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06
악녀는 두 번 산다 외전
꽃봉오리 떨어지는 소리
그 연회는 저녁이라기보다는 늦은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세드릭이 로산 후작가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있었다. 잘 차려입은 하인들이 황동으로 만들어진 긴 촛대를 들고 다니며 여기 저기에 불을 옮겨 붙이기 시작했다.
1층 현관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던 집사 빌은 그를 보고 잠시간 진짜로 놀란 얼굴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에브론 대공 전하.」
그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절을 했다. 그리고 서둘러 안에 알리려 했다.
세드릭은 손을 내저었다.
「알릴 것 없다.」
「하오나……. 당도하시면 곧 알리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자네가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5분도 되지 않아 소문이 날 텐데.」
세드릭은 냉담하게 내뱉고 헤실거리는 집사를 스쳐 지나갔다. 벌써 그를 본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여기저기로 퍼지고 있었다.
유난스럽게 안에 이름이라도 외친다고 해서 별달리 효과가 더 있을 것도 아니었다. 밀라이라의 기분은 순간적으로 좋아지겠지만, 세드릭이 약속한 것은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그다지 좋은 기분도 아니었지만.
서부군이 개선식을 치른 것이 보름 전의 일이었다. 대주교의 중재로 그는 황제와 타협했다.
서부군은 개선하고, 논공행상에도 세드릭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었다. 향후 6년간의 예산을 따냈다.
대신 세드릭은 서부군 사령관직을 내려놓았다. 개선식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공적도 인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출세도, 금전적 보상도 필요 없는 신분이니 세드릭 자신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을 보좌하느라 서부까지 따라와 고생한 에브론 기사들에게도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번의 공적을 보상받으려면 북부군의 직책을 내려놓고 서부군이나 중앙군으로 옮겨가라는 것이 황제의 뜻이었으니까.
마땅한 보상을 해주는 것은 처음부터 자신의 몫이었으나,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자신의 부족함이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자신이 서부군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치르지 않아도 될 전쟁을 치른 것이다.
세드릭은 서부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러니 미안한 마음이 더 강했다. 마음을 다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화가 나는 일이었다.
황제는 그 타협에 밀라이라의 문제를 끼워 넣었다. 세드릭에게 수도에 머물러 로산 후작가의 연회에 참석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쉽게 들어줄 수 있는, 별일 아닌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견 제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도 불쾌했다.
황제가 정부에게 주는 선물의 일부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너무하시는군요, 폐하도.」
세드릭보다도 프레일이 더 크게 화를 냈다.
「황궁 연회에 참석하라는 것이라면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로산 후작가의 연회라니요. 순전히 밀라이라 자존심을 세워주려고 하는 일 아닙니까?」
「로렌스 때문이겠지.」
「차라리 그런 거면 저도 이렇게까지 화가 날 것 같진 않은데요. 밀라이라 기분 때문입니다, 분명히.」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건가?」
「유니스 백작 부인이 밀라이라의 딸 뺨을 갈겼답니다. 아주 시원스럽게, 두 방이나.」
세드릭은 할 말이 없어서 프레일이 울분을 토하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그것 때문에 요즘 밀라이라의 자존심을 세워주려고 난리도 아니라고요. 뭐, 그렇다고 해도 로이가르 대공비까지 불러내진 못했지만요. 전하께서 약점을 잡히자마자 이렇게 바로 명령하는 거 보세요.」
「난 내가 한 일이 약점을 잡힌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네.」
「전하께서 어찌 생각하시는 중요한 건 아니죠.」
프레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세드릭도 서부군 일이 아니었으면 황제의 명령대로 이렇게 로산 후작가의 연회에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몇 시간 후면 그가 밀라이라의 연회에 참석했다는 소문이 날 테고, 그것은 밀라이라의 체면을 크게 살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본래 연회 참석을 꺼리는 편인 것을 고려하면, 로이가르 대공이 참석하는 것보다도 더 소문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연회도,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밀라이라도 싫어하는 세드릭으로서는 그리 즐거운 일이 못 되었다.
‘적당히 가벼운 술이나 한 잔 마시고 아는 사람한테 인사하고 나오면 되겠지.’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어차피 황제도 그가 여기에서 연회를 즐기라고 보낸 것은 아니었으니까.
온 저택의 창문과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저녁 바람이 잘 통했다. 로비에는 간단히 서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넉넉히 차려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서는 소규모 악단이 차분한 실내악을 연주했다.
술과 주스를 만드는 자가 산더미처럼 쌓인 과일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세드릭은 그 앞에서 니코스 주교와 마주쳤다.
「오셨군요, 대공 전하.」
「주교님.」
세드릭은 그에게 묵례했다. 니코스 주교는 과일 주스를 받아들면서 말했다.
「오늘 체리가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습니다. 전 지금 이 주스만 네 잔째 마시고 있답니다.」
「순수한 체리가 아니라 껍질 벗긴 포도를 넣은 것이지요. 제 배합 솜씨도 같이 인정해 주십시오.」
「그래그래, 금손이 아니고서야 이런 훌륭한 맛이 날 리 있나.」
니코스 주교가 넉넉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드릭은 황금색 술에 체리를 한 알 담근 잔을 받아들고 니코스 주교와 함께 테이블 앞에서 나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비교적 점잖아 보이는 연회이기는 합니다만, 주교님께서 참석하실 만한 이유는 없으셨을 텐데.」
「대공 전하께서 참석하셨으니까요. 대주교님께서 여러 가지를 마음에 걸려 하시기도 해서, 말동무라도 해드릴까 해서 왔습니다.」
니코스 주교가 말했다. 세드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주교는 자신이 중재했는데도 세드릭이 이런 일까지 하게 된 것이 미안해서 니코스 주교를 보낸 모양이었다.
날파리처럼 덤빌 자들을 미리 치우고, 혹 문제가 생기면 미리 중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저는 잠시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이리저리 인사나 하고 갈까 합니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체리 주스도 최고이니까요.」
니코스 주교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세드릭은 웃었다.
둘은 천천히 로비에서 홀 쪽으로 움직였다. 대공과 주교가 함께 있으니 얼굴도장을 찍어보려고 접근하려는 자들은 쉽사리 가까이 오지 못했다.
홀에는 화려한 춤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샹들리에가 흔들리면서 빛나는 그림자를 대리석 바닥에 흩뿌렸다.
춤추고 있는 것은 대부분 젊은 청년들이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산뜻하여 세드릭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홀의 창문도 모두 열려 있었고, 테라스도 모두 개방된 채였다. 벽감에도 커튼을 달지 않아 은밀한 공간이 전혀 없었다.
화려하긴 했지만, 밀라이라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농염함이나 난잡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세드릭이 느낀 감상을 깨달은 듯 니코스 주교가 웃었다.
「로산 후작가의 연회이니까요. 로산 후작 부인에게도 이제 장성한 자녀가 있고, 둘 다 오늘 연회에 참석할 텐데 여러 가지를 신경 쓰고 있겠지요.」
「아아, 이해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니스 백작 부인이 딸을 괴롭힌 탓에 폐하께서 체면을 세워준다고 하셨죠.」
세드릭은 새삼스럽게 깨닫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홀을 둘러보았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수수한 옷을 입고 참석해 있었다.
세드릭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세드릭도, 사원의 예복을 입은 니코스 주교도 눈에 띄는 사람이라 유니스 백작 부인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세드릭은 그녀에게 살짝 목례했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사촌이다. 모르는 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니스 백작 부인은 세드릭과 마주 인사하는 대신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가 흥 하고 돌아서서 홀 밖으로 나가버렸다.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니코스 주교가 허허 웃었다.
「유니스 백작 부인으로서는 워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데, 거기에 대공 전하까지 손을 보태는 셈이 되었으니까요.」
「예. 짐작은 갑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세드릭은 문득 유니스 백작 부인과 대화하고 있던 소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유니스 백작 부인을 따라 나가거나 새로운 대화 상대를 찾는 대신에 벽 쪽으로 움직여 붙어 섰다.
그 소녀는 여윈 얼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허리는 부러지도록 졸라맸고, 스커트는 둥글고 컸다. 보디스에는 꽃무늬가 도톰하게 도드라지도록 한껏 자수가 놓여 있었으며, 다른 한쪽 어깨에는 커다란 코르사주가 달려 스커트만큼이나 부피감이 있었다.
소녀는 옷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다.
니코스 주교가 세드릭이 쳐다보고 있는 상대를 보고는 「아아.」 하고 탄성을 냈다.
「로산 후작 영애입니다.」
「유니스 백작 부인에게 뺨을 맞았다는?」
「예. 사실 이번 연회는 어찌 보면 그녀를 위해서 열린 셈이지요.」
니코스 주교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세드릭은 그제야 도가 지나친 옷차림을 이해했다. 밀라이라의 딸이 제 어머니만큼이나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이 이상할 리 없었다.
‘뭐, 어린 것 같고. 철이 없을 법하지.’
세드릭은 편견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밀라이라의 딸이고, 로렌스의 누이다. 미래의 로산 후작이었다. 권력의 맛을 보고, 사치를 즐기며, 오만하게 굴어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조금도 화려한 옷을 뽐내는 기색이 없었다. 비슷하게 젊은 남녀들이 모두 춤을 추거나 저희끼리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녀는 혼자서 벽에 붙어 선 채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렇게 있으면 벽지에 그려진 장식이라도 될 수 있을 것처럼.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까지 더하여, 대량의 옷감에 짓밟히기라도 한 것처럼 초라한 몰골이었다.
창백한 얼굴은 무표정했는데, 그게 감정을 다스리려고 그러는 것인지 마음이 이곳에 있지 않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그 표정이 신경 쓰였다. 세드릭은 연회장에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세드릭 자신도 연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무표정을 하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가엾게도.」
니코스 주교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드릭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니코스 주교가 쓰게 웃었다.
「연회장에 있는 게 즐거울 리 없는데, 유니스 백작 부인에게 뺨을 맞은 당사자라는 이유로 요즘 연이어 저렇게 나와 있으니까요.」
「즐거울 리 없다는 말씀은…….」
세드릭은 말꼬리를 흐렸다. 밀라이라의 딸에게 궁금증을 느낀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가십을 궁금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코스 주교는 그것을 알아챈 듯 빙그레 웃었다.
「마음이 쓰이시면, 춤이라도 한 곡 신청하시면 어떠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