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27
악녀는 두 번 산다 외전
리시아가 봉투를 들고 화로 쪽으로 갔다. 날이 온화했기 때문에 벽난로에는 불이 지펴져 있지 않았고, 화로도 꺼진 듯이 보였다.
리시아는 부젓가락으로 화로를 저어 불씨를 살려냈다. 그리고 거기에 봉투를 얹고, 기름병을 가져다가 몇 방울 뿌렸다.
라니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체 무슨 편지이기에 그렇게 태우는 건지 궁금했다.
리시아가 말했다.
“그런 일에는 당연히 협조해야지. 딱히 숨길 것은 없으니, 장부이든 뭐든 전적으로 다 공개하도록 하자.”
“아데반 경이 반대할 거예요.”
“환곡창에 권위는 필요 없어.”
리시아가 말하고 나서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예산이든 인력이든 정보이든, 지원을 했으면 감사는 해야겠지.”
“네.”
라니에가 밝은 얼굴을 했다. 그녀 자신은 물론 리시아의 비서로서 어디 가서 무시당하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환곡창과 행정 관청 사이에 미묘하게 알력 다툼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감사 책임은 아데반 경에게 맡기도록 하자. 협조 지원은 네가 책임지고.”
“네? 제가요?”
라니에가 화들짝 놀랐다.
“올해 추수한 겨울밀이 이미 풍작이야. 창고가 가득 찼으니, 어지간해서는 별일 안 생기겠지.”
“어디…… 가세요?”
라니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시아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수도에 며칠 다녀올게.”
“무슨 일 있으세요?”
“개인적인 볼일이야.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렇다고 해도 오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두 달은 걸릴 것이다. 라니에가 염려스러운 얼굴을 했다.
“빠른 시간 안에 호위대를 편성하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가볍게 갔다 올 거니까. 사적인 용무이고.”
“그러시면 안 돼요.”
“호위대까지 데리고 가면 너무 오래 걸려. 그냥 기사 두엇과 함께 가는 편이 빨라.”
“혼자 가시는 건 아니신 거죠?”
“그래. 조프리 경과 아델 경에게 부탁할 거야. 가는 길에는 서부군 주둔지를 이용할게.”
그래도 라니에가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리시아는 중요한 몸이었다.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서, 혹은 그녀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무력을 동원할 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리시아가 그 속내를 알아챈 듯 말했다.
“염려 마. 예전 같은 일은 없을 거야. 그때는 여러 모로 불안정하고 흉흉한 시기였잖니. 지금과는 다르지.”
그 말의 뒤에, 이제 자신에게 집착하는 자는 사라졌다는 말이 숨어 있었지만, 라니에로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라니에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는 리시아가 정 하겠다고 하면, 막을 힘도 없었다.
“베냐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특별히 뭘 어떻게 할 것 있겠니? 하던 일 그대로 맡겨둬.”
“다음달에 리시아 님이 자기만 두고 가셨다는 걸 알면 화낼 거예요.”
라니에가 목을 조금 움츠렸다.
그녀는 베냐가 어려웠다. 자기보다 어린 나이인데도 그랬다. 일솜씨마저 나이답지 않게 원숙했다.
리시아는 베냐를 환곡을 살피는 부서에 보내 계속해서 움직이게 했다. 여러 곳을 다니고 변해가는 모습을 살펴보며 베냐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지기를 바란 것이다.
아직은 이른 듯했다. 베냐는 쌓이고 쌓인 감정을 분출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상태를 리시아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다.
지금 베냐에게 있어서 서부 땅도, 리시아 자신도, 사랑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절망에서 버티기 위해 집착하는 상대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 절망이 이제 끝났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마음이 열리고 온전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날도 오리라.
그럴 수 있을 만큼 강한 아이라고, 리시아는 그녀를 믿고 있었다.
“편지를 써두고 갈 테니, 베냐가 오면 전해주렴. 온다고 해도, 바쁜 와중에 어차피 곧 또 나가봐야 할 텐데.”
“네.”
리시아는 라니에에게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렸다.
환곡창의 수장이라고는 해도 실무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인 방침만 결정해주는 것으로 할 일은 끝났다.
일찌감치 그녀는 사무실을 나와 사처로 향했다.
간단히 짐을 챙기고 나오자 기사 둘이 도착해 있었다. 리시아는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고 말했다.
“수도로 가죠.”
“예, 리시아 님.”
리시아는 마지막으로 권총을 허리춤에 꽂았다.
2년 만의 귀경이었다.
* * *
황태후가 여행에서 돌아온 것은 4월 끝물의 일이었다.
피한으로 간 것이라면 딱 적당한 때에 돌아온 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오래 머물러 있을 줄 알았기에, 아르티제아는 의아해했다.
“남부인들에게 남해 여행은 여름이 백미라고 들었는데, 일찍 돌아오셨군요.”
“이 나이에는 바다낚시도, 뱃놀이도 무리가 아니겠느냐? 오랫동안 수도에 살았더니, 이제 더위가 견디기 어렵더구나.”
“그러셨군요.”
“별일은 없었고?”
“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국사에는 이런저런 일이 있겠지만, 단기적으로 수도의 사교계가 변화할 만한 일은 없어요.”
멜을 비롯하여 북부 귀족들의 등장으로 사교계가 출렁이고 있긴 했다.
그러나 황제가 특별히 북부 귀족을 집중적으로 중용할 계획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별것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눈가림용이니까.
카람 문제는 황태후에게도 비밀이었다. 그리고 들키지 않을 정도로 순조롭게 사원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부야말로 어떤가요? 일찌감치 돌아오신 것을 보니 큰일은 없었던 모양이지요?”
“큰일이라니, 예를 들면?”
“에이델 왕국에서 군비를 늘리고 있다거나요.”
“늘 있는 일이라서 새삼스럽게.”
“그렇긴 하네요.”
“그보다는 국왕의 혼사 문제로 시끌시끌하단다. 마침내 에이멜의 중신들도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던걸.”
“그렇군요. 적절한 왕비감이라도 나타났나요?”
“뭐 특별히 새로운 사람이 나타난 것은 아니야. 원래부터도 몇 개 국가와의 혼인 동맹을 염두에 두고 공주들을 택할 예정이었다고 하더구나.”
“또 남부의 세력판도가 요동치겠군요.”
아르티제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에이멜이 어느 나라와 동맹하기로 결정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카드리올의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야심만만하고 대담무쌍한 공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왕비가 내부에서 분쟁을 일으키거나 권력 다툼을 하려 든다면, 에이멜의 국력만 소모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유명무실한 왕비를 세우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지. 카드리올 국왕도 알고 있겠지만.’
흥미롭기는 했지만, 지금의 제국이 세심하게 신경 써야만 할 만큼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 이언츠에서 여러 가지 선물을 받아왔단다.”
그때였다.
콰당!
거실 문이 부서질 정도로 세게 열렸다. 황태후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뛰어 들어온 아이를 보고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할무니!”
레티샤가 소리를 지르며 온몸으로 달려들어 왔다.
그렇지만 황태후의 무릎에 돌진하기 전에 움찔했다. 황태후는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피식피식 웃었다.
“티샤가 할머니 얼굴을 잊었구나.”
“아, 안 잊었…… 어.”
레티샤가 꼬물꼬물 부끄럼을 탔다. 잊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보니 낯을 가리는 모양이었다.
황태후가 레티샤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안아 올렸다.
“어이쿠, 무거워졌구나. 이제 몇 달만 더 지나도 이렇게 안기 힘들어지겠는데.”
“먹는 양에 비하면, 몸무게가 그만큼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죠.”
“전부 뼈에 쌓이고 있을 게다. 세드릭이 그랬으니까.”
“네?”
“천장에서 떨어지면서 쇠로 만든 깃대에 부딪치고도 뼈 하나 안 부러졌지.”
“네?”
아르티제아가 되물었다. 사람이 천장에서 떨어진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황태후가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아르티제아의 거실은 별로 장엄하게 꾸며져 있지 않아서 그녀가 찾는 종류의 휘장이 없었다.
“왜, 있지 않니? 회의실이나 접견실에 걸어두는 황실의 휘장.”
“아, 네. 천장에서부터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내려뜨리죠.”
“그걸 타고 천장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졌단다. 내 접견실에서.”
심지어 위엄을 차려야 되는 장소이기 때문에, 다른 곳과 달리 반층 이상 높았다.
아르티제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이라 황태후는 즐거워졌다.
“몰랐니?”
“그런 걸 왜 타고 올라갔을까요?”
그러자 황태후의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옛일을 떠올린 탓이었다.
“파벨이 거기에서 연을 날렸어. 다른 곳보다 층고가 높으니 제 딴엔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 그게 휘장에 걸렸는데, 혼날까 봐 내려주려던 모양이었단다.”
그러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보모와 시종을 겁에 질리게 했다. 황태후도 대경실색해서 크게 꾸짖었었다.
천만다행으로 다치지 않았으니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르 티제아도 피식 웃었다.
“그럼 티샤처럼 커튼을 타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말이네요. ‘그네처럼’ 타지 않은 거지, 아예 잡고 올라간 적이 없는 건 아니니까.”
“티샤 너도?”
“아앙.”
황태후가 쳐다보자 그녀의 무릎에 안겨 있던 레티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추었다. 그 일로 몇 번이나 혼난 탓이었다.
황태후가 웃고는 경고했다.
“계단 난간은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아직 티샤는 키가 안 되지만, 대비를 해야겠군요.”
“썰매도 그렇고.”
“썰매 정도는 타고 놀게 해줘야죠.”
“계단에서 말이다.”
황태후는 안스가르와 달리 세드릭의 체면을 지켜줄 이유가 없었다.
“파벨이 아주 사고뭉치였지. 세드릭도 이제 와서는 휘말린 척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절대 결백하지는 않을 게다.”
“보모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어요.”
“눈만 떼면 그 순간에 사라져버리니까. 시종을 여럿 쓸까 했던 때도 있지만, 그것도 이래저래 쉽지 않은 일이었어서…….”
“네. 지켜보는 눈이 없으면 사고가 일어나지만, 사고를 일으킬 자가 섞여 있을 수도 있으니까…….”
“티샤에게는 그런 염려가 없으니, 사람을 잔뜩 붙이려무나.”
“네.”
아르티제아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