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12
악녀는 두 번 산다 외전
아르티제아는 현실과 꿈의 경계선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몸에 내리쬐는 햇볕은 따뜻한데 바람은 서늘했다. 발목과 무릎 언저리가 시렸다.
사부작거리고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쏴아아 하고 백사장을 쓸어내는 파도 소리가 났다.
아르티제아는 눈을 감은 채로도 새파란 바다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남해에는 가본 적도 없는데.’
꿈속에서도 아르티제아는 깨달았다. 이 바다의 빛깔은 황태후에게 그녀가 바친 소금과 비슷한 색이었다.
오늘 페셔 자작 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이런 꿈을 꾸는 것일까?
언제부터인지 황태후가 곁에 서 있었다. 얼굴 없는 시녀가 뒤에서 양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황태후가 허리에 묶은 푸른 실크 허리띠가 바람에 흩날렸다.
“항상 돌아오고 싶었단다.”
‘남해로?’
이상한 꿈이었다.
황태후 카트린이 이번에 남부에 간 것은 단순한 여행이었다. 마음의 정리를 하러 간 것은 맞지만, 자신과 이런 대화를 할 만한 사이는 아니다.
그러니 이 꿈은 있을 법한 일을 그려내는 게 아니었다. 아르티제아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이상하기도 하지. 무슨 상관이라고.’
“왜 하필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내가 나왔는지 이상하니?”
아르티제아는 일어나 앉았다. 황후는 본 적이 없는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심히 본 적은 없는데, 젊은 시절의 초상화가 생각 외로 기억에 남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남부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지금 황태후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에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어차피 제 꿈이니까요.”
그렇다면 자신이 남부에 무슨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서 이런 꿈을 꾸는 건가.
아르티제아는 꿈에 미래 예지 같은 것이 깃든다고 믿지 않았다. 꿈에서 보이는 것은 자신의 인상에 강렬하게 남은 것이나 잠들기 직전에 생각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떠오를 뿐이다.
황태후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네 말이 맞다. 사실 남부 이야기를 하려던 것도 아니고.”
“네?”
“네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이쪽이 아니겠니?”
황태후가 주먹 안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르티제아는 자기가 부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희한한 꿈이었다.
황태후가 그 부케 가운데에 꽂힌 하얀 장미 봉오리 안에 들고 있던 황금 보주를 넣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제가 신경 쓰고 있다고요?”
“네 꿈인데, 네가 알겠지. 내가 아니라.”
황태후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바다 쪽으로 돌아섰다. 물빛은 이제 나탈리아에게 선물 받은 보석과 닮은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후가 아주 좋은 곳이란다. 한 번 와보렴. 내가 이곳에 정말 아름다운 별장을 하나 갖고 있거든.”
그건 얼마 전에 황태후가 보낸 편지에 적혀 있는 문구였다. 아르티제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남해에는 원수가 많아서…….”
그때 가볍게 입술에 뭔가가 닿았다.
아르티제아는 쏴아아 하는 이 소리가 파도 소리가 아니라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까부터 몸이 차갑다고 생각했지만, 본격적으로 추워졌다. 아르티제아는 몸을 움츠리고 눈을 감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요.”
세드릭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티제아는 자기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잠에서 깨면서 몸에서 바짝 열이 치솟았다.
“아…….”
갈라진 목소리가 현실에서 울렸다. 세드릭이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올리며 물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었습니까?”
“꿈, 이요?”
벌써 기억이 가물거렸다.
“뭔가…… 좋은 꿈을 꾼 것 같아요.”
아직도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던 살랑거리던 물결 같은 바람이 생생했다. 기억의 마지막에 남은 이미지는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청록색 파도였다.
“좋은 꿈이요?”
세드릭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르티제아는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답보다 입맞춤이 먼저 내려왔다. 아르티제아는 당황하면서 눈을 감았다.
“으, 음…….”
숨이 금세 가빠졌다. 세드릭은 아르티제아의 머리칼 안으로 손가락을 묻었다.
그는 뒷목을 받치며 푹신한 소파에 아르티제아를 더 깊이 눕혔다. 그녀가 놀라 세드릭의 옷깃을 꽉 잡았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아르티제아는 여전히 매번 놀라고, 매번 어쩔 줄을 몰랐다. 맞닿은 입술이 긴장을 풀려고 몇 번이나 짧은 숨을 토해내는 틈을 놓치지 않고 밀고 들어가자 작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세드릭은 뒤에서 다닥다닥 달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하아.”
아이 앞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드릭이 아쉬움을 참고 입술을 떼었다.
젖어 있는 아르티제아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쓱 문지르자 뒤늦게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레티샤가 세드릭의 허벅지에 그대로 돌진했다. 세드릭은 “억.” 하고 소리를 내며 자빠지는 시늉을 했다.
“엄마 괴롭히지 마!”
레티샤가 힘껏 세드릭을 밀어내고 아르티제아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있는 힘껏 세드릭을 떠밀었다.
“엄마 아픈데 그러면 안 돼!”
“……괴롭힌 거 아니야. 뽀뽀한 거야.”
“뽀뽀는 그렇게 하는 거 아냐!”
레티샤가 시범이라도 보여주려는 듯이 아르티제아의 볼에 뽀뽀했다. 세드릭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르티제아가 민망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밖에서 이러지 마세요.”
“뭐 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요.”
“나쁜 짓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요.”
“엄마.”
레티샤가 아르티제아의 머리칼을 잡았다.
“이제 안 아파?”
“아픈 거 아니었어.”
“그치만 아빠가.”
“뽀뽀한 거야.”
아르티제아가 약간 붉어진 채로 말했다. 레티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아빠는 간혹 얼버무리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안 지키는 일이 있지만, 엄마는 절대 아니었다. 레티샤는 신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뽀뽀?”
“뽀뽀!”
레티샤가 아르티제아의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뽀뽀했다. 세드릭이 레티샤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달랑 들어올렸다.
“아빠한테도.”
“싫어.”
레티샤의 볼이 불만으로 부풀었다. 아직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엄마 아프니까 멍멍이 보러는 우리 둘이만 갈까?”
레티샤가 심장 떨어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아르티제아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빗으로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아기를 놀리시면 안 돼요.”
“딱히 놀린 거 아닙니다. 당신이 아프면 나 혼자 데리고 가야죠.”
“안 아파. 같이 가자.”
아르티제아가 그렇게 말하자 레티샤가 조금 전까지 울망울망했던 것도 잊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세드릭의 볼에도 뽀뽀를 해주었다. 세드릭의 얼굴이 흐무러졌다.
“그런데 강아지를 보러 간다고요?”
“로산 저택에 강아지가 있다면서요.”
“아아, 정원사가 키우던 개가.”
아르티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아지를 보고 왔던 날부터 사흘 동안 레티샤는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떼를 썼다.
그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공간은 충분했고, 보살필 손도 있었다. 아이가 강아지와 함께 자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조른다고 바로 들어주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고민 중이었다.
세드릭이 레티샤를 팔뚝에 앉히듯이 한쪽 팔로 안고, 아르티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르티제아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런데 오늘 집무를 일찍 끝내셨군요.”
“오전에 임명식 한 건만 일정을 잡았어요. 오후에는 쉴 생각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말씀하셨었죠.”
기억력이 전 같지 않다며 아르티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드릭은 그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모든 일을 전부 기억하고 이용하고 조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흘려듣기도 하고, 듣고 잊어버리기도 했다.
“옷을 가볍게 갈아입고 오세요. 티샤는 앨리스에게 주시고요.”
“음, 이대로 가긴 그렇죠.”
“가는 것만이 아니라 티샤를 그렇게 안고 그러시면 안 돼요. 그 옷으로는.”
세드릭이 자기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황후궁으로 오기 전에 레티샤가 다칠 것을 우려해서 휘장은 전부 뗐다. 하지만 오전의 임명식 때문에 예복을 입고 있었다.
황제의 예복은 귀한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렇게 구겨지게 하면 안 되긴 했다.
“편한 것으로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당신도 좀 더 따뜻한 차림을 하도록 해요. 저녁에 돌아올 테니까.”
“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드릭은 레 샤를 내려놓을 줄 몰랐다.
앨리스가 말했다.
“티샤 님은 제가 모시고 갈게요. 옷에 모래가 들어가셨어요.”
“그래. 놀이옷으로 입혀주렴.”
“네.”
세드릭이 레티샤를 내려놓았다. 레티샤가 세드릭의 소매를 잡았다.
“아빠가 더 먼저 올 거야.”
“웅…….”
레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손은 순순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급한 일 생겨서 가는 거 아니야. 진짜야.”
“저녁에 엄마랑 같이 책 읽어준단 약속도 지켜야 돼?”
레티샤가 묻는 건지 확인하는 건지 애매한 말투로 물었다. 세드릭은 약속 꼭 지킨다고 말하고 레티샤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레티샤가 곧 앨리스의 손을 잡고 타박타박 아기 방 쪽으로 갔다. 세드릭은 아르티제아를 투왈렛 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옷을 관리하는 시종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키쇼어 부인이 황제 부부가 외출할 것이라고 미리 이야기를 전해 둔 덕분이었다.
소피가 생글거리고 웃으며 두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투왈렛 룸에는 벌써 드레스가 세 벌 나와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요즘 자신이 옷을 만들고 입는 것은 소피의 취미생활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슬슬 다른 일을 시킬까?’
아낀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곁에 두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황후궁에서 자신의 시중을 드는 것보다는 자기 뜻을 펼칠 기회가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보낸다고 해서 교류가 끊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속으로 생각했을 때였다.
세드릭이 물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었습니까?”
“네?”
아르티제아는 잠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세드릭이 불편한 얼굴로 눈을 피했다.
“뭔가 꿈을 꾼 것 같긴 해요. 기억은 안 나지만. 왜 그러세요?”
“남해의 기후가 좋긴 하죠.”
“네?”
“아닙니다.”
세드릭이 고개를 털고, 아르티제아의 손을 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