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298
악녀는 두 번 산다 297화
쇄골에서 튄 피가 로렌스의 얼굴을 더럽혔다. 고통과 피와 눈물이 희었던 얼굴을 적셨다.
로렌스의 손이 고통스럽게 흙바닥을 긁었다.
한때 리시아가 사랑에 빠졌던, 소년다움을 간직한 싱그럽고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리시아는 그 모습을 바싹 마른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제 더 이상 사랑하는 마음도, 노력하는 마음도 없는데, 마음의 상처에도 흉이 지는 듯했다.
“미안하군요. 고통을 주려는 건 아닌데, 그냥 이야기하기엔 당신이 좀 무서워서요.”
“리시아.”
로렌스의 이마가 순식간에 식은땀에 젖어들었다.
“후회하고 있어요.”
리시아는 말했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에게도 힘든 과거가 있었을 테고, 괴로운 일이 있었을 테고…….”
황제의 사생아로 태어나 절반은 황궁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밀라이라였고, 아버지는 그레고르 황제였다.
그러니 그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있어, 이토록 잔혹해졌으리라고 믿었다.
보듬어 안아주고 싶었다. 사람을 믿어도 좋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를 구원해주고 싶었다.
“당신을 용서하고 싶었어요. 나만이라도 당신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그러면 달라질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그게 오만이었다는 것을 리시아는 이제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흉측한 마음은 상흔으로만 생기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한 번 더 용서해보려고 생각했다.
돌아와서 만났을 때에 로렌스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에게도 어렴풋한 감정들만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새로, 처음부터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옛 사랑이 먼저 돌아와 그 마음이 이어질 수 있었다면, 로렌스가 전과 달리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선시해 주었다면,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달리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버리고, 미래의 희망도 잊고, 세상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오로지 그와 자신과 단둘뿐인 좁은 세계에 갇히더라도, 리시아는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해하려던 것도, 용서하려던 것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은 것도 후회하고 있어요.”
그는 그냥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다. 설령 그에게 리시아가 아직도 알지 못하는 사연이 있더라도, 그녀는 더 이상 그것을 이유로 견뎌낼 수 없었다.
리시아는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노력도 그만두었다.
“한순간이라도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했던 걸 후회해요.”
로렌스가 가쁜 숨을 헐떡였다. 그럴 때마다 상처에서 피가 튀었다.
“내 말이 당신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기는커녕 인간으로 여긴 것도 아니니까.”
“리시아, 윽, 컥!”
“그래도 말하는 건 날 위해서예요.”
리시아는 그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기뻐하세요, 로렌스. 당신은 바라던 대로 나를 망치는 데에 성공했어요.”
리시아가 총구를 로렌스의 이마에 댔다.
그에게 원한을 가진 자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로렌스의 운명을 거두는 자는 반드시 자신이어야 했다.
리시아는 사실 사적 복수를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마음이었다.
복수가 목적이라고 해도, 아마 이대로 일어서서 내버리고 떠나가는 것이 더 그를 비참하게 하리라.
하지만 남에게 이 일을 양보할 수 없다고 느꼈다. 마치 탐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성공했다. 결국 리시아의 안에서, 자신과 그의 운명을 하나로 계산하도록 묶어버린 셈이었다.
로렌스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와중에도 흐, 하고 웃었다.
“총알은, 후, 있는, 건가?”
“있어도, 없어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을 죽이는 건 도구가 아니니까.”
신탁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자에게 내려진다.
성력은 네가 가는 길이 온당하니, 이 힘으로 타인의 운명을 바꾸어도 좋다고 인정하여 내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신의 뜻이 아니다. 그녀의 성력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허락되었으니 이런 일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니 이것은 자신의 목숨으로 하는 일이다.
리시아가 방아쇠를 당겼을 때에, 총구에서 튀어나간 것은 흰 빛이었다.
“컥!”
로렌스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고통의 비명이라기보다는 절명 하면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리시아는 손으로 그의 목을 짚었다. 맥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생명이 사라진 눈동자는 순식간에 탁해졌다.
거기에 있는 것은 이제 사랑했던 남자도, 증오해 마땅할 악마도 아니라 영혼이 사라진 인간의 껍질이었다.
리시아는 그의 눈꺼풀을 쓸어내려 감겼다. 어차피 몇 시간이 지나면 강직이 시작되며 도로 열릴 것이지만, 지금의 기분으로는 그러고 싶었다.
끝났다.
리시아는 그것을 느꼈다. 지난 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고통스러운 끈을 비로소 놓은 것 같았다.
“모르텐 소남작.”
“리시아.”
기사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리시아는 일어섰다.
“말 좀 빌려주세요. 세드릭 님을 따라가야겠어요.”
아직 제방 위에서 푸른 빛이 빙빙 돌고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엎드려 쓰러진 자세 그대로 마법진에 일어나는 푸른 번개를 바라보았다.
편안했다. 사실 지난 몇 달을 통틀어 가장 몸이 편안한 것 같았다.
베어낸 검지 끝이 은은하게 아팠다. 하지만 기껏해야 종이에 베인 것 같은 동통이었다.
‘전에도 통증은 없었던가.’
그때에도 편안한 기분을 느꼈었다. 고통스러운 작업이 중단된 덕분에 느끼는 휴식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냥 원래 마법진 안에서는 오감이 가로막히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걸리는 거지.’
아르티제아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찰나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유언을 남겼으면 좋았을까?
유언장은 있었다. 로산 후작이 되었으니, 마땅히 작위와 가문에 딸린 많은 재산에 대해서 정리를 해두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 개인으로서는 유서를 남긴 적이 없었다.
딱히 죽음의 앞에서 남길 만한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될 뿐이니까.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변명하고 설명하고자 했던 상대는 과거에는 밀라이라와 로렌스뿐이었고, 지금은 세드릭뿐이었다.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장부에 기록된 마이너스로 족할 것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해치고 인간의 목숨을 숫자로 다루었으니, 자기 목숨 역시도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옳으리라.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녀는 생각했다.
편지를 써두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은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언젠가 레티샤가 글자를 읽을 수 있다면, 낳는 것밖에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모친이라도 널 생각한 적이 있노라고.
막 글자를 배우기 시작한 아기라도 읽을 수 있도록 딱 한 줄의 편지를 썼으면 좋았을 것이다.
또 세드릭에게 남겼던 편지에 적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죄인으로서 피해자에게, 책사로서 주군에게 남기는 편지가 아니라 아내로서 남편에게.
당신을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하다고 덧붙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것 말고도 써야 할 말, 해야 할 말이 생각보다 많았다.
지금 밖에서 울고 있는 앨리스에게도, 미리 말해두었어야 하리라.
네 남은 생이 안락하고 평안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설령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마음을 슬픔과 미움으로 좀먹지 말라고.
네가 날 지키지 못한 게 아니라고. 넌 이미 날 지킨 적이 있었다고.
미리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위험한 다리를 그렇게 여러 차례 건넜었으니.
소피에게도, 마커스에게도, 헤일리에게도 재산과 연금 같은 것이 아니라 유언을 남겼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베냐에게도.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미안하다고 말했으면 좋았을걸.
부질없는 일이긴 했다. 그런다고 베냐에게 이번에는 반드시 막겠다고 확신을 줄 수 있었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제 몸도 남의 몸과 마찬가지로 자원으로 쓰겠다고 하고서, 인신공양을 망설였다.
그 순간에 쓸 수 있는 최적의 자원이었는데도.
‘잘한 거지.’
제 마음을 다지기 위해 베냐를 곁에 두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확고하지 못했으니, 베냐가 자신을 밀어넣는 것이 당연했다.
그게 바로 인과응보였다. 아르티제아가 다루어 온 체스판의 룰이 아니라 하늘의 그물이다.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낸 검지가 꿈틀거렸다. 그 끝이 간지러웠다.
아르티제아가 곧 끝날 거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전격이 튀는 마법진의 푸른 방벽 안으로 팔 두 개가 쏙 들어왔다.
“티아!”
세드릭이 고함을 질렀다.
아르티제아는 경악하여 눈을 크게 떴다.
“그만.”
그만두라는 말이 턱 막혀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목구멍에서 꺼낸 소리는 속삭임 같았다.
기력이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마음먹은 순간, 그것을 알아챈 듯이 피로 쓴 글자가 발목과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와 몸을 구속했다.
새파란 폭풍이 마법진의 경계를 타고 기둥처럼 휘말아 올라갔다. 푸른 전격이 온통 사방에 터졌다.
손등과 소맷자락에 불이 붙었다. 아르티제아는 빛과 불꽃의 경계 너머로 세드릭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때에도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모습을 생각했다.
“크, 아악!”
세드릭의 손목부터 팔뚝까지 살점이 갈리듯이 터져 나갔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아르티제아의 멱살을 잡았다.
바닥에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마법진의 글자가 한순간 주춤했다.
세드릭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온몸을 던져 움직였다.
퍽!
피로 쓴 글자에 끌려들어가 바닥까지 파묻힌 아르티제아의 옷자락이 찢어졌다. 신발이 벗겨지고, 발목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아르티제아의 몸을 마법진 밖까지 끌어냈다.
그 순간 격통이 되돌아왔다. 아르티제아는 손가락이 잘리고, 발목이 부러지고, 온몸의 피부가 찢겨져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멍하게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검었던 머리가 절반 가까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젊고 강건했던 얼굴도 갑작스럽게 늙어, 자신의 앞에 무릎 꿇었던 그때와 같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더 이상 비바람에 다듬어진 석상이 아니었다. 피와 눈물에 젖은 얼굴 속에서 눈동자만이 불타올랐다.
세드릭이 그녀의 멱살을 잡은 채로 소리를 쳤다.
“내가, 미칠 것 같아. 당신 때문에 미칠 것 같다고!”
아르티제아는 힘없이 그의 손에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세드릭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살렸어. 이번에는 살렸어……!”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