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94
악녀는 두 번 산다 293화
“마님께서는 잠드셨습니다.”
“수면제를 처방받아 오길 잘했군.”
“고맙습니다.”
앨리스가 꾸벅 인사했다.
아르티제아처럼 허약한 몸에 수면제는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것에 의지해서라도 잠드는 게 나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자의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그래서 세드릭이 수면제를 주면서 가서 재우라고 할 때에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랐다.
“내일 아침에는 마님께서도 괜찮으실 거예요.”
앨리스가 변명을 해주듯이 말했다.
세드릭은 “안다.”하고 낮은 소리로 대꾸했다.
아르티제아가 내일 아침에 괜찮을 것이라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앨리스의 걱정을 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 되면, 그들은 일단 문제를 덮어놓고 시급한 일을 논의할 것이다.
세드릭은 어두운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요즘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 괴로운 얼굴을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가슴 속이 들끓는 듯한 기분이 쉽게 식지 않았다.
달려오는 내내 그랬다. 그 열기에 심장이 녹아내려 뱃속으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마침내는 올바른 마음이라는 게 없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래도 만나면 이 열의 일부는 가실 줄 알았다.
반겨주지 않을 줄은 알았다. 왜 왔느냐고 책망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팔을 벌려 안으면, 못 이기는 척 안겨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르티제아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감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세드릭은 생각했다.
‘내가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또다시 생각했다.
‘내가 당신을 변화시킬 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몇 번을 말하고, 몇 번을 부딪쳐야 통할까?
가능하긴 한 건가?
사랑한다는 말도, 함께하자는 맹세도 안 된다. 이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앨리스가 제때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분노를 그대로 아르티제아에게 부딪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가 깨져 버릴 것을 알면서도.
차라리 그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모조리 박살 내서 그 조각을 주워모아 피투성이가 된 담요에 싸 안으면 마음이 편해질까.
가서 그녀를 두 팔 가득 껴안고 누워 있으면, 잠깐이나마 이 고통을 모르는 척 외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이 해결된 듯, 그런 척하고 한동안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과거에도 모든 것을 잃고 황무지를 떠돌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드릭은 지친 기분으로 말했다.
“네가 곁에서 잘 모시려무나. 말린다고 듣는 사람이 아니니, 여차하면 힘으로라도 막아야지.”
“네……. 그, 주인님께서는…….”
“나는 오늘밤에 다른 방에서 자겠다. 어차피 군의가 있어서 그이의 침실에는 가지 못하니, 가서 곁에 붙어 있도록 해라.”
“네.”
앨리스가 안도한 듯한, 안타까운 듯한 복잡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쿵쿵.
뒤이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웬입니다, 전하.”
“들어오게.”
세드릭은 창문에 비치는 고통스러운 표정 위에 무표정을 덧씌웠다.
오웬이 들어와 보고했다.
“첫 번째 신호탄을 쏘았습니다. 지금부터 내일 정오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계속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수고했네.”
“전하의 명령이시니 하긴 했습니다만, 이게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신호탄은 세드릭이 이곳에 왔다는 신호였다.
이미 서부에 와서 한 차례 사열을 하긴 했다. 하지만 자세한 위치 정보를 알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세드릭은 소수로 왔다. 현재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호위는 아르티제아의 호위 100명에 세드릭이 데려온 20명을 합쳐 120명에 불과했다.
물론 서부군 1개 군단이 하루 거리에 여기저기 수색대로 파견되어 있긴 했다. 뒤이어 아인이 지휘하는 서부군 2개 군단도 올 것이다.
그렇다 해도 황태자 부부가 고작해야 120명의 호위를 거느리고 외따로 동떨어진 곳에 와 있다는 것은 기밀로 취급해야 할 일이었다.
세드릭이 이곳까지 달려오는 동안에 따로 소식을 알리지 않은 이유에는 그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리시아가 보면 희망을 갖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세드릭의 대답에 오웬의 얼굴이 살짝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놈도, 보고 있겠지.’
세드릭은 창 밖을 바라보며 혼자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만큼 로렌스도 자신을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건 황제나 아르티제아가 자신을 정치적으로 견제하고 억압했던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세드릭은 로렌스가 북부를 말려죽인 것이 단순히 자신을 싫어해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놈은 아직도 리시아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자신과 리시아 사이에 있었던 우애를 오해하고 이번에도 리시아의 앞에서 자신을 살해하고 싶을 게 틀림없었다.
‘사실 오해도 아니었을 테고.’
남녀간의 감정에 대해서는 로렌스가 아르티제아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세드릭은 생각했다.
그것이 우정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로렌스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아니, 놈은 모르텐 남작 부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굴었다. 자신이 리시아의 전 약혼자가 아니라 친오빠였다 해도 증오했으리라.
다만, 리시아를 굴복시키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죽이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러니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면 분노할 것이다. 아르티제아를 상대하듯이 침착하게 무시하지 못할 것이었다.
분노는 사람을 동요시키는 법이니까.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직접 달려온다면 그보다 더 바라는 일은 없었다.
세드릭은 천천히 돌아섰다. 오웬이 품에서 손수건에 싼 권총을 꺼내서 세드릭의 앞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리시아는 아직 무사할 겁니다. 하녀를 도망보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오웬이 말했다.
세드릭은 손수건을 들췄다. 그리고 착잡한 기분으로 권총을 집어들었다.
“그것을 리시아에게 주신 줄 몰랐습니다.”
“이번 같은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서 그랬었지. 내 탓이야. 서부로 가라고 방치하는 대신에 북부의 일을 맡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리시아에게 명령할 수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부 일을 부탁했다면, 리시아는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녀가 가져왔다고 했지?”
“예. 베냐라고 하는 아이입니다.”
“아까 앨리스에게 들었네. 지금도 여기 있다고?”
“예. 만나보실 거라면 데려오게 할까요?”
세드릭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군. 급한 정보라면 자네나 티아가 이미 들었을 테고, 내일 여유가 있으면 그때 만나 보도록 하지.”
“예.”
오웬이 대답했다.
어린 베냐의 존재는 그에게도 옛날의 상흔을 헤집는 것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돌려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옛날에 이 권총을 가지고 북부까지 왔었다. 리시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결국 그것은 한 번도 쓰여지지 못한 채로 제게 돌아왔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베냐의 손으로 깨끗한 채 돌아왔다.
세드릭은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베냐에게 빚이 있었다. 그 빚은 아르티제아가 느끼는 것과는 종류가 달랐다.
마지막에 세드릭 베냐가 아르티제 아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출하는 데에 손을 빌렸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베냐는 그가 아르티제아의 앞에 무릎 꿇을 줄 알았다면, 결코 돕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충실한 사람을 의도를 가지고 속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라…….”
“예?”
“……아무것도 아닐세.”
세드릭은 권총을 자신의 품에 넣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에 리시아는 유언을 베냐에게 맡기지 않고 아르티제아에게 전했다.
베냐에게 이 권총을 맡길 때의 마음과 죽기 직전의 마음이 같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베냐가 그 멀리 북부까지 유품을 전하러 올 줄 몰랐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 유언은 아르티제아가 가져와야 의미 있었던 것이었거나.
‘난 너만큼 굳건하지 못한 모양이다, 리시아.’
세드릭은 도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였다.
쾅쾅!
경비병이 문을 부서져라 두드렸다.
오웬이 놀라며 밖으로 나갔다가 경비병을 데리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심부름꾼이 왔습니다. 이것을.”
오웬이 경비병의 손에서 편지를 하나 받아서 세드릭에게 바쳤다.
겉봉에 서명이 있었다.
『로렌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세드릭은 봉투를 찢었다.
안에는 붉은 점으로 위치가 표시된 지도 하나와 이틀 후의 날짜가 적힌 쪽지가 들어 있었다.
세드릭은 무심코 그 쪽지를 손 안에 구겼다.
“가져온 자는?”
“심문 중입니다.”
“치료는 해주도록 해. 죽으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뭔가 나오면, 언제든 내게 가지고 오도록.”
“예.”
경비병이 군례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아르티제아가 눈을 뜬 것은 다음 날 해가 남쪽 정중앙에 가까워진 즈음의 일이었다.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잠시 멍청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약으로 재워진 잠이라 그런지 숙면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는 어제보다 윤기가 돌았다.
아르티제아는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그리고 설렁줄을 당겨 앨리스를 부르는 대신 차가운 발로 슬리퍼를 꿰어 신고 밖으로 나갔다.
세드릭이 그녀의 거실에 앉아 있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아르티제아는 멍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나오는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세드릭은 시선을 지도에 고정하고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그 지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이 한 적 없는 붉은 표시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세드릭이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찢어진 봉투를 내밀었다.
아르티제아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바라던 일일 터인데, 속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로렌스가 보냈습니다.”
아르티제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봉투를 받아 황급히 열어보았다.
세드릭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르티제아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은 더는 웃지 않았다. 부드러운 태도로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거리는 어젯밤에 벌어진 그대로였다.
“어젯밤에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을 쐈습니다. 로렌스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네.”
“일단은…… 놈을 막읍시다. 그런 다음에…….”
세드릭이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런 다음에 이야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