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07
악녀는 두 번 산다 외전
세드릭은 침묵했다.
「…….」
「하하.」
니코스 주교가 웃었다. 세드릭은 자신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이상한 얼굴을 했나 싶어 뺨을 쓰다듬었다.
「농담이 과하시군요.」
「불쌍한 아가씨입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보고도 모를 분은 아니시겠지만.」
니코스 주교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글쎄요. 로산의 소후작이 아닙니까?」
세드릭은 불투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신분의 사람은 그렇게 쉽게 불쌍한 입장에 놓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물론 세드릭은 그게 통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소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이제 벽지의 그림이 아니라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생기가 약했다.
그는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인제 그만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니코스 주교는 그 화제를 놓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더욱 안타까운 일이지요. 보기 드물게 영특한 소녀라, 이대로 재능을 묻는 것이 아까워 출가해서 사제가 되라고 권유를 해봤지만, 그럴 마음은 없는 듯해서 말입니다.」
「사제요?」
세드릭은 니코스 주교의 말에 반응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 말에는 놀람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작 가문의 후계자에게 성인이 되기도 전에 출가를 권하다니.
차자 아래라면 후계 구도를 정립하기 위해 미리 수도원에 보내는 일이 있지만, 후계자에게 그러는 법은 없었다.
니코스 주교는 세드릭을 놀라게 한 것에 만족한 듯했다.
「모친에게 권리를 다 빼앗기고 허수아비가 되어 저택에 갇히거나 정략결혼에 재능을 파묻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재능이라……. 무척 높이 평가하고 계시는군요. 영애를 잘 아시나 봅니다.」
「로산 후작 부인이 딸을 못났다고 미워하면서 밖에 내보내지도 않는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요. 뭐어, 그래도 사원에는 자주 오가니까요. 많이들 사정을 알지요.」
니코스 주교가 말했다.
「아직 나이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아가씨에게 출가를 권하다니 가혹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꼭 신앙만으로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학술 사제로 학문에 전념하는 길도 있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록 서서히 제국 대학으로 비중이 옮겨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사원은 신학만이 아니라 철학이나 고대어, 역사학, 논리학 같은 여러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학업을 위해 사제가 되는 일도 여전히 적지 않았다.
「로산 후작가를 탐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족히 아킴의 후계자가 될 만해서, 아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니코스 주교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정말로 영민한가 보군요.」
아킴 주교와 개인적인 친분은 없으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세드릭은 조금 놀랐다.
니코스 주교는 아킴 주교의 친구이면서,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아마도 그가 말하는 재능이라는 것은 진짜일 것이다.
니코스 주교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헌데 그 어머니는 집안 살림할 여자애가 그렇게 많이 배워서 뭣 하느냐고 야단인 겁니다. 결국 교리 연구회에도 나오지 못하게 되었어요.」
「개인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 일인지는 남이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영애는 주교님의 권유를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세드릭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니코스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별달리 깊은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눈에 띄니 이야기한 것에 불과한 셈이다.
하지만 세드릭은 속이 좀 답답해졌다.
만일에 에브론 휘하의 가문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아마도 자신은 본인이 원하든가 하지 않든가 보호자로 개입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뒤로 둘은 별다를 것 없이 여러 사람의 근황에 관해 두루 안부를 나누었다.
그때까지도 소녀는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벽에 붙어 서 있었다.
세드릭은 그것을 의식하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손을 내미는 것까지는 어려운 일이지만, 니코스 주교의 말마따나 춤 한 곡 정도는 괜찮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녀가 대화를 나누는 사람 하나 없이 무도회장 벽에 붙어 서 있게 놓아두는 것보다는.
그는 자기와 춤 한 곡 추는 것이 소녀에게 앞으로 몇 번의 무도회를 더 편하게 버티게 해줄 수 있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망설인 것은 결국 그녀가 밀라이라의 딸이자 로렌스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춤을 추었다는 말이 짤막하게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것조차 내키지 않았다.
음악이 잠시 멈추었다. 춤추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빙그르르 돌던 치맛자락들이 내려앉으며 사방을 화려한 색으로 물들였다.
황제가 밀라이라의 손을 잡고 나왔다. 로렌스가 그 뒤를 따랐다.
세드릭은 소녀의 옷이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밀라 이라도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화려한 옷감과 코르사주 따위에 묻히는 일이 없었다. 커다란 작약송이 한 무더기에 곁들여진 잎과 리본처럼 오히려 그녀를 더 돋보이게 했을 뿐이었다.
황제가 웃음 띤 눈으로 홀을 둘러보다가 세드릭과 마주쳤다. 세드릭은 눈을 내리깔고 공손히 무릎을 구부렸다.
「짐 때문에 흥을 깰 것은 없네. 가벼운 연회이고, 짐도 초대받은 손님에 불과하니 편하게들 있게.」
그 말이 끝나자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다.
세드릭은 약간 긴장한 채로 대기했다. 황제가 부르거나 이쪽으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밀라이라에게 인사를 하고 로렌스와 아는 척도 해야 할 것이었다. 각오하고 오긴 했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부르는 대신에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밀라이라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 중앙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사람들은 황제와 밀라이라를 위한 공간을 널찍하게 비워두고, 마치 연극 무대의 조연처럼 가장자리부터 채우며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로렌스와도 눈이 마주쳤지만, 어느 쪽도 대강 아는 척만 하고 서로 시선을 돌렸다. 로렌스도 그와 담소를 나누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아는 얼굴이 보이기에 세드릭은 니코스 주교와도 적당히 헤어져서 그쪽으로 인사를 하러 갔다.
그러다가 얼핏 다시 로산 후작 영애가 시선 끝에 들어와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에 아로새겨진 푸른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던 시선이 춤을 추듯 음악을 타고 무도회장을 날았다.
혹시나 제 쪽을 바라봐 줄까, 아닐까?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설렘은 무표정했던 얼굴을 열여덟 살이 아니라 아홉 살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보이게 했다.
세드릭은 기묘한 기분이 되어 그 시선을 좇았다. 니코스 주교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 시선 끝에 있는 것이 젊은 남자였다면, 그는 소녀가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선이 향하는 것은 제 어머니였다.
하지만 밀라이라의 고개가 소녀 쪽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있어야 할 당연한 인사도, 대화도 없었다.
세드릭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거기 있는 것은 더 이상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아니라 맞지도 않는 엄마의 옷을 어색하게 입은 소녀였다.
세드릭은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드는 장면을 본 것 같았다. 그는 무언가가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것이 꽃봉오리 떨어지는 소리이리라고 생각했다.
* * *
문득 눈을 뜨자 커튼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아르티제아의 어깨로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세드릭은 이불을 끌어올려 그녀를 목까지 덮어 주었다. 아르티제아가 반쯤 잠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그냥, 옛날 생각이요.”
잠깐 잠들어 꿈을 꾼 것인지, 비몽사몽간에 생각한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세드릭은 차가운 아르티제아의 어깨를 따뜻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며 혼자서 미소를 지었다.
깨울 작정은 아니었는데, 아르티제아도 잠이 깨려는 듯했다. 세드릭은 그 어깨에 한 번 입술을 누르고 말했다.
“옛날에 여기에 꽃이 달린 옷이 있지 않았습니까? 주먹만 한 것으로.”
“뭐 말씀하시는지 알겠어요. 이언츠 자수 유행 중간에 한 번 새로 시도된 스타일이 있었죠.”
아르티제아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여전히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은 채 중얼거렸다.
“어머니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해서 실패했지만요. 애당초 어머니를 위해서 만들어진 옷이었고.”
“당신이 입었을 땐 천으로 만든 무덤에 묻혀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게 기억나서.”
“제가 그런 걸 입은 적이 있었던가요?”
아르티제아가 중얼거리다가 몽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눈을 반짝 떴다.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난 모양이었다.
“그때, 계셨……? 아.”
아르티제아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 올랐다.
그녀는 기억력이 좋았으므로 그 연회에 세드릭이 참석했었고, 그게 서부군 개선식을 위한 타협이었으며, 그 뒤에 어떤 소문이 돌았는지까지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결국 그날 세드릭은 춤 한 번 추지 않고, 술잔 하나를 다 비우지도 않은 채로 돌아갔었다.
덕분에 로렌스에 대한 지지의사를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도 않았다.
황제가 밀라이라를 위해서 에브론 대공을 강제로 참석시키기까지 했다는 것 이상의 이야기는 없었던 셈이다. 그것도 충분히 이득이긴 했었다.
세드릭은 아르티제아가 다른 말을 더 묻기 전에 그녀의 머리를 껴안아 제 품에 얼굴을 묻게 했다.
그때의 일은 제게도 조금 부끄러웠다.
인간적으로는 아르티제아를 보고서도 외면했고, 그러고서도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끝까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는데.
“내가 당신을 언제부터 마음에 두었는지 압니까?”
대답 대신 아르티제아가 숨죽이는 기척만 느껴졌다.
세드릭은 약간 웃었다. 말할 작정은 없었다. 사실 자신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으니까.
다만, 해바라기 같은 그 열렬한 시선이 언젠가부터 제게 향하여, 그것을 의식할 때마다 가슴 안에서 툭툭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는 줄곧 그것을 후회가 내는 소리라고 여겼다.
그때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지 않았었던 거라고. 그 뒤로 일어난 모든 일이 전부 제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만약에, 그런 단어들이 현실과 마찰하며 나는 소리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아마 그것은 꽃봉오리가 떨어진 자리에 새순이 올라오는 소리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