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23
악녀는 두 번 산다 외전
“그렇게 해서 우유는, 할머니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세드릭은 마지막 문장을 읽고 슬 쩍 레티샤의 눈치를 보았다. 레티샤는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우, 아빠, 나 빨강이…….”
세드릭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는지, 레티샤가 돌아누웠다.
하지만 중얼거린 말은 잠꼬대였던 모양이다. 숨을 죽인 보람도 없이 아이는 꿈나라로 멀리 떠났다.
세드릭은 책을 덮어서 표지를 보았다. 책 표지에는 복실복실한 하얀 털의 강아지가 그려져 있었다.
숨바꼭질을 하다가 이웃집 수레에서 잠들었는데 그만 먼 도시까지 가 버려서, 모험을 거쳐 집으로 되돌아와 걱정하던 할머니와 다시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레티샤는 강아지 말만 들어도 빨강이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세드릭은 살짝 일어서서 동화책을 제자리에 꽂았다. 그러고 보니 강아지 모양의 책장에 강아지에 관한 그림책이 잔뜩 꽂혀 있었다.
낮에 놀면서 그린 그림에는 엄마, 아빠, 미엘르 옆에 빨강이도 그려져 있었다.
세드릭은 그것을 집어 들고 쓴웃음을 지었다.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러게요. 키운다는 말은 가서 놀 때에만 할 줄 알았는데.”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자기 책을 읽고 있던 아르티제아가 일어서서 곁으로 다가왔다.
세드릭은 그녀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말했다.
“생각보다 꾸준한데요. 이제 허락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해요. 세드릭 님이 그게 옳다고 생각하시면.”
세드릭은 깜짝 놀라 아르티제아를 쳐다보았다.
“싫은 게 아니었습니까?”
“딱히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요. 단지 조른다고 해서 다 들어 줘도 되는가 싶어서 그랬어요.”
아르티제아가 대답했다.
“더군다나 살아있는 생명인데요.”
“음……. 잘 지켜봐야겠죠.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티샤는 착하니까.”
“네.”
세드릭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팔짱을 끼었다.
유모가 들어와 자리를 넘겨받았다. 두 사람이 나가는 뒤에서 시종들이 휘장을 닫았다.
평소라면 이때쯤에는 이미 조용해질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오가는 자들도 좀 있고, 복도에 불도 환하게 켜져 있었다.
멜의 가족들에게 내준 처소 쪽에 한나와 그 외의 몇몇 가신들의 숙소도 마련했다. 사람이 늘었고, 게다가 그들도 각자 중한 임무를 맡고 있으니, 벌써부터 잠들었을 리는 없었다.
세드릭은 아르티제아를 침실까지 에스코트했다. 황후궁이 모두 잠들었을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혼자 조용히 별채에 들를 작정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침대에 단정하게 앉아서 말했다.
“잠깐 앉아보세요.”
“무슨 중요한 이야기라도 있습니까?”
“아뇨. 중요하지는 않지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세드릭은 티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다가 아르티제아와 마주보고 앉았다. 침실에서 이러고 있자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아르티제아가 말했다.
“제게 숨긴 일이 있으시지요?”
세드릭은 의아하게 아르티제아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는 일이야 당연히 있었다.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러기에는 일이 너무 많았다.
실무에 관한 문제는 일일이 의논할 만한 게 아니었고, 아르티제아가 은퇴하겠다고 말한 뒤로는 큼직큼직한 방향성에 대해서라면 모를까, 내 정에 대해서 시시콜콜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숨기다니?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르티제아가 먼저 말했다.
“아푸아 님이 그러시더군요. 톨드 관문이 무너진 뒤에 북부를 지배한 아홉 세파의 연맹에 들어가 계셨다고.”
“아.”
세드릭은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숨겼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숨기긴 했다. 아르티제아에게 숨겼다기보다는 본토에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
사원의 이단 심문은 이미 걱정할 만한 단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북부가 완전히 멸망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로렌스가 더욱 미쳐 날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알고 있을 줄 알았다.
“몰랐습니까?”
“제가 스스로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안다고 자부하지만, 카람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도 몰랐는데 연맹이 맺어졌으리라는 생각을 어떻게 했겠어요?”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북부를 떠나 그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한 겁니까?”
아르티제아가 잠깐 멈칫했다. 그 말도 옳았다.
로렌스 치세일 때에 세드릭은 서부에 장기간 머물렀으며, 그녀를 데리고 동부와 북부를 모두 돌아보았다.
아르티제아는 그가 에브론 땅을 잃은 후에 서부의 군벌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자세히는 몰랐다. 그녀는 이미 은퇴한 뒤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북부에서 근거지 없이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풍찬노숙할 수 있는 동부와는 전혀 다른 땅이니까.
그것도 그녀가 이제 북부를 알기 때문에 판단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달리 생각하면, 주인이 기사단을 이끌고 떠나도 근거지가 무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연맹이라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치적인 결합이 아닙니다. 무슨 제대로 된 회의 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세드릭이 말했다.
“북부는 넓고, 나눌 땅은 충분하니까요. 게다가 당시에 카람은 유목민에 가까웠고요. 연맹이라고 말해도, 원시적인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파벌이 나뉘었다면서요.”
“있었죠. 왕을 선정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하지만 카람에게는 영토 개념이 없어요. 법은 관습에 따르고, 행정 개념도 없습니다. 조세조차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연맹이라고 해도 부족끼리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공동의 문제에 대응하자, 그런 정도의 것이었다.
카람은 땅을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치에 대한 개념도 인간과 달랐다. 분쟁 조정이나 이익 분배를 위해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혈연의 여부였다.
그러니 연맹에 들어가긴 했어도 세드릭은 부외자였다.
“사실상 에브론 기사단과 더 싸우지 않겠다는 불가침 조약이 형성된 것이지, 인간이 당시 북부에서 정치 세력으로 기능했던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으리라.
애초부터 에브론이 아홉 세파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기보다는 세드릭 개인이 각 파벌의 수장과 같은 정도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었으니까.
그것은 세드릭이 나이 들어 더 이상 위대한 전사가 아니게 되면 사라질 지위였다. 그리고 그때는 금세 다가올 것이었다.
이미 중년의 나이였었다. 병은 없었지만, 몸이 전과 같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잔부상과 피로가 누적되어 육체는 한계에 도달했었다.
다시 한 번 카람의 대전사와 싸우는 것은 당연히 무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대신해서 그렇게 싸울 만한 후계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드릭은 그런 이야기를 아르티제아에게 굳이 하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대공인 그가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던 것까지 알려서 아르티제아의 죄책감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궁금해진 것이 하나 있었다.
“저는 그게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일에……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뭔가 판단이 달라졌었을까요?”
“…….”
그것은 세드릭이 아르티제아에게 계책을 달라고 말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제 와서 궁금해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시점에서 이미 인간의 힘으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었다.
희생의 총량은 줄었을 것이다. 그들 부부에게 있어서도, 여태까지 겪어온 여러 가지 괴로움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때보다 좋은 상황이 되었고 사랑스러운 아기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드릭의 마음 속 한구석에는 늘 그때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오랫동안 눈을 내리깐 채로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있었든 없었든, 세드릭 님은 북부에서 세력을 다시 모아 서부의 성주들 정도로 안정된 영지를 만드실 수 있었을까요?”
“어려웠을 겁니다. 북부에서는 작은 땅만으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소출이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것을 보완할 만한 행정 능력은 이미 상실한 상태였고요.”
세드릭은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수없이 생각해봤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남아 있던 북부인을 모두 한 지역에 모을 수 있다면 정치적 세력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러지 못했다.
차라리 카람에게 국경선의 개념이 있다면 일정한 땅을 영토로 선포하고 사람을 모아들였겠지만, 카람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서부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군벌을 규합하고 저항하는 자를 때려 부숴 땅을 빼앗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하면 곧바로 황제의 중앙군에게 노려지기 때문이었다. 고정된 근거지를 가지면 필연적으로 생길 일이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아르티제아가 말했다.
“당시 저의 건강 상태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제겐 방법이 없었어요.”
“그렇습니까.”
“네. 그때 우리 둘 다 이미…… 나이가 적지 않았잖아요. 진창에 기반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하기에는 시간도, 사람도 너무 없었으니까…….”
아르티제아가 중얼거렸다.
영웅이 홀로 우뚝 선 것이 나라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세드릭이 머리 위에 어느 정도의 절망을 얹고 저항했을지에 대해 아르티제아는 생각했다.
그녀가 두 팔을 벌렸다. 세드릭은 그녀가 손짓하는 대로 순순히 겉으로 다가가 몸을 맡겼다.
아르티제아가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고생하셨어요.”
“…….”
세드릭이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아르티제아를 마주 꽉 껴안았다.
* * *
조르딘 가족의 저녁 식탁은 화기애애했다. 처음 한 시간 정도는.
조르딘 백작 부군, 율리는 선하고 우직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멜이 결혼 상대를 고를 때에 가장 우선시한 조건이 그것이었다.
선량하고 성실할 것, 건강하고 욕심이 많지 않을 것, 다정하고 아이를 좋아할 것.
그녀는 조르딘 백작가의 후계자였고, 장차 에브론 본성의 관리인이 될 사람이었다. 그러니 부군 될 이는 그에 걸맞은 내조를 할 줄 알며, 건강한 후계자를 안겨줄 수 있는 남자여야 했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는 금실이 좋았다. 율리는 멜에게 건강한 아기들을 주었고, 멜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에도 흐린 얼굴 하나 없이 아이들을 키웠다.
가문이 상당히 처졌지만, 그래도 본성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조르딘 가문의 사위로서 흠잡을 곳 없다고 인정했다.
헤일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율리를 좋아했다. 멜과 나이 차이가 있는 만큼 율리와도 나이 차가 상당했다. 보살핌을 받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만나서 한 시간이 넘은 시점부터 애정은 저 머나먼 기억 뒤로 사라졌다.
원래 가족은 같이 살지 않을 때 애틋한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율리는 헤일리의 가족이었다.
“넌 이미 결혼 적령기를 넘겼어, 헤일리.”
율리는 엄숙한 얼굴로 선언했다.
“건강한 아기를 낳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