을 손수 닦아주었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가얀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을 지키는 근위대원은 모두 가야의 심복이었으니 믿고 맡겨도 좋을 것이다.
“황자궁에 있었던 인원은?”
“에브론 대공저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상자는 32명이라고 합니다.”
가얀이 덧붙였다.
“모두 기사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의 경우 대신 미끼가 되기 위해 남아 있던 아기나 젖어미는 모두 무사하다는 뜻이었다.
세드릭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런 식으로 살아남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에브론 인들이 자신에 이어 레티샤에게 목숨을 거는 것이 가슴 쓰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본 마커스가 다른 선택을 한 것에도, 이해하고 남음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가얀이 허리를 직각으로 꺾어 사죄했다.
황자궁이 뚫린 것에는 그의 책임도 있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 황자궁이 문을 닫은 채 버티면, 소란이 퍼진 다음 가얀이 황궁을 어지럽힌 자들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지원군을 보낼 작정이었다.
황후가 호출하자마자 가얀이 3백 명의 근위대원을 이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 전에 황자궁이 뚫렸다.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한 셈이었다.
“진심으로는 경 스스로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겠지?”
세드릭이 말했다.
가얀은 표정에 전혀 드러내지 않고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상황에 따라 행동하라고 전권을 맡기셨습니다. 제가 상황 판단을 그르친 것입니다.”
“황자궁이 너무 일찍 뚫렸지. 경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네.”
아기가 달렸으니,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가얀의 책임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렇게 단시간에 간단히 뚫릴 리가 없었으니까.
오늘 밤에 가장 신중을 기울여 지키게 한 곳이 다름 아닌 황자궁이었다.
에브론 기사 70인과 근위대원 중에서는 정말로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자를 합쳐 1백 명이 지키고 있었다.
거기에 고용인들도 있었다.
부부 출신의 고용인은 그냥 하인과 하녀들이 아니었다. 대부분 에브론 대공령에서 군역을 마친 이들이었다.
기사만은 못해도 병사 노릇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을 터였다.
반황태자파에서 쓸 수 있는 병력은 기껏해야 근위대원 일부와 은밀히 숨겨 들어올 수 있는 병사 한 부대 정도였다.
제아무리 황자궁이 농성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숫자로 방어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만 하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다.
무리해서 대공저로 옮기면, 준비한 낚시가 모두 허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근위대가 지원을 갈 때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
이제 중요한 순간에 에브론 인들만 믿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도 안 되었다.
그렇다고 황후궁에 맡기자니, 암살자와 첩자를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를 해도 안에서 문이 열리면 버텨낼 수 없다. 에브론 본성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30분도 버티지 못하고 뚫린 것은 내통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추격자들은 에브론 기사단의 그림자도 밟지 못했다. 그것은 가얀이 제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내 책임일세.”
세드릭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가얀은 그 말뜻을 오해하고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에브론 기사단이 황자궁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가얀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황후가 세드릭에게 용무가 있다면, 그를 부르는 게 옳았다. 이런 곳까지 나올 일이 아니었다.
세드릭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물러가게.”
가얀이 당혹감을 숨기고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모셔라.”
세드릭이 명령하자 문이 열렸다.
황후는 마르타 백작 부인조차 거느리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외교 사절들에게 오해를 사지 않을 만큼 적당한 시간을 두고 살롱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찾아온 것이었다.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네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말씀하십시오.”
“황자궁이 뚫린 것은 내 책임이다.”
황후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간자는 유벤의 부군이었다.”
세드릭은 놀라지 않았다.
유벤 노자작은 아르티제아가 황후와의 동맹의 뜻으로 받아들인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