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9
악녀는 두 번 산다 29화
“옳은 말씀입니다. 약혼녀와 자주 그런 말씀을 나누십니까?”
세드릭은 난처한 얼굴로 린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많이 외부에 노출되었다. 세드릭이 그녀에게 줄 청혼 선물을 구하다가 인신매매 현장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신문에서 떠들어댔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한동안 말이 사그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에이슨 백작의 일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또다시 그녀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아르티제아는 괘념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화이트 일가를 엄중히 보호하라고 부탁한 것과 달리 그녀 자신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세드릭은 그것이 싫었다.
린을 인간적으로, 또 제국의 신하로서 신뢰하는 것과 별개로 아르티제아에 대해서 함부로 억측하게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린이 묻는데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번 일이 그녀와 관련이 전혀 없는 일도 아니니까요.”
“로산 후작 영애는 아직 어린 나이라고 알고 있는데, 통찰력이 뛰어나군요. 하긴, 로산 후작 부인도 히스테릭한 성미에 비해서 특정한 부분에서는 영리한 편입니다. 본능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방법을 알고 있지요.”
“…….”
아르티제아의 부모에 관한 일이기에 세드릭은 말은 아꼈다.
린이 부드럽게 말했다.
“정치에 회의를 느끼십니까?”
“조금은요.”
세드릭은 허탈하게 말했다.
예전에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황제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세드릭에게 새삼스럽게 생경한 깨달음과 허무함을 함께 던져 주었다.
세드릭 자신이 견제당할 때에는 자기 문제라 실감하지 못했다.
본래 군권을 쥔 자는 위험한 법이다. 게다가 그는 역모로 죽은 부모의 자식이며, 절반은 황족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는 그렇게 견제해야 할 대상이 없었다. 아르티제아가 만들어놓은 상황 덕에 완전히 우연히 드러난 사건처럼 보였다.
린은 드러난 사건을 처리하도록 일을 맡았을 뿐이며, 황제의 신하이다.
굳이 견제해야 한다면 이번에도 세드릭이겠지만, 이제까지 세드릭은 국내 정치에 관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이번 일은 순전히 민생 문제였다.
그런데도 황제는 이 일을 권력 강화에 이용할 생각밖에 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크라테스의 정치입니다. 시비를 가려 옳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재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일도 아니라 황제 폐하의 뜻을 저울추로 삼아 민의를 달아 내는 것이지요.”
“재상은 그것에 회의를 느끼시지는 않습니까?”
“신하는 그런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제게 회의를 느끼느냐고 물으십니까?”
그러자 린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린이 화제를 돌렸다.
“뇌물 건을 덮게 된 것은 대공 전하에게 오히려 다행한 일입니다.”
“예?”
세드릭은 되물었다. 린이 대답했다.
“내막을 모두 알고 있는 우리가 종합적으로 볼 때에, 로렌스 경도, 로이가르 대공도 이번 사건으로 인해 타격을 입었습니다. 로이가르 대공은 중요한 자금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에게 약점을 잡혔습니다. 반대로 전하에게는 은의를 입었지요.”
“예, 압니다.”
“에이슨 백작 때문에 로렌스 경이 입은 타격은 말할 것도 없이 큽니다. 오욕을 뒤집어썼을 뿐만 아니라 폐하에게 미움을 샀을 겁니다. 에이슨 백작이 거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 자금줄에도 타격을 입었겠지요.”
“그렇지요.”
“만일에 뇌물 사건을 크게 만들면, 대공 전하께서 로렌스 경을 위해 이번 일을 파헤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뇌물 사건을 덮었으니 남은 것은 로렌스 경뿐이지요. 우연이었다고는 하나 전하는 로렌스 경을 공격하여 세력을 깎아놓은 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아르티제아와 약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이제 그 약혼에 대해서 결코 로렌스와 세드릭 사이에 이루어진 혼인 동맹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약속한 대로 되었다. 세드릭은 로렌스 파벌의 중요 인사를 찍어내는 것으로 중앙 정계에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그러나 우연으로 시작한 일이므로 로렌스는 그를 적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아르티제아는 여기까지 예측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약혼녀분은 서운해 하지는 않으십니까?”
“예. 자기는 전혀 상관없으니 제게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따라가라고 하더군요. 그녀가 누구보다도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아내감을 얻으셨습니다. 그 손을 놓지 마십시오, 전하. 전하 같은 위치의 분이 정략이 아니라 진실한 애정과 신뢰로 맺어질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대답하는 세드릭의 가슴에 답답한 한숨이 맺혔다.
그것은 이 일이 확대되기 시작할 때에 프레일이 전혀 다른 이유로 같은 말을 했다.
「로산 후작 영애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전하. 다른 자에게 넘기기에는 너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영애가 로렌스의 지낭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솔직히 오싹합니다.」
세드릭은 그 말에 이성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감정은 반발했다.
아르티제아를 생각할 때마다 세드릭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슴이 들쑤셔지는 것 같기도 하고, 설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이제 겨우 18살이다. 아직 어렸다.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였다.
그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목을 보면 정세 이야기를 하고 조언을 구할 게 아니라 포근한 꽃담요로 감싸 양지 바른 소파에 앉혀 놓는 게 옳다고 생각되었다.
보살펴주고 싶었다. 그녀의 조언이 필요하면서도, 이용할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아르티제아 자신이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
그것이 답답하면서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같아 속이 상했다.
* * *
서걱서걱.
깃펜이 거친 종이를 긁는 감촉이 소름 돋게 안 좋았다.
빌은 끙끙거리며 다시 원본을 보고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획을 그었다.
“젠자앙…….”
그는 근 한 달째 좁은 골방에 처박힌 채 아르티제아가 준 읽을 수도 없는 고대문자 책을 베끼고 있었다.
손목과 손가락이 아작 날 것 같았다. 눈도 아프고, 종이와 잉크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았다.
그나마 이 정도 처분으로 끝나는 게 다행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 갇히다시피 했으니 로산 후작 저택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거의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이 많이 갈린 것은 알 수 있었다.
빌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인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대신 그가 후작가의 영지나 별장 구석에 박아놓았던 늙은 고용인들이 다시 불려온 것 같았다.
하녀들도 꽤 바뀌었다. 특히 청소와 세탁 같은 잡일을 하는 하녀들이 많이 바뀌었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하녀도 늘어났다.
상급 하녀는 대부분 밀라이라를 따라 별궁으로 갔을 테니, 그 하녀들은 모두 아르티제아를 모시기 위해 새로 고용된 자들일 것이었다.
한동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니던 자콥도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무서운 아가씨였다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앨리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주인 알기를 우습게 알았던 게 잘못이죠.”
“앨리스 너……!”
“애프터눈 티는 왜 주라고 하시는지 몰라.”
앨리스가 흥흥거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리제가 좁은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종이들을 확 손으로 밀어 바닥에 뿌려버리고 차 쟁반을 놓았다.
빌이 벌떡 일어섰다.
“야! 너!”
“누가 야예요?”
리제가 눈을 치켜뜨며 빌을 쳐다 보았다.
빌이 발을 굴렀다. 그렇지만 손을 내밀지는 못하고 욕만 내뱉었다.
“와, 이제는 이 쥐콩만 한 것까지 날 개무시하네? 야, 앨리스, 넌 이게 이러는데도 가만있는 거야?”
“왜요? 똑같은 고용인끼리 야야거리는 것보단 낫죠. 귀족이세요?? 고용주세요? 싫으면 마시지 말든가.”
앨리스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리제가 도로 쟁반을 들었다. 빌이 “야!” 하고 다시 소리를 쳤다.
“아니야, 아니다. 잘못했다. 잘못했으니까 그건 내려놓고 가.”
“리제.”
“솔직히 죄인한테 차까지 챙겨주는 거 전 이해가 안 돼요.”
리제가 표독하게 말했다. 앨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안 잘랐으니까 그냥 놔둬야지 어쩌겠어.”
“앨리스.”
빌이 안면을 바꾸고 간절한 목소리로 앨리스를 불렀다.
“아가씨 좀 뵙게 해주라.”
“아가씨 뵙고 무슨 말 하게요?”
“일단 잘못했다고 사죄드릴게.”
“뭘 잘못했는지 중한 것부터 10개 말해보세요.”
빌은 욱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신중하게 선택했다.
“아가씨를 무시한 것……”
“틀렸어요.”
“그럼…… 주인을 착각한 것……?”
“그건 한 세 번째쯤 될 것 같네요. 잘 생각해보세요. 일단 아가씨에게 말씀은 드려볼게요.”
“이거!”
돌아 나가려는 앨리스에게 빌이 네 번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뭐예요?”
“반성문.”
리제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렸지만, 빌은 정색하고 말했다.
“내 진심이라고 꼭 좀 전해줘.”
“알았어요.”
앨리스는 어이없어 하는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 반성문을 전달받은 아르티제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졸렬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도, 몇 년이나 로산 후작가의 총집사 노릇을 했어. 한 가지 정도는 잘하는 게 있다는 거지.”
“손 비비는 거요?”
“어머니는 변덕스러워. 그 성격을 10년도 넘게 맞추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지.”
“만사에 해악일 뿐인 재능이네요.”
앨리스가 툴툴거렸다.
“그냥 놔두실 건가요? 해고하시지 않고요?”
“내가 이 집을 떠나는 날까지는 그냥 둘 거야. 하녀장과 총집사만 놔두면, 어머니는 그 아래까지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지금은 준비만 해두는 거지.”
“그래도 아가씨가 장부와 열쇠를 빼앗고 저렇게 책 베끼게 한 것만으로도 노발대발하실 텐데요.”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해야 하잖니? 그리고 아직 빌에게는 쓸모가 있어.”
아르티제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날 빌이 베낀 종이들을 하나하나 넘 겨보았다.
고대문자는 익히기 어려운 것이다. 빌은 한 달이 아니라 1년을 베끼더라도 자기가 쓴 것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그녀는 그 종이들 중에서 제일 글자처럼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을 골라냈다.
빌은 제가 베끼고 있는 것이 오래된 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르티제아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 이런 복잡한 문자가 써진 책을 가져왔다고 믿으리라.
물론 아르티제아는 사소한 복수심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일에는 빌이 다른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는 필적이 드러나지 않게끔 책 한 권을 엮기 위해서였다.
빌의 필적도 되지 않을 것이다. 빌은 글자를 쓴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 오늘 원하는 만큼의 페이지가 모였다.
아르티제아는 그것을 손수 묶어 리제에게 맡겼다.
“이거 갖다가 서재에 꽂아놓으렴. 동편 구석이 좋겠구나.”
“이걸요?”
리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앨리스가 말했다.
“아가씨가 말씀하실 때에는 이유를 궁금해 할 필요 없어. 알아야 할 일은 다 말씀해주시니까.”
“네.”
리제가 고분고분히 대답하고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앨리스가 말했다.
“아가씨, 이제 서두르셔야 해요. 곧 오후의 티타임이에요.”
“알고 있어.”
“정말, 이런 날이 오네요. 아가씨가 티타임에 손님을 맞이하게 되다니. 어서 가요. 옷을 갈아입으셔야죠.”
앨리스가 제가 설레는 양 두 손을 모으며 기뻐했다.
아르티제아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에서 티파티를 열기에 딱 좋은 화창한 날씨였다.
일을 벌이기에 아주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