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10
악녀는 두 번 산다 외전
척. 척.
정련된 군홧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프레일은 움직이는 시체처럼 흐느적거리며 복도 벽에 달라붙었다.
올해에 처음 중앙군의 보직을 받은 장교들이 줄을 맞춰 복도를 지나갔다.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기운차군. 희망이 넘치고.’
이번에 중앙군과 동부군, 북부군의 편제가 한꺼번에 변경되면서 지방 출신으로 처음 수도에 입성하여 입궁한 자가 많았다.
전처럼 빼어난 군공을 세운 지휘관을 황제가 불러들여 요직에 앉힌 것이 아니다. 총사령관을 교체하고, 중간급 사관의 거의 절반을 불러올렸다.
북부군은 이전처럼 에브론 대공이 군부와 협력한다는 느슨한 동맹 형태가 아니라 제대로 북부군이라는 이름으로 제국군 편제에 소속되었다.
동부군은 군과 귀족의 유착을 깨뜨리기 위해 일부러 실무자 대부분을 새로운 지역으로 발령 냈다.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세드릭은 발령 거부하는 자를 전원 해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한순간은 해임된 자들이 무리를 이루는 바람에 긴장감이 높아졌었다. 하지만 중앙군의 임직이 한 발 더 빨랐기에 그 긴장감이 터지는 일 없이 동부군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해임자가 많았기에 승진도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중앙군으로 전출되는 것은 출셋길이 열린 것이라고 봐도 되었다.
거기에 더해 대규모 인원이 승진했으니, 사기는 드높았고 충성심도 하늘을 찌를 듯했다.
프레일은 편제 변경부터 동부군의 긴장에 대응하기까지 표면적으로는 제도 개편에 관여하고, 이면에서는 동부의 정보를 모아 분석했다.
이제는 세 개 지역 군대를 합쳐놓은 셈이 된 중앙군의 질적 통합에 관여하고 있었다. 참모부였으니까.
‘폐하는 내가 무슨 요정 지팡이인 줄 아시냔 말이야.’
프레일의 현재 정식 직책은 참모 보좌관이었다. 정해진 직무는 따로 없다.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만큼 갈리는 역할이었다.
에브론 대공의 부관일 때에도 딱히 정해진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이렇게까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아르티제아가 그를 갈아 넣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던 시기가 있었다. 에브론 대공령의 단순함이 답답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간절히 그때가 그리웠다.
‘지금이 바로 사표 쓸 때 아닌가? 연금은 주나?’
솔직히 시간으로 따지면 늙어서 은퇴할 만큼 일하지 않았나 말이다.
프레일은 시커먼 안색으로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집무실 앞에 비서관 하나가 서류를 산더미처럼 안고 서 있었다. 그도 퍽 지친 모습이었지만, 프레일을 보고는 동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도 귀가하지 못하셨습니까?”
“귀가할 집이 없어.”
프레일은 진심으로 탄식했다.
대관식을 치른 해에 그는 수도에 작은 집에 세를 들었었다. 일단 힘든 순간은 지나갔다고 생각했으니까.
에브론 대공저이든 황궁이든 일할 장소에서 좀 벗어나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다.
퇴근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황궁에 개인실이 생기는 것은 권력과 총애의 증거였다. 이보다 안 반가운 총애는 없었다.
하지만 집무실 문을 열자 거기도 폐허였다.
분명히 화려하게 꾸며진 넓은 공간에, 공기는 제때 환기되었고 상쾌한 과일향이 났다. 곳곳에 놓인 화병에 꽃과 푸른 가지가 가득 꽂혀 있었다.
그런데도 폐허였다. 먼지 대신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세드릭이 고개를 들었다. 적잖이 지친 얼굴이었다.
전장에서 일주일을 쉬지 않고 싸워도 끄덕 안 한 체력이지만, 2년 동안 책상이 갉아먹는 것에는 이겨 낼 수 없었다.
세드릭이 프레일의 눈 밑에 내려앉은 켕함을 보고 말했다.
“며칠 잘 쉬었을 줄 알았는데. 휴가였잖나.”
“그게 참…….”
프레일은 말꼬리를 흐렸다.
“너무 오랜만에 쉬니까 안 쉬어지더라고요. 아니,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십니까? 폐하께서 절 일에 갈아 넣으신 거지, 자발적으로 한 게 아닙니다.”
세드릭이 쳐다보는 시선에 지레 찔려 프레일은 말했다. 그야 에브론 대공가일 때에는 답답해서 대신 해치운 일이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수도에는 유능한 사람이 많았고,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난 자도 많았다.
1년도 넘게 걸린 제국군 편제는 드디어 끝났다. 이제 어느 정도는 안심할 수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니 또다시 자신이 갈릴 일은 없었다. 당분간은.
프레일은 그런 상황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스렸다. 새로 무슨 일이 맡겨지더라도 추천할 수 있는 적임자 목록이 있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이렇게 물었다.
“요즘 헤일리랑은 어떤가?”
“큭, 쿠, 쿨룩!”
뜻밖의 기습공격에 사레들렸다. 프레일은 격렬하게 기침했다. 집무실 한쪽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시종이 물을 가져다주었다.
프레일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물을 마셨다. 잘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하려다가 결국 눈물 콧물을 뽑고 말았다.
시종이 손수건을 건넸다.
프레일은 시뻘게진 눈가와 코를 닦으며 간신히 콜록콜록 대꾸했다.
“사고였습니다, 그건!”
“자네 사고 쳤나?”
“쿨룩쿨룩!”
자승자박이었다. 세드릭은 뭘 알고 물어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무덤을 파고 들어가 눕고 싶었다.
프레일은 고통스럽게 기침했다. 들키면 헤일리에게 죽을 것이다. 책임지겠다고 했다가는 뺨을 맞았으리라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사실이었다.
애당초 며칠 전의 일은 사고였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었다. 헤일리와 그는 그 사실에 대해 완벽하게 동의하고 있었다.
세드릭이 껄끄러운 얼굴로 말했다.
“뭐, 자네 사생활에 간섭하려는 것은 아니고.”
“예.”
“그렇다면 북부 총독으로 가는 것에 문제는 없겠군.”
“큭, 꾸룩!”
두 번째 사레가 들렸다. 프레일은 목을 틀어잡았다. 현기증으로 눈앞이 핑 돌았다.
“농담이시죠? 북부 총독이라니?”
“왜 농담이겠나?”
세드릭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프레일은 입을 벌렸다.
“타 지역 사람을 보내는 건 무리야. 그렇다고 직할령으로 바꾸면서 조르딘 가문이나 다른 전통 있는 가문의 사람을 총독으로 삼으면 사실상 명칭만 바뀌는 셈이 아닌가.”
그래서야 황제 직할령으로 만드는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에브론 대공령은 더 이상 구시대적인 관습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러니 총독은 북부인이되 새로운 사람이어야 했다.
프레일은 적임이었다.
우선 신분이 적당했다. 고위 관료의 절반 이상이 평민 출신이었고, 프레일 정도면 충분히 높은 신분이었다. 그렇다고 혈통주의로 보일 만큼 좋은 가문 출신은 아니었다.
연령도 부족하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고위 관료의 다수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은퇴하고 그 자리를 젊은 황제에게 어울리는 젊은 관료들이 채우게 되었으니까.
젊은 총독이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수도에서 프레일은 세드릭을 대공 시절부터 측근에서 섬긴 총신 중의 총신이었다.
에브론에 가면, 총신이니 뭐니 하는 말이 영 우습게 들리긴 할 것이었다. 그러나 총독에 임명하자면, 수도의 귀족과 관료들이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해야 했다.
세드릭이 말했다.
“예민한 시기야. 3년 안에는 앨리아 장성의 문을 열 거고, 이미 중앙군 부대 몇 개가 벌써 북부로 올라가 있지 않나.”
“예.”
“북부와 본토의 분쟁은 이미 생긴 것이나 다름없어.”
세드릭이 말했다.
“믿을 만한 전권 대리인이 필요해. 자네라면, 내 목표를 알고 있고 정보를 다루는 데에도 능하니까.”
프레일은 얼굴을 팍삭 찌그러뜨렸다. 하지만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네가 헤일리와 결혼이라도 한다면, 관습을 깨는 일이 아니게 되겠지. 북부에서는 조르딘 가문의 사위가 에브론의 대리인이 된다고 받아들일 테니까.”
“…….”
“입장 난처하게 할 생각은 없네. 자네 사생활인데 이래라 저래라 할 마음도 없고. 단지, 상황이 그러니 확인한 것일세.”
세드릭이 프레일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청혼은 아직 안 했나?”
“아니, 왜 다들 자꾸 그러십니까? 저희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요?”
“그러면 임명해도 되겠나?”
프레일은 말이 탁 막혔다. 왜인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세드릭이 서류로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
“이건 주군이 아니라 친구로서 충고하는 건데.”
“…….”
“그냥 생각났을 때 해야지, 안 그러면 후회해.”
프레일은 할 말이 없었다. “아니라니까요.”라고 웅얼거리는 말에는 기력이 없었다.
* * *
세드릭은 그날 오후에 일찌감치 일을 마쳤다.
어의의 조언에 따라 정기 휴일을 정해 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렇게 비정기적으로 생긴 반나절이 더 휴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말을 타는 대신에 걸어서 황후궁까지 갔다. 햇살이 온화해서 몸이 금세 따뜻해졌다.
‘날씨가 맑군.’
정신이 없는 사이에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되어 버렸다.
겨울마다 북방 경계선과 본토 양쪽으로 신경전을 하다가 항구가 녹았다는 보고를 듣고서 긴장을 풀곤 했다.
하지만 올해에는 달랐다. 일은 파도처럼 쉬지도 않고 몰아닥쳤으나 겨울이 그를 미치게 하는 일은 없었다. 계절감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새로운 위치에 조금 익숙해진 기분이 들었다.
겨울 사이에 황후궁도 조금 바뀌었다.
겨울 사이에 궁 남쪽의 나무를 베었다. 암살자가 들지 못하도록 시야를 틔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원인은 레티샤가 제 방에서 창밖의 나뭇가지를 타려고 난간 위로 기어올랐기 때문이었다.
꼭 창에서 뛰어내리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리의 나무를 베는 김에 그 앞까지 싹 다 정리했다.
원래 아르티제아는 거처를 꾸미는 일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예전에 대공저를 수리했던 것은 필요에 의해서 했던 일이다. 결혼식장을 꾸미거나 황자궁을 적절하게 단장하는 일에도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세드릭은 그레고르 황제의 뒤를 이었고, 군사력도 쥐고 있었다.
황권은 충분히 높았으며, 더 이상 권위를 과시할 필요가 없었다.
아르티제아는 제 말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관식 직후에 황궁을 새로운 황제 부부에게 맞추어 개축하자는 의견이 무수히 쏟아졌으나 둘 다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기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겨울에 나무를 베면서 남쪽 거실을 바깥으로 트고, 커다란 테라스를 만들었다.
그 바깥쪽에는 하얀 모래를 가져다가 두툼하게 깔았다. 그네를 설치하기 위해서 줄기가 튼튼한 나무 하나만 남겼다.
세드릭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폐하.”
황후궁을 지키는 근위대원들이 창을 들어 그에게 경례했다.
세드릭은 미소를 띠고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시종들이 달려 나와 무릎을 구부리고 절을 올렸다.
“아빠아아!”
신이 난 레티샤가 달려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