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333
악녀는 두 번 산다 외전
여름이라도 바람이 서늘했다. 아르티제아는 창가에 앉아 멀리 초록색으로 물든 산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그녀는 북부의 겨울을 경험했었다.
사람의 삶이 오로지 버티고 견디어, 무시무시한 자연 속에서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위대하다고 느끼게 했던 그 겨울에 비하면, 여름은 냉랭하지만 차갑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산 빛은 녹음이라기 보다는 검푸른 빛깔로 보였다. 깎아지른 듯한 톨드 산맥의 만년설이 눈부시게 희어 이곳에 드는 햇살까지도 거기에서부터 반사되어 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북부인이 겸허한 것은 이 때문이리라고 아르티제아는 생각했다. 오만해지기에는 너무 거대한 장벽이 앞에 버티고 있다.
이곳에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지배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는 자는 없으리라.
‘아이들은 자주 오게 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이번에는 특별히 에브론의 가묘에 성묘하고, 아이들을 북부에 소개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또 올 만한 기회는 드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아예 한동안 북부에 머무르게 하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눈으로 직접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르티제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북부만이 아니라 서부와 남부에도 가 보는 것이 좋으리라.
서부에서는 끝없는 밀밭과 몬스터 웨이브를 대비해 세워진 요새, 성과 수도원, 그것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마을들을 둘러보아야 한다.
남부에서는 축복받은 기후와 리아간 공작가의 소금 결정 해안, 그리고 무엇보다도 늘 활기차고 생생한 항구를 경험해야 한다.
‘서부에는 리시아 님이 계시니 일찌감치 보내도 괜찮을 거야. 콜튼 수사님에게 부탁해서 여행을 보살펴 주는 것도 좋겠지.’
남부는 자신이 직접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다. 아직 어린 유시스도 남부라면 갈 수 있다.
황태후도 기뻐할 것이다. 그녀는 전부터 아이들을 리아간 공작가의 가묘에 참배시키고 싶어 했다.
기후가 좋으니 자신도 거기에서 몇 달 요양하면 좋을 것이다. 오랜만에 나탈리아를 만나 보고 싶기도 했다.
‘동부에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네.’
아르티제아는 찬찬히 머릿속의 인명록을 넘기며 생각했다.
동부는 아직도 어지러운 땅이었다. 동부군을 장악하여 전쟁은 막았지만, 자신이 제안하고 그레고르 선황이 뿌렸던 불화의 씨앗은 남아 있었다.
‘동부까지는 굳이 안 보내도 괜찮을 수도 있겠고. 오히려 그쪽에 기울 어지는 것을 염려해야 할 테니.’
동부가 잃어버린 긍지는 배워야 할까? 그것이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인지, 어떤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품격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 사람에게 생기는 것이다.
얼핏 상념이 스친 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아르티제아가 그것을 확인하기 전에 방문이 열렸다.
세드릭이 고개를 내밀었다.
“티아, 옷이 얇습니다.”
그가 제일 먼저 말한 것은 그것이었다. 아르티제아는 일어섰다. 헤젤이 그녀의 어깨에 도톰한 망토를 걸쳐 주었다.
“괜찮아요. 아직 춥지 않은데.”
“여기는 괜찮아도, 산바람은 차가워요.”
옷을 두껍게 입으라는 말은 애초부터 조언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세드릭이 안에 짧은 털이 빽빽하게 들어찬 옷감으로 만들어진 외투를 아르티제아에게 펼쳐 보였다.
아르티제아는 순순히 그에게 다가가 입혀 주는 대로 외투에 팔을 꿰었다.
“애들은요? 잘 놀고 있던가요?”
“별문제 없어 보였습니다. 티샤는 친구를 금방 사귀니까.”
“다행이에요.”
지금 이 성에 불려 온 아이들은 대부분 세드릭의 소년 시절 놀이 상대였던 이들의 자식들이었다.
세드릭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사양했지만, 아르티제아는 그 아이들을 레티샤의 친구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세드릭에게 그러했듯이, 훗날 레티샤에게도 그 아이들이 가장 큰 자산이 되어 주리라.
단순히 훌륭한 신하를 얻는다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레티샤가 구중궁궐에 있을 때에도 먼 땅의 온갖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리라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세드릭이 팔을 내밀었다. 아르티제아는 그 팔에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아까 생각했던 것을 이야기하자 세드릭이 되물었다.
“겨울에, 남부로 피한이요?”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는 것이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겠어요? 유시는 아직 너무 어리지만, 티샤에게는 좋은 공부가 될 거예요. 세상이 가장 빠르게 변하고 있는 곳이니까.”
“그렇군요. 하긴, 남부라면 요즘 치안도 제법 안정되어 있고.”
“간 김에 나탈리아 님을 만날까 해요. 안전하게 타국의 왕족을 만나 보는 것도 큰 경험이 되겠지요. 그런데, 어째 껄끄러운 듯이 말씀하시네요?”
“아닙니다.”
“아니라뇨?”
아직까지 결혼하지 못한 모 왕국의 국왕에게 유부녀와의 불륜 취향이 있다는 소문이 돈다고, 세드릭은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절대.
그 소문의 상대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카멜리아 후작 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을 완전히 오해한 아르티제아가 말했다.
“유시에게 리아간 공작가를 상속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하는 말은 아니에요. 아직 너무 이르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고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드릭이 모르는 체 말을 돌렸다.
“겨울에 저 혼자 쓸쓸해지겠군요.”
“그럴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일하셔야죠.”
할 말이 없어진 세드릭이 입을 다물고 슬픈 얼굴을 했다.
아르티제아는 미소를 지었다.
“티샤의 교육을 생각해서도 그렇지만, 유시에게도 넓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으니까요.”
“그 말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저도 남부에 간 적 없습니다.”
“세드릭 님은 이미 늦었어요. 여행을 가려면 옛날에 가셨어야죠. 황제의 행차를 남부에서 어떻게 감당하라고요?”
“…….”
“다자 정상 회담이라도 만들려는 게 아니시라면.”
“생각만 해도 일 더미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느낌이니 그건 참아 줘요.”
세드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티제아는 말했다.
“내후년이나 그 후년에는 서부에도 한번 보냈으면 해요.”
“그것도 좋습니다. 서부는 정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안계가 넓어지는 곳이니까.”
“북부도 그래요.”
“그렇습니까?”
“수도에서만 살던 사람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경이었으니까요.”
세드릭이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아르티제아는 그가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우선은 티샤부터 북부를 잘 경험하게 하세요.”
“그건 명령입니까?”
“명령이라뇨. 전 북부는 무리이니 당연히 세드릭 님이 잘 하셔야죠. 아마 유시도 못 갈 거고.”
세드릭은 겸연쩍은 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티샤만이라도 데리고 잠깐 여기저기 다니려고 하긴 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티샤가 북부 말을 탈 수 있을까요?”
“그건 아직 어렵죠. 열두어 살은 되어야 가능할 겁니다.”
“세드릭 님도 모처럼 쉬시는 거고, 북부에는 또 언제 올지 모르니 많이 데리고 다니세요.”
“예.”
세드릭이 웃었다. 아르티제아는 짧게 덧붙였다.
“……동부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도 좋고요.”
“그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말하는지 둘은 서로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마차 앞에 두 아이가 모두 와 있었다. 양털 옷과 털실 모자로 동글동 글해진 유시스가 멜에게 안긴 채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엄마! 엄마! 나 오늘 신기한 거 봤어요!”
“신기한 거?”
“어떤 형아 눈이 세 개였어요!”
유시스가 신나서 말했다. 유시스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새로운 사물과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제 나름대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아르티제아는 미소를 지었다. 유시스는 아르티제아에게 안기겠다고 팔을 뻗어 버둥거렸다.
세드릭이 대신 받아 안았다. 유시스가 아직 어리고, 레티샤보다 발육이 느리다고 해도 아르티제아의 팔에는 무리였다.
“그 형아 엄마도 눈이 세 개이고, 이모는 팔이 네 개래요! 마을에서 제일 힘이 세대요!”
그러다가 유시스가 세드릭을 보고 말했다.
“아빠보다 크댔는데.”
“그럴 수도 있지, 왜?”
“시러.”
유시스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세드릭이 희한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가 키가 큰 편이긴 했지만, 북부에는 그보다 키가 크거나 덩치가 더 큰 자가 얼마든지 있었다. 카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유시스가 아는 기사 중에도 있었다.
그러니 유시스의 반응이 새삼스러웠다.
“유시는 작으면 약하다고 생각하니?”
아르티제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유시스가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그러면 엄마가 아빠보다 약해?”
“웅…….”
약하다는 단어의 뜻이 혼란스러워진 아이가 고민에 빠졌다.
자기는 레티샤보다 작으니 레티샤보다 약했다. 엄마도 어른이지만 여리고 몸이 약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엄마가 아빠보다 약하냐고 물으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아빠가 그 친구 이모보다 세.”
세드릭이 정색하고 말했다.
아르티제아는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좀처럼 표정을 변화시키는 법이 없는 멜조차도 눈초리와 입꼬리를 동시에 움직거렸다.
세드릭이 헛기침을 했다. 유치하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엄마! 아빠! 이거 봐봐! 나 엄청난 거 발견했어!”
그때 뭘 발견했는지 마차 바퀴 옆에 쪼그리고 앉아 혼자 꼬물락거리고 있던 레티샤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아르티제아는 의아하게 레티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레티샤가 두 손에 살살 모아 쥐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기겁했다.
“티샤, 그 손 펴지 마.”
“껍데기가 완전 새하얀데 무지개색이야!”
경고한 보람도 없이 레티샤가 아르티제아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벌레가 손바닥에서 푸르르 날아올랐다.
“꺅!”
아르티제아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벌레가 그녀의 얼굴 쪽으로 달려들기 전에 세드릭이 한 손으로 벌레를 낚아챘다.
“티샤, 엄마는 이런 거 싫어하잖니.”
세드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티제아가 주먹 쥔 그의 손을 흘끔거렸다. 레티샤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예뻤는데.”
“아빠가 봐 줄게.”
세드릭이 슬그머니 그녀와 레티샤의 눈치를 함께 보고, 한 손으로 레티샤의 손을 잡고 저쪽으로 갔다.
아르티제아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유시스와 함께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