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08
악녀는 두 번 산다 외전
봄바람
창문이 열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책갈피의 긴 꼬리들이 팔락팔락 날렸다.
거실 여기저기에 쌓인 책이 많고, 그 대부분에 온갖 색의 꼬리표가 붙어 있어서 마치 초봄의 티파티 때에 부족한 꽃 대신 나뭇가지에 묶어놓은 장식용 수실을 연상케 했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쿠션에 편안히 몸을 기댄 채 흐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이것도 꽤 괜찮네? 교육적으로도 좋을 것 같고, 그냥 보기에도 제법 예쁜데.’
책의 먼지야 어차피 하녀들이 털 것이니 상관없다. 늘 책을 곁에 두는 숙녀처럼 보인다면, 얼마나 품위 있어 보이겠는가.
또 망아지처럼 툭하면 싸돌아다니며 햇볕에 얼굴을 못 태워서 안달하는 둘째 딸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
‘그래, 나도 올해는 책 좀 읽어야지.’
유니스 백작 부인은 마음속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값진 책들을 자기 거실에 배치해 보기도 하고, 내용도 떠올려 보았다.
대부분 장정이 예쁜 것을 사 모은 것이라 그대로 두면 자연스러운 맛이 없을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유행이 될 것이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확신했다.
벨벳과 실크, 도자기는 언제나 옳았지만, 이제 봄 아닌가? 좀 더 산뜻한 치장이 필요할 때였다.
그리고 본래부터 사교계 유행이라는 건 사교계 제일의 귀부인이 만드는 법이었다.
황후궁의 문이 닫혀 있어, 손님으로 오갈 수 있는 사람이 워낙 적다 보니 아직 황후를 따라 하는 유행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곧, 자신이 선두 주자였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과거의 마르타 백작 부인, 카멜리아 후작 부인에 뒤이어 자신이 수도에서 가장 지적이고 영향력 있는 귀부인이 되는 것이다.
‘진짜 읽던 책처럼 보이는 게 좋겠지? 아니, 진짜 읽을 거지만.’
유니스 백작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까이에 있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성전에 기록된 고유명사의 음운학적 연구: 앨리아 장성 형성기 전후의……》
유니스 백작 부인은 부제까지 다 읽지 않고 책을 도로 탁 내려놓았다. 검은 것은 장정이고 붉은 것은 글씨였다.
편찬자가 어리석었다. 이 제목은 금박으로 박았어야 했다. 그래야 장식용 문양처럼 보였을 테니까.
팔락팔락.
또다시 창문을 타 넘어 들어온 봄바람이 갈피를 날렸다.
그때 마침 거실 문이 열렸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민망하여 얼굴이 벌게진 채로 일어섰다.
“책이 생각보다 무겁네.”
그녀는 공연히 종알거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아기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어머, 황녀님.”
“고모!”
레티샤가 들고 있던 그림책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신이 나서 두 팔로 홰홰 날개를 치며 달려왔다.
“아고. 그 사이에 또 무거워지셨네.”
유니스 백작 부인은 레티샤를 안아들었다. 레티샤를 뒤따라온 미엘르가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유니스 백작 부인? 죄송합니다. 방해 드린 것은 아니지요?”
“그럴 리가요. 황후 폐하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에요.”
유니스 백작 부인은 있는 한껏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레티샤가 황후궁의 실세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귀중한 장황녀이자 제국의 미래가 아닌가.
아르티제아가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기는커녕 혹시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 개인적인 만남조차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황후궁의 문이 여닫히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제국의 미래가 엄마 아빠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미엘르였다.
방해가 될 리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방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해야 할 판이었다.
유니스 백작 부인이 황후궁에 드나들 수 있는 것도 다 고모라고 부르며 따르는 레티샤 덕분이었다.
그리고 레티샤가 그녀를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은 미엘르 덕분이었다. 유니스 백작 부인과 세드릭의 관계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레티샤에게 미엘르가 그냥 ‘고모’라고 부르라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레티샤가 깨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미엘르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티제아는 물론이고 미엘르마저도 이렇게 침착하고 어른스러운데, 왜 자기 딸들은 못 그럴까?
레티샤가 유니스 백작 부인의 재킷 칼라에 손을 뻗었다. 칼라에는 보들보들한 토끼 인형 모양의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고모, 나 이거.”
“고모 옷에 달린 거예요.”
“만져도 돼?”
“얼마든지요.”
그래서 일부러 이런 귀여운 브로치를 달고 온 것이기도 했다. 한창 호기심 많은 레티샤는 예쁜 것을 보면 만지고 싶어 했다.
지난번에는 곡식다발처럼 생긴 브로치를 다짜고짜 움켜쥐는 바람에 손바닥에 상처가 날 뻔했다.
“이거 아기 같아.”
레티샤가 웅얼거리며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다가 거기에 볼을 댔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보들보들한 애정 표현에 올라간 광대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미엘르가 웃으면서 말했다.
“엊그제 유모가 둘째를 낳았거든요. 티샤 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홀딱 반해서 난리예요.”
미엘르가 웃으면서 말했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 갖고 싶으세요?”
“아기 너무 귀여워.”
레티샤가 손가락으로 브로치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나도 동생 갖고 싶다. 아기는 보들보들해.”
그러는 레티샤의 손가락이야말로 보들보들했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어마마마께 졸라보세요.”
레티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니스 백작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편안한 드레스를 입은 아르티제아가 사뿐사뿐 들어왔다.
“엄마!”
레티샤가 내려달라고 버둥거렸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레티샤가 몸부림치는 힘이 얼마나 센지 아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조심하셔야죠.”
“엄마!”
레티샤는 대뜸 아르티제아의 치맛자락에 매달려서 소리쳤다.
“엄마! 나도 동생!”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아르티제아는 레티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부정문을 들을 것을 예상한 레티샤가 울상이 되었다.
“그림책 읽으러 온 것 아니었니?”
“나도 동새앵. 이잉.”
달라붙는 레티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르티제아는 칭얼대는 것을 흘려 넘겼다. 그리고 유니스 백작 부인에게 말했다.
“모처럼 오셨는데 레티샤가 귀찮게 했군요.”
“아니에요, 황후 폐하. 영광입니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공손히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호호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조금도 귀찮지 않아요. 황녀님께서 고모라고 불러주시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데요.”
그녀는 굳이 말을 돌리지도 않았다.
아르티제아가 어떤 사람인지 안 지도 벌써 5년이 되어간다. 어차피 머릿속을 들여다보일 바에야 그냥 훤히 내보이는 편이 서로에게 좋았다.
레티샤가 말문이 트이고 친척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뒤로 유니스 백작 부인은 전과 다른 방식으로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전에는 황제의 딸이면서도 사생아로서 법적으로는 그 신분을 보장 받지 못했다.
총애로 얻는 지위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며, 계승권도 없으면서 황실의 피를 받았다는 위험성은 위험대로 갖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미래의 황태녀를 안아 올리고 고모라는 호칭을 듣는 삶은 얼마나 좋은가.
권력과의 거리가 완벽했다. 황후궁에 편지 한 장만 보내고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어디 몇 명이나 되겠는가.
청탁과 선물이 산처럼 쏟아졌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죄 되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해먹었다.
처음에는 그것도 아르티제아의 눈치를 보느라 모두 일일이 돌려보냈지만, 아르티제아는 정말로 그런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모양이었다.
대신에 그녀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가슴에 단 토끼 인형도 그중 하나였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레티샤의 두 살 생일선물로 토끼털로 만든 아기 옷과 똑같은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보냈다. 레티샤가 그 옷을 입고 저와 같은 크기의 토끼 인형을 안고 생일파티를 한 뒤로 토끼 옷도, 토끼 인형 유행도 가실 줄을 몰랐다.
그 유행은 다른 데에까지 퍼졌다. 숙녀들은 다투어 귀여운 토끼털 장신구를 달았다. 요사이에는 가방에 주먹만 한 토끼털 장식을 달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는 아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아르티제아가 자리를 권했다. 유니스 백작 부인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 생각 없으세요?”
“무얼요?”
“둘째요.”
레티샤가 유니스 백작 부인이 자기편을 들어주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쪼르르 그녀의 무릎에 달라붙었다.
“하나는 외롭잖아요.”
“글쎄요. 낳을 때에 워낙 고생을 해서…….”
“물론 우리 황녀님은 이렇게 건강하시지만, 세상사라는 게 또 늘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후사는 튼튼할수록 좋고, 로산 후작가도 물려주셔야지요.”
말하다말고 유니스 백작 부인은 방정맞은 소리를 했다며 자기 입을 막았다.
첫 아기가 조금 자라면 흔히들 하는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진짜로 황실의 친척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것은 황태후뿐일 것이다.
어쩌면 노력하고 있는데 생기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하긴, 몸이 워낙 약하시니.’
대관식 전후로는 폭삭 늙어버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황후궁에서 전혀 나오지 않고 두문불출하는 것도 그 탓이리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제 유니스 백작 부인이 보기에는 머리색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 외에는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로산 후작가는 따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에브론 대공의 작위도 마찬가지이고.”
아르티제아가 말했다.
“억지로 대를 잇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오래된 명예는 명예로만 남겨두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혈통과 능력을 이미 분리하여 생각할 줄 안다. 가문의 영광과 혈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버려야 마땅할 가치관이다.
세습 작위는 그냥 그 자체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지 않은 일이었다.
아르티제아는 미엘르의 무릎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는 레티샤를 바라보았다.
“미이 언니, 나 책.”
뒤집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레티샤는 이제 말도 곧잘 했고 그림책도 보았다. 책장을 넘기는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은 두 살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글자는 아직 몰랐지만, 미엘르가 자주 읽어주는 페이지에 있는 단어를 외워서 읽는 척하곤 했다.
하지만 자기가 그림책을 펼치고 앉았는데도 아르티제아가 옆에서 책을 펴지 않자, 레티샤는 미엘르의 무릎에서 도로 기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