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32
악녀는 두 번 산다 외전
여름 산
1.
“안 내면 술래, 가위바위보!”
“앗! 황자님, 또 늦게 냈어!”
아이들 목소리가 안뜰에 짜랑짜랑 울려 퍼졌다.
백금빛 머리칼을 짧게 자른 어린 황자가 울상이 되어서 누나의 옷자락을 잡았다.
레티샤가 소리쳤다.
“너네가 화내니까 유시가 자꾸 긴장해서 실수하잖아!”
“화내는 거 아냐!”
“화냈잖아! 유시는 아직 어려서 손을 빨리 내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생각과 몸 중에서 압도적으로 후자가 빠른 레티샤로서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유모가 그렇다고 말했다.
“제일 화내면서 소리치는 건 티샤 님인데…….”
남매의 젖형제인 켄이 듣는 사람 없는 한탄을 웅얼거렸을 때, 소매가 흔들렸다. 유시스 황자였다.
“아, 유시 님. 왜요?”
“나 갈래.”
“방에요?”
“아니, 쩌어기.”
레티샤가 원치도 않는 대리전을 하는 동안 유시스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기로 했다.
그는 타박타박 켄의 등 뒤로 돌아 반대편에 서 있던 카람 혼혈 소년 쪽으로 갔다. 켄이 깜짝 놀라 뒤따라 갔다.
“유시 님, 혼자 움직이시면 안 돼요. 그리고 사람을 그렇게 손가락질 하면.”
켄이 말했지만, 유시스는 듣지 않고 물었다.
“있잖아, 형아는 왜 눈이 세 개야?”
소년이 무심코 이마의 눈으로 손을 가져갔다. 유시스보다 어른이었고, 레티샤보다 눈치를 보는 아이로 자란 켄은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말했다.
“유시 님, 남의 몸에 대해 함부로 질문하면 안 된다고 시녀장님께 배우셨잖아요.”
유시스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눈을 깜박거리다가 말했다.
“몸 아니야. 눈이야.”
“눈도 몸이에요.”
“눈이 몸이야?”
유시스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켄은 답답해졌지만, 눈과 몸의 포함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아기에게 설명할 능력이 없었다.
소년이 난처한 태도로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켄이 곤란해하는 것이 괜히 미안했고, 또 지체 높은 황자님이 묻는 데 감히 자기 따위가 대답하지 않는 것도 무례할 것 같았다.
“원래 그랬어요.”
“원래 눈이 세 개야?”
“네, 황자님.”
유시스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가 세상에 원래 그런 일은 없댔어.”
“그치만 전 태어날 때부터 눈이 세 개였는걸요. 저희 엄마도 그렇고요.”
“엄마도 눈이 세 개야?”
유시스가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이모는 팔도 네 개고, 이만큼 커요. 저희 동네에서 장작을 제일 잘 패고, 힘도 세요. 외할머니가 카람이었대요.”
소년이 두 팔을 크게 벌려 덩치를 표시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거기에 질세라 유시스가 두 팔을 번쩍 쳐들며 소리쳤다.
“우리 아빠도 이만큼 커!”
“아니…… 폐하께서 키가 크시긴 하지만 카람보다는…….”
켄이 웅얼거렸다.
그때 레티샤가 바락 고함지르는 소리가 켄의 중얼거림을 덮어 버렸다.
“유시는 꼭 나랑 같이 있어야 해! 엄마가 나한테 유시를 잘 부탁한다고 했단 말야!”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된 사이였지만, 레티샤는 이미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상태였다.
소꿉놀이 같은 거면 모를까, 얼음땡 놀이에 너무 어린아이가 끼어 있으면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레티샤가 가 버리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었다.
“알았어. 그럼 황자님은 피클이 해.”
“피클이가 뭐야?”
“피클이는 얼음을 계속계속 해도 되는 거야.”
“그러면 재미없잖아.”
“안 그러면 황자님이 술래 되면 끝이 안 나잖아.”
아직 어린 유시스가 일고여덟 살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레티샤는 망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얼음이 무제한이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모두가 얼음땡을 하기로 했다. 이 이상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워 봤자 이 놀이가 아니면 켄과 유시스를 상대로 소꿉놀이를 하러 가든가, 아니면 답답한 방 안에 가서 장난감 병사를 만지작거리는 심심한 결말이 될 것이었다.
“좋아. 자, 그럼 다시!”
합의를 본 레티샤가 활달하게 말했다. 유시스는 얼떨떨해서 멍하게 그 광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안 내면 술래, 가위바위보!”
“와아아-!”
승패는 유시스를 빼고 결정되었다.
혼혈 소년이 재빨리 달아났다. 하지만 켄은 유시스에게서 멀리 떨어질 수 없어서 주춤거렸다.
레티샤가 달려와 유시스의 손을 낚아챘다.
“도망치자, 유시!”
“누나아! 흐엥!”
레티샤가 끌어당기는 힘에도, 속도에도 따라갈 수 없는 유시스가 울상이 되어 할 수 없이 뛰었다. 금세 쌕쌕, 숨이 가빴다.
세드릭이 안뜰에 나온 것은 이때였다.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보모들과 호위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세드릭은 편하게 있으라고 그들에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리고 큰 소리로 불렀다.
“티샤! 유시!”
“와, 아빠다!”
레티샤가 홱 돌아보고 신나서 외쳤다. 그리고 유시스의 손을 꼭 잡은 채 다다다 그를 향해 달려갔다.
“누나, 악!”
뜀박질이 서툰 유시스가 제풀에 발이 걸려 꽈당 넘어졌다. 레티샤가 반사적으로 유시스의 손을 위로 잡아당겨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 바람에 오히려 잡힌 손을 축으로 유시스의 몸이 뱅글 돌아 옆으로 자빠졌다.
“앗!”
레티샤가 깜짝 놀라 유시스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흐, 흐아앙! 으아아앙!”
유시스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세드릭은 서둘러 유시스에게 다가가 안아 일으켰다.
레티샤가 울먹거렸다.
“유시, 어떡해. 이마에서 피 나.”
“어디 보자. 그냥 살짝 긁힌 거야. 괜찮아.”
세드릭이 유시스의 머리칼을 넘겨 옆머리의 상처 부위를 살폈다. 레티샤가 잔뜩 울상을 지으며 사과했다.
“유시, 괜찮아? 미안해.”
“흐어엉!”
설움이 폭발한 것처럼 유시스가 통곡했다. 세드릭은 유시스를 안은 채 훌쩍 일어서서 등을 토닥거렸다.
“울면 또 열난다, 유시. 아픈 거 싫잖아.”
“팔 아파. 흑. 아빠.”
유시스가 세드릭의 목을 껴안았다.
“황자님, 괜찮으세요?”
켄이 불안한 얼굴로 주춤주춤 다가왔다. 세드릭은 유시스를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걱정 마렴.”
“하지만…….”
“놀다 보면 다치기도 하고 그런 거지.”
“응.”
“티샤는 아빠가 말한 거 잊어버렸지? 유시는 어려서 너랑 똑같이 뛸 수 없으니 억지로 끌어당기면 안 된다고 했잖니?”
“……잘못했어요.”
레티샤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는 누구한테 해야 하지?”
“다친 사람한테요. 미안해, 유시.”
“우웅.”
유시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세드릭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세드릭은 유시스를 왼팔로 옮기고, 오른팔로는 레티샤를 안아 올렸다. 레티샤는 이제 제법 팔이 뻐근할 만큼 무거웠다.
“어이쿠, 요 녀석. 벌써 이렇게 무거워져서는. 조만간 못 안아 주겠다.”
수행 기사로 따라온 켄의 아버지가 얼른 뒤따라 켄을 안으며 세드릭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었다.
세드릭은 피식 웃었다. 레티샤가 말했다.
“아빠, 근데 나 친구들한테 인사해야 해.”
“자, 저기 친구들 있네. 손 흔들어서 ‘안녕’ 해.”
어느 틈에 눈물을 그친 유시스가 그 말을 듣고 두 팔을 다 흔들었다. 하지만 레티샤는 손을 흔들면서도 불평했다.
“이렇게 나만 빠지면 안 되는데. 나랑 유시 때문에 술래 정하는 거 엄청 오래 걸렸단 말이야.”
“친구들은 내일 또 만날 수 있잖니. 아빠랑 약속한 건 잊어버렸어?”
“웅…….”
레티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시스가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성묘.”
“앗.”
레티샤가 깜짝 놀라 외쳤다. 세드릭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티샤는 아빠랑 약속한 거 깜박했어?”
“아냐! 안 잊어버렸어!”
레티샤가 빤한 거짓말로 답했다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세드릭의 얼굴을 껴안았다.
“잘못했어요…….”
“괜찮아. 재밌게 놀다 보면 까먹을 수도 있지. 그래도 거짓말은 안 돼.”
“응…….”
레티샤가 부끄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드릭은 두 아이를 안은 채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 방으로 꾸며 놓은 안채의 방에는 이미 갈아입을 옷과 따뜻한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놀게 해 주려고 미리 준비시켜 놓고 데리러 간 탓이었다.
“어머, 유시 님 이마에 상처가!”
유모가 황제의 앞인 것도 잊고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켄이 아버지의 품에서 내려 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일렀다.
“티샤 님이 유시 님 손잡고 뛰다가 넘어졌어.”
“에구…… 조심하셔야 된다구 늘 말씀드리는데도. 유시 님은 아직 어려서 티샤 님처럼 잘 뛰지 못해요.”
“응…… 잘못했어. 유시, 많이 아파?”
레티샤가 순한 얼굴이 되어 다시 유시스에게 물었다. 유시스가 괜찮다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리 오세요. 제가 상처를 돌봐 드릴게요.”
“부탁하네.”
세드릭은 유모의 품에 유시스를 넘기고, 레티샤도 내려놓았다.
유모가 젖은 물수건으로 유시스의 이마를 닦았다. 생채기 난 곳이 쓰린지, 유시스가 다시 울먹거렸다.
“많이 아프셨어요?”
“보모들은 뭘 하느라고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뒀는지. 요 고운 이마에 흉 지시면 어쩌라고.”
유모가 찌릿, 보모 하녀들을 노려보았다. 하녀들이 고개를 수그렸다.
세드릭이 대신 말했다.
“그러지 말게. 아직 마음껏 놀 수 있는 나이에는 편하게 놀아야지.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게다가 레티샤가 제법 자라 제 뜻을 명확하게 말로 할 수 있게 된 뒤로는, 하녀들이 어른이라 해도 쉽사리 그 행동반경을 제약하지 못했다. 감히 황녀의 발걸음을 막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레티샤는 잘 다치지도 않았고, 조금 다친다고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시스는 발육이 늦은 편이었다. 어머니를 쏙 빼다 박은 탓에 뼈대가 가늘고, 머리색 때문인지 가냘파 보였다.
잔병치레도 잦아서 세드릭을 잠 못 이루게 하곤 했다.
똑같은 아이이니 레티샤처럼 자유롭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공연히 따뜻한 모포로 싸안아 못 움직이게 하고 싶은 마음을 참기 어려웠다.
“티샤는 이리 온. 옷을 갈아입기 전에 얼굴이랑 손을 닦자.”
“저희가 씻겨 드리고, 옷도 갈아입혀 드리겠습니다. 성묘는 오랜만에 가시는 것이 아니십니까? 여러 가지로 준비하실 것도 많으실 텐데.”
멜이 공손히 말했다.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부탁하겠네. 티샤, 멜 경의 말을 잘 듣고 착하게 굴어야 한다.”
“네.”
요즘 들어 멜에게 예의범절을 배우기 시작한 레티샤가 서운할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세드릭은 쓴웃음을 짓고는, 레티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