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2
악녀는 두 번 산다 32화
아르티제아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낯선 방의 포근한 깃털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몸에는 흰 원피스 잠옷이 입혀져 있었다.
벽난로에 불이 지펴져 있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날씨인데 난방이라니. 하지만 한기가 돌고 있는 아르티제아의 몸에는 딱 좋을 정도였다.
아르티제아는 가만히 누운 채로 손발을 꼼지락거렸다. 무릎과 정강이 쪽이 아프고, 팔과 어깨도 따끔거렸다.
얼굴도 그랬다. 아르티제아는 뺨을 맞다 터진 입 안의 상처를 혀로 쓸 어보았다.
다른 때와 다른 것은 눈가가 쓰리지 않다는 것이었다. 누가 얼굴을 닦아준 모양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맞은 자리만이 아니라 어깨와 팔 다리의 근육, 관절, 이런 곳이 아팠다. 긴장한 나머지 온몸에 너무 힘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기절했었던 것 같다. 마지막 기억은 세드릭이 밀라이라의 팔목을 잡았던 것까지였다.
그 뒤에 바로 기절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도 몸이 다 자라고 난 다음에는 이런 식으로 기억이 끊긴 일은 없었는데.
그게 뭐 별일이라고 기절할 만큼 긴장했을까.
제방을 터뜨린 것도, 전염병을 퍼뜨린 것도, 남해의 해적왕을 상대로 제국의 남부 도시를 놓고 거래를 한 것도 아닌데.
그럴 때조차도 기절할 정도로 긴장한 적은 없었다.
아르티제아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쓰다듬었다. 광대뼈 언저리가 아팠다.
“휴우…….”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이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틀림없이 참담한 몰골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얼굴을 세드릭에게 보였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울적함이 들었다.
‘뭔가 말실수한 건…… 없겠지?’
기억이 없으니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아르티제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부하 걸린 듯이 기억이 끊어진 것도 머릿속이 내내 복잡했던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서 끝이다.
그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냥 형식적인 것이었는지 상대는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안스가르였다.
그는 아르티제아가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가지고 들어온 세숫대야와 수건을 문에서 가까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침하셨군요. 저는 에브론 대공가의 집사 안스가르라 합니다.”
“네.”
아르티제아는 목구멍으로 치솟으려는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러나 다 참지 못하여 감정이 가득 섞인 어조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네, 알고 있어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세드 님께서, 여러 가지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소후작님께서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제가 감사한 일이죠.”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직 저택이 좀 어수선합니다. 평소에는 주로 군인들만 오가던 공간이라서요. 정리도 지난달에야 시작했고요.”
“네…….”
“계시는 동안 우선 제가 시중을 들어드릴 겁니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안스가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아르티제아에게 다가왔다.
아르티제아는 안스가르에게 얼굴을 맡기는 대신에 그 수건을 받아들었다.
“의사 말로는 긴장을 많이 하시고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으셨던 것이라고 합니다. 몸에 있는 상처는 대부분 외상이니 금방 회복되실 겁니다. 손거울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별로, 보고 싶지 않아요.”
“예. 흉으로 남을 상처 같은 것도 없다고 합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아르티제아는 무던하게 대답했다. 그럴 것이다.
맨손에 맞아 죽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여자 손으로라면 더 그렇다.
밀라이라는 아르티제아보다는 힘이 세지만, 그래봤자 귀부인이었다.
그 손으로 드는 것 중에 가장 무거운 것은 기껏해야 황제의 코트나 왕홀 정도일 것이다.
어제처럼 맞은 일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다.
대여섯 살 때에도 죽지 않았고, 여태까지 죽어 나간 하녀도 없었다. 밀라이라는 분을 못 이겨 날뛰는 것이지, 죽일 작정으로 상대를 때리거나 목을 조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르티제아는 조심스럽게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눈 앞머리와 꼬리를 닦고, 이마와 뺨의 얼얼한 부분도 살살 눌러 닦았다.
안스가르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소후작님의 하녀들도 이 저택에 와 있습니다. 처소를 결정해주었으니 지금은 짐을 풀고 있을 겁니다. 불러드릴까요?”
안스가르가 굳이 물은 것은 아르티제아의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많은 품위 있는 귀족들이 그런 감정을 내보이기 싫어했다.
그리고 이 어린 숙녀는 제 어머니나 오라비보다 고귀하고 귀족적인 사람인 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몇 번에 걸쳐 감정을 목구멍 아래로 내려 삼키는 것을 안스가르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쓰러운 감정을 숨겼다.
상대는 세드릭의 약혼녀로서, 조만간에 안주인이 되실 분이다. 그러니 일개 집사인 그가 동정을 표시해도 되는 상대가 아니었다.
“앨리스는 어떻게 되었나요?”
“소후작님의 측근 하녀 말씀이시군요. 부상은 손목을 삔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소후작님의 곁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많이 피곤해보여서 가서 쉬라고 했습니다.”
“알겠어요. 마음 써주어서 고마워요.”
아르티제아는 이제 완전히 차분하게 수습된 얼굴로 대답했다.
“마커스는 무얼 하고 있나요? 에브론 대공저에 의탁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마커스 한슨 씨는 지금 후작 저택 쪽의 일을 수습하기 위해 가 있습니다. 세드 님께서 기사단을 남겨두고 오셨습니다.”
“기사단은 과한데…….”
아르티제아는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몹시 지쳐서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이 머리 밖으로 흘러나간다.
뻔히 알고 있는 일, 익숙한 일이라고 해도 육체적인 고통에는 결코 적응되지 않는다.
아니, 마음도 그랬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검을 배우면 굳은살이 생기는데, 마음에는 그것이 결코 생기지 않는 것 같다고 아르티제아는 생각했다.
아무튼 후작 저택의 일은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간단한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무어라도 조금 드시고 오늘 하실 일을 생각하시지요.”
“지금은 그다지 들어갈 것 같지 않아요. 식사보다는…… 진한 차를, 한 잔 만들어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곧 준비해 오겠습니다.”
안스가르가 조용히 물러나갔다. 아르티제아는 혼자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은 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곧 안스가르가 차 한 잔과 부드러운 마들렌 두 조각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르티제아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혀끝부터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이런, 맛이었구나.’
아르티제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 눈물방울이 둥글게 커졌다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도 알지 못하고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맛있네요, 고마워요.”
안스가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세드릭이 문을 두드린 것은 아르티제아가 차 한 잔을 간신히 비웠을 무렵이었다.
대답이 없었지만, 그는 그냥 문을 열었다. 인기척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제아가 깨어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안스가르가 그녀를 보살피러 왔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아르티제아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과 맞닥뜨렸다.
“아…….”
“대공 전하.”
아르티제아의 목소리는 맑았다.
세드릭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머뭇거리고 고개를 돌렸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안스가르가 첫 마디로 잔소리를 했다.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도 숙녀의 침실에 이렇게 들어오시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세드 님.”
“미안합니다. 깨어나 있을 줄 모르고.”
“잠든 여자 방에는 더욱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 세드릭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뒷걸음질을 쳤다.
아르티제아는 무심결에 웃음소리를 내버렸다.
그다음에야 그녀는 제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스가르가 조용히 그녀에게 수건을 다시 적셔 내밀었다.
아르티제아는 그것을 받아 얼굴을 한 번 푹 묻었다. 단 것을 마신 덕분인지 기분이 훨씬 나아져 있었다.
“고마워요, 안스가르.”
그녀는 얼굴을 닦아낸 수건을 안스가르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문간에 서 있는 세드릭에게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는 들어오셔도 괜찮아요. 제 얼굴이 너무 흉하다는 걸 책망하시지 않는다면요.”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세드릭은 더듬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전하께서 타인의 외모 같은 것에 마음 쓰시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아르티제아는 미소를 지었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도 별로 예쁘지 않은 얼굴인데, 거기에 멍이 들고 딱지까지 앉았다.
그 위에 눈물로 범벅했으니 틀림 없이 눈뜨고 보지 못할 몰골이리라.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시원했다. 과거로 돌아온 후로 계속해서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 얹어져 있던 커다란 돌덩이가 굴러떨어져 사라진 것 같았다.
그것이 시원스럽게 밀라이라에게 맞고 모든 것이 끝나버린 탓인지, 아니면 눈물을 흘린 탓인지 아르티제아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남은 일은 첩첩산중이고, 여전히 자신은 외줄 위에 서 있다.
하지만 틀리지 않았다.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옳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
안스가르의 차 맛은 그녀에게 그것을 알려주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세드릭이 안절부절 못했다. 여전히 시선은 그녀를 정시하지 못했고, 귀끝이 붉었다.
“그러고 계시지 말고 앉으세요.”
아르티제아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세드릭은 머뭇거리다가 테이블 옆에 놓인 의자를 돌려서 아르티제아에게서 거리를 둔 채 앉았다.
안스가르가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물러나 방 밖으로 나갔다.
“함부로 문을 열어서 미안합니다. 걱정이 되어서, 나가기 전에 잠시 들렀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도…….”
아르티제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도와주러 오셔서 감사했습니다. 직접 오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리제가 사람을 부르러 왔을 때에 마침 제가 저택 앞에 있다가 마주쳤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세드릭은 깨달아버렸다.
직접 올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니.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누구이든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르티제아가 ‘생각한다’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의미가 달랐다.
“티아, 역시…….”
“네?”
“이 일, 당신이 꾸민 겁니까?”
수줍어서 소녀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청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에브론 대공이 나타났다.
심연까지 들여다볼 듯 뜨거우면서도 새카만 눈동자가 아르티제아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